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결혼이 차라리 최선으로 보이는 실장석 참피 소설 일그러짐의 끝에서

나의 아버지는 심각한 의처증에 시달리는 남자였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의처증 끝에 이어지는 폭언과 폭력, 의심암귀를 견딜 수 없어한 끝에 결국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걸 발견한 건 중학교 2학년 때의 여름방학 첫 날이어서 학교가 일찍 끝난 것에 대해 기뻐하며 집까지 한달음에 내달려온 나와 ─ 그 날 집에서 나랑 같이 놀겠다는 이유로 함께 따라온 나의 친구 몇몇이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단순히 장난을 쳤을 거라고 믿었던 나와 친구들이었지만, 노을이 질 쯤에 친구들이 모두 다 자기내들의 집으로 돌아간 후 자정이 넘어가도록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의심은 커져만갔다. 결국 참을 수 없어서 나는 핸드폰으로 어머니에게 미칠듯이 전화를 걸었지만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다.


그렇게 어머니가 없는 최초의 밤을 불안으로 지새우던 내 곁에 회사에서 야근을 끝내고 돌아온 아버지가 나타났고, 나로부터 사정을 전해들은 아버지는 경찰에 신고한 후 집 밖으로 뛰어나가 어머니를 찾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새벽이 넘어가도록 밖을 뛰어다니고 경찰들까지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달씩이나 철저하게 자취를 감췄던 어머니는, 나중에 우리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떤 도시의 강변에서 물에 퉁퉁 불어터진 시체의 몰골로 나타나, 경찰들에게 인수되었다. 어머니의 마지막이 그런 모습이었다는 걸 직감한 순간, 한순간의 찰나에 희극이 비극으로 전환된다는게 어떤 기분인지, 나는 절실히 깨달았다.


이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더 이상 어머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비참해서, 그날 나는 펑펑 울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울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오로지 한 마음 한 뜻으로 그 인간이 어머니에 대해 격렬한 분노와 증오를 불태우고 있다는 것을 ─ 그 이유가 자신으로부터 영영 도주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사인은 익사였지만 그것이 사고인지 자살이었는지 ─ 아니면 타살이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척들도 그 사건을 조용히 덮기를 바랬고, 경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사건을 깊게 파지 않고, 그냥 투신자살 건으로 귀결지었다. 그 뒤에 뭔가 어둡고 음침한 무언가가 오간듯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쪽 계통으로는 지식도 모자랐고 어머니를 상실한 슬픔에 이성이 마비되어있던 나는 그걸 신경쓰지 않은채, 그저 어머니의 영정사진만 붙들고 하염없이 울고 또 울기만 했다.


어머니가 영원히 내 곁을 떠난 뒤로 우리 집은 아버지와 나, 단 둘밖에 남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한 의처증이 심각했으나 그걸 다른 여자에게까지 풀 생각은 없었는지 아니면 아버지의 흥미를 당길만한 다른 여자를 못 찾은 모양인지, 아버지는 재혼이라던가 새로 만나는 여자라던가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않았다. 친척들이 나를 생각해서라도 (나는 그 말이 최고로 웃긴 말이라 생각했지만) 재혼을 해서 딸에게 양어머니를 주는게 어떠냐고 권유한 적도 여러번이었지만, 아버지는 짤막하면서도 완강하게 "재혼할 생각 없다" 라고 답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3년이 흘러서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어머니가 있던 시절에도 정이 없고 엄격한데다가 편집증 끼만 내게 잔뜩 부려댔던 아버지였지만 완충제(?)가 되어주던 어머니가 사라진 후의 아버지는 내게 도를 넘어선 강박관념과 살벌한 규칙 준수를 강요했다. 덕분에 그동안 내 인생은 아주 살얼음판이었고, 나는 그 동안 집에서 두 다리를 쭉 뻗고 자는 것도 두려워서 언제나 새우잠을 자느라 등이 아플 지경이었다.


하지만 혹여나 자세를 풀기라도 했다간 어디선가 아버지가 득달같이 달려와 효자손을 휘두르거나 술병을 집어던지거나 할 것 같아서,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물론 나도 머리가 컸고 한참 반항끼가 올라올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으니 속으로는 아버지에게 온갖 욕과 폭언을 퍼부었지만, 일기장은 커녕 휴대폰의 매모 엡이나 인터넷 블로그에도 아버지 이야기는 절대로 쓰지 않았다. 아버지가 언제 확인할지 몰랐기에.



그렇게 언제 터질 지 모르는 휴화산과도 같은 일상이 지속되었고 ─ 그 사이에 나는 고 3이 되어 본격적으로 대학 진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딱히 꿈이 있다기보다는 경기불황인 이 시대에 최대한 안전빵인 직장을 찾고자 들어가는 대학인만큼 선생님들에게서, 친구들에게서 최대한 취업률이 좋은 학과를 추천받아 그 학과에 맞춰서 학력을 쌓는 데에 매진하고 있었던 나의 삶에서 ─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다름아닌 아버지가 어디서 '떨이 판매' 랍시고 구매해온 실장석이었다.




*****




동물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 오히려 관리가 귀찮고 지저분하다며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던 나의 아버지가 왜 보편적으로 잘 알려진 동물인 개나 고양이도 아니고, 관리하기 어렵다고 소문이 난 (그리고 인터넷 쪽에서 '학대파' 가 형성될 정도로 혐오스럽다고 소문난) 실장석 따위를 (아무리 떨이 판매여서 헐값으로 사왔다고 해도) 집 안으로 들고 올 줄은 몰랐다. 물론 그걸 싼 값에 들고왔다고 해서 아버지가 자신이 직접 그 분충(중학교 시절에 학교에서 사육하는 실장석 관리당번 맡았다가 뒤지게 고생한 이후 난 이놈들을 싸잡아서 분충이라고 부르기로 했다)을 자기가 직접 돌보는 건 절대 아니었다.


"이거, 니가 돌봐. 아버지는 바쁘니까 ─ 밥이랑 물이랑 잘 먹이고, 빵콘인지 뭐시긴지 안 하게 관리 잘해"


종종 나에게 툭툭 던지는 무책임한 발언을 툭 던진채, 아버지는 무슨 학생 한 명 찝어다가 교실 창틀 위에 깔린 화분 관리 맏기는 선생님마냥 그런 말을 한 후 뒤도 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동장 안에서 풀려난 실장석은 나를 올려다보면서 데스데스 거리고 있었고, 나는 그놈이 샵에서 흔히 파는 자실장이 아니라 성체라는 걸 알아낸 후, 이 실장석의 출저가 나의 고등학교와 10분 거리에 있는 시가지의 실장석 샵 출신일거라 짐작했다.


왜냐하면 ─ 종종 친구들이랑 시가지에 놀러갔다가 종종 들여다보는 실장석 숍의 윈도우 바로 안쪽에서, 맨날맨날 가격이 내려가는 채로 유리수조 안에 갇혀있던 성체실장 한 마리가 이놈과 똑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장석 샵을 비롯한 '펫샵' 에서 이렇게 떨이로 판매하는 '동물' 들은, 보통 구매자들이 보기에 별로 귀엽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다 커버린 성체들인 경우가 대다수기도 했으니까.


어쨌든 억지로 관리당번이 된 나지만, 아버지의 말에 거역했다간 몽둥이나 발길질이 날아오는건 예사고 심하면 술이나 음식물쓰레기 세례를 당한 채 집 밖으로 쫓겨나는 것도 각오해야 했으므로, 나는 이 짜증나는 분충을 어떻게 하면 잘 관리할까 생각하면서 인터넷 동네 주민들에게 도움을 구하기로 했다.



거실 소파에 앉아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앱을 키고 자판을 두들기며 실장석 관련 정보들을 검색하고 있자니, 이 넌씨눈 분충이 [데스데스~~데스웃! 데스데스!!] 라고 외치면서 붕쯔붕쯔(실장석이 팔을 휘휘 휘두르는 걸 말함)를 시전했다.


실장석이 인간에게 들러붙어서 이렇게 붕쯔붕쯔를 시전할 땐 공격의사가 강하게 드러나지 않을 경우, 하여튼 뭔가 원하는 게 있다는 것이다.


랑갈 앱을 깔아서 키면 뭘 원하는지 좀 더 상세히 알 수 있지만 학교에서 사육실장들을 돌본 경험에 의하면 이놈들이 보통 이럴 땐 '배고프니 밥을 달라' 정도의 단순한 의미만 담고 있으므로, 나는 아버지가 대충 현관 언저리에 던져놓은 실장푸드 봉투 쪽으로 다가가 그것의 지퍼백을 열고, 그 안에서 실장푸드 몇 알을 꺼내서 대충 실장석 앞에 던졌다. 물론 "흘렸다간 너 죽여버린다" 라는 위협문구를 잊지 않은채로.


[데스웃…]


"이놈봐라? 의외로 얌전히 먹네?"


내 말을 귀담아듣기라도 한 걸까? 아까전까지만 해도 내가 사료봉투에서 사료를 꺼내는 모습을 보자마자 언청이같은 'ㅅ' 자 입 위에 난 작은 콧구멍에서 김을 숭숭 뿜어내며 얼굴을 붉히던 녀석이, 내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얼어붙어서는 조심스럽게 푸드를 줍고, 아무리봐도 음식물을 흘리기 쉬운 언청이입을 조심스럽게 움직여가며, 최대한 얌전히 푸드를 섭취하기 시작했다.


중딩시절 사육했던 분충새끼들이 밥만 좀 던져줬다하면 그냥 정신사납게 걸신들린 것처럼 다 흘려대면서 먹는 것밖에 보질 못했던 나는, 뜻밖에도 잘 훈련도니 강아지처럼 조심조심 음식을 먹는 이 실장석에게 약간의 호기심을 가졌다. 좀 특이한 놈인가 ─ 라는 생각과 함께. 물론 그렇다고 그 분충이 귀여워보이냐면, 그건 전혀 아니었지만.



분충놈이 오물거리며 조심스럽게 밥을 먹는동안, 나는 나름 큰 규모의 실장석 커뮤니티 하나를 알아내서 거기에다가 우리 집에 새로 들어온 사육분충의 정보들을 몇 줄 적은 뒤 '실장석이 새로 우리집에 들어왔는데, 어떻게 하면 잘 돌볼 수 있나요?' 라는 제목을 붙여서 글을 하나 올렸다.


몇 분 기다리자 (과연 규모가 큰 커뮤니티답게) 순식간에 댓글들이 줄줄히 달렸고, 나는 쓸데없이 과격한 방법을 조언하는 학대파나 딱 봐도 애오파라고 생각되는 이들의 답변은 제쳐두고, 그나마 좀 제대로 된 훈육정보를 제공하는 (아마 브리더, 트레이너라고 추정된다) 사람들의 댓글들만 살피며 "아, 이럴 땐 이렇게 하는구나" "저럴 땐 저럴 때 하는구나" "임신하면 새끼 엄청 싸지르니 조심하고, 가능하면 의안을 박아넣거나 샵에서 피임약을 사서 주기적으로 먹이는게 좋다고?" 하는 식으로 중얼거리며, 차근차근 실장석 훈육정보를 배워두었다.


【XXdsdfds님 댓글 : aadww*/ 님네 집에 온 사육실장은 꽤 개념개체거나 훈련이 잘 된 개체인 것 같네요. 보통 사육실장들은 ─ 특히 떨이처리되어서 집에 오는 놈들은 금방 분충끼를 드러내거든요. 그놈들 행복회로가 원래 그런 극적인 상황에 쉽게 반응해서 돌아가거든요. 근데 떨이처리 신세에서 벗어났는데도 사람한테 얌전히 군다는 건 제법 좋은 개체가 걸린 거에요, 축하드려요.】



【swljksw님 댓글 : 윗분이랑 저도 하고 싶은 말이 거의 동일한데, 주의사항 하나 말씀드릴께요. 원래 사육실장 중 개념개체로 보이는 놈들 대다수가 열라 엄청나게 학대해서 개념을 '박아넣은' 인위적 개념개체가 대다수거든요?


그래서 샵에서 꺼내진지 며칠동안은 개념잡힌 것처럼 굴어도 상황이 좀 편안하면 분충끼 드러내는 놈들도 있으니 주의하는게 좋아요. 또 어떤 놈들은 되게 영악해서, 자기가 사고 다 쳐놓고 귀신같이 모르쇠로 일관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주의하시고요. 분충끼 드러내면 가차없이 때려주거나 이동장 안에 가둬놓고 운치 더 이상 못 쌀때까지 굶기거나 해보세요.】



【ilkjlwweAw님 댓글 : 집에 남자분이 기거하신다고 하셔서, 좀 실례될지도 모르지만 조심해야 할 사항을 하나 더 알려드릴게요.


여기서 이런 말 하긴 뭣한데…사육실장석들 중에는 인간이랑 교미해서 흑발의 자실장을 낳으면 세레브한 삶이 약속된다고 믿는 놈들이 꽤 많아요. 얘들한텐 이게 거의 반박 불가의 본능 비슷한 거거든요…


그래서 사육실장들 중에는 인간이랑 수간을 시전하려 들거나(음지 용어로 직스라 해요) 인간의 정액이 묻은 옷이나 휴지같은 걸 어디서 구해다가 유사교미를 해서 흑발의 자를 가지려는 시도를 하는 미친 놈들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피임 잘 시키세요. 제 지인도 집에서 기르는 실장석놈이 자기가 딸칠 때 쓴 휴지 가지고 흑발의 자를 낳아버려서 그 새끼들 죄다 쳐죽여버리는 식으로 처리했어요.


안 그러면 그놈들이 남자 주인 보고 남편사마라 부르고 흑발실장들을 갔다가 인간이랑 자기 사이에서 난 사랑의 결실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다른 인간들에게 다 소문내서 사회생활 끝장날 수도 있어요. 실재로 그 건에 휘말려서 사회에서 매장당할 뻔한 피해자도 있고요】



쓸만하다고 생각되는 조언글들을 읽는 도중에, 가장 마지막에 달린 댓글에 나온 조언이 유독 맘에 걸렸다. 아니 그러니까 ─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분충놈들이 지금 인간과 이종교배를 해서 새끼치는게 가능하다고 하는거야…? 그것도 정액 조금만 있어도? 이놈들이랑 섹스한다는 직스파라는 놈들도 제대로 미친 것 같지만 정액 묻은 휴지 가지고 애 낳을 생각까지 해서 실천하는 게 이 분충들이라니, 진짜 무서운데 이거?


이놈들이 꽃가루만 가지고도 애를 쉽게 가지는 놈들이라는건 중딩때 사육실장 당번 하느라 알게됬지만 설마 이 정도로 미친 놈들이라는건 또 몰랐는데 ─ 하는 생각이 들자, 난 어이가 없어서 커뮤니티 검색창에 '흑발실장' 을 쳐봤고, 거기서 나온 온갖 기상천외한 사례들과 소송분쟁 등등을 정리해준 수많은 글들을 보고 어이가 털려나갔다. 아니, 판타지보다 무서운게 현실이라지만 설마 이 지경일줄은 몰랐어, 정말로.


'혹시 이 새끼도…일단 성체긴 하고, 주의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나중에 샵에 가서 의안이라던가 피임약이라던가 알아보자'


아버지가 아무리 의처증에 걸려서 어머니에게 제정신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못된 짓들을 일삼은 막장인간이긴 했어도 짐승과 수간하는 취미가 없다는건 가장 가까운 가족인 내가 잘 안다. (그 전에 이 인간은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우리집에 온 실장석의 경우 어쩌다 흥미가 동해서 '한 번 사와본' 물건 비슷한 존재에 가까웠고) 그러니 직스라는 미친 짓을 할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이 분충은 다 자라서 새끼를 가질 수 있을 가능성이 높은 성체에, 겉으로는 이렇게 얌전하게 굴어도 속으로는 남편사마니 흑발실장이니 세레브니 뭐니 하는 엉터리 망상이나 하고 있을 놈일 가능성도 다분했으므로 ─ 혹여나도 이상한 짓을 하지 않도록 (아버지가 혼자서 딸치는 일이 있을련지도 모르겠다만) , 그리고 그 전에 멋대로 새끼를 늘려대지 않도록 피임시키는게 제일 적절한 조취일 것 같았다.


'학교랑 가까운 거리에 실장석 샵도 있겠다…내일 하교하는 길에 그쪽으로 들려서 피임약이나 사야지.'


그 때의 나는 ─ 그렇게 안일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이 세상 뒷편에 숨어있는 기괴한 어둠의 영역에 속한 족속이, 십 몇년간 나와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




의안수술은 약간 비싼 편이었지만 피임약은 슈퍼마켓에서 파는 콘페이토 3봉지밖에 안 되는 수준인데다가 한 알에 한 달씩, 한 봉지면 1년 정도를 너끈히 버티는 수준이었으니, 그야말로 혜자상품이 따로없었다.


흑발의 자가 아니라 그냥 일반 실장석이라고 쳐도 실장석의 징그러운 번식력의 결실에 우리 집이 잠식되고, 아버지에게 그것 때문에 험한 꼴을 당하기 싫었던 나는, 피임약을 사와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우리 집의 분충놈에게 푸드와 함께 그것을 먹였고, 분충놈은 위장을 풀지 않은건지 아니면 성격이 진짜로 순딩이인건지 몰라도 시키는대로 약을 잘 먹었다. 그렇게 1년간 피임약을 먹이는 동안, 놈은 단 한 번도 새끼를 가지지 않았고, 거기에 불평도 하지 않았다.


1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분충놈은 뜻밖에도 '분충' 호칭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사고를 치지 않았다. 이런 게 떨이처리가 되서 싼 값에 아버지가 사올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운이 따라주었기에 가능했다는 걸 나는 분충놈과 1년을 보내면서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물론 허약하기 짝이 없는데다가 여러모로 모자라기 그지없는 신체구조를 가진 실장석인만큼 그 분충이 집안일에 보템이 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내가 매를 들지 않아도 푸드를 정량만큼 흘리는 일 없이 먹고, 운치도 화장실에서 알아서 잘 보고, 뒷정리도 싹싹 잘 하고, 내가 간단한 지시를 던지면 할 수 있는 만큼 해내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자기 옷도 알아서 빨아입을 정도로 괭장한(?) 놈이었기에, 나는 속으로는 분충이라 부를지언정 겉으로는 '분충' 이 아니라 아버지가 대충 지어준 이름인 '하나다(花田 = 꽃밭(...))' 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편 저 분충을 언제쯤 버릴까 했던 아버지의 태도도 꽤나 달라졌다. 내게는 여전히 무심했지만 가족에겐 무심해도 자기 개나 고양이는 예뻐서 어쩔 줄 모르…까진 아니고, 헐값에 떨이상품으로 받아와서 기대도 없었던 '물건' 이 의외로 자신의 말도 잘 듣고, 온순하고, 개기는 법도 없고, 뒷처리도 알아서 잘 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자 (정작 길어야 일주일 중에서 일요일, 혹은 토요일 하루 정도였지만) 나름 마음이 움직였는지, 나한테는 이름조차 안 부르고 '너 뭐해?' 하는 그 남자가분충에게는 '하나다, 이리 온' 이라고 다정하게 말까지 걸었다.


하나다가 그 남자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다도 남자를 볼 때마다 약간 뻣뻣해졌다가 금방 내색하는 일 없이 아버지 곁으로 뽀르르 가는 걸 보면, 아무래도 놈도 나와 거의 엇비슷한 신세 ─ 저 남자에게서 개기지 않는 게 신상에 좋다는 걸 알기에 시키지 않아도 기는 시늉을 하는 신세라고 나는 짐작했다. 뭐어, 하나다가 우리 집 규칙을 어기지 않아주는 덕분에 우리 집의 분위기는 살풍경하긴 해도 어머니가 살아있을 적처럼 난폭하고 격렬한 광기를 띄지 않았다.


'엄마도 이런 분위기에서 살았다면…좋았을텐데'


어머니가 있던 시절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하나다를 쓰다듬는 아버지를 보는동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고나니 문득 어머니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어릴 적부터 매번 한쪽 뺨이 벌겋게 부었다가 나았다가를 반복하고, 울어서 퉁퉁 부은 눈에 고생과 고민으로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보이는 주름살만 가득한 얼굴의 어머니 ─ 언제나 시종일관 우울함과 절망에 가득한 눈빛만 짓고 있었던 어머니 ─ 아버지의 폭언을 들을 때마다 아니라고 하면서, 그만 좀 하라고 하면서 울던 어머니 ─ 마지막에서조차도 퉁퉁 부은 얼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어머니.


옛날에 어머니가 나와 단 둘이 있을 때 해줬던 이야기에 따르면 어머니는 좋아서 그 남자와 결혼한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스토킹 수준으로 질기게 쫓아다녔는데다가 암묵적으로 위협까지 해댔지만, 당시에는 스토커에 대한 적절한 처벌제도가 마련되지 않아서 결국 어쩔 수 없이 결혼한 뒤로는 의처증에 시달려서 들들 볶이며 살았다고 털어놓는 어머니의 얼굴엔 눈물이 가득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을 매번 눈물로 적셔놓은 남자는, 지금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모른다는듯이 제 애완동물과 온화하게 놀 뿐이었다.


그 모든 것을 마음 속으로 이어보고 난 뒤 밀려온 건 아버지에 대한 역겨움이었다.


'위선자 새끼'


조용히 속으로 욕을 지껄이며, 나는 그 견딜 수 없는 풍경으로부터 벗어나기로 작정했다.



"아빠, 나 나갔다올게."


"어디로 가는게냐? 시가지에서 또 쓸데없이 쏘다니려고? 내가 그런 짓거리는 3학년 끝나고 나서 하라고 했을텐데?"


"그럴리가…그냥 도서관 내 독서실에 가는거야. 공부하게"


공부라는 말이 나오자, 아버지는 살짝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어머니에게 의처증을 보였던만큼 내 학력에 집착하는 저 남자가 내게 온화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면, 그건 내가 자진해서 공부한다고 말할 때 정도이다. 그에게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자, 나는 도서관으로 가기 위해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었다.


[데스우~]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나는 그 울음소리만 듣고도 분충놈이 내게 [잘 다녀오는데스] 하는 투로 인사하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놈이 딱히 나에게 죄지은 건 아니다만, 어머니와 나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온화한 반응' 을 1년만에 따내버린 그 새끼를 생각할 때마다 짜증이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어서, 나는 그놈의 얼굴을 부러 보지 않았다. (이건 아버지도 딱히 신경 안 쓰고 말이다.)




*****



아아, 그날 내가 집구석에 남아있었다면,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었을까. 그 남자가 ─ 아니, 인간이길 포기한 원숭이같은 놈이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자신이 집에 있을 때 내가 밖으로 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더 빨리 알아챘더라면 뭐가 나아졌을까? 언제부턴가 그놈이 피임 취소약을 사다가 하나다에게 먹이기 시작했다는 걸 알았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이제와선 모두, 모두 의미없는 가정일 뿐이다.



*****



세월이 또 흘러서,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전공은 보건행정학과로 했고 (보건계열 공무원 되기 좋다고 해서) 이 대학교에는 내가 아는 친구들이 제법 많이 붙었는데다가, 같은 과에 같은 해 동기로 들어간 친구들까지 만나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았다. 하나다가 온 이후로 한동안 잠잠해지던 아버지가 다시 또 편집증 섞인 광기를 드러내며 내 행동에 이것저것 제제를 걸기 시작했고,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여기에 휘둘리던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집을 나가기로 했다.


솔직히 집을 나간 뒤에는 대책이 없었다만, 옛날부터 가까운 곳에 살면서 날 안쓰럽게 보던 친척 중 한 명이 자기 집에 하숙해도 된다고 했고 (그 집의 사촌들은 이미 다 독립해서 나갔다) 나는 가사일을 도와주고 알바비 중 일부를 친척에게 상납하는 걸로 (그 친척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극구 말렸지만, 나도 염치가 있어서 이것만큼은 해주기로 해싿) 그 날 이후로 집을 빠져나와서 친척네 집에서 하숙을 하며, 나중에 직장을 땄을 때 어디에 묵을지를 알아보기 위해 재산을 모으고, 오피스텔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친척네 집에 처음 하숙하러 갔을 때만 해도 아버지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서 나까지 자기 영역 밖으로 벗어나는게 용서가안 된다는 것처럼 지독하게 전화를 걸어대고, 어쩔 땐 친척네 집까지 찾아와서 소란을 피우고 하긴 했지만 날 맡아준 친척도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어서, 이제 성인이 된 나에게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간섭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으며 부모라도 요즘에는 신고하는게 가능하다고 논리정연하게 아버지를 나무랐다.


그런 공방이 한동안 계속되다가 결국 아버지 쪽에서 뜻밖에도 백기선언을 했고, 그 뒤로 아버지는 다시는 내게 연락히자 않았다. 물론 나도 그 집엔 영영 안 찾아가기로단단히 마음을 먹었기에, 더더욱 학업과 재산 모으기에 매진할 뿐이었다. 그렇게 난 아버지와 사실상 의절했다.


이대로 쭉 엮이지 않았으면 정말 좋았을텐데 ─ 질기고 질긴 인연의 끈은 기어이 다시 한 번 내게 손길을 내밀고, 가고싶지 않은 곳으로 날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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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의 소식을 (별로 듣고 싶지도 않았지만) 듣게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은지 1년 되는 해 ─ 그러니까 26살이 되던 해였다. 내가 없는 동안 하나다와 둘이서 지낸 아버지가 뭐에 홀렸는지 아는 사람 몇몇과 함께 뭔가 사업 비슷한 걸 시도했다가 대차게 말아먹었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모든 재산은 빚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와중에 뭔가 중병에 걸려서 고생하다가 (난 그게 돌아가신 어머니의 복수를 하늘이 대신해준 것이라고 지금도 굳게 믿고있다. 꼴좋다) 결국 훅 간 모양이었다.


당연히 난 그 인간이 싸질러놓은 똥(빚)을 상속받아서 개고생할 생각은 없었기에 장례식을 치른 이후 유산 포기 절차를 밟기로 했고, 법을 잘 아는 친척들과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일을 진행하면서, 이제는 빚의 담보가 된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어디까지고 이 되도 않는 유산들을 정리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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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찾은 집은 여전히 건조하고 울적했으며 살풍경하기 그지없었다. 집 밖에 딸린 창고같은 다용도실부터 집 안까지 여기저기 압류 딱지가 안 붙은 곳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썩을 아버지와의 기억이 훨훨 날아간다는 생각이 더 앞서서, 나는 오히려 이 집이 날아가는 사실에 기뻐했다. 중도에 어머니가 생각나서 울컥하기도 했지만 어머니도 결국 이 집을 떠나서 죽은 걸 생각해보면, 여러모로 이 집은 집이 아니라 올가미같았다는 생각만 더 들었다.


"그러고보니 하나다 녀석 ─ 지금까지 살아있으려나?"


집을 살펴보다가 문득 하나다를 떠올린다. 내가 집을 나가서 아버지와 의절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집에 남아있던 그 실장석. 아버지에게 해가 가면 갈수록 예쁨받았지만 우려와 달리 분충끼 한 번 드러내지 않았던 실장석. 그 집구석에 있었던 시절엔 아주 간단하게 아버지의 애정을 따낸 그 분충을 괭장히 고깝게 봤지만 의절한지 몇 년이나 지난 지금은 그 실장석에 대한 기억도 옅어져있었다. 그리고, 실장석과 관여되는 일이 거의 없는 삶을 살면서 내가 실장석을 부르는 통칭도 '분충' 에서 실장석으로 바뀔 정도로 나의 인식도 누그러져있었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압류딱지가 넘쳐나는 집 안에서 경제생활에 부담이 될지언정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될 실장석이 무사히 있을 리가 없다. 세레브 실장이니 뭐니 하는 상품이라면 팔아치워서 돈이라도 벌 수 있겠다만 하나다는 아버지가 떨이상품으로 팔던 걸 헐값에 주워온 놈이니 그걸 팔아봤자 뭐가 될 리도 없다. 그렇다면 ─ 역시 아버지는 그놈을 버렸을 가능성이 높겠지. 그리고 버려진 하나다는 어딘가에서 죽거나 살거나 했을 것이다.


암, 그럴 것이다.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을 시절엔 애완동물에게 자상하던 사람들도 돈이 없어지거나 아기를 가지면 훅훅 버려버리는 세상이니, 그 인간이라고 다를쏘냐.


'그렇게 일이 돌아가지 않으면 내가 열라 빡칠 것 같기도 하고'


왜 그런 생각이 이제와서 나타났는지는 모른다. 해묵어서 다 해어져가는 옷감쳐럼 느슨해지던 증오와 질투가 뭘 계기로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는지, 나로서는 정말로 알 수 없었다. 하여튼 그 생각을 하며 나는 집안을 돌아다니고, 빚과 관련된 서류들을 찾아서 정리한 후, 아직 제대로 둘러보지 않은 다용도실 쪽으로 향했다.




*****




우리 집의 다용도실은 집 안에 붙어있는게 아니고, 차고 부근에 창고처럼 붙어있다. (사실 창고라 봐도 무방하다) 아버지는 거기에 자기가 주워와놓거나 한 번 충동적으로 사재기해본 물건들을 처박아놓는 버릇이 있었고 ─ 죽을 때까지 그 버릇이 지속되었다면 아마 그 다용도실도 쓰레기들과 잡동사니들로 한가득 차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문고리를 잡고 살짝 열어봤는데 (그 남자는 다용도실 문을 닫는 법이 없었으니까) ─



[데스웃?]


들릴 일 없다고 생각했던 실장석의 울음소리에, 나는 순간 흠칫해서 다용도실 문 뒤쪽으로 물러났다.


"…설마…하나다?"


에이, 그럴리가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긴 했지만, 옛날에 들었던 중학교 때의 사육실장들처럼 째지는 목소리가 아니라 여리여리하면서도 차분해서 잊기가 쉽지 않은, 그 특이한 울음소리는 분명 하나다의 것이었다. 아니, 이 자식 대체 어떻게 여기 있는거야? 그 인간이 빚더미에 눌러앉으면서도 아직도 저걸 매달고 있었다고? 진짜? 대체 왜?


왜, 라는 의문이 나오기도 전에, 하나다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데스으으읏!!! 데스데스!! 데에에엣!!!!] 하고 뭔가 다급한 목소리로 울면서 문 가까이로 뛰어오는 성체실장의 소리와, [테츄!! 테치테치!! 테치치!!!] 하는 자.실.장.들.의. 소리가 문 가까이에서 들리고 있었다.


뭔가 이 문 뒤의 광경을 보면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오한이 삽시간에 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머리가 손에게 이 문을 여는 대신 뒤로 빼든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든 하라고, 그리고 다리에게는 당장 뒤로 몸을 틀어서 집 밖으로 나가라고 간절하게 명령이 아니라 호소를 하고 앉아있었지만 ─ 나는 그 외침을 무시하고 문을 열었다. 왜 그렇게 불길한 느낌이 드는지, 확인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리고, 눈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에?' 하고 멍청한 소리를 한 번 낼 수밖에 없었다.




*****




문 안쪽의 다용도실의 풍경은 내가 기억하는 것과 전혀 달랐다. 집 안처럼 살풍경하긴 했지만 쌓여있는 건 쓰레기가 아니라 두루마리 휴지 여러 개와 깨끗한 물이 담긴 햄스터와 도마뱀 정용 식수통 여러 개(그것도 제법 큰 사이즈), 그리고 실장푸드 大 사이즈 사료 여러 봉지와 간식거리로 추정되는 콘페이토 여러 봉지……그리고 어째 머리가 다 빠진 채로 두건과 앞치마만 두른 채, 예전보다 더 추레해진 몰골을 한 하나다와………자실장들이었다. 흑.발.의. 자.실.장.들.


바뀐 다용도실의 풍경이 주는 감상은 저 멀리로 날려버릴 만큼의 충격을 주는 흑발의 자실장들이 내 발치에서 테치테치니 테츄테츄니 뭐니 하고 씨부렁거리는 것을 신경쓰지 않고, 나는 전보다 몰골이 더 추레해지고 망가진 하나다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낯선 이(?)가 자신이 사는 방의 문을 열고 자신을 쳐다보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며 경계하던 하나다가, 나를 알아보았는지 옛날의 버릇대로 고개를 꾸벅 숙인다. 그러나 녀석은 ─ 어딘지 불안해하는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내 발치에서 뛰노는 자신의 새끼들을 어떻게든 제 품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데, 데스우…데스데스…]


마침내 모든 자실장들을 자기 품으로 끌어들인 후, 하나다는 뭔가 사죄라도 하는듯이 죄송하다는 눈빛을 지은 채로 뭐라 지껄이면서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나는 ─ 하나다의 그 영문모를 사과를 받아줄 정도의 정신머리가 아니었다.


내가 집을 나간 뒤로는 집에 피임약을 줄만한 사람이 없었을테니 하나다가 피임을 안 해서 새끼를 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까진 대충이니마 계산해뒀던 나지만, 설마 이놈이 보통의 새끼도 아니고 인간과 교미했다는 증거인 흑발의 자실장들을 다섯 마리나 까놓은 채 여기다가 살림을 차리고 살고 있을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오로지 그 생각에 사로잡혀서 하나다의 두 볼이 엄청나게 홀쭉하다는 것과 머리털이 몽땅 다 뽑히고, 예전의 사육실장복 대신 구질구질한 앞치마만 입은 상태라는 것 ─ 마지막으로 옛날의 우리 엄마처럼 하나다의 몸 여기저기에 익숙한 생채기가 나 있는 걸 쉽게 눈치채지 못했다.


'이건 대체…뭘 어떻게 하면 일이 이따구로 돌아갈 수 있는거지? 막장드라마 작가가 오늘부터 운명에 대한 각본을 써보겠습니다!! 하면 이렇게 되는건가?'


그 생각을 하면서, 나는 하나다에게 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고, 내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하나다와 눈을 맞추며, 짓씹듯이 내뱉었다.


"야, 하나다"


[데, 데슷!!!]


"너 ─ 이 시꺼먼 머리의 새끼들 말야…어떻게 된거냐? 그리고 이 다용도실 풍경은 또 뭐야? 하도 오랜만에 왔더니 너무 많이 바뀌어있어서 도통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고 아버지란 작자는 병 걸려서 죽었다고 하고…상황이 너무 이상하게 꼬여있어서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가는데……


너 뭔가 아는 거 있냐? 넌 내가 집 나간 후에도 그 남자랑 같이 살았으니까 ─ 아는게 없을리가 없을텐데에……?"


내가 일부러 말꼬리를 늘였다가 흐리자, 하나다가 더더욱 불안해진 눈초리로 나를 살펴보면서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 동안 나는 스마트폰의 랑갈 앱을 키면서, 이 이해 안 가는 반응을 보여댐과 동시에 이 괴상한 사태의 실마리를 쥐고 있을 실장석을 향해, 위협하듯이 딱밤을 때리려는듯한 자세를 취했다.


옛날에 별 악의없는 위협으로 이 자세를 취하면 뭐든 하려들었던 하나다니, 이 자세는 분명 먹히리라는 자신이 있었고 ─ 그건 사실이었다. 어느세 놈의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랑갈에 의해 인간이 알아보기 편하게 변역되고 있었으니까.



[마, 말하자면 긴데스…작은 주인사마(하나다는 날 작은 주인사마, 아버지를 큰 주인사마라 불렀다)……자, 자들에게는 아무 자, 자, 자, 잘못도 없으니까…이, 이야기를 다 듣고…와타시를 어떻게 해도 좋으니까……자들만은 제발 ─ ]




*****




들으면서 이 실장석, 아니 이 분충이 뻥을 까는게 아닌지 여러 번 생각했지만 제아무리 좀 특이한 케이스인 하나다라고 해도 결국 실장석 ─ 실장석이 행복회로를 굴려서 나오기라 하기엔 하나다가 들려준 이야기는 지독한 이야기이고(하나다의 현 몰골이 그걸 증명했다), 하나다놈이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지어낼 정도의 지능도 없다는 건 내가 가장 잘 아는 사실이니, 난 결국 하나다가 털어놓은 황당무개하면서도 지저분한 사연이 진상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아버지가 아니고 그 쌍놈의 짐승새끼의 격과 함께 죄 없는 나의 '격' 이 같이 끌어내려지는 느낌이었지만 들려달라고 한 건 나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




내 아버지가 예전부터 의처증을 지니고 있어서 그것 때문에 병적으로 어머니를 괴롭혔왔다는 것, 그것 때문에 어머니가 집을 나갔다가 모종의 사유로 익사체가 된 체 발견되었다는 것은 미리 이야기를 했으니 알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 이것도 선술한 거지만 ─ 그 뒤로 인간 여자한테 관심을 들이지 않았는데, 이유는 그놈의 인간불신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어머니에 대한 병적인 집착에서 싹을 틔운 의처증은 어머니가 죽어서 되돌아온 순간 폭발해, 의심을 넘어서서 불신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그 과정과 결말은 순전히 아버지의 병폐적인 성격 때문에 일어난 인재(人災)에 가까웠지만 결코 자신을 원망하지 않고 탓을 남에게만 돌리며 타인을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의심과 불안을 가라앉히려드는 고약한 성격의 아버지에게 있어서, 더 이상 인간은 믿을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대상으로 낙인찍혔다. 믿을 수는 없어도 통제 가능한 대상이라면 ─ 나 정도가 한계였고.


그런 아버지였지만 그래도 사회적 동물이라는 본질 탓인지 아버지는 '믿을 수 있는 소통상대' 를 한편으로는 갈구하고 있었고(...라고 하나다한테 아버지 자신이 그렇게 말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다름아닌 실장석이었다.


물론 실장석은 대다수가 바보멍청이에 지독한 분충성을 지니고 있고 대부분이 잘해주면 밑도끝도없이 기어오르려드는데다가 정신나간 망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거의 평생동안 주구장창 전개하도록 해주는 행복회로의 빨을 빌어서 온갖 병신같은 망언을 줄줄이 늘어놓는게 특기인, 어딜봐도 쓰레기같은 놈들이지만 신기하게도 인간의 말을 그럭저럭 알아먹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허나 인간은 아니라는 점 ─ 결정적으로 통제하기 쉬워보인다는 (풉) 그 면모가 아버지에겐 나름 맘에 든 모양이었다.


사람을 온전한 사람으로 대하지 못하고, 자신이 타인에게 가할 수 있는 통제력에 집착하며 밑도끝도없이 타인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아버지에게 있어서, 사람보다 만만하면서도 어머니가 사라진 지금 어머니에게 해소하던 욕구를 대신 풀어줄 대상이 될 대상으로서 실장석은 '적합해보였던' 모양이다.


당연히 통상의 실장석들이라면 아버지의 뜻에 맞춰줄 리가 없다. 중학생 때 학교 당번활동을 하면서 다뤄본 사육 자실장만 해도, 그 몇 개월 살지도 않은 놈들의 조그마한 머리에서 온갖 징그러운 분충성 발언이 자아내지고 밑도끝도없는 , 그러면서도 결코 내려가는 일따윈 없는 욕망의 상한선이 펼쳐진다.


그놈들은 조금만 쓰다듬어줘도 [이 닝겐이 와타시에게 메로메로된테치? 그렇다면 더욱 메로메로되어서 와타시에게 복종하는테치!! 어이 쿠소닝겐!! 빨리 와타시니 스시와 콘페이토를 바치고 세레브한 드레스를 입혀주고 아와아와를 시켜주는테치!! 빨리빨리 하라는테치!!] 하는 식의 점입가경식 발언을 내놓는게 특기인 놈들이다. 그러니 그런 '일반적인' 놈들을 만났다면 아버지는 빨리 실장석이 자신의 그런 어그러진 탐욕을 풀 수 있을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다른 학대대상을 찾던가 했겠지만 ─ 문제는 아버지의 최초의 실장석이 하나다라는 점이었다.


하나다는 다른 실장석들과 비교하면 훈육이 잘 되서 개념이 그럭저럭 박혀있는 편이었고, 성격도 제법 순한데다가 브리더에게 배운 철칙을 거의 본능 수준으로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여느 실장석들처럼 인간들 눈에 거슬리거나 하는 짓은 절대로 일삼지 않았다. 또한 브리더에게 '인간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라' 라고 끝없이 교육받아왔기에 하나다는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아버지가 자기를 앉혀놓고 ─ 마치 옛날에 나의 어머니에게 했던 것처럼, 어그러진 감정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걸 거의 반강제로 듣는 신세가 되었고, 그러다가 결국 어머니의 대타가 되었다는 모양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만, 아버지는 하나다를 애정의 대상이라던가 대다수의 실장석들이 꿈꾼다는 '남편사마의 정실' 같은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 인간이 원하는 것은 결국 예나 죽기 직전이나 「자신의 말을 잘 듣고, 배반하지 않고, 마음대로 어그러진 욕구를 풀어낼 수 있는 '약자(弱者)'」 정도였을 뿐이다. 결혼 전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집착에 굴복했고, 결혼 후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폭정과 의심암귀에 굴복하며 살아왔던 것처럼 하나다도 어머니의 대용이 되어, 겨우 그런 역할을 이어받았을 뿐이었다.


인간인 어머니조차도 그 짐승 아래에서 제 권리를 주장 못하고 눌려살다가 그렇게 죽었는데 하물며 우길 권리조차 없고 인간은 커녕 사마귀한테도 지는 실장석이,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문제시되는 인간인 아버지를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결과 하나다는 내가 집에서 없는 동안 아버지의 감정의 쓰레기통 노릇을 하고, 보이지 않는 학대를 당하고, 그러다가 점점 어머니와 하나다의 역할을 필요 이상으로 겹쳐보게 된 아버지가 단순 학대를 넘어서서 (참고로 머리칼을 뽑힌 건 내가 집을 나간 후라고 한다) 직스라는 위험한 영역에까지 들어가면서, 결국 지금 이 다용도실 안에 있는 새끼들을 낳는 지경까지 다다른 모양이었다.


뭐, 그래도 갖고놀기 재미있는 물건을 뺏기는게 싫어서였던지 그 작자는 이렇게 다용도실 안에다가 하나다네를 숨어서 살게 해주긴 했다고 하지만 ─ 애정이라기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장난감이 도망치지 않게 하는 우리였던 거다, 이 다용도실의 진짜 용도는.



[자는 몇 번이고 가진 적 있지만…큰 주인사마가 임신 도중에 전부 죽게 만들어버렸는데스…이번 자들 빼고……]


[주인사마는 와타시의 자들이 든 배를 걷어차면서 즐거워했는데스…웃고 계셨는데스…지금은 계시지 않는, 안주인님이랑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면서…안주인님에게도 이렇게 해보고 싶었다면서…와타시를 때리다가 그걸 깨달았다면서……웃고 계셨는데스……이번의 자들도 죽여버리겠다고 하셨지만 주인사마가 그 전에 쓰러져버리는 바람에 ─ ]


"너와 니 새끼들은 목숨을 건졌다 이거군"


[하이데스……브리더사마가, 인간이랑 직스는 절대로 해서 안 될 짓이고, 흑발의 자도 절대로 가지면 안 되는 것이라고 했지만…죽일 수 없었는데스……흑발의 자가 다른 주인사마타치께 민폐라고 브리더사마에게 몇 번이고 배웠는데도…와타시는…죄송한데스…!!!]


오로롱, 오로롱, 오로롱 하고 감정이 북받쳐오르는듯한 울음소리를 내며 하나다가 울고 있었다. 브리더에게서 직스도 흑발의 자도 모두 부정적인 것이라고 단단히 훈육받아온 이 녀석은 아마 억지로 자를 만들고 낙태당하고 하면서, 이번에 자를 낳으면서도 아직도 본능 수준으로 새겨진 훈육을 잊지 않은 채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 죄책감은 어디까지고 브리더가 심어놓은 '룰' 때문이지, 인간처럼 수간이 주는 사회적 악영향이라던가 등등의 복잡한 건수들을 고려해서 느끼는 죄책감은 아니었지만 ─ 어쨌든 하나다의 몸에 난 흔적들과, 나중에 이 녀석을 들어서 살펴본 총배설구에 난 학대의 흔적을 본 나는 하나다의 말이 다시 한 번 사실임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는 그것 때문에 토해버리고 싶었지만.


역겨운 분충이라고 욕하면서 얼굴이 완전히 뭉개질 때까지 때리고픈 충동도 뭉개뭉개 피어올랐지만 솔직히 말해서 사람으로 치자면 정신병자에게 몇 년씩이나 시달려온 성노예한테 '당한 것도 죄니까 니가 책임져!' 하면서 때리는 꼴이 된다. 허나 불쌍하다고 살려둘 수만도 없는게, 잘못하다가 이 새끼들이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되면 ─ 내 입장도 망한다. 아무도 모르는 이 간극이 유지되는 동안, 나는 하나다와 새끼들을 조용히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하나다가 학대받은 동물이니 뭐니 해도 ─ 어찌보면 나와 이복자매 신세가 된 흑발의 자를 낳았다는 생각만 하면 일단 역겨움이 가장 앞섰고.


그 와중에도 하나다는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서 어쩔 줄 몰라하며 어리둥절해있고, 자실장이면서도 이목구비라던가 체형이라던가가 인간을 묘하게 닮은 흑발의 자실장들은 ─ 여느 자실장들과 다름없이,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겁도 없이 내 바지를 톡톡 치면서,[큰닝겐 무찔렀는테치!!!] [테프프, 오네챠만 하다니 치사한테치! 와타시도하는테치!!!] 하고 지껄이고 있었다.


이 자식들이 지금 하나다의 이야기가 뭔 소린지 알아먹었다면 날 오네챠라고 불러댈테니, 못알아먹고 바보짓이나 하고 앉아있는게 다행이겠지. 그리고 난 이 자식들을 법적으로 가족으로 인정하라는 선고가 내려와도 절대로 인정을 못할거고.


지금이라도 당장 잔혹하게 발길질을 해서 자실장들을 죄다 다진 고기처럼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흑발실장이 다른 실장석에 비해 몸이 좀 튼튼하다고 해도 어짜피 인간의 진심을 담은 발길질 한 방에 즉사당하는 건 변함없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내게 유전자 한 쪽을 제공해주고 몸의 반신을 준 빌어먹을 짐승새끼가 싸질러놓은 이 오물들을 지금 당장 다 밟아주고 싶다.



솔직히 실장석에 대해 무지하거나, 유니크한 걸 좋아하는 괴짜들이 아닌 한 애호파나 애오파도 실장석계의 흑역사 치부하며 경멸하고 더러운 것으로 볼 흑발실장들이니, 이놈들이 인간의 눈에 띄는 한 절대로 살아남기는 그를 것이다. 게다가 옛날에 들은 바로는, 흑발실장은 그 흑발이 인간에게 사랑받는다는 증거로 여겨져서 들실장들 사이에서도 미움받는다 했다. 결국 이놈들은 인간에게도 실장석들에게도 (아마 자기내들 모친 빼곤) 미움받을 운명인 '영원한 미운오리 새끼 겸 낙동강 오리알' 인 것이다.


그러니 ─ 오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어찌보면 존속살해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모를 때 재빨리 내 손에 죽임당하는게 더 자비로운 결말일수도 잇다.



이 새끼들에겐 태어난 죄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인간의 자존심과 격인지 뭐시긴지 하는 것이 이 새끼들의 존속을 용납치 않는다. 사회적으로도 까발려지만 나도 같이 매장당한다. 직스파의 딸이라니, 난 그딴 소리 듣고싶지 않아!!! 그것도 너희들 때문에 그딴 소리 듣게 되는 상황에 처하고 싶지도 않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정신병자에게 몇 년간 시달린 하나다도 불쌍하지만, 결국 이 녀석도 살아남았다간 두고두고 내 인생의 오점이자 가족 관련 흑역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된다. 직접적으로 향할, 정당한 악감정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 녀석이 나는 ─ 역시 싫었다. 이 녀석이 낳은 흑발들과는 좀 다른 이유로, 난 역시 이 녀석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걸 보기 싫었다.


과연 험악한 죽음이 좋을까, 조용한 죽음이 좋을까. 난 여기서 여러 번 갈등했고, 이딴 걸 숙제라고 남겨주고 떠난 빌어먹을 부친이란 이름의 쓰레기를 증오하면서 몇십 분을 그 자리에서 까먹었다. 이윽고, 한 시간 남짓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결심했다.



"하나다, 나 잠시 다녀올게. 애들이랑 같이 나가지 말고 있어. 나갔다간 ─ 벌 줄거야"


[하, 하이데스. 모두 이리로 오는데스]


[큰 닝겐상 가는테치? 바이바이테치!!]


[바이바이테치!!]



어디서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 아마 하나다가 가르쳐줬겠지 ─ 바이바이라고 인사하며 작은 손을 붕붕 흔드는 흑발의 자실장들과, 추레한 몰골을 한 채로도 나에게 정성껏 인사하면서 다용도실 안으로 새끼들을 챙기고 들어가는 하나다를 본 나는, 다용도실의 문을 꽉 닫고, 이놈들이 혹여나 문을 열고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가, 5번쯤 그 짓을 하고 나서야 다시 앞만 보고 걷기 시작했다.



집에서 4분 정도 걷자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나왔고, 거기서 10분 정도 더 걷자 시가지가 나왔다. 그 시가지에는 아마 아버지가 하나다를 사왔을 ─ 그리고 고등학생 시절 내가 하나다의 피임약을 사러 들렀던 예의 그 실장석 샵이 나왔다. 아직도 운영이 잘 되는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게 몰려있는 그 가게 안쪽에서 줄을 선 나는, 드디어 카운터 앞까지 다다르자 주인 아저씨에게 조용히 말을 꺼냈다.


"실장석 안락사용 코로리랑……─ 주세요."


주인은 날 못알아본 것인지, 그냥 평범한 학대파라고 생각했는지 "학대파용 카운터는 저 안쪽에 있고, 말씀하신 물건은 저기서만 결제 가능합니다" 라고 조심스럽게 속삭여줬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 안쪽에 있는 검은 카운터로 가서, 원하던 물건을 구입한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는 충견 하치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바보같이 내 말을 얌전히 들으며 기다리는 그 녀석들이 있었다.



영원히 잘 자, 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하나다에게 먼저 실장석 안락사용 코로리를 먹였고 ─ ……




*****




그날, 내가 살았던 집 ─ 이제는 빚의 담보가 되어 어디로 넘어갈지 모르는 집에 실장석들이 살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실장푸드라던가는 모두 내가 따로 은밀하게 처분해버렸고 (누구 줬다가 사정 역추적당하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실장석 안락사용 코로리를 먹은 하나다와 흑발 자실장 5마리는 그렇게 고요하게 생을 마감했다. 안락사용으로 만들어진 만큼 통증 없이, 편안한 꿈을 꾸는 것처럼 저승으로 보내버리는 약을 내가 그놈들에게 줬다는 것 자체가 ─ 내가 놈들에게 배푸는 위선이자 자비였다.


더 이상 아무 고통도 느끼지 않을 시체들 위에, 내가 실장석 샵에서 사온 실장석 전용 용해액을 뿌렸다. 보통 흔적 없이 실장석 시체를 처리하고 싶을 때 주로 쓰는 용액이라고 하는데, 사실 난 그냥 시체를 흔적 없이 처리할 수 있는 도구 주세요, 라고 말한 것 뿐이었고 정말 이런 편리한 물건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치도 않았지만 정말 존재했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용해액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마당의 흙 위에 놓여진 채, 잠든 것처럼 누운 6구의 실장석 시체는 용해엑을 맞자마자 설탕이 물 속에 녹아내려가듯이 천천히 그 형체를 잃고 허물어지기 시작해, 이윽고 흙 위에 고인 물처럼 되었다. 나는 그 흔적을 감추기 위해, 다용도실 옆에 구비된 삽을 찾아다가 몇 번이고 그 6구의 시신이 녹아내려 남은 흔적 주변의 땅을 갈아엎고 다지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30분을 또 잡아먹은 후, 나는 그 집을 떠났다.



"뭐, 안녕이다. 하나다 ─ "


넌 분명 나를 원망하겠지.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였어,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




하나다와 그 딸내미들을 죽이고 온 후, 나는 스마트폰 속에 있던 아버지의 사진을 찾았다. 그게 왜 거기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의 사진 위에 스마트폰 터치팬으로 낙서를 하면서, 사진을 완전히 괴물로 바꿔놓고 낄낄거리다가 그 사진을 삭제해버렸다.


이제 내 스마트폰에, 더 이상 아버지의 흔적은 남지 않았다.



- 完 -



+ 솔직히 일반 실장석보다 더 험한 취급을 받을게 흑발실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으로 치자면 인간이랑 개가 교배해서 새끼 낳았다는 거랑 거의 비슷한 소리잖아요. 여러모로 무서운거죠.


+ 나중에 쓸 소설의 흑발실장들도 분명 험난하게 가겠지요. 이번 편은 학대물이 아니어서 좀 온화하게 죽을 수 있었지만. 



[해설 + 캐릭터 설명]


나(쿠로카와 아키라)

여성, 편부가정 출신. 의처증 외에도 여러모로 문제 많은 성격의 아버지와 동거하다가 결국 의절. 일반인(학대도 애호도아님). 아버지의 빚을 처리하기 위해 집에 들려서 뭘 좀 찾다가 아버지 생전에 기르던 실장석 하나다와 하나다의 자식(흑발실장들)을 만나고, 이들의 처우를 고민하다가 결국 안락사시킨 후 흔적을 없에버림.

자신과 어머니에게 부정적인 존재이기만 했던 아버지를 증오하고, 아버지에게 자신보다 쉽게 애정을 받았던 하나다를 미워했지만 하나다의 속사정을 알고 좀 불쌍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다와 하나다의 자식들이 자신의 인생의 오점이라 생각해 죽여버리는 걸 택했다.




'나' 의 아버지

의처증, 편집증, 강박관념, 과도한 상황통제욕구, 고압적이고 폭력적인 기질이 많은 문제 많은 성격의 남자. '나' 의 어머니와 결혼하기 전에 그녀를 스토킹하면서 괴롭힌 끝에 결국 결혼을 승낙받고 이후 의처증이 도져서 어머니를 괴롭히다가 어머니가 죽게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불신에 빠져서 딸만 괴롭히다가 실장석으로 타깃을 바꿨는데 그 대상이 하나다.

하나다에겐 애정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그건 가식이고 실상은 그냥 '나' 의 어머니의 대타로 삼아서 괴롭히기만 했다. 직스도 직스파여서 했다기보다는 어느 시점부터 진행된 동일시에 빠져서 그런 것에 가까우며, 흑발의 개념은 모르나괴상한 가학성에 눈떠서 하나다의 자식들을 낙태시키면서 내면의 존속살해욕구도 깨운 정신병자. 다만 이상한 투자에 매진하다가 망하고 병 걸려서 죽었다. 여러모로 사회의 암덩어리.



'나' 의 어머니

아버지에게 시달리다가 집을 나갔고 이후 익사당한 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자살로 처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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