실장석 참피로 요리왕 비룡 더 마스터 미스터 초밥왕 요리하는 소설 마담 구르메 2부 - 23. 중화실장요리 잔치 (1)

 [수능 다음 날, 12:03PM, '마담 구르메' 식당 구역]




어제 저녁은 수능 끝나고 스테이크 썰러 온 가족 손님들이 몰려든 덕에 모처럼만에 바쁜 하루였다. 홀 팀의 매니저나 주리 양은 이번 기회에 아직 실장독감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르메가 다시 성수기를 맞기를 바라는 눈치지만 그게 쉽게 되련지는... 그 놈의 실장독감이 어서 지나가길 손꼽아 기다릴 뿐이다.

'점심 시간 되면 정신없었는데... 요새 좀 편해졌지?'

'쉿! 미자야. 매니저님 듣겠어.'

보다시피 이 시간이면 엉덩이가 바닥에 붙을 일이 없던 오전조 웨이터 미자와 영민이도 아직 손님이 없어 한가롭게 의자에 앉아 수다나 떠는 중이다. 매니저가 저걸 보면 그리 좋아하지 않겠다만은...

'......안그래도 다 듣고 있걸랑?'

'어맛! 죄송해요 매니저님...'

'죄송합니다...'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쑥덕거리던 웨이터 애들이 그새 나타난 매니저를 보고 바짝 쫄아붙었다. 하지만 막상 저쪽은 성질을 내는 대신 그냥 가볍게 한숨만 쉬고 넘어가 버린다. 장사가 시원찮은게 애들 잘못도 아닐 뿐더러 하루이틀 있는 광경이 아니어서 그렇다.

'에휴우... 니네들 잘못은 아닌걸 뭐 어쩌겠어? 그래도 어제 간만에 좀 바빴으니까 다행이지.'

'저희도 이젠 바빴으면 좋겠어요. 힝, 며칠째 이러려니 놀고 월급 받는 기분이라구요.'

비수기인 초겨울에 가까워진데다 아직 지난 달 내내 데스넷 검색어에 올랐던 실장독감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덕에 족발 의뢰가 끝난 지금도 손님들이 반이나 겨우 채우는 상황이다. 살아남은 헬스실장들을 매각하고 받은 대금과 의뢰비 덕에 그런대로 수입은 나오고 있지만 이렇게 한산한 분위기론 그다지 일할 맛들이 안 날 것이다. 다행히 무능함의 상징이나 진배없던 실석관리부의 공무원들이 모처럼만에 일이란 걸 해준 덕에 조기진압에 성공해서 맹위를 떨치던 실장독감의 기세가 서서히 줄고 있다고 하니, 조만간 좀 나아지겠지.

'어, 손님이다!'

'손님, 손님!'

출입문 쪽에서 벨 울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손님이 온 걸 확인한 웨이터들이 잽싸게 행동에 나서는 사이, 들어오는 40대의 머리 살짝 벗겨진 아저씨 옆 청년이 좀 낯이 익다.

'삼촌, 날도 추운데 이왕 온 김에 밥이나 먹고 감까?'

'여기 비쌀 건데? 그냥 가는 길에 국밥이나 한 그릇 사먹고 가자야.'

'에이 제가 사는 건데 뭘 그럼까? 월급 탄 김에 조카가 좀 쏘는 거 국밥보단 스테끼가 낫지 않겠슴까?'

'쩝, 알았다. 근데 나 프랑스 요리는 완전 초본데? 사영이가 시켜주는 거나 몇 번 먹어봤지...'

'까잇거 맨땅에 헤딩 한번 해보지 말임다? 어차피 이런 레스토랑에선 추천받은 것만 먹어도 중박은 칠건데.'

아저씨 옆의 청년은 놀랍게도 마진기였다. 뭐 저 학살파 친구라고 실장요리 먹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하필 왜 장사영네 회사 사람이 여기에... 한산한 식당 구역을 슬금슬금 둘러보던 두 사람이 미자가 골라주는 테이블을 골라 자리에 앉는다.

'손님들, 점심 시간대엔 여기 자리가 좋아요. 햇볕도 적당히 들어오고, 바깥 경치도 잘 보이고요!'

'그럼 아가씨 골라주는 대로 앉아볼까? 근데 아가씨? 여기 구르메에선 뭐가 제일 맛있나? 나도 조카도 프랑스 요리는 영 젬병이라서 말이지.'

'에...그건... 매니저님!'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미자가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매니저를 부른다. 이럴 때는 매니저 쪽이 나서서 메뉴를 추천해 주는 게 보통이다.

'마담 구르메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스토랑 매니저 서다혜입니다. 초보자시라면 혹시 제가 추천해드려도 괜찮을까요?'

원래 이럴 때는 평소의 괄괄한 성격을 최대한 자제하는 편이지만 오늘의 서다혜는 유독 조심스럽다. 구르메에 손님이 뜸해진 가운데 나타난 오늘의 첫 점심 손님이기 때문이다.

'오오! 매니저 아가씨가 직접 골라준다면 괜찮겠지. 혹시 얼큰한 탕 종류 없남? 날이 추워서 따끈한 국물 한 사발 마시고 싶은데.'

'저는 고기 종류로요. 좀 기름기 있고 느끼한 거면 뭐든 괜찮아요.'

진짜 쌩초보 맞긴 하군. 프랑스 실장요리에서 얼큰한 걸 다 찾다니... 다행히 구르메에서 3년 가까이 구른 경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고, 매니저에겐 이런 손님들을 대비해 감추어둔 패가 늘 몇 장씩 있곤 하다.

'손님께는 페페론치노 파우더를 추가한 바다실장 부야베스가 맞으시겠군요. 그쪽 분께는 짓소버섯 포타주를 곁들인 자실장 커틀릿을 추천드리겠습니다.'

'엥? 나 버섯 싫어하는데...'

'그럼 크림으로 드리죠. 이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렇게 주세요.'



매니저가 주문을 받고 주방으로 향한 사이 삼촌과 조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저 아저씨도 조카처럼 짓소 버스터즈에서 일하는지 대부분은 구제 사업에 관한 이야기다. 실장독감 이야기가 얼마간 오가다가 주제가 바뀌는데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지 사육버러지 간수못한 애호파 X끼들 덕에 이 날씨에 강원도 산자락까지 가서 개고생했었죠. 그나마 사장님 조카 애 덕에 좀 쉬게 되었다만.'

'야 야. 진기야. 레스토랑에서 X끼가 뭐냐? 말 좀 우아하게 하자야.'

'에휴... 삼촌이 그 칼바람 부는 산자락에서 산버러지 쫓아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으면 이런 말도 안 나올 검다. 근데 걔 이름이 도치라고 했지 말임다?'

'그래, 장도치. 올해 수능 잘 봤다고 사영이가 아주 입이 헤벌어지더라. 그래서 백도네 집에서 한 상 거하게 쏘기로 했어.'

'걔 열여덣살 아님까? 아직 2학년일 건데...'

'야, 그건...'

삼촌 쪽 표정이 좀 씁쓰레해진다. 하는 말을 들어보니 마담이나 가영씨만큼이나 도치 군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지난 번에 말했잖냐. 걔 사고 후유증 때문에 동네 심부름도 못 다녔었다고. 그래서 작년에 검정고시 치고 올해 응시한 거야.'

'아아, 그랬지 말임다...'

핀잔에 머리를 긁적거리며 시선을 피하던 마진기가 나를 발견했다. 좀 쌔해진 분위기를 돌리고 싶은지 이쪽을 보며 아는 체를 하고 나선다.

'여, 김대리님 아님까? 요새 연애사업은 좀 어떻슴까?'

음... 영업 시간에 손님이랑 떠드는 건 금지인데... 매니저 눈치를 슬쩍 살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스테이크감은 다 처리했으니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 주려는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주임님. 가영씨야 늘 잘해주시죠.'

'삼촌, 이쪽이 구르메 김대리님임다. 전에 위석 가지러 왔다 가셨던 그 분이요.'

'아아? 토시아키 이사가 말하던 그 분?'

삼촌 쪽이 내게 인사를 한다. 서글서글하고 친근감있는 인상이 여기저기 발 좀 넓을 것 같은 모습이다.

'김철수 대리님이군요! 진기한테 이야기 몇 번 들었죠. 마자합니다. 사영이네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아 예, 안녕하십니까. 그런데 이런 거 물어봐서 좀 죄송하긴 하지만... 구르메엔 어떤 일로 찾아오신 거죠?'

'보면 모르심까? 밥 좀 먹으러 온 거지 말임다.'

'에그 이 눈새야! 내가 말할테니 가만 좀 있어봐.'

몇 번 이야기를 나누며 긴장이 다소 덜해졌다곤 해도 여전히 마담과 장사영의 관계는 껄끄럽기 그지없다. 그쪽 회사 사람이라고 마담이랑 꼭 불편할 이유야 없지만 그래도 좀 찝찝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말을 하려던 삼촌 쪽이 코끝에 풍겨오는 짭쪼름한 바다실장 향에 입맛을 다신다. 미자가 완성된 요리 접시를 들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주문하신 바다실장 부야베스에, 자실장 커틀릿과 크림 포타주 나왔습니다!'

'일단 두 분 식사 먼저 하시죠.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뭐 꼭 방해하신 건 아니지 말임다...'

조금 아쉬워하는 마진기 역시 커틀릿 접시 쪽에서 스며드는 고소한 실장석 기름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고 있다. 일단 밥부터 먹이고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크으! 역시 추울 땐 얼큰한 실장탕이 최고라니깐. 이거 산이슬이랑 아주 그만이겠는데?'

'저희 근무시간 아직 안 끝났지 말임다.'

'나 혼자 먹긴 양이 좀 많은데? 진기 너도 좀 먹어봐라.'

'삼촌 말마따나 해장에는 그만이겠지 말임다.'

고춧가루를 듬뿍 쳐서인지 성체실장육 토막부터 우지챠까지 가릴 것 없이 둥둥 뜬 냄비 속 부야베스는 수프라기보단 해물탕에 가깝게 변해있었다. 시원한 바다실장육에 얼큰한 국물까지 더해졌으니 저것도 나름대로 맛이야 있겠지만 당초에 주방 쪽에서 의도한 원래의 맛과는 거리가 꽤 있겠다.

바다실장 일가 하나에 비싼 해산물까지 아낌없이 털어넣은 덕에 구르메 단품요리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가격을 자랑하는 요리가 졸지에 고춧가루 범벅 실장탕으로 전락했지만 매니저 쪽은 그닥 개의치 않는다. 이전의 권기준 군 때처럼 요리를 진지하게 배워보려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찌되었든 손님 취향에 맞춰주면 되는 거고 그 손님이 만족하고 맛있게 먹어주면 그만인 거라나?

조카 쪽은 그런대로 정석에 가깝구먼. 바삭하게 지져낸 자실장 커틀릿 덩어리들을 차례대로 포크에 찍어 소스를 묻히고 감자튀김을 곁들이며 우적우적 씹고 있다.

'이거도 좀 드셔보시지 말임다?'

'괜찮다야! 이쪽은 바삭거리는 게 맥주 당기네.'

실장육과는 거리가 있는 구제업계 사람들일 텐데도 거부감들 없이 잘들 먹고 계신다. 뭐 요새 스테이크용 자실장이 좀 남아서 커틀릿이나 다른 요리에도 종종 쓰고 있으니 맛이 더 좋으면 좋아졌지 나쁘진 않겠지. 한동안 맛깔나게 식사를 계속하던 삼촌과 조카가 이윽고 만족해서는 배를 두드린다.

'거 역시 프랑스 요리가 대단하긴 한가봐. 사영이가 왜 그리 환장하고 먹는지 알겠다야.'

'싸장님도 같이 오셨으면 좋았겠지 말임다.'

'큰일날 소리, 너 사영이 앞에서는 그 말 하지 마라?'

'그건 뭔 소림까?'

'그런 게 있어.'

깔끔히 먹어치운 냄비와 접시를 남긴 채로 두 사람이 요리값을 계산하고는 흡연장으로 향한다. 그새 레스토랑에 손님이 좀 들어와서인지 영수증을 뽑아주는 주리 양 표정에 좀 여유가 감돌고 있다.

'대리님, 안 가보세요? 저 아저씨가 그냥 밥만 먹으러 오진 않았을 건데요.'

어느새 매니저가 내 옆에 다가와 나가볼 것을 권하고 있었다. 아까 저쪽에 말을 걸도록 허락한데다 굳이 따라가볼 것까지 권하는 걸 보니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다.

'매니저님, 혹시 저 분 아세요?'

'말은 안 섞어봤지만 누군지는 알아요. 사샤네 구제회사, 그러니까 장사장네 회사 이사님이에요.'

'이사님이시라고요?'

'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짱가 언니네 집안이랑 꽤 가깝게 지낸다던가? 아무튼 그래요.'

'그럼 장 사장네 분이란 건데, 그래서 허락하신 거군요.'

'맞아요. 분명 할 말이 있어서 여기 오셨겠죠? 걱정 말고 얼른 나가봐요.'

'알겠습니다.'

아, 어째 장사영네 집 사정을 이상하리만큼 잘 알고 있다 싶었지. 매니저 역시 저쪽 사정을 한 번 알아보고 싶은가 보다. 그 길로 흡연장으로 가 보니 역시나 두 사람이 이쪽을 기다리고 있었다. 담배를 권하는 이사에게 가볍게 사양의 뜻을 밝히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이쿠 나오셨네. 한 대 피실래요?'

'괜찮습니다. 마담께서 레스토랑에서 담배 냄새 풍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셔서요. 그보다 마 이사님, 아까 말씀하시던 걸 들어보니 뭔가 용건이 있으셔서 찾아오신 게 맞는 모양이던데 한번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아 그럼요. 괜찮다마다요.'

멋적게 웃은 마 이사가 용건을 밝혔다. 수능 후 사흘 뒤는 전에 만났던 장사영의 조카인 장도치 군의 생일이기도 했다. 마침 도치 군의 수능 성적이 로젠대 입학을 노려볼수도 있을 정도로 무척 잘 나왔고, 겹경사를 맞은 집안에서 마 이사의 사촌이 경영하는 회사의 단골 중화요리집에서 한 턱 크게 쏘게 되었다.

장사영은 거기에 마담 역시 찾아올 것을 권유했다. 친동생과도 마찬가지인 도치 군에게 기쁜 일이 생겼으니 부를만도 하고, 요 두어 달 동안 가영씨의 강권과 협박(?)에 마지못해 만나긴 했지만 그 덕에 두 사람의 악연으로 점철되었던 관계가 전보다는 다소 부드러워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시호 씨도 가능하면 오셨으면 좋겠다더라고요. 도치가 꼭 보고 싶답니다.'

'그건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쁜 소식을 왜 사장님께서 직접 전하시지 않는 거죠?'

'자기가 구르메에 와 봐야 서로 어색하기만 해질테니 그래도 안면이 있는 제가 나을거라 하더라고요.'

뭐, 그건 그렇지. 수 년간 전화번호도 교환 않고 필요한 일 아니면 만나지도 않던 앙숙들이 고작 두 달만에 화해할 리가 있나... 석기 군과 알료샤의 사이가 나빴다곤 하지만 마담과 장사영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실취석 따라가려다 파킨한 들실장이다.

'뭐... 알겠습니다. 일단 지금은 주방 일이 바쁘실 테니까 있다 점심 시간에 전해 드릴게요.'

'그럼 잘 부탁드려요- 진기야, 뭐하고 있냐?'

'나 참, 낄데 안 낄데 더럽게 못 가리는구만. 그새 버러지들이 기어들어왔지 말임다.'

[데, 데에에...]

[테엥...]

마진기의 고개가 그새 추위를 피해 흡연장 난로 주변에 옹기종기 모인 일가를 향했다. 겨울이 가까워지며 점점 날씨가 추워지다보니 필사적으로 보존식을 모으는 와중에도 이렇게 본능적으로 따스한 곳을 찾아 휴식을 취하려 하는 것이다.

초겨울 바람에 얼어터진 볼살과 여기저기 쩍쩍 금간 뭉툭손, 땟국으로 절어 실장취를 풍기는 실장복에 반도 못 채운 비닐봉지가 일가의 삶이 그리 세레브하진 못하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슬슬 골판지에 틀어박혀 월동에 들어갈 시기가 다가오는데도 아직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걸 보니 꽤 절박한 실생인건데, 이번 겨울 넘기는 게 가능은 하련지 잘 모르겠다.

'씨불, 내가 밖에 나와서도 이것들한테 시달려야 하나-'

[데샤앗!]

난로불 열기에 슬금슬금 구리구리한 실장취가 흡연장 안을 채워간다. 그 악취에 인상을 확 구긴 마진기가 구제업이 일상인 학살파 아니랄까봐 거의 반사적으로 구둣발을 들어 걷어차려는 자세를 취하고, 친이 너다섯마리 자들 사이를 몸으로 막아서지만 일가실각을 면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무정한 구둣굽이 친실장의 몸에 박혀들려는 찰나 녀석들에게 생명의 은인이 나타났다.

'아서라, 아서. 일감도 아닌 것들한테 힘빼서 뭐하냐 그래? 그것들도 살겠다고 그러는데 그냥 내비둬라.'

'삼촌은 이 일도 오래 하셨으면서 너무 물러서 탈이지 말임다.'

'무른 게 아니야. 흐흐흐, 자비를 베푸는 거지.'

어... 글쎄. 저 일가가 그 자비에 감사나 하련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 중 하나가 그새 치프프 웃으며 마 이사의 허전한 앞머리를 가리키고 있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던 친이 놀라 뜯어말리지만 그만할 줄을 모른다.

무음 링갈앱을 켜보니 역시나, 화면에 [치프프 똥독라 주제에 제법 쓸모가 많은테치! 이제 와타시를 오마에의 하우스로 모시고 운치굴로 들어가면 와타시도 오마에의 팔다리를 보존하는 자비를 내리는 테치칫~]이라는 분충성 충만한 메시지가 떠오른다.

애호파나 무관심주의였다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이제 데스넷의 또라이 밑에서 4개월을 수행하며 물들대로 물든 학대파다. 이 기회를 그냥 넘기면 분명 내 주인 닌겐상이 두고두고 놀림감으로 삼고도 남을 것이다.

'흐흐흐. 자를 잘못 키운 니 업보로 생각하거라.'

[데..뎃?]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친의 적록빛 눈을 마주봐주고는 마 이사를 불렀다.

'이사님? 가기 전에 보여드려야 할 게 있는데요.'

'뭔데 그러세요?'

뭐긴 뭐겠어? 아저씨 독라 타령하는 똥벌레지. 휴대폰에 지금도 출력되어 나오는 자충의 실성질을 보여주자, 마 이사의 서글서글하던 미간이 대번에 탈모인의 서러움이 가득 담긴 분노로 일그러져간다.

'이..이이! 이 소갈머리도 없는 똥벌레들 주제에!!!'

'낄낄낄 삼촌, 저 버러지들이 또 머리 얘기 했죠?'

'진기 너 조용히 못해! 하다못해 내가 실장석한테까지 그놈의 대머리 소리 듣고 살아야 하나... 니네들 오늘 다 뒈진 줄 알아라!'

[데스? 데스 데스우 데샤아!!!]

그제서야 분충 자와 나 때문에 가까스로 건졌던 일가의 명줄을 날려먹은 걸 깨달은 친이 나와 지 자충을 번갈아 쳐다보며 원망섞인 절규를 내뱉는다. 벗겨진 머리가 시뻘겋게 물든 마 이사가 일가에게 다가가는 사이, 저 심술 넘치는 조카가 삼촌을 실컷 놀려먹는다.

'분명 아까 전에 삼촌이 저 버러지들도 생명이라고 했지 말입니다?'

'씨이... 나도 알아! 안 죽일 거야! 그냥 저 통벌레들한테 탈모인의 고통만 알게 해줄 거라고!'

[데스 데스! 데에에! 데갸아아아아아아!!!]

마진기와 함께 흡연장 밖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으니, 곧 친을 시작으로 어딘가 한 군데씩 부러진 일가가 차례대로 독라가 되어 흡연장 밖으로 내팽개쳐진다. 하나둘씩 정신을 차린 독라의 일가들이 친을 시작으로 일제히 비통한 울부짖음을 내뱉는다.

'흥! 이제 대머리가 얼마나 서러운 건지 알겠지...'

[데샤아아아아]

[테챠아아아아]

이제야 좀 만족스런 표정의 마 이사가 걸어나오는 사이 친과 다른 자충들이 원흉인 분충 자실장을 둘러싸고 데샤 테챠아 분통에 차 울더니 온 몸이 찌그러지도록 사정없이 린치하기 시작한다. 진작에 솎아내었으면 저 꼴이 날 일도 없었을 건데 이제 와 화풀이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다고...

[데샥! 데쟉 데스우 데샤악!]

[찌아아아]

초겨울 추위에 독라가 되었으니 차라리 파킨하느니만 못한 처지겠지. 그걸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띄우고 지켜보고 있는데, 떠나는 마진기가 실실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누님 밑에 계시는 동안 진짜 학대파 다 되셨네요. 이제 구제 일은 그만하셔도 되겠지 말임다.'

'그럼요? 흐흐. 이렇게 제 적성에 맞는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2시간 후, 02:15PM, '마담 구르메' VIP룸]



'도치한테 수능 잘 보았다고 전화는 왔지만 이렇게 확인하니까 안심이 되네요.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도치가 열심히 공부해서 만든 결과인걸요.'

마 이사와 마진기가 남기고 간 전언을 전하는 사이 마담의 얼굴에서 요새 구르메 사정 덕에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싱글벙글한 웃음기가 좀처럼 걷히지 않는다. 레스토랑 일이 바빠 자주 찾지는 못해도 그녀 역시 장사영만큼이나 도치 군을 아끼고 있고,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공부를 이어나가는 동생을 돕기 위해 족발 의뢰 와중에도 남은 에메랄드 시럽을 써서 실장엿을 만들어 보내주고 수능 당일날에는 새벽부터 나와서 바래다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었다.

뭐 그래도 그 즐거울 생일 잔치를 장사영과 함께 보내야 할 처지가 되었으니 막판에 가선 어깨에 조금 힘이 빠지고 있었다. 시무룩해진 마담 쪽을 보는 가영씨가 그런 그녀의 기운을 조금이나마 북돋워준다.

'아가씨, 오빠를 위해서가 아니라 도치를 위해서잖아요? 우리 오랜만에 도치 좋아하는 중화요리도 같이 먹고 이야기도 좀 나누고 해요. 구르메는 다혜가 잘 돌보고 있을 거에요.'

'...그래야죠. 제가 빠져서는 안 되겠죠.'

'할아버지도 모처럼만에 우지산에서 내려오신대요. 가족이 다 같이 모여서 한 번 즐겁게 보내봐요.'

마담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영씨 얼굴에도 생글거리는 미소가 돌아온다. 이번에는 내 쪽을 돌아보았다.

'철수씨도 같이 안 갈래요?'

'네? 저요?'

'그럼 누구겠어요? 김철수 대리님요.'

뭐 가서 나쁠 것 없겠지? 예전에 실장요리사를 지망하기도 했다던 장사영 입맛이 무척 까다롭다는데, 그 양반이 단골로 찾는 집이라면 중화요리도 꽤 맛있을 것이다. 내가 뜸들이는 사이 쐐기를 박으려는지 한 번 더 이야기를 꺼내는 가영씨다.

'어차피 스테이크감도 요새 남아도는데 우리 같이 축하해주러 가요. 다혜 꼬드겨서 연차 안 쓰고 가는 걸로 해드릴게요. 네?'

마담의 눈치를 슬슬 살폈다. 괜찮다는 기색이다.

'그간 연차 한 번 안 쓰시고 고생하셨으니 한 번쯤은 괜찮아요. 대리님만 좋으시다면 저희랑 같이 가죠.'

'어 그러면...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가영씨는 마담과 남아 무언가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내가 끼어들 주제는 아닌 것 같아서 서둘러 문을 닫고 브리더룸으로 돌아갔다.



연재 간격이 점점 길어지네요... 현장이 워낙 바쁘게 돌아가는데다 쉬는 시간도 부족해 주말 빼곤 좀처럼 짬을 못 낼 지경입니다;;; 일단 이것도 1월까지라곤 하는데 그 사이 파킨하지 않고 잘 버틸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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