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장석 참피로 요리왕 비룡 더 마스터 미스터 초밥왕 요리하는 소설 마담 구르메 2부 - 25. 중화실장요리 잔치 (3)

[10여분 후, 01:45PM, K시 휴지구 연합동 차이나타운, 실장중화요리점 '마초반점']




차이나타운 주변에 자리잡은 식자재마트에서 청경채, 대파, 마늘잎, 고수 따위 같은 야채들과 이름 모를 중화풍 향신료 몇 통을 경차에 꽉꽉 채워넣곤 방향을 돌렸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까지 정작 모자라다는 실장육은 우지 한 마리 없이 빈 손인 채로였다.

'사장님께서 실장육도 모자라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 쪽은 따로 맡은 사람이 있어요.'

'따로 맡아요?'

'누구냐면- 헤, 양반은 못 되네.'

그 사람이 누군지 곧 알게 되었다. 마백도 사장의 중국집으로 향하는 양 갈림길 저편에서 SUV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고, 앞유리창 너머로 안면이 있는 얼굴 둘이 비쳤다. 여기서 보게 될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던 둘, 장사영과 경리 사샤였다.

'사장님도... 오셨네요.'

'구제업체도 겨울엔 널널하잖아요? 저래뵈도 대책없이 자리 비워두고 올 사람은 아니에요.'

'그거야 그렇죠. 그래도...'

알지, 이맘때 쯤엔 일감이 팍 줄어드는 거. 겨울을 맞은 공원과 길거리 들실장들의 태반이 얼어죽거나 굶어죽고, 살아남은 나머지도 자기 골판지에 틀어박혀 오매불망 봄만 기다리게 된다. 즉 거리에 실장석이 싹 사라지게 되고, 실장석들 본실과 구제업자들 빼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된다.

당연히 구제 의뢰나 민원도 급감하게 되는데, 먹을 게 있는 시장이나 식당가 인근에 꼬이는 분충들 조지는 일이나 아파트 단지에 빌붙어 월동하려는 것들 걷어내는 일 같이 나름의 일감이 있긴 하지만 업계의 주력 사업인 공원이나 농촌 구제업은 사실상 다음 해 봄을 기약해야 한다. 그래서 실장석이 그렇듯 구제업자의 겨울 역시 덩달아 추운 법이다.

할 일도 없을테니 우리를 초청한 장본인이 여기 오지 말라는 법 없지만, 그래도 솔직히 별로 달갑지 않은 건 사실이다. 괜한 걱정같기는 해도 추석 때 마담과 장사영이 만나서 벌어졌던 난리판을 떠올리니까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으니깐.

'둘이 다툴 걱정이라면 안 해도 좋아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어제 단단히 으름장 놔두었으니깐요.'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가족끼리 모인 추석과는 달리 온갖 지인들이 다 찾아올 생일 잔치다. 마담이야 물론이고 조카를 아낀다는 양반이 설마 그 조카 생일날에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겠지.

'그러니까 그만 긴장타고 표정 풀어요. 울 오빠 그렇게 못되먹은 사람만도 아니라구요?'

'알겠어요.'

그새 우리를 앞서가는 SUV 뒷칸 트렁크 사이로 큼직한 스티로폼 박스 몇 개가 비친다. 저것들이 내일 저녁상에 올라올 요리의 주인공인 모양이다.

그렇게 경차에 탄 채로 얼마간 차이나타운 이곳저곳을 감상하며 잡담을 나누었다. 내용 주로 도치 군에 대한 이야기였다.

'요새 불수능이라고 뉴스도 많이 나오던데 그래도 성적이 잘 나와 다행이네요.'

'원래부터 가르치면 잘 따라오는 애였고, 3년 동안 집에서 할만한 게 공부나 게임 정도가 전부였으니까요. 도영 오빠랑 새언니도 하늘에서 정말 기뻐할 거에요.'

'학교야 당연히 로젠대로 지원할 거고, 앞으로 통학하는 게 문제겠네요?'

내 물음에 잠시 아련함에 젖었던 얼굴이 빠르게 현실로 되돌아왔다. I시와 로젠대가 있는 서울 사이는 지하철로도 족히 2시간은 넘는 거리고, 어느 정도 외출이 가능해졌다곤 해도 아직 도치 군 입장에선 그 거리를 감당하기엔 무리일 거리다.

'오빠도 서울 쪽에 집을 한번 알아보고 있어요. 그쪽 재정 상황도 넉넉한데다 저랑 아가씨도 추가로 보탤테니 그건 문제될 게 없어요. 나머지는 이제 도치한테 달린 거죠.'

'그래도 이렇게 수능도 보러 나오고 외식도 할 정도면 많이 좋아진 것 같은걸요 뭐. 그 애라면 앞으로도 잘 해낼거에요.'

'보기보다 강한 애에요. 우리가 신경만 잘 써주면 반드시 그렇게 될 거고요.'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지어졌고 5분 정도를 더 달리자 마침내 붉은 바탕에 검은 글씨, 주인장의 성품이 짐작되는 굵직한 친필로 휘갈겨 쓴 간판, '마초반점'이 드러났다. 준비할 게 많다고 하니 아마도 내일 저녁까지는 여기서 일을 도우며 마담과 장사영의 어색한 동거(?)를 감상해야 할 듯 싶다.

'저기 오빠 쪽 리어카에 싣고 들어가면 되겠네요. 할 일이 많으니까 후딱 부려놓자구요?'

장사영 쪽은 벌써 짐을 다 풀어놓고 내용물을 리어카에 싣는 중이다. 박스에 담긴 실장육, 수지폼과 뾱뾱이에 감싸여 잠든 성체 독라와 아까 본 것과 비슷한 치파오 차림의 중실장, 자실장과 엄지 몇 마리에 예전 된장찌개 의뢰 때 보였던 것과 같이 바짝 말려놓은 건어물 실장들이 보인다. 이쪽도 짐을 리어카에 올리려고 가까이 다가가니 사샤 쪽에서 먼저 아는 체를 한다.

'대리 아저씨?'

'어, 사샤 양?'

'아저씨도 사장님 도우러 왔어요?'

'음, 그게...'

장사영이 고기 상자 하나를 들고 리어카 한 구석에 올려놓다 그제서야 인기척을 느끼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는지 인사를 건네는 얼굴에 아주 여유가 풀풀 감돈다.

'그래도 동생이 남자 보는 눈은 있어 다행이구먼. 그쪽 일도 바쁠텐데 찾아줘서 고맙습니다.'

'사장님이 아니라 아가씨 도우러 온 거거든? 우리 중국집에서 김칫국 찾지 말자?'

'흐, 흠!'

딱 자르고 나선 동생의 퉁명스런 대답에 무안해진 저쪽이 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옆의 사샤가 은근슬쩍 맞장구를 놓는다. 헤, 여태 저 양반 곤란해하는 건 동생 앞에서뿐인 줄 알았었는데.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깐, 우리 사장님이 뭐가 이쁘다고 대리 아저씨가 여기까지 와서 도와주겠요? 저쪽 사장님 정도는 되어야 민심이 끌리는 거지.'

'야, 사샤 이년아! 너는 도대체 누구 편이냐?'

'그거야 당연히 월급 주는 회사 편이겠죠? 까놓고 말해서 마담 정도 빛빛빛 인성은 되어야 연차까지 쓰면서 오는 맛이 있지 않겠어요?'

'에라이 몹쓸 년, 늘라는 돈 계산은 안 늘고 고놈의 주둥이만 잔뜩 늘어서! 도치 성적 잘 나왔으니까 내가 특별히 봐준다 봐줘...'

잠시 툴툴거리던 장사영이 스마트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끝나고 얼마 안 있어 가게 안에서 누군가 나왔는데... 확실히 삼국지 장수를 닮긴 했군.

'와하하하! 장 사장! 오느라 수고 많았어! 이거 어르신이랑 장 사장 덕에 모처럼 솜씨 좀 부려보겠구먼.'

'도치 덕도 본 거지. 그럼 난 형만 믿겠수?'

'맡겨만 보시라고, 내 상다리가 분질러지게 차려놓을 테니! 와하하하!'

...마초가 아니라 장비겠지만 말이다. 저 반팔 조리복을 비집고 튀어나온 구릿빛 근육에 박박 민 머리와 밤송이 수염, 손에 들고 나온 두터웃 중식도가 장난감 과도처럼 보이게 만들 떡 벌어진 어깨와 떡대... 한 천 년 일찍 태어나 참피 대신 사람을 일가실각내고 다니는 게 더 어울릴 사람이다. 장사영이 챙겨온 재료를 보고 마음에 들었는지 한바탕 호탕하게 웃어재끼곤 이쪽과도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였다.

'아가씨는 어디 계세요?'

'안에 계시지. 데스파 만들 때는 불에서 눈이라도 떼었다간 큰일나거든.'

'근데 급히 만들어서 맛이 나려나 모르겠는걸?'

'재료가 좋으니까 발효는 좀 속성으로 해도 돼. 시간이 있었으면 좀더 좋았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이거 같이 끌고 주방으로 가 보자고.'



마백도 사장까지 해 남자 셋이 미니 꽉 찬 리어카도 엄지 손목 비틀듯 매끄럽게 가게 후문으로 향했다. 바깥 주변부터 슬금슬금 새어나오는 열기를 느끼며 문을 열자, 화끈한 불기운과 함께 구르메만은 못해도 꽤 잘 정돈된 주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담은 주방 한쪽에서 커다란 솥 아래 가스불과 솥 안 온도계를 계속 살피며 수시로 불 조절에 신경쓰는 중이었다. 솥 안에는... 와우, 독라 자실장 십수마리가 각자 쭉 뻗고 널브러져 때아닌 아와아와 목욕을 만끽중이시다.

'텟, 이 정도 세레브 대접은 받아야 와타시의 격에 맞는 테치.'

'테히이... 따끈따끈테치~ 똥닌겐이 고귀한 와타시를 대접하는 법을 조금은 아는 테츄.'

'아와아와 목욕이 끝난 다음엔 약속한 스테이크와 스시인 테치! 그 다음엔 오마에와 털보 독라가 맨 가마를 타고 순행을 나서는 것으로 특별히 봐 주는 치프프프.'

중국집에서 스시와 스테이크라니, 저것들도 참 한결같군. 솥 안 온도계를 슬쩍 보니, 목욕탕 열탕에서 흔히 보이던 40대 초반보다 약간 높은 온도다. 저 정도로 데워서 육수가 나오나?

'수고 많으십니다 마담. 저것들 시중 드느라 피곤하시겠네요.'

'아, 대리님? 구르메 쪽은 어떻게 하시고...'

'스테이크감이라면 다 처리해놓고 왔습니다. 조수실석 애들은 매니저 쪽에서 퇴근시켜준다고 하더라구요.'

'그 정도면 일찍 들어가셔도 될 텐데, 여기까지 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목례로 답하는 마담 뒤로 시끄럽게 울어대는 자실장들 소리가 울려퍼진다. 이제 슬슬 뜨거워진 모양이구먼.

'저것들이라니 무례한 테치 마라닌겐! 텟? 왜 손씨가 안 움직이는 테츄? 몸씨가 말을 안 듣는 테챠악!'

'와타시타치한테 뭔 짓을 한 테치카? 돌려놓는 테치!'

자기들도 모르는 새 살이 익어버렸는지 투분을 하려던 한 마리를 시작으로 솥 안이 슬슬 시끌벅적해 간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내 의문을 옆의 마 사장이 해결해 주었다.

'솥 안의 개구리 이야기 들어 보셨겠지? 처음엔 목욕물 정도로 시작해서 서서히 온도를 올리면 저 죽는 줄도 모르고 가만히 익어간다는 그 말 말요.'

'네, 들어보았죠.'

'개구리는 몰라도 녹돈 데스파는 그렇게 해서 뽑는다오. 솥 안에서 난리치면 주방에 물 튀는데다 대놓고 뜨거운 물에 던져버리면 생각보다 그 짓소산인가 하는 맛 성분이 잘 안 우러나더군.'

해물 육수 뽑을 때 종종 그렇게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었지. 실장석의 물러빠진 몸뚱이와 멍청함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발상일 듯 싶다.

'뭐 이제 슬슬 저 온도론 국물이 안 나올 때가 되었수다. 이제 서서히 온도를 높여 골수까지 재생력을 짜내야지.'

말대로 마담의 손이 가스불 레버를 확 틀어놓고, 미동도 없던 솥 안의 물에서 서서히 김이 피어오르며 안쪽의 난리통이 더욱 커져간다.

'똥닌겐! 와타시의 우아한 살결에 화상이라도 입힐 생각이면 당장 집어치우는 테챠아!'

'테에엥! 아와아와 목욕이 아니라 팽형이었던 테챠아!'

'이게 무슨 횡포 테츄! 와타시를 당장 꺼내놓지 않으면 똥벌레와 털보 독라의 삼대를 멸족시켜주는 테챠악!'

'마마 살려주는 테챠아아아!! 와타쉬히- 뜨거우호오오-'

굳은 몸을 흔들며 발악해보려 하지만 김이 피어오름과 동시에 구석에 올려졌던 접시 속 위석들이 격렬히 진동한다. 뜨거움에 발악하던 한 마리의 목이 막혀가는 비명을 마지막으로 목구멍까지 익어 말을 잇지 못하는 자실장들이다.

이제 솥 안의 온도계는 80도에 육박한다. 접시 안의 활성제가 어떻게든 저것들의 명줄을 이어놓고 있고, 그 생명력과 재생력을 이용해 저렇게 한참 골수까지 짓소산과 국물을 짜내는 게 중국식 조리법인가보다.

'이대로 한 시간쯤 더 데워서 재생력이 다 되고 나면 온도를 더 올리고, 걸쭉해질 때까지 끓인 다음 밀가루랑 섞어 사흘 발효시키면 완성되는 게요. 뭐 시간이 없으니 아쉬운 대로 속성으로 익혀야겠지만.'

'뭐 그래봤자 조미료 아닌가요? 이 정도는 시중에서 대충 사서 써도 될 텐데...'

'뭣이, 대충?'

어... 실수였나? 순간 마담과 장사영이 흠칫했고, 마 사장의 고리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흐익! 무슨 사람 눈빛이 저렇게...'

'어, 어버버버버버...'

'헤헤, 이 친구가 중화요리를 잘 몰라 그런 거니까 마 형이 이해 좀 해주십쇼.'

'그러셨나? 그럼 그럴 수도 있지.'

사..살았다. 구원투구를 날려준 장사영이 얼굴에 슬쩍 웃음기를 머금곤 마 사장의 어깨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팔을 얹는다.

'이제 영감이 보내준 건화나 썰러 갑시다그려. 육수 내려면 밑손질 잘 해놔야지.'

'그래야지, 할 일이 태산인데.'

마 사장의 솥뚜껑만한 손이 조리대 위에 진열했던 건실장이 담긴 포대를 가볍게 둘러메고 장사영을 따라나선다. 둘이 그렇게 나간 다음에야 어깨에 힘이 쭉 빠지는 게 느껴졌다.

[털푸덕]

'...십년 감수했네...'

옆의 가영씨와 마담이 별 일 아니라는 듯 다독이긴 했지만, 까놓고 저런 마초 아저씨랑 시비라도 붙었다간 나는 그날로 구제업자 손에 붙들린 실장석 꼴이 날 테니...

'히히, 철수씨. 뭘 그렇게 겁먹어요? 마 사장님 그렇게 무서운 분 아니에요. 화내신 것도 아니고요.'

'그거야 그렇다 쳐도 저 분 인상이... 좀 장난이 아니라서요...'

'대리님께서 느끼시는 것처럼 성격이 강하신 분은 아니에요. 다만 자기 요리에 대한 긍지가 높으신 분일 뿐이죠.'

'그런데 마담, 데스파가 뭐길래 사장님이 저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거죠?'

'데스파는 풀어 말하면 '실패'. 실장석의 재생력이 소진될 때까지 푹 끓인 엑기스에 밀가루를 섞고 발효시킨 육장 계열 조미료의 일종이에요. 문혁 시절 실전되었다가 2000년대 들어 재발굴되어 중화실장요리 업계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반응이 무척 긍정적인 모양이고요.'

'그, 그런 거군요.'

'저 데스파나 실장육 노추, XJ같은 실장석을 원료로 한 조미료들은 마백도 주방장님처럼 뜻있는 요리사 분들이 힘을 모아 복원해낸 중화실장요리의 정수에요. 당연히 거기에 대한 자부심도 크실 테니 대리님께서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마담도 같은 업계 사람이다 보니 이럴 때는 무척 진지하다. 대략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 사장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해가 가긴 했다. 평생을 기울여 이룬 성과를 그렇게 폄하해 놓았으니 내 멱살을 잡아도 모자랄 판에 대강 넘긴 저 아저씨가 대인배였다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데스파는 최근 들어 실장중화요리뿐만 아니라 일반 중국집에서도 미원을 밀어내고 폭넓게 쓰이고 있죠. 이젠 이게 없으면 중국집의 그 맛은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나을 정도니까요.'

잠시 이야기를 더 들어보니 데스파란 게 이제는 중화요리에선 없어선 안 될 주 조미료 중 하나라는 모양이다. 구르메에서 쓰는 액상 짓소산이랑 비슷한 감도 있고, 이제 미원이나 다시다 대신 실장석 조미료를 쓰는 건 어느 나라에서도 공통분모지 싶었다.

'아무래도 제가 단단히 실수한 모양이네요. 있다 사과라도 드려야겠는데요.'

'성품상 그렇게 오래 가실 분은 아니에요. 가볍게 미안하단 말 한 마디면 금새 웃어넘기실 거고요.'

'그런데 마담, 중화요리 쪽에도 지식이 꽤 폭넓으시네요.'

'기초는 배웠지만 그 후론 잘 몰라요. 오히려 바깥의 도련님이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실 거에요.'

'도련님이면, 장 사장님이요?'

'네, 사영 오빠요.'

이야기가 끝나고 성체실장, 중실장, 나머지 쩌리들... 가져온 실장육을 철제 조리대 위에 진열하는 사이, 잠시 불과 솥을 조금 더 지켜보던 마담이 몸을 일으켰다.



[테.. 테브브브브베...]

솥 안의 자실장들이 뼈와 껍질만 남기고 거의 녹아 국물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마담이 국자를 꺼내 그 껍질들을 걷어 창밖의 길고양이들에게 던져주자, 잠시 냄새를 맡더니 곧 잽싸게 물어 골목 사이로 사라진다.

'세 번째니까 이거면 데스파 준비는 끝났어요. 이 쪽은 이제 다른 분이 봐 주실 거고, 육수 만들 시간이네요.'

말대로 구석에서 졸고 있던 염소 수염의 키 작고 통통한 아저씨가 이쪽으로 슬금슬금 걸어와 마담에게 솥을 넘겨받는다. 자리를 나서며 뒤를 돌아보니, 큰 주걱으로 솥 안의 내용물을 펄펄 끓이며 묵 만들 때처럼 휘휘 젓는 중이다.

'육수도 중요하나 보네요.'

'실장중화요리에는 재료만큼이나 중요한 세 요소가 있는데, 조미료, 기름, 육수에요. 어르신께서 최고급 건실장을 준비해 주셨다고 하니 여기서 손질만 잘 하면 좋은 육수가 만들어지겠죠.'

바깥으로 나서니 장사영과 마 사장, 밖에서 기다리던 사샤가 두툼한 포대자루를 바닥에 깔아놓고 바짝 마른 우지들을 한데 모은 다음, 성체 여럿을 차례대로 눕혀놓는 중이다. 어떻게 했는지 이제 놀랍지도 않지만, 다들 살아서 뭐라고 웅얼거리고 있는 모습이 괴기영화 속 미이라쯤은 애교로 보일 비주얼이었다.

'무...물을 주는 데스흐...'

'추우운 데스흐... 목 마른 데에헤...'

'데.. 데베베...'

'마침 잘 나왔군. 대리님, 가영아, 거기 한 마리 좀 붙들어주고.'

'제가 다리 쪽 잡을게요. 철수씨는 그 쪽 잡아줘요?'

'예이.'

가영씨 하는대로 면장갑을 끼고 붙들자, 면장갑 너머로 푸석푸석한 살결의 질감이 손을 타고 흐른다. 마담과 사샤가 다른 놈 양 끝을 붙잡은 사이 예기가 흐르는 줄톱을 하나씩 챙겨든 장사영과 마 사장은 서로 너스레를 떨며 옥신각신중이었다.

'백도 형, 이번엔 가루 안 날리게 잘 썰어보슈. 이거 한 마리 몸값이 일식집 참치회 VIP세트급은 가볍게 넘는 거니깐?'

'마, 임마! 그러지 말고 니가 주방장 해라! 자식이 어딜 중국집 주방장 앞에서 장 볶는 소릴 하고 있누.'

'에이 내가 형님 솜씨가 있으니 믿고 말하는 거지. 못 할 양반이면 이런 말도 안 꺼내지 말이우.'

주고 받으면서도 둘의 톱은 비쩍 말라 푹 꺼진 건실장의 배 가운데를 기준으로 앞뒤로 능숙하게 오가며 그것들을 반으로 가르고 있었다. 톱날이 배때기를 오갈때마다 나무 써는 톱질 소리가 울려퍼지고, 내 쪽에서 붙든 실장석 대가리에서 바람 빠지는 신음성도 뒤따라 오간다.

[서걱서걱 서걱서걱]

'데히... 히햐하하... 데뵤요오...! 후고오오...!'

나무토막처럼 마른 몸이 움직이진 못하지만, 그 몸 어디서 짜낼 수분이 남았는지 끈적한 적록빛 눈물이 푹 들어간 눈두덩을 타고 흐르고 있다. 그나마 흐른 몇 방울이 말라붙은 살 속으로 스며드는 사이 몸뚱이가 반으로 갈라졌고, 그제서야 고개가 뒤로 힘없이 푹 꺾이며 몇 개월 간 말라왔을 지옥같은 실생도 마감되었다.

'어르신께서 제대로 실한 놈을 보내주셨군. 잡은지 일 년이 넘었는데 살아있는 녹돈이라니 말야.'

'그럼 누구 솜씨인데. 근데 영감 연세가 연세라 후계자를 구해놔야 하는데 큰일났수다. 이런 힘든 일을 요새 누가 배우려고 하나.'

'흐흐, 그 노인장이라면 백 살은 우습게 넘기실게야. 아직도 장작더미 한 지게 정도는 장난감처럼 지고 나르신다면서?'

'그래도 노인 건강은 모르는 거유. 계실 때 잘 해드려야 하는데 매번 이렇게 신세만 지니 참...'

영감이라면 장만성 포수를 말하는 모양이다. 매니저도 전에 우지산에서 저런 말린 실장석 여럿을 본 적이 있다고 하니까. 건실장 몇 마리를 그렇게 모두 반으로 썰고, 한 마리당 대략 여덣 토막을 치고 나서 작업이 끝났다.

다들 11월 중순의 쌀쌀한 가을 바람에 몸을 살짝 떨곤 썰어낸 건실장 토막을 콘크리트 바닥에 깔았던 포대자루에 도로 넣고 주방으로 향했다. 아까의 염소수염 요리사가 마른 버섯, 마늘, 생강 따위의 육수 재료를 손질해놓곤 다시 데스파 냄비를 젓는 중이다.

'왕씨가 잘해놓았군. 이거 불려놓고 잠깐 밥이나 먹자고.'

'식사는 어디서 시킬 거유?'

'이 친구가 중국집 앞마당에서 배달 소리를 하고 있나? 다들 잠깐들 쉬시고 계십쇼. 내 금방 짜장에 탕수육 한 접시 맛깔나게 차려드릴 테니까.'

'그럴 줄 알고 한번 떠봤지. 그럼 형만 믿고 나가보겠수?'

'임마! 어딜 빼려고? 넌 남아! 나랑 같이 녹돈 잡고 탕수육 튀겨야지.'

'이크크.'

뒷덜미를 붙들리면서도 왠지 장사영 얼굴이 꽤 신나보인다. 둘을 두고 주방을 나가 빈 테이블에 각자 한 명씩 자리를 잡고 앉아서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나누었다.



'사장님이 중화요리 쪽을 잘 아신다고 했죠? 설마 전에 꿈이라던 요리 분야가...'

'맞아요. 실장요리 중식부.'

'그래서 저렇게 일을 잘 아시는 거군요. 톱질도 그렇고 주방 일 도와드리는 것도 그렇고.'

마담과 사샤 쪽은 대화에 끼지 않고 나와 가영씨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는 중이다. 특히 사샤 쪽, 매니저의 장사영에게 관심 있다던 말이 허언은 아닌지 꽤나 진지하다.

'두 분 무척 친해보이시던데, 어떻게 아시게 된 거에요?'

'전에 오빠가 회사 처음 세웠을 적에 이사님 소개로 여기서 구제 의뢰를 한 건 받은 적이 있었거든요. 일가 하나였는데, 그것들을 잘 꼬드겨서 집 지키는 개처럼 만들었대요. 말 안 듣던 자들은 본보기로 탕수육처럼 튀겨버렸고요.'

'납골장에서도 그렇고 저 쪽 분도 꽤나 학대파였군요.'

'어딜 가겠어요? 학창시절 별명이 실장석 직쏘였어요. 그 와중에도 돈 안 되는 학대는 안한다며 데스넷 동영상만 올려대긴 했지만요.'

'풋! 내 앞에선 그렇게 학대파 아니라고 빼더니...'

마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사샤는 입을 가리고 쿡쿡 웃는다. 자기 사장의 흑력사를 듣는 것이 꽤 재미있는 모양이다.

'사영아, 꽉 붙들어라!'

[취이이이익 취익 취에에에에엑]

[취에에에에엑]

그새 문 너머로 아까 본 영상 속 녹돈 잡는 단말마가 울려퍼진다. 곧 칼 꽂는 소리와 마지막 비명이 들리고, 중식도로 찍는 소리가 몇 번 울려온다. 비명소리가 굵직하고 큰 걸 들어보니... 하긴 여기 모인 사람들 먹으려면 성체 두엇은 잡아야겠지.

'아까 오면서 보니까 여기 사장님 솜씨가 대단하시다고 하던데요? 잊혀진 원조 실장중화요리의 복원이라고 했었나.'

듣고 있던 사샤가 슬쩍 끼어든다.

'그거 동우위키에서 보신 거죠? 실장독감 유행 전만 해도 여기 나름대로 연합동 차이나타운 핫플레이스였어요. 독감 돌고서도 다른 집들 다 문닫네 마네 하는데 마초반점은 잘 버티고 있고요.'

'아까 그 말린 실장석도 마리당 수십만원은 한다면서요? 그런 비싼 재료도 아낌없이 쓰시는 걸 보니 여기 사장님 주머니 사정이 꽤 되시나 보네요.'

'어, 그건. 잠깐, 언니. 말해도 돼요?'

'하오.'

잠깐 멈칫한 사샤가 가영씨한테 뭔가를 묻고, 허락을 받아낸다. 이 여자들이 또 나한테 뭘 숨기는 거지?

'무슨 얘긴데 그래요?'

'어... 그게 사실 전적으로 마백도 사장님 자력은 아니에요. 우리 사장님이 말로는 투자라고 핑계대면서, 마 사장님 필요하신 고급 재료비를 이것저것 제법 대주시거든요.'

'투자요?'

'아까 말한 실장중화요리 복원 운동 기억나시죠? 예전 호텔 요리사 하시던 시절은 몰라도 중국집을 따로 차리고 나서부턴, 연구비에 재료비에... 아무리 장사가 잘 되어도 동네 중국집이니 주머니 사정으론 한계가 있었대요. 저기 주방에 계시는 중화요리 덕후께서 돈줄 노릇 해주시기 전에는요.'

'장 사장님이요?'

'사샤 말대로요. 사영 오빠가 집안 생계 떠맡느라 구제업으로 빠지긴 했지만, 저렇게나마 꿈을 이루고 있더라고요. 자기 입으론 대리만족이라곤 하지만, 그 말 할 때 기분이 참 좋아보였어요.'

뭐, 사람에겐 각자 나름의 꿈이란 게 있는 거지. 바쁘게 사느라 잊기 마련이지만 팔자가 피고 살림에 여유라는 놈이 생기면 저렇게들 뒤를 돌아보기 마련이다. 일흔 먹은 할머니가 뒤늦게 학교에 진학해 평생 소원이었다던 글공부를 하거나, 배움에 한이 맺혔던 기업가가 사재를 털어 장학금 마련에 나선다거나, 의외로 신문에 흔하디 흔한 기삿거리고 레퍼토리다.

그래도 어째 뒷맛이 좀 쓰다. 자기 집안 관리나 잘 할 것이지 엉뚱한데 삽질하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으니...

'돈이 많은 건 알겠는데, 그렇게 여유가 있었으면 구르메나 좀 도와줬었으면 참 좋았겠는데요.'

'헛?!'

'흐흠!'

내 푸념에 별안간 사샤 쪽에서 화들짝 놀라선 움찔하고, 가영씨도 가볍게 헛기침을 한다. 아니, 내가 또 뭘 잘못했다고?!

'뭐에요, 갑자기. 둘 다 왜 그래요?'

'대, 대리 아저씨 말이 맞아요! 하튼 그놈의 허당, 잘난 척은 있는 대로 다 하면서 정작 등잔 밑은 어둡다니깐요?'

'사영 오빠랑 아가씨 사이 아시잖아요? 도와줄 리도 없고, 그런다 해도 아가씨가 거절했을 거고요.'

'뭐 그거야 그렇죠.'

그렇게 어영부영 넘어가나 싶는데, 정작 마담은 뜻모를 씁쓸한 미소를 짓곤 주방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요리를 돕는 중인 문 뒤의 장사영을 응시하고 있을 터였다.



'기대들 하시구려, 신선한 녹돈 기름으로 갓 볶아낸 실장짜장과 탕수육이외다!'

허~ 내가 언제 중화요리를 이렇게 맛있겠다고 생각했었지? 겉보기로는 분명 대학가에서 대충 먹다 남기던 짜장면과 탕수육일 뿐인데, 예전에 먹던 그 시절 기름 쩐내가 안 난다. 오히려 희미한 실장향이 곁들여진 고소한 냄새가 잘 익은 춘장 향과 어우러져 일하고 먹는 늦은 점심의 식욕을 있는 힘껏 뒤흔들어놓고 있었다.

테이블 하나를 놓고 여섯 명이 둘러앉아 짜장면 하나씩 붙들고 수북한 탕수육 접시를 사이에 놓자 꽤 그럴싸한 점심식사 그림이 나온다. 마담과 장사영이 당연하게도 양쪽 끝을 차지하고 앉았고, 그 사이를 나머지 넷이 채워서 마주앉았다.

'그럼 잘 먹겠습시다.'

'맛있게 드시오!'

먼저 뭔지 모를 야채절임과 찐 땅콩으로 가볍게 입가심을 하곤, 그릇에 가득 담긴 탱글한 면발 위에 갓 볶은 자장과 후라이를 슬쩍 얹었고 잘 비벼 한 젓가락 들고 입에 넣었다.

[후루룩]

음. 이 고소하고 달고 짭짜름한 장에 감싸인 쫄깃한 면발, 그간 내가 음식에 가졌던 편견 하나가 또다시 장렬히 전사했다. 젓가락으로 가볍게 집기 무섭게 바삭거리는 질감을 한껏 뿀내는 탕수육 한 조각, 살짝 녹색 빛이 도는 소스에 찍어 입에 넣자 바삭한 튀김옷 속 촉촉한 실장육이 부드럽게 이 사이로 녹아든다. 이쪽 음식이 입맛에 맞는지 남매와 사샤는 신이 나서 젓가락을 움직이고 있고, 평소에 이쪽 요리와는 별로 연이 없었을 마담도 별 군말 없이 제법 음미까지 하며 맛있게 잘 먹는 중이다.

그렇게 한참 즐거운 점심 식사에 빠진 사이 식탁에서는 대화가 이어졌다. 육수를 뽑는 동안 무슨 작업을 더 할지에 대해서다.

'당일 바로 만들 것들은 재료만 준비해놓으면 될 거고, 그럼 이제 만두 속이랑 북경식 녹돈구이, 그것만 남은 거유?'

'그렇지! 그 둘이 오늘 제일 신경써야 할 거야. 이쪽들은 보통 고깃감들 말고 바짝 올려놓은 것들을 써야 하니 내 특별히 준비를 좀 해 놓았지.'

'그 치파오 입힌 것들 말이구먼. 실장석한테 치파오라니, 처음 볼 적엔 고량주에 아편이라도 타서 마셨나 싶었었지 말이우.'

'철수씨랑 들어올 때 문 밖에서 이거랑 비슷한 것들 꽤 많이 팔던데요?'

아까 밖에서 잡상인들이 팔던 '중화실장' 되시겠다. 그 말을 들은 마 사장이 대머리를 벅벅 긁적이며 어깨를 슬쩍 으쓱한다.

'동네 앞에서 사육녹돈 파는 사람들 말이구먼. 육질이 떨어지는 것들이나 아직 덜 키운 새끼녹돈들을 그쪽에서 떼어가곤 하지.'

'따지고 보면 여기 화교분들 유명세 빌어서 폭리 뜯는 건데, 따져보실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휴우.'

그 말에는 가볍게 한숨으로 답한다. 장사영 역시 좀 씁쓰레한 기색이다.

'우리가 여기 터잡고 산다지만, 결국 굴러온 돌은 우리들이외다. 그랬다간 상인들 생계 보장하라고 시민단체랑 애오단체가 동네 앞 가로막고 난리부터 칠 거요.'

'화교 분들 이야기는 몇 번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접하니 좀 씁쓸하네요.'

'아버지 대에는 더했었지. 더러운 녹돈 잡아서 고기로 판다고 되도 않는 시비도 많았었고, 기껏 차린 가게가 법에 걸려 넘어가도 할 말이 없었고. 지금은 그런 일은 없어서 다행이라오.'

마백도 사장 일가의 인생역정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모국이 혼란했던 시기 하필이면 독재자가 몰살을 명했던 녹돈을 다루는 요리사란 이유로 허구한 날 하수인들에게 고통을 당하던 부친이 견디다 못해 일가를 이끌고 대륙을 탈출했지만, 새로 정착한 우리 나라라고 살기가 수월한 건 아니었다. 3대 대통령 시기 나라 내부에선 공산국가 출신인 화교들에게 그리 우호적인 분위기가 아니었고, 온갖 역경 끝에 차린 가게가 폐업되고 재산이 묶이는 등 갖가지 고생을 해왔다는 말에 듣는 우리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고생이 많으셨겠네요.'

'인간 사회란 게 그놈의 녹돈이란 것과 묘하게 닮은 구석이 많더군. 아버지가 모국에 사실 적엔 그놈의 반동 소리 들으며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몰매맞고 옥에 갇히고 하더니, 한국에 와선 빨갱이 나라에서 왔다며 온갖 눈초리는 다 받고 했으니. 그놈들이 공원에서 독라나 반편이들 대하는 것과 다를 게 뭐가 있겠수.'

옛날 아픈 기억에 대해 푸념을 좀 하나 싶었지만, 곧 대범하게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흘려버린다. 저렇게 대수롭지 않은 듯 넘겨버리는 털털함, 그게 저 마 사장의 일가가 세상을 살아온 방식일 것이다.

'허허허! 그래도 요새는 많이 나아졌지. 법이라는 놈도 점점 우리 편을 좀 들어주고 있고, 장 사장처럼 잘해주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으니깐. 이젠 제법 살만하다오.'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장사영이 말을 받아 잇는다. 그리 마음에 드는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서로 다른 것을 받아들여가는 사회야말로 제대로 된 사회지. 화교거나, 러시아 사람이거나, 동남아 친구들이거나, 출신은 중요하지 않아. 우리 사회에서 마음잡고 잘 살아가면 그걸로 족한 거야.'

...하나 빼먹으셨군. 오늘은 조용히 넘어가려 했지만, 저 인간의 예전 행적을 아는 입장에서 저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는 없겠다.

'그리고 실장인도 말이겠죠?'

시선이 잠시 내 쪽으로 향했다. 지지 않고 맞받아치자, 곧 시선을 돌리곤 덤덤히 답한다.

'그렇지. 물론 실장인도 말입니다.'

장사영과 마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가영씨와 사샤 쪽은 가볍게 동요하는 기색을 보인다. 둘 쪽엔 좀 미안하긴 하지만 아직 저쪽의 미담이나 말들이 내게는 위선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한 마디 정돈 쏘아주고 싶었으니까. 영문을 모를 마 사장만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고 그릇을 마저 비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밥도 다 먹었으니 일들 마저 합시다! 일단 육수는 사영이 너가 보고, 그... 대리님과 가영 씨는 마당으로 따라와서 만두속 만들 유니 거르는 것 좀 도와줘요. 마담이랑 사샤는 화덕에서 북경녹돈 만들 녀석들 좀 가져와 주시구려.'

각자 위치로. 장사영은 데스파 작업을 마친 키 작은 요리사와 함께 육수 재료를 잘 씻어 솥에 때려넣고 있고, 마담과 사샤는 안쪽으로 들어가 화덕이 있을 곳으로 향한다. 마 사장은 큼지막한 손아귀에 잠든 치파오 중실장을 두어마리씩 뒷덜미를 잡아들고 마당으로 향하고 있고, 나와 가영씨도 두 마리씩 챙겨서 뒤를 따랐다.

마당으로 향하는 문을 나서기 전, 가영씨가 잠시 나를 불러세웠다.

'철수씨, 오빠한테 많이 실망한 건 알고 있어요. 그치만 그렇게까지 말을 꺼낼 필요가 있었어요?'

'적어도 마담 앞에선 저렇게 뻔뻔한 모습은 보이지 말았어야죠. 사람 그렇게 만들어놓고 이제와서 선비 행세라니! 해도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요?'

'그건... 사영 오빠가 확실히 잘못했던 거에요. 하지만 오빠도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요?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나마도 가영씨가 없었으면요? 자기는 티끌 하나 안 묻은 사람이라는 듯이 계속 저리 뻔뻔하게 잘 살았을 거잖아요? 적어도 그 사람이 죄책감은 느꼈으면 좋겠다 이 말이에요.'

'철수씨, 그건...'

가영씨가 당혹한 모습으로 말을 이으려던 찰나, 상자 하나를 구르마에 실어 이쪽으로 가져오던 마담과 사샤의 눈을 마주쳤다.

'아가씨?'

'대리님. 절 위해 나서주신 건 감사하지만, 이젠 더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장사영 그 사람이 죄책감 정도는 느끼고 있었으면 해서요. 마담께서 거절하시든 아니든, 예전 일을 반성하려면 적어도 도움을 주려는 시도 정도는 해 봤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다음에 마담이 꺼낸 대답에는, 나도 가영씨도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돕고 있었어요.'

'아가씨?'

'마담?!'

'여기 온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걸 묻기 위해서에요.'

'묻다뇨?'

'도련님과 만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지 좀 지난 다음 사샤에게서 연락이 왔었어요.'

둘이 동시에 사샤 쪽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지만, 슬며시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흐흠! 마..마담께 물어보세요!'

'돕다뇨? 도대체 그게 뭔...'

궁금증을 채 해결하기도 전에, 문이 덜컥 열리고 마 사장의 구릿빛 대머리가 번들거린다.

'거 녹돈 가지러 간 게 아니라 키우러들 갔수? 빨리들 시작합시다!'

'......'

'왜, 왜들 그러시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마 사장이 그 머리를 번쩍거리며 영문 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걸 멈추질 못한다. 그러면서도 털 숭숭 돋은 고릴라 팔뚝으로는 집채만한 도마 위에 나란히 눕혀놓은 치파오 중실장들 위로 네무리 해독제와 시비레를 번갈아 뿌리는 중이다. 대접 잘 받기는 했구만, 깨어나 주절거리는 주둥이 사이로 영락없는 분충소리가 술술 새어나온다.

'텟, 여긴 어딘 텟승? 고귀한 와타시타치를 모시던 똥시녀와 하인들은 어디 가고 왠 털보 독라와 마라닌겐이 기다리는 테스카?'

'테프프 와타시를 시중들 마라닝겐 첩실들인 테스웅! 어서 옷씨를 벗고 와타시의 처음을 가져가는 영광을 누리는 테스야.'

흐으으... 옷 벗기는 중에 저 소리를 들으니 자연히 총구 쪽으로 눈이 돌아가고, 곧 그놈의 미디엄이 겹치며 욕지기가 슬슬 올라온다. 다른 셋 쪽으로 애처로이 눈빛을 돌려봤지만, 가영씨는 삐쳐서, 마담은 체 씻느라 바빠서, 사샤는 딴청피우면서 이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는다.

'끄으... 하필 올려도 이렇게 올려놓는답니까?'

'요새 알바를 젊은 애들이 하다 보니까 키우는 방식도 변했거든. 예전엔 산해진미나 궁중 음악같은 소리나 지껄여서 비위는 덜 상했는데 말야.'

'알바생을 쓰는군요. 하긴 이 짓을 매일 하단 머리카락이 남아나지 않겠지 말입니다.'

'뭘 그리 짖어대는 테스카! 털만 많은 독라닌겐은 거르는 데스. 싱싱한 마라닌겐 마라는 와타시 차지인 데퍄퍄!'

'어딜 넘보는 테스카! 이모토라도 용서없는 테스!'

어우 ㅆ... 당장에 이놈의 살색 알몸뚱이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어차피 조리 과정에서 갈려나갈 것들이니 일단은 무시해 넘겼다. 겉옷을 벗고 팔뚝을 걷어붇인 사샤가 잠시 이것들이 주절거리는 소리를 듣더니, 킥 웃곤 마 사장에게 묻는다.

'사장님. 이거 위에 꽂든 아래에 꽂든 상관없죠?'

'물론이지! 똥만 잘 빼내면 상관없다네.'

'오케이, 그럼 밑으로 할게요?'

'어린 처자가 비위도 좋군.'

'말만한 남동생도 있는 몸이에요? 풋, 우리 잠탱이가 여기 있었으면 볼만했을 건데.'

한 마리 집어 사샤에게 건냈다. 붙들린 놈이 적록빛 눈알을 볼썽사납게 굴려대며 대들고 나선다.

'왜 마라닌겐이 아니라 총구닌겐이 덤비는 테스카? 오마에는 박을 마라도 없지 않는 테스!'

'있거든? 여기 마라 받아라!'

[푸욱]

'테벡?! 화끈화끈 테샤아아아아!!!'

굵직한 고무호스가 단숨에 분충의 총구를 꿰뚫고, 수도꼭지가 돌아가며 중실장이 입에서 녹색 물줄기를 시원하게 뿜어댄다.

[풰베에에에에에에]

'텟! 저런 마라는 다메테스! 닌겐상 마라를 내놓는 테스 똥닌겐! 그러면 지금의 무례는 석고대죄 열 번으로 특별히 퉁치는 테스!'

'뭐? 빨리 박아달라고? 금방 운치 빼고 갈 테니까 구멍이나 벌리고들 있어!'

'테갸아! 미친 똥닌겐 테갸아앗!'

'거 젊은 처자가 입심도 좋구먼.'

발악하던 중실장들이 차례대로 입에서 운치물을 분사하는 신세가 되었고, 마담에게 넘겨받아져 머리카락이 뽑힌다. 분대 세척을 받고 시비레를 먹어 기운이 빠진 상태에서도 움직이는 입으로 마당이 떠나가라 발악을 하지만, 무정한 마담의 손은 재빨리 머리를 뽑고 다음 놈의 머리를 잡느라 바쁠 뿐이다.

'똥벌레!!!! 어딜 천잠사 비단결같은 와타시의 머릿결에 손을 대는 테스카!!! 냉큼 놓지 못하는... 테에! 독라가 되어버린 테샤아!!!!'

'똥마라닌겐은 어서 와타시의 양귀비 몸매에 메로메로되어 똥벌레를 독라달마로- 테샤아아아아!!'

'양귀비는 얼어죽을 양귀비! 얼른 다져버리죠 이제.'

'아, 다지는 거 아니요. 야채면 몰라도.'

엥? 안 다진다고? 그러고 보니 마담이 다지는 재료에 야채나 해산물은 있어도 실장육은 빠지고 없다. 그럼 이걸 통으로 넣을 건 아니고...

'체에다 거를 거요. 유니, 육니, 고기 진흙.'

'고기 진흙요?'

'그래, 고기 진흙 말요. 가영 씨, 이제 도로리 풉시다!'

'준비 다 해 놨어요!'

뭔가를 물에 풀더니, 도로리였군. 식용 도로리라 그런지 특유의 비릿한 악취는 없다. 한 마리를 먼저 살짝 담갔다 빼자 바로 녹지는 않지만 반응은 온다. 몸이 물러지는 질감과 함께 놈이 발악하기 시작했다.

'테샤아! 와타시의 고귀한 몸씨가 흐물거리는 테스! 감히 와타시를 독살하는 반역을 저지르려는 테스카!'

'독살? 끔살이겠지!'

가영씨가 씩 웃으며 이죽거리는 사이, 마담이 잘 씻은 체를 양동이에 받쳐 가져오고, 물렁거리는 몸뚱이가 거기 얹힌다. 어느새 마 사장의 손에 들린 틀이 놈이 얹힌 체와 딱 맞는 크기다.

'자. 틀 얹고, 누릅시다! 즙 안 튀게 조심하고.'

'어? 예, 예...'

'한 번에 꽉 눌러야 안 튄다오. 자 그럼!'

'으잇차!'

마 사장과 내 손이 흐물거리는 중실장 위에 얹은 틀을 단숨에 내리누르자, 양동이 안으로 살점 눌리는 파열음이 울리며 내용물이 체를 통해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풰베! 푸붸에에에!]

[푸확]

틀을 타고 올라오는 기분나쁜 질감에 슬쩍 떨리는 손을 들어올리자, 짓눌리고 터진 가죽과 찌꺼기 사이로 양동이 바닥에 고인 적록빛 고기즙이 비쳐보였다. 진흙 같은 질감이 말 그대로 고기진흙이 따로 없다. 동족의 최후에 발광하며 울부짖는 중실장들 사이로 마담이 다른 체를 씻어 넘겨주고, 체에 끼인 가죽과 고기떡을 호스로 씻어 배수구로 흘려보낸다.

'테샤아아아아!!! 오네챠가 터진 테샤아!'

'싫은 테스! 이거 놓는 테스! 저런 일은 싫은 테샤아! 놔 주는 테샤아!'

그제서야 애걸하고 빌지만 열대여섯 가까이 될 손님 받으려면 한 마리론 택도 없다. 뒤이어 발광하던 다른 중실장들도 하나둘씩 도로리에 담가진 다음 틀에 눌려 걸러진 실장육이 되는 최후를 맞는다.

'똥닌겐! 지금이라도 놔주면 여태까지의 반역은 모두 용서하는- 풰붸붸-]

[쫘악!]

'흐걋!'

'어억! 죄송합니다!'

'거 보슈! 내 튄다고 하지 않았나.'

'대리 아저씨! 나중에 세탁비는 꼭 받아낼 거에요!'

마지막 놈을 짜내던 중 사샤가 틈새로 뿜어나온 육즙에 때아닌 봉변을 당한 걸 빼면 만두 소 거르는 작업은 그런대로 잘 끝났다. 투덜대는 그녀에게 싹싹 빌곤 일찍 보내놓으니, 육수 일을 끝내고 온 장사영이 대신 합류했다.

'육수는?'

'나머지는 왕씨 아저씨가 본다던데, 자기가 할테니 이쪽 일 도우랍디다.'

'거 그 양반도 쉴 땐 좀 쉬어야 하는데... 나중에 보너스라도 좀 줘야겠구먼 그래.'

자실장과 엄지는 내일 쓴다니 이제 재료 중 남은 것은 화덕에서 물엿 바르며 말려놨다는 중실장들뿐이다. 가끔 들어본 북경오리랑 어감이 흡사한 북경 녹돈구이의 재료들인데, 원작을 그대로 답습할지, 혹은 뭔가 좀 다를지 약간 궁금해졌다.

'이것도 북경오리처럼 화덕에서 굽나요?'

'그렇게 하지. 하지만 그 전에 껍질부터 뜯어낼거요.'

'어떻게요?'

'보면 알 겁니다. 이건 할 줄 아는 사람만 할 수 있으니깐요.'

장사영 말대로 이쪽들은 자잘한 보조만 맡고, 마지막 작업인 껍질을 분리하는 일은 전적으로 마 사장의 몫이 되었다. 팔자에도 없는 사우나를 마치고 물엿이 배어 번들거리는 알몸뚱이에 스프레이로 찬 물을 몇 차레 끼얹자 조금 기운이 돌아온 중실장들이 저마다 시끄러이 떠들어대고 있다.

'물! 물 더 내놓는 테스우!'

'먼저 내놓는 마라닌겐이 먼저 범하게 해 주는 테스! 목 마르니 냉큼 내놓는 테에에...!'

'아오, 저것들은 물 달란 소릴 꼭 저렇게 해야 하나?'

'천성이 저런 놈들이니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알몸뚱이에 가진 재산이라곤 세레브하다고 생각하는 자기 총구뿐이니까. 그걸 써서라도 살겠다고 발악하는 거죠.'

'그 말은... 좀 그럴싸하네요.'

'테프프 보는 눈은 있는 털보 독라테스! 어서 대충 한 발 뽑고 시원한 물 한 잔 갖다 바치는 테텟!'

그 사이 마 사장의 텁수룩한 손이 제일 시끄러운 놈 하나를 붙들어 엉덩이를 자기 얼굴 쪽으로 돌린다. 벌름거리는 총구에서 방귀가 푸쉭푸쉭 새지만, 경험많은 요리인답게 무시해 넘기곤 옆에 얹힌 철제 빨대를 총구 바로 윗쪽에 꽂아넣는다.

'테엑! 오마에는 눈깔도 없는 테스카! 거기가 아닌 테스!'

[후우우우우웁]

마 사장의 가슴팍이 후욱 부풀며 숨을 들이쉬고, 장사영이 뭔가 올 듯 가볍게 몸을 굳힌다. 곧이어 피부 밑에 꽂은 빨대를 입에 물고...

[푸우우우우우우우]

얼굴이 대머리에 돋은 힘줄채로 시뻘개지도록 있는 힘껏 불어재낀다.

[테풰에에에에에@:-:/?%)'!,;%!((]

[쫘아악]

중실장의 껍질이 풍선처럼 부풀며 몸에서 가죽 찢기는 소리가 시원히 울려퍼진다. 둥근 공처럼 변한 몸뚱이를 받쳐둔 대야에 대고 잽싸게 빨대를 빼자 피가 쏟아지며 피부가 분리된 새빨간 속살만 총구를 통해 쏙 빠진다.

'캬, 형님 솜씨는 여전하구만.'

'처음 배울 적에 이거 연습하다 핏물 역류한 적 많았었지.'

'핏물만 말이우까? 똥 안 빼는 거 깜박했다가...'

'예끼! 그 말은 아서라.'

'크크크크.'

[테베.. 테데데데.... 테에?]

벌건 몸뚱이만 자기 몸에서 쏟아진 피 위에서 바들거리는데, 뒤척이다 그새 피가 눈에 닿고 만다. 곧 횅하니 벌어진 벌건 총구에서 구더기가 쏟아지는 걸 보고 마 사장이 혀를 차고 만다.

[테, 테샤아아아아!!!]

[텟데레- 텟데레- 텟데레-]

'에이, 그 새를 못 참고 또 새끼를 까는구만. 너 말대로 그놈의 총구 빼곤 남는 게 없는 것들이다 참.'

'다음엔 눈알을 뽑고 합시다.'

'그러지.'

'똥마마 프니프니레후? 레삣? 자가 나오는 레뺘! 뜨거운 레뺘아!'

대야의 내용물들은 곧 친부터 구더기가 낳은 구더기까지 마당 한켠에서 타오르던 난로 속 땔감행이 되었다. 실장육 타는 냄새가 마당에서 솔솔 풍기는 사이 버둥대는 한 마리가 팔다리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반항해보지만 곧 펜치에 눈알이 붙잡히고, 적록빛 눈알에 시신경이 딸려나오며 절망에 찬 발악을 내지른다.

'테... 테뎃! 저리 가는 테스! 테갸아아! 와타시의 눈씨가!'

물론 그 한 마리도 총구 위에 대롱이 꼽혀 살에서 껍질이 분리되는 전자의 수순을 그대로 따른다. 껍질이 분리되는 것도 모자라 눈까지 뽑힌 벌건 몸뚱이들이 대야에 차곡차곡 쌓였고, 마담의 칼날 아래 잘게 썬 잡채용 고기가 되었다.

'햐! 다 끝났군.'

재료를 살펴본 마 사장과 장사영이 만족해서는 손뼉을 탁 쳤다. 뭐... 오길 잘했다. 벌써 해가 지고 있으니 둘과 염소수염 아저씨만으로는 밤이 깊도록 고생하고도 남았을 거다.

'오늘 고생들 많았수다. 다들 도와줘서 정말 고맙소들.'

아, 참. 가기 전에 사과는 해야지...

'저 사장님. 아까 조미료 이야기는 죄송했습니다.'

'음? 조미료? 하하하하하하하하!!'

'어이쿠!'

호탕하게 웃어넘긴 마 사장이 내 등을 거의 철썩 치다시피 두드려주면서 솥뚜껑만한 손을 내민다. 맞잡으니 뜨거운 체온과 함께 이 아저씨 악력이 실장석을 넘어 실장씨도 일격에 짜부라뜨릴 수준이란 걸 덤으로 알게 되었다.

'뭘 그런 걸 신경쓰고 그러시우? 몰라서 그런 건데.'

'아구구... 사장님 이거 놓고 말해주세요!!!'

그걸 보던 나머지 사람들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고, 마담도 슬쩍 입에 손을 가져다댄다.



뭐 이리 좋게 끝나니 참 다행이다. 이제 떠나려는데, 장사영이 이쪽을 불러세우고 저녁을 권한다.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형님이랑 제가 저녁 준비할테니 가기 전에 좀 들고 가시지요.'

'마담?'

'아가씨, 어떻게 하실래요?'

'주신다면 사양하진 않을게요.'

'허허! 조금만 기다리고들 계시구려. 육수가 좀 남으니까 이번에는 시원하게 짬뽕으로 끓여드리지.'

주방에서 매콤한 볶음 냄새가 솔솔 스며나오는 사이, 아까의 테이블에 앉아 저녁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오갔던 말이 말이다 보니 나와 가영씨, 마담 사이에 약간의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저어, 마담. 아까 하셨던 말씀 말인데 어떻게 된 겁니까?'

'말 그대로에요.'

'그... 그래요. 아가씨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빠 쪽에서 구르메를 도운 적이 있었어요.'

'어떻게 말씀이시죠?'

'그건...'

잠시 말끝을 흐리던 마담이 양해를 구했다.

'조금 있다가, 본인 앞에서 말해도 괜찮을까요?'

'네 뭐... 그렇게 하시죠.'

한참 궁금증을 달래던 도중 주방 문이 열리고 장사영 혼자 요리가 실린 카트를 받치고 들어왔다. 짬뽕 네 그릇과 잡채였다.

'오빠, 사장님은?'

'급한 볼일이 있어서 잠시 나갔어. 먼저 먹고 들어들 가랜다.'

'사장님껜 죄송하지만 잘 되었군요. 그 분 앞에서 묻긴 곤란한 이야기였는데.'

'뭘 말씀입니까?'

오늘 처음으로 오가는 둘의 대화였다. 미묘한 마담의 눈빛에 장사영의 표정에 처음으로 긴장이 흘렀다.

'불겠네요. 다들 식사하시면서 들으시죠.'

얼큰하니 시원한 국물에 잘 볶은 야채와 실장육이 오가니 소주 한 잔 생각이 절로 났지만, 마담이 꺼내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술 생각 따위는 절로 사라지게 만들 폭탄발언이었다.

'귀국해서 철웅 선배와 가영 아가씨와 함께 처음 구르메를 세울 때였어요. 아무래도 맨바닥에서 처음 레스토랑을 세우는 일이라 도영 선배의 지인들이 찾아오긴 했어도 손님들이 느는 속도는 다소 더뎠는데, 어느 순간 구제업계 손님들이 찾기 시작하면서 구르메의 손님들이 늘기 시작했죠. 거기다 실장석을 다루는 업종들은 법적 문제에 시달릴 일이 많아 그쪽 대비도 특히 중요했는데, 법조계 지인분들도 그 때 알게 되었어요.'

'경기도 일대에 본사를 둔 구제업체가 많다 보니 생길 수 있는 우연입니다. 구제업체가 법에 휘말릴 일이 많다 보니 이 바닥에서 오래 구를수록 자연스레 법조계 사람들과는 친해져 두기기 마련이고, 그 사람들도 그 쪽 소개를 받아왔겠죠.'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에요. 구제업계에서 17년간을 종사하신 분이라면 법조계 지인들을 소개받으실 일도 많았겠죠.'

그 말을 받는 장사영의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슬쩍 웃음기까지 흘리며 마담의 의문을 여유있게 받아넘기고 있었다.

'이 바닥에서 그 정도 일한 사람이 그렇게 적은 건 아닙니다. 그쪽 단골이신 토시아키 이사님도 있고, 대형 구제업체 간부 분들 중에서도 더러 계시고들 하죠.'

'부정이군요. 그럼 다른 이야기를 하죠.'

'말씀하십시오.'

나와 마찬가지로 긴장어린 낯빛으로 둘의 대화를 듣는 가영씨를 흘깃 쳐다봤지만,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구르메에 부족한 건 손님들뿐은 아니었어요. 저도 철웅 선배도 경영은 처음이었던지라 도영 선배의 빈자리가 보통이 아니었죠. 그래서 종종 융통할 자금이 부족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아가씨가 부자 친척에게서 돈을 빌려온 덕에 넘어갈 수 있었어요.'

'가영이는 수완이 좋으니까요. 제 동생이지만 그 점은 저도 높이 삽니다.'

'그런데 어르신과 함께 도영 선배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에 이상한점을 발견했어요.'

'이상한 점이라면...'

'어르신은 6.25 당시 홀몸으로 내려오신 분이라 일가 중에 친척이라고 하실 분이 없으셨어요. 친척이라면 도련님과 아가씨 뿐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다른 지인들에게 도움을 받고 친척이라고 둘러댔겠죠. 아가씨의 자존심 문제도 있으니 말입니다.'

마담이 가영씨 쪽을 무심히 바라본다. 가영씨가 시무룩해 고개를 푹 숙이는 걸 보니 확인사살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사영은 긍정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저도 어렴풋이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그 전에 당신에 대한 미움이 너무 커서 부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를 미워하는 것에 대해 변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아가씨한테 저지른 잘못은... 말 따위로 용서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깐요.'

'사샤 양이 제게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진요.'

'......!'

사샤의 이야기가 나오자 처음으로 장사영의 삼백안에 동요의 빛이 흘렀다. 사실 추석 후로 이 양반이 이렇게 놀란 빛을 보이는 건 그간 본 적이 없었다.

'사샤라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도련님을 무척 깊이 생각하고 있더군요. 알료샤의 일 때문에 말을 나눌 기회가 종종 있었는데, 제가 도련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고 무척 힘들어했어요. 그러다 얼마 전에 제게 사실을 털어놓았고요.'

'휴우, 사샤. 그 오지랖 넓은 지지배가...'

장사영의 뒷목에 손이 얹힌다.

'저를 속이려 들 수는 있어도, 사샤 양까지 속이려 들지는 마세요. 경리 일을 하고 도련님 집 살림을 봐주면서 10원 한 푼까지 어디로 흘렀는지 모조리 알고 있더군요.'

'하아, 이 잔망스런 년....'

뒷목을 부여잡고 장사영이 끙끙대는 사이 마담의 표정이 처음보단 다소 풀어졌다. 하지만 그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건 그전보다 배는 조심스런 물음이었다.'

'...의도를 알고 싶어요.'

'의도라면.'

'추석 때도 억지를 부리는 대신 제게 사실을 이야기했으면 좀더 수월했을 거에요. 그 전에 저와 도련님이 갈등을 빚을 일도 적었을 거고요.'

'......'

'저를 그간 도와왔으면서, 그간 숨겨왔던 의도가 뭐죠?'

'......'

'...속죄인가요?'

'...복잡합니다.'

묻는 마담도, 답하는 장사영도 무슨 말을 더 꺼내야 할지 모를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걸 보는 나와 가영씨도 애간장이 타 죽을 맛인 건 덤이고.

'스스로도 모르시겠나요.'

'이젠 더 숨길 것도 없겠군. 그래요. 나도 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간 그리 해온건지 확실히 정리가 되질 않습니다. 형을 아직 용서한 건지도 잘 모르겠고, 단순히 자기만족을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고, 도치에게 떳떳해지고 싶어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듣는 마담은 대답이 없다. 장사영 스스로도 입장을 정리하기 힘든 듯 잠시 멈추었다가 호흡을 가다듬은 후 다시 답했다.

'어쩌면 아가씨 말대로 속죄일지도요. 적어도 내 입장이 정리된 다음 알았으면 해서 말을 아꼈습니다.'

'그럼 시간을 드리겠어요.'

답하는 장사영의 목소리에 힘이 빠져있다.

'길지는 않겠군요.'

'우선은 내일 도치 생일잔치가 끝나면 다시 말해요. 내일은 제게도 도련님께도 중요한 날이니까요.'

'그, 그렇죠. 중요한 날이지...'

'그럼 푹 쉬시고, 내일 뵐게요.'

마담이 먼저 몸을 일으키고, 이쪽도 가볍게 목례만 마치고 서둘러 뒤를 따랐다. 장사영은 그때까지 반쯤 먹은 짬뽕 그릇만 멍하니 뒤적거리고 있었다.



...거의 한 달을 끌다 겨우 다시 씁니다. 뭐 한동안 반백수가 되게 생겼으니 그간은 다시 좀 여유있게 쓸 수 있을지도요. 그간 기다리셨을 분들께(아직 남아계신다면...) 정말로 죄송합니다. ...파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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