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카오스 럭키짱 천일모험기를 능가하는 진정한 판타지 실장석 참피 소설 실장석과 환상 20화 : 수레와 실장석
“샤아아아아아악! 샤아아아아아악! 뎃쌰아아아아아악!”
“경과시간 31시간, 흡혈귀화는 완벽히 끝났습니다.”
“쌰아아아아아아아아악!”
에립마브에게 물린 실장석은 12시간 만에 체온조절 능력을 잃어 저체온증으로 죽었고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사후강직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경련하더니 그 경련이 점점 커지다가 미친 듯이 소리지르며 희번덕한 눈을 번뜩 떴다. 날뛰기 전에 팔다리를 쇠사슬로 묶어놓아서 난동은 부릴 수 없었지만 딱히 묶어놓지 않는다고 해도 소리만 엄청 클 뿐 그리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러트너는 저 실장석을 그냥 저대로 때려보고 싶었다. 때릴 수도 없는 에립마브 대신으로 죽지도 못 하는 몸 차라리 죽기를 바라고 싶을 만큼 때리고 싶었다. 귀에 언어를 꽂고 있었지만 흡혈귀 실장석은 굳이 언어 없이도 해석할 수 있는 문장만 내지르고 있었기에 언어는 금방 귀에서 빠졌다.
창백한 피부, 뾰족한 송곳니, 희번덕한 눈 말고는 실장석과 다를 것이 없었다. 죽으면서 몸 안에 들어있던 모든 걸 쏟아내고 죽었으므로 배설을 할 여지도 없었다. 옷과 머리칼도 에립마브가 진작 다 뜯어발겼다. 저 미쳐 돌아가는 습성만 빼면 지금의 흡혈귀 실장석이 살아있는 실장석보다 훨씬 나았다.
“이제 이 녀석도 마법을 쓸 수 있을까요?”
“못 써요.”
“사실 흡혈귀 자체는 흑마법이 뇌를 지배하여 움직이는 산송장이기에 마력은 넘쳐흐릅니다만, 마력을 다룰줄 아는 흡혈귀는 특이한 편입니다. 마력을 다루기 위해서는 마력을 다룰 수 있을 만큼 이성이 멀쩡해야 하는데 다들 저렇게 이성이 나가버리니 말입니다. 그 흡혈귀는 기록말살된 특수한 방법을 썼을 겁니다.”
피시스에는 우선 실장석에게 강철 입마개를 씌웠다. 그리고 수술용 칼을 가져와 실장석의 팔에 대고 살짝 그어보았다. 날이 닿기만 해도 갈라질 것 같은 피부는 뻣뻣하고 단단하여 흠집도 나지 않고 수술용 칼의 날만 망가졌다. 그래서 유리막대를 성수 병에 끄트머리만 담갔다 빼내어 한 방울을 팔에다 떨어트리니 흰 거품이 부글부글 일었다. 차가운 불과도 같은 성수에 실장석이 거세게 날뛰려 했지만 성수를 떨어트리기 전부터 날뛰고 있었으므로 실장석의 움직임은 전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성수가 자국을 남긴 자리에는 이미 무뎌진 수술용 칼날도 잘만 들어갔다.
“흡혈귀화 확인 됐고, 그럼 두 번째 실험으로 넘어가죠.”
“두 번째 실험은 뭐죠?”
“마법사들이 제일 좋아하는 전투력 실험이죠.”
“나도 좋아하는데!”
괴생물학파의 실험실에서 실장석 보관층으로 흡혈귀 실장석을 데리고 내려갔다. 언제나 실장석의 악취로 가득한 층에 도착하니 흡혈귀 실장석은 그 악취에 흥분하여 더더욱 사납게 소리지르기 시작했고 주위의 다른 실장석들은 그런 실장석을 보면서 예의는 어디다 팔아먹은 분충이냐고 욕들을 마구 했다. 흡혈귀 실장석의 괴성이 시끄러운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수천 마리의 실장석들이 욕하는 소리에 비하면 노랫소리와도 같았다. 피시스에는 일단 10마리 정도 제일 덩치 큰 실장석들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
[데기잇, 저 미친 분충은 조용히도 할 줄 모르는데수?]
[데프프프, 와타시가 저 자를 조용하게 만들어주겠는데스!]
[눈깔을 뽑아버리고 그 구멍에 마라를 박아버리면 가버리는 걸 참지 못해서 조용해질 것인데스!]
[와타시는 저 자의 혀를 뽑아버리고 그 혀로 총구를 마사지하는데스!]
바닥에 흡혈귀 실장석을 내려놓자 10마리의 실장석들이 모여서 바로 흡혈귀 실장석을 향해 마구 주먹질과 발길질과 이빨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눈알을 뽑아보겠다고 눈알에 주먹을 날리는 실장석도 있었는데 흡혈귀 실장석의 몸에는 멍은 커녕 생채기도 하나 나지 않았다. 외려 때렸던 실장석들이 이빨도 깨지고 손도 아파서 물러나고 만다. 실장석들 모두 예상 못한 전투력에 다들 머리를 맞대고 술렁였다.
[데기잇, 이 자는 뭐인데수, 온 몸이 통나무같은데샷!]
[데뎃! 무림에 몸을 담은 실장석이 분명한데스. 금강불괴 무공을 익힌데스! 데프프프, 하지만 제 아무리 금강불괴라 해도 와타시의 실장권법을 이길 수는 없는데스! 와타시의 실장권법! 와타시의 세레브함으로 분충은 느껴볼 수 없는 황홀경의 환상을 느끼게 하는데스! 분충은 죽는데스!]
[데엣, 중생들 앞에서 함부로 무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이 자가 먼저 잘못한 것인데스! 이 분충 사파가 먼저 강호의 도리를 나락으로 떨어트려놓은데스! 와타시도 감춰놓은 무공을 뽐낼 수밖에 없는데스!]
때려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이번엔 관절기를 시도했다. 다리나 무릎을 잡고 꺾을 수 없는 방향으로 꺾거나 부러트리려고 마구 힘을 준다. 모가지를 잡고 비틀어버리려는 실장석도 있다. 그러나 쇠사슬로 묶어놓은 실장석의 팔다리는 그 어느 방향으로도 꺾일 수 없도록 고정되어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꺾는 실장석보다 꺾이는 흡혈귀의 힘이 더욱 강해서 팔을 잡아봤자 팔을 잡은 실장석이 휘둘릴 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목을 꺾으려던 실장석은 손을 잘못 댔다가 흡혈귀에게 손을 물리고 말았다.
[데갸아아앗! 이 분충이 미친데수! 와타시의 섬섬옥수를 더럽힌데스!]
[데프프프프, 분충 얼굴에 손 씨를 들이민 오마에가 멍청한데스.]
“어, 쟤 물렸는데요?”
“좋았어, 너도 실험체 당첨. 쟤는 실험실에다가 격리시켜버리고 한 마리 더 꺼내와.”
[데에에에엥, 데에에엥, 와타시가 다친데스! 어째서 아무도 와타시를 도와주지…… 데? 똥노예! 오마에 늦는데스! 와타시가 다치기 전에 와서 미리미리 손을 써두지 않고 어디서 늑장을 부린데스! 어서 와타시의 세레브한 몸에 흠집을 낸 저 분충을 처단하고 와타시의 상처엔 스시를 발라달란데샷!]
손을 다친 실장석은 마법사들의 손에 들려 실험실로 끌려간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다른 실장석들이 크게 동요했다. 그리고는 자기들도 흡혈귀 실장석의 입에다가 손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흡혈귀 실장석은 그때마다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손을 와구와구 물었고 실장석의 피맛을 보면서 더더욱 기운차게 날뛰었다. 곧 철창에서 꺼낸 10마리 실장석들은 모조리 흡혈귀에게 손을 물렸다.
[데, 뎃! 데스데스! 데갸아아아앗! 엄청 아픈데스! 와타시도 다친데스! 와타시도 스시를 발라주는데스!]
[와타시도 다친데스!]
[와타시도 아픈데스!]
“이 놈들 왜 이래? 한두 마리만 있으면 되는데. 얘네들은 소각로에 넣어버리고 10마리 더 꺼내와.”
[데프프프, 데스뎃승~. 와타시도 이제 사육실장데스웅~. 멍청한 분충 덕분에 와타시의 삶이 더 윤택해지는……. 데, 데? 이건 출구가 아닌데스, 똥닌겐 노예! 출구가 뭔지도 모르는 병신데수? 뎃, 데프프프, 스테이크 굽는 화덕인데스웅? 화끈한 불내가 느껴지는데스웅~. 스시 대신 스테이크 요법도 와타시의 세레브한 몸에 잘 받는데, 데? 뎃 데쌰아아아아아아아아악! 데보오오오오오오오오! 뜨거운데스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데프프프프, 분충스테이크나 되란데스. 오마에의 더러운 육신으로 만든 스테이크는 와타시가 맛있게, 뎃쌰아아아아아아아악! 맛있게 되어버리는데샤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앞에서 한 마리가 타오르면 뒤에 있는 실장석이 타오른 실장석을 비웃다가 자기도 똑같이 타오른다. 그러기를 마지막 실장석까지 똑같이 반복한다. 이 모든 과정을 쿱이 귀에 물고기를 꽂은 채로 기록하고 있었고 물고기 없이도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요정은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빛과 열의 신 반홈의 소각로에서 잿더미 하나 남지 않고 깔끔하게 타버린 실장석들은 연기가 되어 굴뚝을 타고 올라가 이 세상의 공기가 되었다.
“끅끅끅끅…….”
“어쩜 요정 님은 웃는 것도 이렇게 매력적이실까.”
길드 마스터의 그 말 한 마디에 요정은 바로 정색했다.
새로 꺼낸 10마리의 실장석들도 다들 달려들어서 흡혈귀 실장석의 입에 손을 넣으려고 한다. 그러기 전에 피시스에가 염동력 주문으로 흡혈귀 실장석을 높게 들어올려 닿을 수 없는 위치까지 올려버린 다음 길드 마스터에게 쇠사슬을 풀어줄 것을 부탁했다. 길드 마스터의 가락지가 빛나며 실장석의 쇠사슬을 풀어내니 팔다리가 실장석의 속도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빠르게(그래도 인간보다는 느린)속도로 파닥거린다. 그 팔다리를 염동력으로 잘 붙든 채로 바닥에 내려놓자 마법사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물리차단막을 펼쳐 사람 세 명은 세로로 누울 수 있는 지름의 울타리를 만들어냈다.
“틈새 없게 조심해. 실장석한테 물려서 흡혈귀 되기는 싫잖아.”
“그래서 저희가 알아서 조심하잖아요.”
“좋아, 준비 됐지? 셋에 푼다. 하나, 둘, 셋!”
[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데? 데게복!]
흡혈귀 실장석은 풀려나자마자 제일 가까운 실장석에게 뛰어들어 면상에 주먹을 박았다. 흡혈귀의 흑마법으로 통나무같이 튼튼해진 육체와 강인해진 근력과 이성을 잃어 한계치를 뛰어넘은 힘조절이 더해지니 흡혈귀 실장석의 주먹은 다른 실장석의 얼굴을 말 그대로 으스러트려놓았다. 주변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오오, 소리를 내며 감탄한다. 얼굴이 으스러진 실장석이 짧은 단말마와 함께 쓰러지고 흡혈귀 실장석은 그 실장석의 목 구분 없는 모가지를 마구 물어 뜯어 사방에 피를 흩뿌리면서 야만적으로 피를 빨아댔다. 피가 양 눈에 튀었지만 이미 죽은 몸이기에 새로운 새끼를 낳는 일은 없었다. 러트너는 그 점을 아쉬워했다.
동족답지 않은 동족의 모습에 다른 실장석들이 심한 불쾌감을 느껴 즉각적인 응징을 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실장석은 식사시간에 방해받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생물이며 흡혈귀가 되었다고 그런 습성이 더하면 더했지 사라질 리는 없었다. 흡혈귀 실장석은 다른 실장석들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자마자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런 적대감은 실장석들을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실장석들은 동시다발적으로 흡혈귀 실장석을 덮쳤고 피바람이 몰아쳤다.
[데, 데갸아아아아아악!]
[데에에에에에에에엥!]
[데겟, 봇, 보호오오오오오오오…….]
“우와, 미쳤다! 미쳤다!”
흡혈귀 실장석은 팔을 휘둘러 한 마리의 머리통을 으스러트린 다음 뒤따르는 실장석의 눈알을 물어뜯고 씹어먹었다. 순식간에 두 마리가 죽어버리니 다른 실장석들이 덤비길 주춤했지만 흡혈귀 실장석에게 더 많은 공격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곧장 다른 실장석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리고 바닥에 머리부터 내다꽂으니 그 충격에 안구가 안와에서 튀어나오고 위턱과 아랫턱이 맞물려 혀가 잘려나갔으며 으스러진 두개골에서 뇌수가 새어나왔다. 다음 실장석은 흡혈귀 실장석이 양주먹으로 내려치려하니 팔로 반사적으로 막으려 했지만 팔과 머리통이 같이 으스러질 뿐이었다. 그 기세는 전쟁터의 장군과도 같았다. 쿱은 열렬히 그 기록을 써내려갔고 콜드펌이 그 장면을 하나도 놓치는 것 없이 그려냈다. 어느새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흡혈귀 실장석을 응원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9마리의 실장석이 너덜너덜해지고 마지막 한 마리의 실장석만 남았다. 이 실장석은 다른 실장석들이 죽어나가는 동안 열심히 발발발 움직여서 어찌어찌 물리차단막까지 다가와 바깥의 마법사들과 비마법사 그리고 요정을 향해 애원하고 목숨을 구걸했다.
[데에에에엥! 미친 자가 와타시타치를 실각시키는데스! 오마에타치는 어째서 이런 비극을 지켜보고만 있는데스! 와타시가 죽는데스! 오마에타치는 그런 슬픔을 견딜 수 없을 것인데스!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이었음을 알고 싶은데수! 지금이라도 늦지 않은데스! 와타시가 멀쩡히 살아남기만 하면 오마에타치의 무능한 인생에 드디어 의미가 생길 것인데스! 자부심이 생길 것인데스!]
[데게레레레레렉! 데게레레레레레레렉!]
[데, 데에에에엥! 미친 자가 오는데스! 구해주는데스! 살려주는데스! 와타시는 죽고 싶지 않은데스! 아무 것도 없는데 왜 앞으로 나갈 수가 없는데샤아앗! 데갸앗! 데갸앗! 와타시는 이 나라의 국보란 말인데스! 국보를 훼손하는 건 전쟁범죄란 말인데스! 빨리 구해내란데스! 지금이라도 늦지 않은데스! 지금이라도 꺼내주면 늑장 부린 죄로 콘페이토 100개로 용서, 뎃 데엣, 데갸아아아아아아아아악!]
공포에 질린 단말마를 끝으로 마지막 실장석은 물리차단막과 흡혈귀 사이에 끼어서 납작한 피떡이 된다. 순간 물리차단막에 피가 잔뜩 뿌려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피는 금세 씻겨나가고 흡혈귀 실장석이 그 피를 열심히 물고 핥고 빨아댄다. 그렇게 멀쩡한 10마리의 실장석은 모두 시체가 되었다. 그 시체들의 피는 흡혈귀 실장석이 열심히 빨아먹었다. 바닥은 온통 피가 널부러져있고 시체들도 신체의 일부가 한두 조각씩 떨어져나가 있는 등 깔끔하게 먹는 편은 아니었다. 피시스에는 만족스럽게 박수를 짝짝짝 쳤다. 그 소리에 흡혈귀 실장석이 피시스에를 돌아본다. 그리고 또 사납게 그르렁 대더니 피시스에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학파장 님, 조심하세요~.”
“뎃, 데갸아아앗. 데갸아아앗. 어때, 좀 비슷하냐?”
“완전 실장석 같으세요.”
“사람이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흡혈귀 실장석은 염동력에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간단하게 붙잡힌다. 공중에서 팔다리를 휘젓는 흡혈귀 실장석은 소리만 크다 뿐이지 사실상 다른 실장석들과 별반 큰 차이가 없었다. 길드 마스터가 다시 쇠사슬로 실장석의 팔다리를 묶어주니 실장석은 괴성을 지르며 짤그랑짤그랑 꿈틀대는 하나의 굼벵이가 되었다.
“좋아, 실험 끝! 시체는 소각로로!”
“실장석에게서 저런 전투력이 나올 수 있다니 흡혈귀라는 거 무섭네요.”
“고작 실장석이랑 붙은 거 가지고 뭘. 다음은 진짜 괴물이랑 붙여봐야죠.”
“오오! 실장석 투기장이다! 전 괴물이 이긴다에 걸래요!”
실장석을 이긴 흡혈귀 실장석이 다음으로 붙게 될 상대는 괴생물학파에서 가장 약한 생물, 워터슬라임이다. 마법사들은 바로 양동이 하나를 들고 와서는 바닥에다가 그대로 쏟아 부었다. 바닥에 철퍼덕 물웅덩이가 만들어지더니 곧 물이 탱글탱글하게 덩어리지면서 한 덩어리로 모였다. 모든 물이 한 자리에 모이니 그것은 커다란 아침이슬처럼 보였다. 요정은 겁도 없이 실장석 크기와도 비슷한 슬라임에게 다가가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보았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니 슬라임은 데굴데굴 굴러서 요정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그 속도는 쭈그려 앉은 채로 걸어서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하잖아요. 워터슬라임이라니. 고블린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워터슬라임도 못 이기면 추후 실험은 의미가 없어질 테니 절차가 간단하지.”
“더 보고 싶으니까 실장석 이겨라!”
야생의 워터슬라임의 입지는 움직이는 옹달샘과도 같다. 눈도 코도 귀도 없으며 그저 처음 구르기 시작한 곳으로 길이 막힐 때까지 움직인다. 슬라임의 몸체라 할 수 있는 핵은 주위의 수분을 끌어모아 점성있는 구형으로 모으며 이 수분은 말 그대로 수분이므로 목이 마르면 마셔도 된다. 야생동물들은 아무 적개심 없이 워터슬라임에게서 물을 빨아마시고 워터슬라임이 지나가는 경로에 있는 풀과 나무들은 그 물기를 받아 더욱 싱싱하게 자라난다. 그나마 워터슬라임에게도 굳이 살해당하는 것들이 있다면 지나가던 벌레들이 물에 갇혀 익사하는 정도였다. 다들 아무리 그래도 워터슬라임을 못 이기겠나, 하고 하나같이 실장석의 편에 돈을 건다. 가끔 워터슬라임의 편을 들어주는 쪽도 있었다. 실장석이 정말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멍청해서 워터슬라임한테 이빨을 박으려다 빠져나오지 못하고 익사당한다는 주장이다. 설득력은 꽤 있었지만 그래봤자 현실성이 턱없이 없어도 너무 없는 주장이었으므로 여전히 실장석 편이 우세였다.
워터슬라임이 나아가는 경로 앞에 실장석을 놓아두고 다시 물리차단막을 쳤다. 실장석의 사슬은 풀리고, 실장석은 자신을 향해 굴러오는 자기 몸통만한 물덩이를 보았다. 실장석은 그르렁댔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르르르르르…….]
슬라임은 실장석의 그르렁도 듣지 못하고 경로에 뭐가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저 바닥에 물자국을 남기면서 구를 뿐이다. 실장석의 떨림은 슬라임이 가까워질수록 심해진다. 슬라임이 그 기운을 느꼈는지 방향을 바꿔 다른 곳으로 굴러간다. 워터슬라임이 실장석에게서 멀어지자 떨림은 잦아들고 실장석은 슬라임을 향해 하악질을 한다. 그리고 워터슬라임을 째려보더니 크게 괴성을 질렀다.
[데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오! 어!”
“에이…….”
흡혈귀 실장석은 워터슬라임으로부터 멀어지려고 꽁지빠져라 도망쳐 물리차단막을 마구 긁어댔다. 승부는 1분도 되지 않아 실장석의 항복으로 끝났다. 다들 김이 팍 새버렸다. 이를 기록하던 나뮈의 열쇠들과 피시스에는 자기 이마를 탁 때린다.
“아차, 흡혈귀는 공수병이 있었지 참. 하, 에립마브 놈 때문에 까먹고 있었네.”
“……워터슬라임도 못 이긴다니.”
“이야! 봤냐! 역배당으로 대박쳤다! 야, 야, 늦기 전에 빨리 돈부터 걷어.”
“워터슬라임은 흡혈귀의 천적같은 괴물이니 공정한 결투가 못 되겠습니다.”
“워터슬라임 말고, 다른 거!”
“고블린!”
“보다 약한 괴물이 있지요.”
워터슬라임을 양동이로 퍼다넣고나서 다음 투사로 나선 괴물은 고블린보다 약한, 고블린이었다. 녹색 피부에 잔뜩 주름진 피부와 구부정한 허리, 그리고 큼지막한 코와 귀는 누가 봐도 고블린이었다. 덩치는 실장석 성체보다 머리 하나는 컸는데 보통 고블린이 사람 허리까지 오는 것과 비교하면 많이 왜소한 크기다. 그에 걸맞게 팔과 다리가 고블린 치고는 많이 가늘어 서있는 모습도 애처로웠고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곱곱이는 잔뜩 겁도 먹은 채였다. 사실 사람들이 이 괴물을 고블린이라고 확신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하나가 있었다.
“아, 안녕, 집고블린, 곱곱이.”
“우와, 고블린이 사람 말을 하네?”
“다른 고블린들보다 유달리 허약한 놈이라 동족들에게 괴롭힘 당하다가 맞아죽을 뻔한 놈이었죠. 원래 이름도 좀 그럴싸한 이름으로 붙여줬는데 영 이름을 못 외워서 그냥 곱곱이라 했어요. 지금은 그냥 괴생물학파 시종이죠. 빨래, 요리, 청소, 쇼콜라틀 타오기, 책 정리. 실장석 똥 치우기, 실장석 때려죽이기 등등…….”
“오늘, 화장실, 청소, 진행중. 호출, 무엇?”
곱곱이는 대걸레를 들고 있었는데 피시스에가 내놓으라고 해도 손에서 놓지를 않았다. 덩치도 고블린보다 작고 약해보여서 진짜 고블린이랑 싸워도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곱곱이는 주변을 슥 한 번 돌아보고는 묶인 실장석을 보았다. 지금껏 봐왔던 실장석들보다 피부는 유난히 하얗고 미친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악을 쓰는 실장석. 곱곱이는 그제야 들고 있던 물걸레를 놓았다.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바닥에서 쇠사슬에 묶여 데굴데굴 구르는 실장석을 보고, 물걸레를 넘겨받은 피시스에를 보았다. 피시스에는 물걸레의 자루 부분을 분리해서 곱곱이에게 주었는데 딱 적당한 몽둥이 크기가 나왔다. 몽둥이라도 들고 있으니 이제야 고블린이라는 티가 났다.
“오늘, 분충, 죽임?”
“얘도 실장석 때려잡기를 엄청 좋아한답니다. 누가 고블린 아니랄까봐. 잡으면서 스트레스라도 푸나보죠. 곱곱아. 조심해. 저거 흡혈귀야. 물리면 아프다?”
“곱곱이, 분충, 안공포. 구타! 타격! 죽음!”
“근데 괜찮겠어요? 괜히 물렸다가 흡혈 고블린이라도 되면 어쩌시려고.”
“그럼 여기서 치료하면 되죠. 내가 괜히 괴생물학파장이겠어요? 양바니 수도사는 사람을 살리지만 괴생물학파장은 괴물을 살린다구!”
힘찬 전투의 함성을 외치며 몽둥이를 마구 휘두르지만 그 속도는 어린이도 맨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처럼 느렸다. 저걸로 실장석을 때려잡을 수나 있을까, 사람들은 곱곱이의 힘으로도 맞아죽는 실장석을 잔뜩 봐왔지만 하필이면 이번 상대는 흡혈귀여서 걱정이었다. 곱곱이파와 흡혈귀파로 관중들이 나뉘는데 흡혈귀파는 대부분 슬라임 전에서 역배당으로 이득을 본 사람들이었고 대부분 곱곱이파였다. 그리고 파가 어떻게 나뉘든 사람들은 모두 곱곱이를 응원했다.
[데샤아아아악! 데샤아아아아아악!]
“분충! 죽음! 분충! 죽음! 분충! 죽음!”
“곱곱이 힘내라!”
“곱곱아 조심해! 너 없으면 쇼콜라틀은 내가 타야 한단 말야!”
“그래, 가서 싸워봐!”
곱곱이가 물리차단막 안으로 들어가고 실장석의 쇠사슬도 풀린다. 실장석은 곱곱이에게 전혀 겁먹지 않았고 괴성을 지르며 덤벼들었다. 곱곱이도 몽둥이를 마구 휘두르며 실장석을 향해 돌진한다. 성인 남성이 빠르게 걷는 속도로 달리는 두 괴물. 실장석과의 싸움보다도, 워터슬라임과의 싸움보다도 흥미진진하다. 실장석이 전력으로 뛰어오르고 곱곱이도 몽둥이를 올려들고 뛰어오른다.
[데샤아아아아아아아아악!]
“구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땅, 청량한 소리와 함께 곱곱이의 몽둥이가 실장석의 머리통을 내려치고 실장석은 공중에서 바로 땅으로 처박혀 바닥에 코를 박았다. 바로 일어서려고 했지만 바닥에 착지한 곱곱이가 실장석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몽둥이로 마구 내려친다. 모두가 예상한 결과다. 다들 당연하다는 듯 웃으면서도 곱곱이를 응원했다.
“이럴 줄 알았지. 잘한다 곱곱이!”
“아니야. 이건 곱곱이가 불리해. 상대는 흡혈귀잖아. 곱곱이가 양바니의 수도사도 아닌데 저걸 어떻게 죽여!”
“10초 동안 일어나지 못 하게 해도 승리야. 곱곱아! 다리를 분질러버려!”
[데샤아아앗, 데샤아아앗, 덱, 덱! 데기아아아아악!]
실장석은 계속 맞으면서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곱곱이의 몽둥이가 뒤통수를 땅바닥에 박아버리니 팔다리를 휘적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팔다리를 휘젓다가도 실장석은 어떻게 운 좋게 바닥에서 굴렀다. 데구르 굴러 운 좋게 곱곱이의 몽둥이를 피한 실장석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고, 몸을 다 일으키기도 전에 추진력을 얻어 도약해 곱곱이의 얼굴을 때렸다.
“아픔!”
“으악! 곱곱아!”
“주먹은 상관없는데! 물리지만 마!”
그나마 곱곱이는 실장석이 도약해오는 것을 보고 몽둥이를 휘둘러 때려냈기에 주먹에 이어 날아오는 이빨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설마 실장석에게 맞을 줄 몰랐던 곱곱이는 생각보다 아픈 주먹에 코가 얼얼하고 당황했다. 때문에 실장석은 다음 공격의 기회를 더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곱곱이도 비틀거렸지만 공격이 익숙하지 않은 실장석의 이빨을 방어해내는 것은 약한 고블린이라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방어만 계속 될 뿐 공격은 하기가 힘들다. 곱곱이의 기세가 밀린다. 곱곱이는 대걸레 자루를 실장석의 입에 물린 채로 자신을 물지 못하도록 버티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곱곱아! 문 채로 놓아주지를 않잖아! 그냥 그대로 휘둘러버려!”
“아니야, 발로 차서 떨어트려야 돼! 그 다음 목구멍에 몽둥이를 박아야지!”
“이렇게 된 거 그냥 너도 물어버려 곱곱아!
전투의 열기는 대단했다. 러트너도 어느새 실장석과 고블린의 싸움에 무아지경으로 몰입하여 곱곱이를 응원하고 있었다. 실장석이 마구마구 장대를 물어뜯으며 몰아붙이지만 곱곱이도 끝까지 밀리지는 않는다. 양 손으로 장대를 받치던 곱곱이는 잠시 장대를 쥔 오른손을 빼더니 오른발로 그 자리를 대신 받치면서 여유로운 오른손으로 실장석의 머리통을 밀어냈다.
“응징! 응징! 응징!”
“기술 좋다! 곱곱이!”
“야, 애들 싸우는 것도 아니고 머리끄덩이가 뭐냐?”
철창 속에서 구경하던 실장석들도 치열하고 흥미진진한 싸움에 다들 철창 앞으로 나와 뭉툭한 팔다리를 휘두르며 응원에 가세했다. 그래도 동족은 동족이라고 이들은 흡혈귀의 편이었다. 싸움의 기세를 실장석이 쥐고 있었으므로 실장석들의 응원은 귀가 아플 정도였다.
[죽여버리는데스! 죽여버리는데스! 오마에가 와타시타치의 희망데스!]
[건방진 노예에게 반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는데스! 와타시도 구해주는데스!]
[오마에는 용사데스! 어서 최후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세레브한 공주 와타시를 쟁취해주는데스!]
“이야, 저 녀석들도 싸우는 게 재밌나본데?”
“곱곱아 힘내! 네가 이기면 3박 4일 휴가 줄게!”
곱곱이와 실장석을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간다. 그때였다. 곱곱이가 필사적으로 오른발에 힘을 주어 장대를 받치면서 머리를 밀어내던 오른손의 엄지로 눈을 힘껏 찔렀다. 흡혈귀가 된 실장석에게는 물리적 고통을 느낄 신경이라곤 없었지만 시야가 가려지고 흡혈귀 경험이 별로 없으니 살아있을 적의 본능이 몸을 뒤로 빼며 자기도 모르게 눈을 만지게 만들었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
“굉장하다, 곱곱이!”
“어이어이! 믿고 있었다구, 젠장-!”
사람들의 기세가 등등해진다. 실장석들의 분위기는 초상집이다.
[데에에에에엥! 정정당당한 결투에서 눈을 손대다니 오마에는 상분충데샤아아!]
[이 판 무효데스! 눈을 찌르는 건 반칙데스! 반칙을 저질렀으니 오마에의 목숨으로 사죄하는데스! 오마에의 목을 치고 그 목구멍에 마라를 박아주겠는데스!]
[심판은 뭐하는데샤앗! 반칙데스! 실격데스! 저 자를 운치굴 달마노예로 보내버리란데샷!]
기세를 되찾은 곱곱이가 대걸레자루를 고쳐 잡고 머리 위로 높이 들어 흡혈귀의 머리통을 내려친다. 통, 목탁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실장석이 다시 고개를 숙인다. 그때 곱곱이는 몽둥이로 흡혈귀의 옆구리를 쳐 천장을 보도록 눕히더니 얼굴 쪽을 마구 구타하고 눈을 찍어댔다. 눈부신 천장의 빛과 곱곱이의 몽둥이질이 합쳐지니 흡혈귀는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저, 저거!”
“알아낸 거야, 곱곱이가 흡혈귀의 약점을 알아낸 거라고!”
[데샤아아아아아아아! 상습반칙범데샤아아아아아! 심판 나오란데샤아앗! 스포츠 정신에 입각하여 페어플레이하란데샤아아아앗!]
[심판도 한 패인데스! 심판도 싸잡아서 독라로 만들어버리란데스!]
철창 속 실장석들의 아우성은 곱곱이의 필사적인 힘을 멈출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나 힘이 너무 필사적이었을까, 곱곱이가 휘두르던 몽둥이가 점점 금이 가더니 어느 순간 우지끈 부러지고 말았다. 무게중심이 흔들린 곱곱이는 휘청이다가 부러진 몽둥이를 어찌하지 못 한 채로 앞으로 넘어지고 만다. 바닥에 누운 흡혈귀 실장석이 곱곱이가 넘어지는 모습을 두 눈 부릅 뜨고 맞이했다.
“곱곱아!”
[데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물리차단막을 치고 있는 마법사들까지 놀라서 손을 머리 위로 드느라 물리차단막이 전부 거둬졌다. 곱곱이는 흡혈귀 실장석의 배에 머리를 박았다. 흡혈귀는 곱곱이의 머리통에 입을 대고 있다. 곱곱이는 머리에서 느껴지는 더러운 기분에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난다. 손에 들린 막대는 없었다. 실장석은 부들부들 떨며 바닥을 마구 긁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대는 실장석에게 있었다. 하지만 들고 있지는 않았다.
거칠게 숨을 내쉬는 흡혈귀의 희번덕한 눈에 핏줄이 발딱 서있었다. 흡혈귀는 곱곱이를 노려보았고 자신의 가슴팍에 불쑥 솟아있는 대걸레 자루를 보았다. 부러진 대걸레 자루는 뾰족한 말뚝이 되어 흡혈귀의 심장을 찔렀다. 흡혈귀의 숨이 거칠어진다.
[데헤에에에에엑, 데헤에에에에에엑, 데헤에에에에에엑!]
“마, 말뚝을 박았, 이, 이겼다! 곱곱이가 이겼다!”
“야 곱곱아, 안 물렸냐!”
“곱곱이! 이김? 이김! 곱곱이! 안물림!”
[말도 안 되는데스! 말도 안 되는데스! 반칙인데스! 무효인데스!]
[정당하게 맨손으로 싸운 와타시타치의 투사를 무기까지 써서 공격하다니 오마에타치는 명예도 없는데스! 자존심도 없는데스! 애미애비도 없는데스!]
사람들은 환호하며 곱곱이를 칭찬해주고 실장석들은 통곡하며 철창을 마구 두드렸다. 곱곱이는 신이 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흡혈귀는 무릎을 꿇은 채로 말뚝을 잡고 거친 숨을 마지막으로 내쉰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숨이 마지막 숨이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된 실장석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본능에 따라 스스로의 최후를 부정하며 단말마를 내질렀다.
[데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온 건물을 울리는 파킨 소리. 흡혈귀 실장석의 몸에서 강력한 기운이 터져나왔다. 흡혈귀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이와 철창 속의 모든 실장석들이 그 기운에 휘말렸다. 물리차단막은 흩어지고 유지하던 마력이 깨어지자 마법사들은 모두 뒤로 넘어진다. 마력을 유지하고 있지 않던 러트너 일행은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온 몸을 울리는 귀신같은 무언가가 자신들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고 온 몸이 전율하며 굳었다.
“으아악!”
실장석들도 그 기운에 휘말리기는 마찬가지였고 흡혈귀 실장석이 터트려낸 기운은 철창 속 실장석들의 마력동석을 마력동석이 견딜 수 없는 주파수로 진동시켰다. 곧 수천 마리에 달하는 실장석들의 마력동석이 한 순간에 전부 깨졌다.
“……윽, 아윽……. 다들 괜찮아? 다친 사람!”
“없어요! 우와, 방금 그거 뭐였지.”
“요정 님, 괜찮으세요?”
“일없노라. 귀가 좀 먹먹하구나.”
“잠시만요. 제가 봐드릴게요.”
“음흉하도다!”
길드 마스터와 피시스에도 머리가 지끈지끈하여 정신을 차리질 못하고 있다가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흐려진 시야를 정갈히 맞춘다. 길드 마스터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치렁치렁한 로브 자락을 밟고 넘어지고 말았다.
“뭐 저런 마력이……. 어떻게 저런 마력이 나오지? 마스터, 괜찮아요?”
“나 다신 이 옷 안 입어…….”
“실장석들이…… 죽었어? 이 놈도, 저 놈도! 마, 말도 안 돼! 시, 실장석이 전부 죽었어!”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혼비백산해서 철창 속 실장석들을 살핀다. 죽어있었다. 전부 가슴을 부여잡은 채로 죽었다. 철창을 열고 시체들을 꺼내가며 혹시나 살아있을 한 마리라도 찾기 위해 모두들 손과 발을 바삐 움직이지만 그런 움직임 자체가 허사였다. 실장석들은 모두 죽었다. 흡혈귀 실장석이 죽은 것처럼 모두 가슴을 부여잡고 죽었다. 흡혈귀 실장석의 시체에는 곱곱이가 다가가있었다. 곱곱이는 흡혈귀의 시체를 발로 차며 물었다.
“곱곱이, 이김?”
“어떡해요! 어떡해요! 곧 있으면 저녁 시간이에요! 다른 괴물들은 그렇다 치고 흡혈귀에게 실장석을 조달 못 하면 학파장 님이…….”
괴생물학파에 비상이 떨어졌다. 흑의 계약서에 명시되어있는 실장석 무제한 제공 규칙을 지킬 수 없게 됐으니 여차하면 피시스에가 흡혈귀의 손아귀에 떨어질 수도 있었다. 마법사들도 그렇고 나뮈의 열쇠들도 그렇고 러트너와 요정도 그렇듯 다들 어쩔 줄 몰랐다. 그렇게 놀려먹었던 흡혈귀가 피시스에의 명줄을 쥐고 또 건방지게 도발하는 모습은 죽어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 피시스에 만큼은 이 자리에서 가장 침착했다.
“어떡해요 할 시간에 해결책을 생각해! 아직 실험실에 갇혀있는 실장석들이 있어. 그 실장석들을 강제 번식시켜서라도 일단은 버틸 수밖에.”
“하루에 100마리는 잡아먹는 녀석에게 겨우 열 몇 마리 실장석 가지고는…….”
“그러니까 밖에서 더 잡아와야지!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몇 명이야, 하나, 둘, 셋……. 스물, 아니지. 열다섯 명.”
그 수에는 명예 마법사 네 명과 길드 마스터 한 명을 뺀 수치였다. 피시스에는 그 인원을 알아서 뺐지만 빠진 인원들이 자신들을 넣어달라고 자청하며 나섰다.
“나도 도와줄게.”
“이 몸과 이들도 포함하거라. 스무 명이니라. 불만 있는 인간 있느냐?”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들. 아무튼, 스무 명이면 한 손에 한 마리씩 잡아온다고 해도 마흔 마리야. 두 번만 왔다갔다해도 여든 마리고, 그렇게 밖에서 잡아오고 번식시키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서 철창을 다 채우는 수밖에!”
“여든 마리를 어디서 잡아오죠……?”
“어, 어, 그거라면 러트너가 잘 하느니라!”
요정이 러트너의 팔을 잡아서 손을 대신 들어 올려주면서 폴짝폴짝 뛰며 관심을 끌었다. 사람들과 곱곱이까지 러트너를 바라보니 러트너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네, 네……. 그, 실장석을 불러 모으면 되긴 하죠…….”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어요. 오늘 안에 150마리만 잡으면 되고, 에립마브 잠든 사이에 더 잡아오면 되니까! 불러 모으든 납치해오든 강제로 낳게 하든 뭐든 좋으니까 수만 채우면 돼요! 어차피 상대는 실장석이야!”
“러트너! 가자꾸나! 그대들도 따라오거라!”
“예, 예!”
쿱과 콜드펌은 즉시 승강기 앞으로 가 단추를 누르고 기다렸지만 12층에 서있는 승강기를 어느 세월에 기다리고 있을 거냐고 요정이 호통을 치기에 허둥지둥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후다닥탁탁탁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온 계단통에 울렸고 이들은 승강기가 12층에서 지하 5층에 도착했을 때 이미 괴생물학파 아파트를 뛰쳐나갈 수 있었다.
“너희도 빨리 따라가! 나는 마스터랑 실장석 번식시키고 있을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열린 승강기에 마법사들이 비좁은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려다 무게 제한에 걸려 몇 명의 마법사들은 탑승하지 못한다. 이들은 결국 먼저 뛰쳐나간 일행들처럼 계단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곱곱이, 임무, 무엇?”
“넌 잘 싸웠어, 푹 쉬어! 마스터, 우린 빨리 실험실로 가죠.”
“가자!”
“곱곱이, 쉰다!”
가끔 사람들은 정말 이런 마법은 왜 개발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곤 한다. 과거에는 필요했지만 지금은 딱히 필요가 없어졌거나, 만들어놓고 만든 사람도 까먹었거나, 굳이 주문이 없이도 사람들이 알아서 잘 해내는 일이라든가. 가속 주문서를 쓰지 않고도 날아다니듯 달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가속 주문서의 존재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아파트 바깥으로 나온 일행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전력질주하여 더 가이더링 길드의 관문을 나왔다. 쿱은 주위를 둘러보며 마차간을 찾아가 다급하게 물었다.
“수레를 빌려야 합니다!‘
“수, 수레? 어디까지 가시기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도사가 저렇게 윽박을 지르니 세상 말세라고 여기면서도 마차간지기는 어찌어찌 수레와 마부를 구하러 나섰다. 그 사이 괴생물학파 마법사들도 우르르 관문 밖으로 빠져나왔는데 다들 체력이 달려 헉헉대고 있었다.
“어디, 러트너 씨! 어디로 가야 합니까!”
“여기서 제일 가까운 숲이요!”
“이 몸이 안내할 터이니 수레만 준비해다오!”
“아이고, 운동은 너무 오랜만인데.”
“꼴랑 그거 달려놓고 뭐가 그렇게 힘들어요!”
“마법사 안 해보셨으면 말을 하질 말아요…….”
“에……. 숲까지 가신다고……요?”
마차간지기에게 대강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마부는 굉장히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이들을 찾아왔다. 쿱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러트너도 쿱의 옆에 붙어서 이야기를 보조했다. 마차를 타고 가장 가까운 숲까지 가야 한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말이었지만 말 할 수 있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다. 특히 다음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하자니 자기가 말하기에도 미안했기에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네. 사연이 복잡하니까 어떻게든 빨리 좀 가주세요!”
“대체 무슨 사연이길래 마법사들까지……?”
“급하다니까요!”
러트너는 바로 주머니에서 금화 한 닢을 꺼내 마부의 손에 척 쥐여주었다. 마부는 그 금화를 보더니 깜짝 놀라 눈 앞에 가까이 댔다가 멀리 댔다가 이에다 톡톡 부딪히며 진짜 금화임을 실감했다.
“그 돈으로 모자라요?”
“아, 아니, 그, 저.”
“안 모자라면 빨리 가자고요! 시간 없어요!”
러트너가 손짓하자 마법사들이 우르르 수레 위에 자리를 채워가며 올라탔다. 짐수레였기에 사람이 앉을 만한 구조가 아니어서 움을 쭈그리고 앉아야 했지만 어떻게 우겨넣으니 마법사들은 다 탑승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법사들이 다 타고 나니 다른 사람들이 탈 자리가 없었다.
“저희는 어디에 탑니까?”
“그러게요. 제 말도 아직 못 찾았는데.”
“가속 주문서가 있으니 뛰어오시면 될 것 같네요. 수레는 주문서 없이 달리고. 여기서 제일 가까운 숲까지 얼마나 걸리죠?”
“한 식경도 안 걸릴 것이니 서두르자꾸나!”
말에게 쓸 주문서를 나눠받은 일행은 서로에게 가속 주문을 걸어주고 수레 한 바퀴를 빙 돌아 속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적절히 가늠했다. 이미 가속 경험이 있는 러트너는 금세 익숙해졌지만 쿱과 콜드펌은 어느 정도의 박자로 달려야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지 찾아내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답답해진 러트너가 말했다.
“저희 먼저 가도 될까요!”
“예, 예! 따라잡겠습니다!”
“가겠노라. 뒤처지지 말거라!”
요정은 광활하고 차갑게 말라붙은 대지를 미끄러져 나아갔다. 요정에겐 가속 주문서라곤 주지 않았는데도 여유롭고 부드럽게 마차를 따라잡을, 앞지를 속도를 내고 있었다. 마부는 아무렇지 않게 1골을 건네는 남자, 마차를 앞지르는 여자, 사람에게 윽박지르는 나뮈의 열쇠들과 수레를 꽉꽉 채운 마법사들을 보면서 대체 자신이 무슨 사건에 휘말린 건지 예감이 그리 좋지 않았다.
“출발 안 해요?”
“예, 갑니다요!”
가속 주문서도 없이 수레가 출발한다. 그것이 마차가 낼 수 있는 가장 적절하고도 일상적인 속도였음에도 가속이 없으니 수레가 굼벵이가 된 것 같다. 수레를 끄는 말들만 제외하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요정은 숲과 가이더링 사이의 추수 끝난 농지를 바로 가로질러 달려가느라 그 속도가 더욱 빨랐다. 하지만 수레는 미리 터놓은 길만 갈 수 있었으니 분명 느린 속도는 아닌데도 더욱 느리게 느껴진다. 러트너는 진작 수레를 앞질러서 요정의 곁에서 함께 달렸다. 멀쩡하게 힘껏 달리는 요정의 모습에 웃고 싶지 않아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지금 요정이 달릴 수 있게 해준 사람들의 모습이 다들 눈 앞을 스쳐지나갔다. 러트너가 웃으면 바보같이 보인다고 요정이 나무랐다.
가장 가까운 숲을 찾았으니 숲이 바로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요정이 먼저 발바닥으로 흙바닥에 제동을 걸어 미끄러지듯 멈춘다. 러트너도 그 모습을 보고 따라해보려 했지만 괜히 안 하던 짓을 하다가 앞꿈치를 땅바닥에 박아버려서 가속이 붙은 채로 바닥을 굴러버리고 만다. 흙바닥이어서 아프지는 않았지만 아픈 게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곡! 겍! 으갹!”
“러트너!”
러트너는 구르던 반동으로 자세를 유지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온 몸이 흙투성이였지만 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씨익 웃었다.
“하여튼, 그대는 정말 어마어마한 무지렁이로다!”
수레는 길을 따라서 숲길 쪽으로 갔는데 러트너와 요정이 있는 곳에서 꽤 떨어져있었다. 수레가 그들 쪽으로 올 수는 없었으므로 러트너와 요정이 수레 쪽으로 움직였다. 수레가 숲의 경계에서 멈추고 마법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수레에서 뛰어내린다. 멀미에 약한 마법사 하나가 곡식도 심지 않은 밭에 거름을 게워내긴 해도 다들 무사히 도착했다.
“이제 실장석들을 불러모으면 돼요.”
“그런 주문이 있어요?”
“주문은 없지만, 소라고둥이, 어, 소라고둥이? 으악! 맞다! 소라고둥이 쿱 씨한테 있는데!”
“이런 바보천치를 보겠느냐!”
머리를 쥐어뜯으며 욕을 안 하려고 끄아아아아 신음하는 러트너를 요정이 마구마구 쥐어박았다. 러트너가 요정에게 맞은 것 때문인지 소라고둥을 못 챙겨온 것 때문인지 모를 스트레스를 쿱의 이름에 담아 하늘에 내지르며 언제 출발할지 알 수가 없는 쿱을 찾아 왔던 길을 돌아간다. 요정은 한숨을 쉬며 저런 인간에게 자기 목숨이 살아난 것이 다행인 건지 위험했던 건지 루노께 잠깐 물었다.
“처자는 달리기 실력이 대단하시네. 아니, 가속 주문서도 없이 어떻게 수레보다 빠르게 달려?”
“그야 요정 님이시니까요!”
요정이 뭐라 하기도 전에 마법사들이 대뜸 대답해버려 요정은 그 입을 연 마법사를 쏘아보았지만 어차피 이젠 의미가 없음을 알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부는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어서 무슨 뜬구름 소리 하듯 바라보았다.
“요정은 무슨. 가이더링에 요정이 잘도 돌아다니겠수. 마법사들은 참 머리도 이상하게 굴러간다니까. 뭐 요정처럼 이쁘장하게 생기시긴 했네.”
“아 진짜거든요!”
“아, 그러시겠지요! 우리 마누라도 젊을 땐 요정인 줄 알았는데 아 글쎄 결혼하고 보니까 요정의 탈을 쓴 오크였지 뭐야.”
“어찌 인간과 요정과 오크를 헷갈릴 수 있느냐.”
“아니 진짜 오크라는 말이 아니잖우. 그 말이 그 말이 아닌데, 세상을 너무 곱게 사셨네.”
요정은 말을 길게 하지 않았고 말을 길게 할 필요도 없음을 알았다. 마법사들이 하나같이 입을 맞춰서 진짜 요정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마부는 마법사들 말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길 뿐이었다. 마법사들은 속이 터질 것 같아서 요정에게 한 마디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요정은 그 어떤 말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멀리서 방금 전 스트레스에 가득 차 멀어지던 함성이 이번엔 가까워지고 있다.
“찾아왔드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러트너는 이번엔 똑같이 구르지 않도록 적절한 시점에서 발에 힘을 주며 달리는 속도를 줄였다. 그러나 속도를 줄이다보니 발이 달리는 박자를 맞추지 못해 그만 엉켜버렸고 러트너는 다시 넘어져 바닥을 구르고 만다.
“으갸갹! 겍! 아이곡!”
“하, 저런 멍청한…….”
이번에도 러트너는 구르던 반동으로 자세를 유지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일어나 품에서 소라고둥을 꺼내들고 씨익 웃었다.
“그대는 걸음마부터 다시 배워야겠노라! 쿱과 콜드펌은 아직이더냐?”
“자꾸 뛰다 자빠지시던데요.”
“그대가 좀 도와주지 그냥 왔느냐.”
“사태가 급하잖아요.”
“그걸로는 뭘 하시려고?”
“실장석을 불러모아서 괴생물학파에 보관할 겁니다.”
러트너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마부는 수레에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뭐라고! 실장석! 지금 고것들을 내 수레에 태우겠다는 거요!”
“그래서 1골 줬잖아요! 수레 하나에 얼마나 한다고!”
“그건! 그, 그야 그렇긴 하지.”
수레 하나에 얼마나 한다고, 러트너는 자기가 책을 쓰게 된다면 그 문장을 제목으로 하고 싶을 만큼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물고기는 귀에 꽂고, 소라고둥은 입에 대고. 러트너는 이제 마도구 사용에도 아주 익숙해져있다. 마법의 마 자도 모르는 사냥꾼이지만 명예 마법사 증표까지 가지고 있는 인재다. 그리고 그 인재는 지금 실장석들을 꾀어내기 위해 실장석이나 할 법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음, 흠. 아. 아. 자~. 세레브한 콘페이토랑 스테이크랑 스시가 왔어요~. 착한 실장석 여러분께 공짜로 나눠드려요~.”
그 목소리에 마법사들이 죄다 웃음을 터트렸다. 러트너가 목을 째면서 내는 목소리는 정말 사람이 실장석으로 변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듣고 있기 거북했다. 요정은 웃지는 않았지만 러트너를 한심하게 쳐다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러트너는 말을 마치고 소라고둥의 줄을 당긴다. 러트너의 목소리보다도 거북한 실장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데스데스 소리의 반복일 뿐이니 알아들을 수 있는 러트너의 말보다는 상대적으로 듣기 나쁘지 않았다. 러트너의 목소리와 소라고둥의 목소리 사이의 차이는 이빨이 부러져 튀어나올 정도로 주먹을 갈기고 싶은 느낌과 주먹은 갈기되 입은 망가트리지 않고 계속 비명을 지를 수 있도록 남겨두는 느낌의 차이였다.
실장석이 기어나오길 기다리는 사이 쿱과 콜드펌도 숲의 경계에 도착했다. 러트너 못지 않게 넘어지고 구른 티가 온 몸 곳곳에 가득하며 숨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달려온 이들 중에 몸이 깔끔한 쪽은 요정 뿐이다. 요정이 쿱과 콜드펌을 보자마자 학을 떼면서 옷을 마구 털어내주었다.
“맙소사, 이 무슨 몰골이라는 말이냐! 그대들은 러트너마냥 무지렁이도 아니거늘!”
“로브를 입은 채로 뛰기가 좀 힘들었습니다.”
“으이그, 으이그, 어디 코는 아니부러지었느냐? 그나마 고운 얼굴에 생채기는 없구나.”
“실장석은 불러냈습니까?”
“러트너가 실장석 그 자체가 되어 불러내었으니 곧 반응이 올 것이야.”
실장석 그 자체라는 말에 러트너가 항의했지만 그때 자리에 없었던 쿱과 콜드펌을 제외하고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기에 러트너는 실장석 그 자체가 되었다. 그는 아무리 요정이 한 말일지라도 절대 이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차마 요정을 실장석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으므로 그냥 시무룩해서 궁시렁 댈 뿐이다. 자신과 비교된 실장석을 때려죽이며 비명소리를 들어야만 이 설움을 풀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기다렸다. 처음에도 빨리빨리 기어나오진 않았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싶어서 줄을 다시 당기려고 할 때나 되어서야 미적미적 기어나온다. 그는 그때까지 기다렸다.
“제대로 부른 거 맞아요?”
“영 안 나오는데.”
저런 말을 할 때쯤에야 기어나온다. 러트너는 다가올 피바람을 예상하며 씩 웃었다.
[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 데스데스~.]
소라고둥을 세 번째 울리고 있지만 실장석이 전혀 나오질 않았다. 숲에 실장석이 없는가, 싶었지만 요정이 숲의 냄새를 맡고 코를 찡그리며 확실하게 있다고 알려줬는데도 기척도 보이질 않는다. 요정의 후각이 민감해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깊은 숲 속에 숨어있는 것인가 하는 추측도 있었다. 하지만 요정은 여기저기 수풀에 숨어있는 실장석들이 잘 보인다고도 했고, 숲 속 깊이 소라고둥을 들고 가서 러트너의 음성을 재생해주었다. 그래도 여전히 반응이 없다. 요정은 빈 손으로 돌아왔다.
“이것들이 왜 안 나오지?”
“여긴 가이더링에서 가장 가까운 숲입니다. 마법사들이 실험용으로 잔뜩 잡아갔으니 사람에게 겁을 잔뜩 먹었을 겁니다.”
마법사들은 또 눈을 피하면서 딴청을 피운다. 그래도 아무도 뭐라 하지는 않았다.
“이럴 때 심리분석학파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실장석 심리를 탁 꿰뚫어가지고 팍, 하면 수십 마리가 알아서 몰려올 텐데 말이죠.”
“어디 숨어있는지 보인다면 결국엔 그냥 물리력을 써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번엔 이야기를 좀 바꿔서 해볼게요.”
실장석 심리 하면 누구 못지 않게 잘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런 거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는 러트너가 소라고둥에 대고 어떤 말을 할지 열심히 고민했다. 머리를 짜내고 짜내 실장석들을 대한 경험과 지식을 살려 그는 어떻게든 실장석들을 설득해보는 쪽으로 노선을 잡았다. 그가 고둥에 대고 말한다.
“착한 실장석만 데려가는 수호천사가 여기 왔답니다! 여러분을 악마의 손에서 구원해주고 사악한 인간들을 몰살시켜줄 평화와 자애의 천사랍니다! 착한 실장석들은 여기 나오세요! 콘페이토도 드릴게요!”
“큽, 러트너 씨, 이런 말 하기 실례라는 걸 알지만…….”
“아, 그래요 그래, 나 실장석 같다고? 에잉.”
이런 소리를 두 번이나 들었으니 실장석이 잡히면 바로 그 자리에서 모가지를 맨 손으로 뜯어내버려야겠다고 요정이 보기에도 불길하고 기분나쁜 얼굴로 손을 비벼댔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러트너의 그 사악한 얼굴 때문에 실장석이 나오지 않는다는 여론이 대세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러트너는 실장석 입맛에 맞으면서 인간은 하기 싫은 소리를 하기까지 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웃으면서 할 수도 없었다. 실장석 앞에서 웃을 수 있는 때는 실장석을 괴롭히면서 그것들이 온 사력을 다해 목청 찢어지게 소리지를 때 뿐이었다. 그런 소리를 제일 먼저 지른 쪽은 실장석이 아니라 사람 쪽이었다.
“실장석이다!”
“앗싸, 드디어! 축하해요! 1등으로 왔네요! 어서 이 수레에 타세요!”
그 실장석은 단 한 마리,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았고 실장석을 따르는 새끼들도 없었다. 새끼가 없는 건지 있는데 안 따라나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실장석은 굉장히 비장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이 광활한 숲에 저 한 마리밖에 없는 건가, 다들 목을 길게 빼고 숲의 저 먼 곳을 살폈지만 지금 이 한 마리가 끝이다. 그 실장석은 수레까지 다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저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걸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실장석은 수레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소리쳤다.
[거짓말데스웃! 믿으면 안 되는데스웃!]
실장석의 말에서 러트너가 기대하지 않았던 말이 튀어나왔다. 러트너는 할 말을 잠시 잊었다.
“뭐라고 합니까?”
“예? 아, 저, 그, 거짓말 하지 말라는데요?”
“예?”
실장석의 눈매는 근엄하고 비장하다. 흐리멍텅한 그 눈매에는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있었다.
[오마에타치의 같은 수법에는 두 번 당하지 않는데샤아앗!]
“같은 수법? 같은 수법이라니 내가 또 언제, 악! 설마! 너 그때 그 숲에서!”
수레와 실장석의 사이에 누구도 예상 못했던 기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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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의 진주인공은 언제나 참피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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