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카오스 럭키짱 천일모험기를 능가하는 진정한 판타지 실장석 참피 소설 실장석과 환상 33화 : 크나큰 은총

 

도무지 풀리지 않을 혼돈의 도가니. 그 안에서 드워프 쇠뇌의 준비가 거의 끝나간다. 꽂을대를 다시 꽂고 방아쇠까지 다시 건 드워프는 자기 동족들이 잔뜩 엉켜서 포승줄을 붙들고 있는 에립마브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심장이 있을 가슴팍 바로 앞에다 쇠뇌를 들이밀었다.

 

안 돼요!”

마녀는 빠져!”

으아앗!”

 

리베라나의 절실한 몸통박치기도 드워프의 완력 앞에 무참히 무너진다. 뒤로 밀리고 드워프에 엉켜 다리까지 걸린 리베라나는 바닥에 팔부터 떨어질 뻔하다가 러트너가 붙잡아주어 위기를 면했다.

 

, 허억, 으아.”

민망한 곳에 손이 좀 닿은 것 같은데 절대 고의는 아니었…….”

 

러트너가 사과를 끝마칠 새도 없이 리베라나가 다시 허둥지둥 앞으로 뛰어들었다. 리베라나를 밀쳤던 드워프가 에립마브의 가슴팍에 쇠뇌를 바로 들이대고 있다. 리베라나가 소리쳤지만 누구도 그 소리를 듣지 않는다. 드워프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다시 당겼다. 방아쇠와 연결된 쇳조각이 앞으로 전진한다. 다시금 폭음이 울릴 것이다. 에립마브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이면 시간이 엄청나게 느려지고 자신의 일생이 눈 앞에 스쳐지나간다고들 사람들이 말한다. 지금껏 살아온 세월이 백 년을 넘는데 그 일생 다 지켜보다간 오늘 안에 못 죽겠네, 그는 죽음 앞에서도 태연했다. 이미 한 번 죽음을 거슬렀고, 여기서 한 번 죽어봤자 지금 저기서 급하게 달려오는 괴생물학파장의 시선으로 자신의 시체를 보고 말 뿐이다. 너네들 실수한 거야, 나만 묶을 게 아니라 피시스에도 같이 묶었어야지, 드워프는 응용은 잘 해도 창의력이 약하다고 하더니 역시 사실이었나보다. 이제 슬슬 폭음이 들릴 때도 됐는데 주위는 굉장히 고요했다. 일생이 길어서 주마등도 긴가, 라고 하기엔 주마등이라 할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에립마브는 눈을 살짝 떴다.

 

뭐하는 거야! 쏴버리라고!”

이게 왜 안…… 으앗!”

됐다!”

 

쇠뇌는 정상적으로 작동했음에도 쇳조각이 미묘하게 쇠관에 닿지 않고 있었다. 폭음도 울리지 않고 에립마브도 멀쩡하다. 드워프가 당황해서 다시 방아쇠를 당기려는데 피시스에와 리베라나가 함께 달려와서 드워프의 손을 걷어차 쇠뇌를 멀리 밀어냈다. 화를 내려던 드워프는 화들짝 놀라며 날아간 쇠뇌를 보았다. 땅에 떨어진 쇠뇌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돈다. 그 방향이 어디를 향할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드워프들은 쇠뇌가 자신을 향하려고 할 때마다 혼비백산해서 주변에 엄폐물로 쓸 만한 것을 찾아 숨는다. 호위병들은 즉시 국왕의 앞을 몸으로 막으며 물러났고 피시스에는 서둘러 리베라나를 감싸면서 손의 가락지로 물리차단막을 펼친다. 러트너도 요정을 감싸며 뒤를 돌았다. 요정이 깜짝 놀라 러트너의 가슴팍을 마구 두드렸지만 두드리는 와중에 폭음이 터져나와 귀를 감싸고 만다.

 

……!”

귀가……. 러트너, 러트너! 그대 일없느냐?”

……. 느껴지는 게 없는데. 요정 님, 저좀 봐주세요.”

상처 없이 말끔하도다. 다행이구나. 다른 이들은 일없느냐!”

폐하! 옥체는 무탈하시옵니까!”

난 괜찮네, 나는, 다른 이들을 살피게.”

쭙쭙아! 괜찮아?”

살아있다. 너는?”

리베라나랑 나랑 다 무사해.”

마스터! 괜찮으세요?”

 

사람들 모두 소란스럽게 서로의 상태를 살핀다. 피시스에와 리베라나는 무사했고 국왕과 호위대 모두 아무 부상이 없다. 침대 뒤로 뛰어들었던 드워프 역시나 다들 몸에 생채기 하나 없다. 자욱한 연기가 걷히고 문제의 쇠뇌를 살펴보니, 쇠뇌의 끝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어느 누구도 아닌, 천장을 향해 꼿꼿이 서있었다. 천장에 작은 흔적이 나있고 돌부스러기가 떨어진다.

 

……쇠뇌가 섰다?”

어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그걸 갑자기 걷어차버리면 어떡해!”

 

남은 연기 사이, 길드 마스터가 가락지를 빛내며 염동력으로 쇠뇌를 세우고 있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자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먼저 내쉰다. 그 다음 찾아온 것은 분노였다.

 

이 무례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네! 호위병과 전투마법사는 드워프를 전원 생포하라!”

!”

반항하는 자는 무력으로 제압해도 좋다!”

 

국왕의 명령 앞에 가릴 것이 없어진 호위병들이 물리력과 마력을 앞세우자 맨손의 드워프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스무 명의 드워프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데에는 열 명의 호위병과 열 명의 마법사만으로 충분했다.

 

으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 이것좀 풀어봐 빨리.”

흡혈귀에게 손대지 마라!”

 

포승줄을 풀려는 리베라나와 피시스에에게도 국왕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그 불호령과 함께 호위병들이 앞으로 나와 두 사람에게 칼을 겨눴다.

 

, 안 할 게요. 안 할 게요.”

흡혈귀를 따로 떼어놓으니 별의별 사달이 다 나는군. 나 원…….”

국왕이면 다냐! 우리한테 이러고도 무사할까봐!”

그러는 자네들은 드워프라고 왕궁에서 무기를 쓰고 귀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가! 상대가 아무리 흡혈귀라고 하여도 이곳은 왕궁이며 짐의 말이 곧 법이다! 입장을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자네들이 평화롭게 해결하지 않겠다면 흡혈귀의 처리를 확실하게 정하기 전까지 자네들을 수감하겠다! 호위병!”

!”

 

위병들은 포박한 드워프들의 몸을 샅샅이 뒤져 무기로 쓸 만한 도구나 잡동사니를 모두 빼내고, 두꺼운 면갑옷도 전부 벗겨 의복만 남기고, 얼굴을 가린 검은 투구도 빼앗았다. 맨얼굴이 드러나기 전까지 마구 으르렁대던 드워프들은 얼굴을 가리던 것이 사라지자 다들 기겁하며 흡혈귀로부터 얼굴을 돌렸다. 머리가 다들 짧고 수염도 풍성하다. 수염을 깎은 드워프도 있기는 있었는데 아주 짧게 깎아도 남은 수염자국이 거뭇거뭇해서 수염이 나지 않는 피부와 차이가 확연했다.

 

이것들이 하다하다 투구까지!”

흡혈귀 보지마! 흡혈귀 보지마!”

그 투구는 흡혈귀에게 씌워주게.”

? ?”

 

드워프 머리에 맞춰놓은 투구는 에립마브의 머리에는 헐렁했지만 얼굴은 충분히 가리고도 남았다. 투구 너머에서는 얼굴이 전혀 안 보여서 도대체 앞을 어떻게 보고 다니나 싶은 가림막은 안에서는 밖이 보이는데 밖에서는 안이 안 보이는 구조였다. 턱끈을 조여 쉽게 빠지지 않도록 고정을 하는 동안 에립마브는 은근슬쩍 리베라나에게 정신지배 마법을 걸어보았는데, 리베라나가 자신의 투구를 정면으로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시선 차단 효과 하나는 확실하다.

 

자네들 머리가 몸에서 떨어지기 전에 식힐 시간을 줄 테니 대화할 마음이 들거든 다시 말하게. 흡혈귀의 처분은 그때 다시 진지하게 의논할 것이네!”

너네 이러다 진짜 후회한다!”

훗날 조금 후회하기 싫다고 지금 더 크게 후회하고 싶지 않네!”

당장 이거 안 풀어!”

자꾸 시끄럽게 떠들어대면 흡혈귀 투구를 벗겨버릴 걸세!”

 

대광장에서 흡혈귀가 난동을 부릴 때도 침착하고 근엄한 모습만을 보여주던 국왕이 진심으로 진노하고 있다. 에립마브는 내심 드워프들이 국왕의 경고 같은 건 깡그리 무시하고 계속 난리를 피워주길 바랐다. 하지만 흡혈귀를 들먹인 경고는 아주 잘 먹혀들어 드워프들은 찍소리 못 하고 입을 닫아야했다. 스무 명의 드워프들은 칼과 장병기로 무장한 호위병에게 이끌려서 패잔병처럼 지하감옥으로 끌려갔다.

 

저들을 어찌 처분하실 것인지 여쭤보아도 되겠사옵니까?”

타국의 백성이 두르마르의 왕궁에서, 그것도 국왕의 앞에서 무장을 꺼내들고 난동을 부렸으니 두르마르를 향한 드워프의 무력도발, 또는 반역죄로 물을 수도 있는 일일세. 어느 쪽이든 주동자는 최소 사형이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침만 꿀꺽 삼킬 뿐 국왕의 말에 아무 이의도 제기할 수 없었다. 국왕이 말을 이었다.

 

허나 이번 사태는 흡혈귀가 연관된 만큼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네. 아무리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해도, 자네들은 한 나라의 국왕이 요정과 함께 흡혈귀를 귀빈으로 추대하고, 반대파를 모두 처형했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심정이겠나.”

절대 좋은 소리는 못 할 것 같습니다.”

역사라는 것이 원래 그런 걸세. 당사자들이 아니고서야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 들지 않으니. 저들을 사형에 처하는 일은 없을 걸세. ……드워프 대장이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궁내부장, 종이와 펜을 좀 가져다주게.”

 

국왕이 종이와 펜을 가져다 달라고 하니 나뮈의 열쇠들이 항상 가지고 다니는 종이와 펜을 바로 대령했다. 하지만 국왕은 손을 내저으며 열쇠의 종이와 펜을 물렸다.

 

서신으로 쓸 종이일세. 아무 종이나 쓸 수 없네.”

어디에 보낼 서신인지 여쭤도 되겠사옵니까?”

그야 드워프들의 대장이 아니겠는가.”

 

열쇠들의 기록용 종이 대신 궁내부장이 들고 온 종이는 아주 새하얗고 빳빳하여 구김이 전혀 없고 마치 광이 나는 듯 했으며 금빛 촉에 하얀 무늬가 새겨져있다. 에립마브는 그 펜이 본능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은이나 백금으로 무늬를 새겨넣은 것이 분명했다. 그 펜촉은 화려하게 일곱 빛깔로 반짝이는 새의 깃털에 달려있었는데 글을 쓰며 펜을 움직일 때마다 색이 현란하게 변했다. 다들 그 깃털의 광채에 넋을 놓는다. 종이에 새겨지는 글자는 촉과 깃에 비하면 아무 특색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깃털과 펜촉에 영향을 받기라도 했는지 굉장히 범상찮게 보였다.

 

아까도 소개하면서 말했지만 저들은 아이언힐에서 온 드워프라오. 아직 드워프의 땅 본토에는 소식이 닿지 않았을 것이네만, 이미 아이언힐에 소식이 들어갔다는 건 드워프의 땅까지 소식이 닿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오. 드워프 대장까지도 이렇게 격노하면 많이 난처하오.”

 

국왕이 종이에 적어나가는 글씨체는 손재주가 잔뜩 들어가서 굉장히 화려했다. 가이더링에서 받았던 서신의 글씨체와 똑같다. 가이더링에서 받았던 서신이 한두 장이 아니었는데 그걸 다 쓰려면 또 엄청 큰 일이었겠다, 러트너가 속으로 짐작했다.

 

질서와 창조의 신 가망의 은총이 함께하는 드워프들에게, 반홈의 빛 아래 반짝이는 두르마르의 국왕이 전합니다. 불미스럽게도 최근 드워프 대장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차원문이 흡혈귀에게 파괴되었으며 그 주범 되는 흡혈귀를 포획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대장 귀하보다 먼저 접한 휘하 드워프가 격노하여 왕궁에서 무기를 사용하는 등 적잖은 혼란을 초래하여 부득이하게 임시조치를 취하오니 해당 사건에 관한 대장 귀하의 의견을 여쭈고자 이 서신을 보냅니다. 왕궁에서 무기를 사용한 죄는 두르마르의 법대로 책임을 물을 것이되 흡혈귀의 처분은 드워프 대장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단 흡혈귀의 목숨이 요정 님의 목숨과 더 가이더링 길드 괴생물학파장의 목숨을 저당잡은 상태이기에 쉬이 처분할 수 없는 바, 처분은 무자비하되 목숨은 보존하여주시기를 청합니다. 두르마르 국왕, 쿠타오 3.’

 

서신을 다 적은 국왕은 종이를 돌돌 말았고 궁내부장이 같이 가져온 가느다란 비단천으로 살짝 묶어 두루마리를 만들었다. 가이더링에서 받았던 국왕의 서신과 겉모습은 완전히 똑같은, 완전히 똑같을 수밖에 없는 서신 하나가 뚝딱 완성되었다.

 

가능하면 사적으로 해결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게 만드는군. 드워프들도 그렇고 자네도 그렇고.”

……미안.”

드워프들의 처벌은 이 난장판이 매듭을 짓는대로 결정할 것이네.”

그럼 이 서신을 드워프 대장에게 보내야 하는데, 그럼 대장이 있는 곳까지 가야 하옵나이까?”

그래야지. 헌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려.”

 

국왕은 잘 말아놓은 두루마리 서신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턱을 괴었다.

 

자네들도 이 난리를 겪어보아서 알겠지만 드워프는 말이 잘 통하는 종족이 아닐세. 요정 님께서 그렇게 열심히 변호를 하셔서 간신히 설득하나 했지만 금세 또 무너지고 말았잖은가. 그러니 이 서신을 아무나의 손에 보냈다간 종족 전체의 노여움을 막을 수 없어 흡혈귀를 두고 전쟁이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라네. 읽지도 않고 찢어버릴지도 모르고, 사절단의 목숨까지 위협당하지 않을까 우려가 크네. 그렇다고 숨겼다간 일이 더욱 커질 것이고.”

지당하십니다.”

그렇다고 요정 님을 보낼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게. 아무리 그래도 어찌 요정 님을 그런 험한 곳에 보내겠는가. 요정 님, 그리고 자네 모두들 트루피아의 귀빈일세. 귀빈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모두 국왕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국왕도 이들에게 고개를 숙인다. 에립마브는 이런 고생을 하게 만드는 드워프들이 정말 꼴도 보기 싫었다. 그는 드워프 대장더러 실장석이라 부른 일을 내심 한 점 후회도 하지 않았다.

 

이 서신을 보낼 적임자는 딱 한 명 뿐이군. 궁내부장!”

, 폐하.”

 

오늘 궁내부장은 평소보다 배로 바쁘다. 그럼에도 드워프가 일으킨 소동이 워낙 요란했던지라 궁내부장은 피곤하면서도 피곤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국왕에게서 명이 떨어지자 즉각 이행하고, 다음 떨어질 명을 기다리며 늘 있는 자리에 대기한다. 가끔 보면 국왕의 그림자같기도 했다.

 

가능한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누구를 부르신 겁니까?”

드워프 사절이네. 드워프 사이에는 천대받는 직업이라 드워프의 땅보다 인간 사이에서 사는 것이 훨씬 윤택하오. 그래서 항상 아이언힐에 상주하고 있으니 부르면 바로 올 걸세.”

 

귀빈실 창문 너머로 파발마가 열심히 뛰어가며 잘 다듬은 도로를 두드린다. 다그닥 다그닥하며 소리가 멀어지는 방향을 대충 그려보니 관문으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인데, 바로 공간의 대성전을 향해 가는 모양이다.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귀빈실 안에서 아직도 쇠뇌의 연기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국왕은 턱을 괴고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다들 무슨 말을 먼저 꺼내기가 어렵다. 또 그만큼 이 침묵을 감당하기도 어렵다. 러트너는 요정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는 아무 말이라도 해보라는 눈빛을 보내봤다.

 

국왕이여, 이 몸이 미안하구나. 이 몸이 조금만 신중하여 다치지만 아니하였어도 흡혈귀와 이리하게 엮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니. 오늘같은 일도 벌어지지 아니하였을 것이야.”

요정 님이 무슨 잘못이 있으시겠습니까. 다 저 흡혈귀 놈 때문이지. 사실 언젠가 이런 일이 터질 것이라고 예감은 하고 있었소. 단지 이 정도로 과격할 줄은 몰랐지. 설마 왕궁에서 무기를 뽑아들고 난동을 부릴 줄이야. 천하의 오크도 그런 짓은 안 하는데 말이오.”

 

다시금 무거운 침묵이 방 안을 감돈다. 대화를 오래 이어가기 힘든 분위기 속에서 이번엔 에립마브가 넌지시 물었다.

 

근데, 이러면 회의장에서 했던 내용을 저 드워프들이 뒤엎어버린 거니까, 나 실장석 안 물어도 돼?”

, 넌 지금 그게 중요하니?”

 

다들 에립마브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한 대씩 때렸다. 아픔은 전혀 없지만 때릴 때마다 퍼지는 찰싹 소리가 명랑하다.

 

중요하지! , 요정 오라비. 넌 내 심정 아주 잘 알잖아. 너도 국왕한테 실장석 얻어먹고 죄다 토했다며?”

, ? , 지금 그 얘기는…….”

사실일세. 그 일은 확실히 짐의 실수였지. 이번 일을 계기로 해서 앞으로 적어도 연회 자리에는 실장석을 올리지 않을 걸세. 귀빈이 직접 주문하지 않는 한은.”

 

에립마브와 러트너 모두 동시에 몸을 부르르 떤다. 아직도 입 안에서 실장석의 잔해가 남아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리고 야, 너는 그때 내 피도 빨고 사람들 피도 빨고 리베라나 님 팔도 부러트려놓고 요정 님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놓고, 그런 짓을 해놓고도 실장석 모가지 무는 걸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이번 기회에 차라리 실장석을 물고 싶어질 정도로 더 끔찍한 벌을 줄까보다!”

실장석을 무는 것보다 끔찍한 거? 글쎄,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실장석한테 물리는 상상을 하던 에립마브는 리베라나의 답변을 듣고는 자신의 상상력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 깨닫는다.

 

예를 들자면 실장석이랑…….”

리베라나, 입 밖으로 내지 말거라.”

……무슨 얘긴지 알겠다.”

 

다들 리베라나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한 대씩 때렸다. 풍성한 머리칼은 때려도 별 소리가 나지 않지만 아파서 눈물이 나온다.

 

아야! 왜요! 저 아직 말 제대로 끝내지도 않았다구요!”

안 끝내도 다 알 수 있어요. 국왕 폐하 앞인데 처신에 조심하셔야죠.”

다들 쭙쭙이한테 세뇌되더니 정신지배라도 배우셨나보죠? 아야!”

 

요정이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손에서 빛을 발하니 아픈 동시에 시원하고 간질간질해서 맞으면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한 다섯 방 정도를 쥐어박은 요정은 헝클어진 리베라나의 머리칼을 다시 빗어주었다. 머리칼이 맞기 전보다 단정해졌다. 에립마브의 이야기를 들은 국왕은 이미 열쇠들의 기록에서 삽화를 통해 당시 증언을 들은 바 있어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쉽게 떠올릴 수 있었지만, 정작 왜 싫어하는지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물론 자신도 살아있는 실장석을 씻지도 않고 그대로 물라고 하면 싫겠지만, 사형에 처하는 대신이라고 하면 기꺼이 한 번 물고 입 싹 씻으면 그만일 것 같았다.

 

실장석 문다고 아픈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싫은가?”

뭐가 그리 싫냐고? 실장석 못 봤어? 때 꼬질꼬질하고 썩은내나고 허구한날 옷 입은 채로 똥싸고 그 상태로 바닥에 뒹굴고 여차하면 그 똥을 자기 손으로 집어서 던진다고! 그걸 내가 손으로 잡아서 내 입에 대야 한다고! 한 번 입에 물면 입에서 썩은내가 가시지를 않아! 그리고 여차하다 실장석이 고개라도 돌리면…… 으아아아아악! , 직접 해보기 전엔 몰라. 그런 짓거리를 미쳤다고 제정신으로 하겠냐!”

그러면서 항상 실장석 피만 빨고 있잖은가. 모순적이네만.”

좋아서 그러는 거 아냐. 가축 피나 사람 피를 빨면 사냥꾼이 들러붙어서 일부러 실장석만 빠는 거라고. 너네가 흡혈귀로 살아가는 고충을 알아!”

 

에립마브가 역겨움과 두려움에 질려 성질을 버럭 내는데 옆에서 길드 마스터와 피시스에가 끼어들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물어줘야 돼. 그냥 흡혈귀가 무는 거랑 특별한 흡혈귀가 무는 거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연구해야 하거든.”

“아무 차이 없을 것 같은데, 으으.

안 그래도 돼. 쭙쭙이 네가 특별한 흡혈귀인 거지, 그 특별한 흡혈귀가 꼭 너일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 어휴, 피시스에 너 간만에 듣기 좋은 말 한다.”

근데 특별한 흡혈귀는 쭙쭙이밖에 없잖아요.”

없으면 만들면 되지.”

 

피시스에는 집 앞 마실 나가는 이야기 하듯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고 에립마브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자기가 특별한 흡혈귀 노릇을 하고 있으니까 어떻게 되는지도 잘 알 거 아냐? 실장석 몇 마리 잡아다가 그 특별한 흡혈귀로 만들면 끝.”

만들 줄도 모르면서?”

네가 알지 내가 아나.”

 

피시스에가 입꼬리 한 쪽을 씨익 올리며 에립마브에게 웃어보인다. 에립마브는 그 웃음이 정말 정말 보기 싫었다. 실장석의 탐욕스러운 웃음만큼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조롱하는 웃음은 누가 짓든 정말 보기 싫었다.

 

일단 안 해줄 거고, 한다고 해도 마음대로 되는 게 아냐! 의식이 엄청 복잡해. 인신공양도 해야 하고, 개기월식이 일어나는 날 밤에 육각형 거울 8개를 둥글게 배치해서 달빛이 한 자리에 모이게 해야…….”

그런 게 있어? . 난 지금껏 그냥 흡혈귀의 정…….”

으아아아아아아! 너어어어가아아아 잘못 알고 있는 거야아아아아아아아!”

 

아직 피시스에가 말을 제대로 마치지도 않았는데 에립마브는 의자에서 펄쩍 뛰려다가 성수에 적신 밧줄을 끊지 못하고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돌바닥에 뒤통수를 세게 부딪히자 투구가 울린다. 넘어지고 나서도 의자에서 발버둥치는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실장석 같은 에립마브를 길드 마스터가 염동력으로 다시 일으켜주었다.

 

, 여기 다른 마법사들도 있고! 국왕도 있고 요정도 있고 길드 마스터도 있고 드워프도 있는데 흑마법 얘기는 그만 하자구, ? 에이, 실장석 무는 것 정도는 별 일도 아니지! 그럼! 평생직장으로 삼으라면 좋구나 하고 삼을 수 있어!”

흡혈귀가 저렇게 겁에 질릴 정도라니 얼마나 무시무시한 방법이란 말이오?”

굉장히 궁금하지만 또 알고 싶지는 아니하구나.”

그치? 그만하자! 나도 생각해보니까 너희들한테 진짜 씻지 못할 죄를 졌고, 드워프한테도 죄를 졌고, 나 때문에 왕궁에도 큰 민폐를 끼쳤고, 지금 내 존재만으로도 여러 가지로 지은 죄악이 많잖아? 피로써 이룬 죄악은 피로써 씻어야지. 실장석의 피로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실장석으로 흡혈귀 만드니 뭐니 하는 소리는 삼가주라…….”

……저것이 무슨 일로 참을 고하는고……? 도대체 무슨 방법이기에.”

 

요정마저도 어리둥절할 만큼 에립마브의 반응은 낯설었다. 피시스에가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러트너는 어딘가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는데 흑마법과 관련된 이야기기도 해서 대놓고 물어보기가 좀 꺼려졌다.

 

. 근데 만약에 쭙쭙이가 실장석을 특별한 흡혈귀로 만들면 실장석이 마력을 다룰 수 있을까?”

그냥 실장석은 마법을 쓸 수 있을까요?”

마력동석이 마력에 직접 노출되면 깨져버리니까 힘들걸.”

어차피 마법 쓸 때 몸에 마력이 직접 도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일단 마법을 배우는 게 먼저인데, 그 멍청이들 지능으로 마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길드 마스터가 끼고 있는 가락지에 실장석의 마력동석이 박혀있으니 어느 귀부인의 손가락에 끼워져있어도 자연스럽게 화려했다. 그래도 저 보석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알고 다시 보면 그리 고급스러워 보이지도 않는다. 길드 마스터는 가락지 위에 계속 빛덩이를 띄워놓고 있었다. 마력의 한도를 재보려는 듯했다. 다들 머릿속으로 실장석이 마법을 쓰는 장면을 대강 그려보고 있었는데, 마법 전공자들은 자기 학파에 관련한 마법을 쓰는 실장석을 생각하는 반면 비전공자들이 생각하는 마법사 실장석은 그저 창의적이고 독특하고 역겨운 방법으로 사방에 똥을 뿌리는 괴물의 모습 뿐이었다.

 

, . 이리로 와봐.”

…… 데스우……?”

 

에립마브의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방구석의 실장석이 순순히 앞으로 나온다. 온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겁에 질린 건지 추운 건지는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나 투구 좀 잠깐 벗겨주면 안 돼? 드워프들도 없고. 얘한테 기초마법 몇 개만 새겨보게.”

절대 안 되네.”

그럼 말고.”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비벼가며 투구를 빼보려 했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투구를 빼내려다가 빠지는 대신 옆으로 돌아가서 시야가 틀어지는 등 더욱 불편해지기만 했다.

 

마스터 가락지 하나 빼서 줘봐요. 쓸 수 있나 보게.”

손가락도 없는 게 가락지를 어떻게 쓰냐?”

아 그걸 생각 못 했네. 목걸이나 팔찌는?”

가락지든 팔찌든 목걸이든 기본적으로 마력공식을 알아야 쓸 수 있는 거야. 지금 이거는 여기서 우리밖에 못 쓴다고?”

주문서는? 나 주문서 몇 개 있는데.”

주문서? 줘봐. ……. 소생낙뢰, 신성결계, 온난화, 너무 고급 주문만 챙기고 다니는 거 아냐? 오, 음향파랑 가속도 있네. 음향파는 말고 이거 줘보자.”

펼쳐서 보여줘. , 저 종이에 그려진 그림을 그대로 손으로 따라그려봐.”

 

피시스에가 실장석의 앞에 가속 주문서를 펴자 러트너의 눈에 잘 익은, 그림처럼 휘갈겨 쓴 글씨가 보이고 에립마브가 명령하자 실장석은 일단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종이를 한참 응시한다. 응시하기만 한다. 손을 든 상태로 종이를 한참동안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하면서 가만히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서있는지 두고보자, 다들 실장석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실장석은 가만히 있다. 아무리 기다려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실장석이 죽어버렸나, 이게 나한테 반항을 하는 건가 싶어 에립마브가 호통을 쳤다.

 

!”

, 데에에에! 데에에에에엥!”

닥쳐! 뭘 멍하니 서있어? 그대로 따라서 손으로 짚어보라니까?”

, , 데스, 데스데스, 데스데스우웅…….”

 

실장석이 호통 소리에 풀이 죽어 뭐라뭐라 말을 하자 요정이 덧붙였다.

 

문양이 너무 어려워서 따라그리지를 못 하고 있노라.”

어휴, 이렇게 답답하도록 멍청하냐. 아니 그냥 손으로 따라 그리기만 하면 되는걸 못 알아본다고? 여기 선에 손을 짚어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걸……. 어우 열받아.”

광원주문 줘봐. 이건 간단하니까 쉽게 그리겠지. 몇 시간 짜리야?”

“6시간 짜린데요.”

, 실험하는 것 치고는 좀 긴데. 다른 게 없으니 뭐.”

 

가속주문서는 다시 말아버리고 광원주문서를 새로 꺼내 펼친다. 광원주문서의 그림은 가속주문서보다 훨씬 간단했다. 동그라미 안에 광원이라고 쓰인 글자가 끝이었다. 휘갈겨 쓴 정도도 심하지 않아 알아보기 쉽다. 과연 실장석도 쉽게 알아봤는지 손으로 종이 위의 선을 천천히 따라갔다. 먼저 글자를 따라 그리고 글자 끝에서 시작하는 동그라미를 빙 돌려 그리자, 주문서가 가루가 되고 가루가 빛을 내면서 공중에 뭉쳐 밝은 빛을 낸다. 손이 묶인 에립마브를 제외한 마법사들은 박수를 쳤다. 실장석은 그 신비한 빛덩이에 홀려 시선이 고정된다.

 




데헤에…….”

주문서는 쓸 줄 아네.”

당연히 쓰겠지, 주문서는 마력 못 다루는 드워프도 쓰고 저 멍청한 요정 오라비도 쓰는 물건인데! 멍청해서 문양 못 알아보는 것만 빼면.”

하긴. 마법역량을 측정하려면 주문서 사용이 아니라 주문실현이나 주문서 제작을 시켜봤어야…….”

아니 잠깐만, 왜 갑자기 주제가 이렇게 새버리는 거예요?”

 

언제 누구 입에서 튀어나왔는지 기억도 잘 안 나는 주제로 에립마브를 포함한 마법사 4명이 순식간에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고 있으니 저게 마법사 직업병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러트너는 실장석이 마법을 쓸 수 있는가, 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라고 하면 그런 토론 할 시간에 실장석 10마리는 더 잡겠다라며 뛰쳐나가 실제로 10마리 실장석을 잡아올 자신도 있었다.

 

그리고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마법 안 쓰고 손으로 똥을 퍼서 던지는 괴물이잖아요. 염동력 배워서 똥을 마법으로 투척하면 어떡해요? 저같은 비마법사들한텐 큰일이라고요. 제자리에 앉아서 사람들 짐가방에 새끼도 던져넣고 아주 혼돈의 도가니일 걸요?”

. 상상된다.”

쭙쭙이처럼 피 빠는 흡혈귀 흑마법사 실장석이 나오기라도 한다면 그것도 큰일이지.”

거기다 가속 마법이나 비행 마법으로 도망쳐대면 잡기도 힘들 거고.”

우리도 마법으로 반격하려들면 마력차단막 펼치고……. 어우. 그런 거 싫다.”

그래도 궁금한데. 만약에 실장석에게 마법을 제대로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바로 학파 교수로 임명할 수도 있을걸.”

 

실장석이 멍청해서 다행이다, 러트너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실장석이 마법을 쓴다고 생각하니 멍청하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훨씬 다행이다. 아니면 실장석은 물론이고 자기 같은 천치는 쉽게 배울 수 없을 만큼 마법이 어려워서 다행인 건가, 둘 중 하나를 고르기 어려웠던 러트너는 둘 다에게 감사하기로 했다. 아렌지의 은총으로 세상은 아직 그렇게 더럽혀지지 않았으니. 마법 광원을 띄워놓은 실장석은 에립마브가 고갯짓을 해서 저리 가라고 하자 다시 방구석으로 돌아갔는데, 자신을 따라오는 광원에 신기해하면서 잠시동안 그 광원을 쫓거나 자기가 광원에게 쫓기는 등 마법 빛덩이로 스스로 놀고 있었다. 그러다가 에립마브가 또 꾸중을 하면 놀다가도 방구석에 찌그러져서 소리없이 훌쩍여야 했다. 실장석은 자신의 주위를 떠다니는 빛덩이를 바라보면서 훌쩍거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라 중얼거리는지 소리도 작고 발음도 웅얼거려서 요정마저 알아들을 수 없다. 실장석은 빛덩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사람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킥킥 웃어댔다. 마치 빛덩이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데스…… 데스데스…… 데스데스웅…….”

나처럼 흡혈귀가 된다고 머리가 똑똑해지는 건 또 아니거든? 그러니까 실장석을 특별한 흡혈귀로 만들어도 마법은 평생 못 쓸 거야. 아마 일단 똑똑한 실장석을 만들어야겠지. 주문서 그림도 못 알아본다는 게 말이나 되냐?”

머리가 똑똑하다고 해도 결국 마법은 못 쓸 것 같은데. 대충 흡혈귀 되는 방법을 생각해보면.”

무슨 소리냐? 넌 방법도 모르면서.”

 

러트너가 하는 말에도 마법사들이 하나같이 갸우뚱했다. 러트너는 엄지와 검지로 턱선을 쓸면서 말했다.

 

대충 무슨 방법인지 예상이 가거든. 근데 그 방법을 쓰면 실장석이 마법은 못 쓰겠어.”

……? 무슨 방법? 난 지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거든?”

제가 아는 방법과도 다른 것 같은데……. 러트너 씨, 귓속말로 좀 해주실래요?”

 

피시스에가 러트너를 향해 몸을 숙이자 러트너가 그의 귀에다 대고 자신이 생각한 방법과 이유를 소근소근 말한다. 피시스에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먹지도 않은 음식에 사레가 들러서 거칠게 기침을 해댔다.

 

푸크흑, 커헉, 어으흑! 으음. 허윽.”

대체 무슨 방법을 생각한 거야, !”

, 리베라나! 너 러트너 씨한테 반쉰의 법칙 얘기 해드렸어?”

? . 여행길에 같이 잠자리를 쓸 일이 있었거든요. 혹시나 눈맞을까봐 싶었죠. 러트너 님이 싫다는 건 아닌데 마법이 더 중요하니까.”

반쉰…… 하이고 맙소사.”

반쉰? 뭔데 그게. 두르마르에만 있는 거냐? 


피시스에와 길드 마스터는 얼이 나가서 서로를 쳐다보았고 에립마브도 리베라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투구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러트너를 포함한 비마법사들은 대체 무슨 연유인지 자기들끼리 돌아보며 추측할 뿐이다. 요정은 러트너의 옆구리를 찌르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물어보았는데, 러트너는 말하기를 꺼렸다. 그리고 피시스에가 다시 러트너의 어깨를 당기며 귓속말을 한다. 피시스에는 입모양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입을 손으로 가려가며 소곤소곤 이야기했다.

 

, 방법은 그게 맞는데요, 25살 이전에 해도 마력 다루는 데 아무 지장 없어요.’

 

러트너의 눈썹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요정도 눈썹이 꿈틀꿈틀한다.

 

그거 그냥 애인 못 만드는 마법사들이 자조하면서 만들어낸 얘기에요. 근데…… 왜인지 몰라도 리베라나는 진지하게 믿고 있는 거고. 지금처럼 믿고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으니 한동안은 비밀로 해주세요.’

 

피시스에가 속닥속닥 귓속말을 하는 동안 러트너는 리베라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리베라나도 이야기가 끝난 러트너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는데 어째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기 민망했다. 러트너는 서둘러 이야기를 둘러대면서 마무리지었다.

 

, . , 그렇군요. 제가 생각했던 거랑 전혀 다르네요. 이제 바로 잊어버릴게요.”

무슨 생각? 그 반쉰의 법칙이란 게 대체 뭔데!

국왕 폐하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하겠니?”

 

러트너는 에립마브의 머리통을 투구도 벗기지 않고 그대로 퍽 내리쳤다. 러트너의 손만 아플 뿐이지만 행위 자체로 만족스럽다. 러트너가 답을 해주지 않자 에립마브는 리베라나에게 다시 물었다.

 

, 네가 요정 오라비한테 말해줬다며. 무슨 얘긴데 저게?”

반쉰? ~. 나중에 알려줄게. 3년 뒤에, 내가 25살 되면?”

네가 25살 되면? 몰라, 그때까지 못 기다려. 가이더링 돌아가면 다른 마법사한테 물어봐야지.”

그러시든가.”

 

실장석의 마법 사용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무거운 분위기가 어느 정도 풀리고 모두들 원래의 활기를 되찾는다. 국왕의 옆에 요정이 앉아 노여움을 달래주고 에립마브를 포함한 마법사들은 잠시 마력에 관해 열띤 토론을 나누었으며 열쇠들은 그 과정을 기록하는 등 다들 자기들만의 전공을 살리기에 여념이 없다. 혼자서만 멍하니 앉아있던 러트너는 잠시 자신의 전공이 무엇이었는지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러트너는 사냥꾼이다. 그리고 그가 가장 잘 잡는 사냥감은 지금 방구석에 쭈그려 앉아서 빛덩이와 말을 섞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실실 웃는다. 꼴도 보기 싫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냐?”

[, ? , 오마에는, 몰라도 되는데스…….]

 

실장석의 대답을 듣고 러트너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금세 풀렸다. 러트너는 자신이 손에 아무 것도 들지 않은 채로 실장석에게 대답을 들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 잠깐, 뭐야. 이 자식 쭙쭙이한테 세뇌되고 나더니 언나 없이도 사람 말을 알아듣네. 근데 좀 건방지다? 몰라도 된다고? 어디 흡혈귀 노예 주제에.”

[오마에가 와타시의 주인도 아닌데 왜 참견데스!]

내가 네 주인보다 높으신 분이거든? 가서 말한다? 싸가지 없는 게 꼴도 보기 싫으니까 혼쭐좀 내주라고. 이마빡에 구멍이 하나로는 부족하지?”

[데에에에에에! 데에에에에에! , 주인사마! 이 똥닌겐이 와타시를 아프게 하는데스우우우우! 혼내주는데스우우우우!]

 

방구석에서 조용히 있던 실장석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니 다들 관심이 절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실장석은 자신의 주인 에립마브만을 불렀는데도 모두가 돌아본다.

 

러트너, 또 할 일이 없어 실장석이나 괴롭히고 있었느냐?”

괴롭히다뇨! 전 그냥 대화를 시도했을 뿐인걸요. 이 녀석 쭙쭙이한테 세뇌되고 나더니 언나 없이도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구요.”

허허, 대화만 시도했는데 소리는 왜 지르는가?”

저도 모르겠사옵니다, 폐하. 이것들이 종잡을 수 있는 생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하니 이 기회에 그 생물에게 인간의 예의범절이라는 것을 좀 가르쳐보는 것이 어떻겠나. 그런데 어제까지만 해도 못 본 것 같은데 그 실장석은 언제 데려왔는가?”

 

오크 챔피언 아이라즈가, 라고 대답하려던 러트너는 잠시 입을 꾹 다물고 국왕에게 거짓을 고해야 하는 자신의 죄악이 용서받을 수 있기를 모든 신들에게 빌었다.

 

쭙쭙이가 기절해있을 때 피를 공급하려고 사들인 실장석 중 한 마리를 남겨두었사옵니다. 혹여나 또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거든 즉각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본디 궁에 실장석을 들이는 것은 금하고 있거늘 흡혈귀가 참으로 호강을 하는구려.”

호강? 그래 뭐, 죽는 것보단 호강이지. 개똥 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잖아.”

실장석 똥밭에서 구르라고 하면 구를래?”

차라리 날 죽여.”

 

에립마브의 대답에 모두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실장석의 울음소리도 커져만 간다. 실장석의 주인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을 위협하는 인간과 웃고 떠들면서 재미를 보고 있을 뿐이다. 불공평하고 불합리했다. 주인 되는 이가 키우기로 한 실장석을 방치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반인륜적인 범죄행위와도 같거늘, 실장석은 제자리에서 콩콩 뛰면서 그 점을 집중적이고도 논리적으로 부각했다.

 

[주인사마아아아아! 와타시가 죽는단 말인데스으으으!]

그럼 죽어, 새꺄!”

[, 데에에에엥…… 데에에에엥…….]

아니다, 잠깐, 지금 죽지는 말고. 나중에. , 너 계속 시끄럽게 떠들면 아가리 닥칠 때까지 내 시종이 두들겨 팰 거니까 처맞기 싫으면 조용히 있어. 알겠어?”

[…….]

 

실장석은 말 없이 뜨거운 눈물을 철철 흘려댔다. 적록의 피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누렇게 때가 낀 앞치마를 적신다. 그래도 통곡하는 모습은 실실 웃는 모습보다 보기 좋았다. 러트너는 실장석의 소리 없는 통곡을 들으면서 에립마브에게 따졌다.

 

시종은 누가 네 시종이야!”

종복보다는 시종이 낫지? , 뭐라고 불러줄까. 도련님? 영주님? 공주님? 국왕 폐하? ! 네놈이 감히 두르마르의 국왕 앞에서 역모를 꾸미려 들어!”

역모는 무슨, 억지도 정도가 있지 인마. 그리고 난 국왕의 재목이 아니야.”

 

러트너가 말을 하면서 국왕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쿠타오 3세도 에립마브가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았기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국왕은 에립마브의 말을 받아주며 자신의 왕관을 잠깐 벗었다. 국왕의 펜과 마찬가지로 금으로 테를 만들고 백금으로 무늬를 새긴 뒤 형형색색의 보석을 박고 머리에 쓰는 부분을 비단으로 채워 머리에 잘 얹히면서도 착용감도 편한, 두르마르 장인들의 손길이 듬뿍 들어간 왕관이다.

 

왕관을 잠시 줄 터이니 써보겠는가?”

 

러트너는 얼굴이 새하얘지다 못해 까무러칠 지경이다. 다른 사람들도 국왕의 반응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누가 봐도 진중한 일이 아니었기에 곧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러트너의 반응을 기다린다. 막상 그 주인공 되는 러트너는 웃지도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하고 있었다.

 

, 에에에에에에! ,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제게는 턱도 없는 일이옵니다!”

어명일세. 요정의 선구자 러트너는 즉시 무릎을 꿇고 왕관을 받게.”

, , , , 이이이…….”

어명이라시잖아요! 빨리 꿇으세요!”

그래, 지금 아니면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있겠어요?”

 

러트너의 뒤에서 리베라나가 무릎 뒤쪽을 발로 차 강제로 한 쪽 무릎을 꿇렸다. 러트너가 덜덜 떨면서 몸이 굳어버린 사이 국왕은 벗은 왕관을 러트너의 머리 위에 살포시 올려주었다. 너무 떨어서 왕관이 머리에서 떨어질 것만 같다. 왕관이 원래 이렇게 무거운 건가, 아니면 내 머리가 무거운 건가, 고개가 자꾸 내려간다.

 

고개를 들라.”

 

그러나 국왕의 목소리는 떨어지는 고개도 다시 들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사람들도 모두 국왕의 뒤쪽으로 와서 왕관을 쓴 러트너의 모습에 웃으며 감탄했다.

 

요정 님이 보시기에 어떠하오?”

왕관 덕분에 러트너가 평소보다 멍청하게 보이는구나.”

어디 어디, 으아, 진짜 러트너 님은 국왕 하시면 안 되겠어요.”

동화 속 왕 중에 이런 분위기의 왕이 하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늪지대 오우거랑 당나귀가 나오는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정확히 그런 분위기는 아닙니다. 그런 느낌이 있긴 합니다만, 여러 이야기의 다른 왕들이 섞여있습니다.”

, 존엄하신 러트너 국왕 폐하. 폐하의 신료들이 모두 집결했사오니 명을 내려주시옵소서.”

러트너 폐하, 이 간악한 흡혈귀의 운명을 결정하셔야 하옵니다.”

푸흐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 , , , 안 된다고, 했잖, 아요, , 이 왕관을 다시 내려주시옵소서 폐하…….”

 

러트너의 머리에서 왕관이 자리를 벗어났지만 머리가 아직도 무겁다. 도대체 어쩌다 일이 이 지경으로 커졌는가, 러트너는 자기 머리 위에 왕관이 얹혔다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거기에 국왕이 한 마디를 더하니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 정말로 죽어버릴 것만 같다.

 

짐이 아직 후계자가 없던 차였는데 마침 잘 됐구려.”

, 아니되옵니다 폐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하하하하! 농일세, . 공적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함부로 꺼낼 수 없으니 지금이라도 해보는 걸세. 걱정 말게나. 짐에게는 이미 왕태자가 있으니. 잠시 유학하러 나가있느라 두르마르에 없을 뿐이네. 요정 님을 뵐 수 있는 기회를 놓치다니 안 된 일이네.”

러트너, 숨을 깊게 쉬거라. 농이라 하지 아니하느냐.”

 

국왕이 왕관을 다시 머리에 쓰려는데 그의 뒤에서 궁내부장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러트너의 머리도 가벼워진다. 만약 궁내부장이 방금 전 내 모습을 봤다면 설마 역모로 여겼으려나? 대광장에서 목이 잘린다든가 하는 끔찍한 상상은 그만 하기로 했다.

 

국왕 폐하. 찾으시던 이가 지금 바깥에서 폐하의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들라하게.”

 

국왕의 말에 드워프 사절 세탑 나이가 귀빈실로 들어오며 모습을 보인다. 그 키가 짤막하고 다리는 더욱 짤막하니 걸음걸이가 인간 어린아이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던 세탑 나이는 국왕이 입을 열자 고개를 들었다가 국왕 옆에 드워프 투구를 쓰고 있는 에립마브를 보고는 숨이 턱 막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부르셨습……. , , 저 투구는, , 설마!”

걱정 말게. 자네 동족들은 지금 지하감옥에 안전하게 모셔놨으니.”

지하감옥……? 폐하! 흡혈귀와 결탁하신 겁니까!”

자네 동족들이 흡혈귀를 내놓으라며 짐과 귀빈 분들에게 쇠뇌를 쏘아댔네.”

 

세탑 나이는 국왕의 말에 흠칫 놀랐다. 요정도 국왕의 진실같은 거짓말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러트너가 손을 잡고 놀라지 말라고 다독였다.

 

자네는 먹물이니 잘 알겠지. 국왕에게 무기를 겨누면 어찌 되는지?”

, 그렇사오나, 상황의 특수성을 이해해주시길 간청해주시는 바…….”

그 상황이 반역죄를 감수하면서까지 용납할 수 있다고 보는가?”

……그것이…….”

아니지, 반역은 이 나라의 백성에게만 물을 수 있는 죄이니 드워프들에게는 옳지 않아. 국왕을 시해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드워프가 두르마르에게 던지는 도발이지. 지금이라도 전쟁을 선포할 명분은 충분하다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조차 들을 수 없다. 국왕은 말에 감정을 드러내보이지 않으려고 무척 애쓰고 있었다. 눈빛을 읽지 못하는 이들이라도 어렵잖게 이해할 수 있다.

 

그 드워프들은 트루피아에 발도 들이지 않았는데 잘도 흡혈귀의 얘기를 알고 있더군. 누군가 전해주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을 터. 따지자면 그 자도 도발에 도모하였다고 볼 수 있겠지.”

허나, 폐하, 그것은…….”

이 흡혈귀도 국왕을 위협한 적은 없었네. 흡혈귀도 안 한 짓을 드워프가 해냈단 말일세. 그래놓고도 자네는 계속 그들을 두둔할 셈인가? 동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말을 하면서 국왕은 에립마브의 투구를 손으로 탁탁 쳤다. 에립마브가 짜증을 내면서 국왕을 돌아봤다.

 

, 폐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역모나 선전포고의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며 그저 흡혈귀를 단죄하기 위하였음을 이해하여주시옵고, 주시옵고, 제 동족들을 이대로 죽이시거나 전쟁을 선포하시면 국왕 폐하와 두르마르에 좋지 않은 영향이 쌓여갈 것을 알아주시기를…….”

물론 그렇지. 그래서 내 자네를 부른 걸세. 고개를 들게.”

 

세탑 나이는 고개를 들었다. 가뜩이나 작은 키에 무릎까지 꿇고 있어 국왕을 올려봐야 했다. 귀빈실 입구에 선 세탑 나이의 위치에서 국왕 쿠타오 3세의 뒤로는 귀빈실의 활짝 열린 노대 문과 그 문으로 들어치는 태양의 광채가 가득하다. 그 광채가 국왕을 비추어 그의 얼굴을 제대로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받게.”

 

국왕은 탁자에 있던 서신을 들어 드워프 사절에게 건넸다. 사절은 두 손으로 공손히 그 서신을 받아들었다.

 

오늘 있었던 혼란과, 자네의 동족들의 처분을 결정해달라는 내용을 담았으니 자네의 대장에게 전하라. 이건 어명이다.”

, . 폐하.”

기한은 얼마든지 주지. 원한다면 돌아오지 않아도 좋네. 자네 동족들은 자네가 돌아오고 나서 그 처분에 따라 결정할 것이고, 자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처분이 정해지지 않으니 계속 감옥에 갇혀있겠지.”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폐하. 그런데 저, 묻고 싶은 게 있사온데 물어도 되겠사옵니까.”

얼마든지.”

저 흡혈귀는 어떻게 처분할 생각이시옵니까?”

그 서신에 다 담겨있네. 자네는 그저 서신을 전하고 답신을 받아 돌아오기만 하면 되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세탑 나이는 말을 끝마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허둥지둥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리가 짧은데도 전력질주하는 속도는 평범한 인간이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신을 건넨 뒤 국왕은 이마에 손을 짚으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어깨를 짚는 손이 있어 고개를 돌리니 요정이 손에서 빛을 내며 국왕의 어깨를 주물러주고 있었다.

 

그대가 흡혈귀 때문에, 또 이 몸 때문에 고생이 많도다.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요정 님.”

이 몸이 하여줄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어 더욱 미안하구나. 그대가 이 몸에게 바라는 것이 있느냐?”

국왕이 바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요정 님께. 그저 자주 뵙고 가까이 지낼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하지요.”

 

요정의 빛에 닿은 국왕은 근심이 잠시나마 녹아내린다. 손아귀 힘이 세다고 할 수는 없었음에도 어깨가 굉장히 시원했다. 알면 알수록 신기한 요정의 힘,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어봐도 요정은 자기도 모른다고만 대답한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어쩌면 그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빠르게 움직여줄지 모르지만, 빠르면 닷새에서 늦으면…… 평생 정도 걸리겠지. 드워프의 땅까지 순간이동이 불가능하니 시간이 꽤 걸릴 것이오. 그래도 트루피아까지는 순간이동이 가능하니 그리 길지만도 않을 것이고. 그 사이에 여러분들이 따로 계획이 없으시다면 돌아가셔도 좋소. 흡혈귀는 빼고 말이오.”

나는 왜?”

드워프는 가둬놓고 흡혈귀는 자유롭게 활개치게 놔두면 이를 좋게 보겠는가?”

.”

 

에립마브는 설마 이 투구도 계속 쓰고 있어야 하나 싶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갇혀있는 것보다도 투구를 계속 써야 한다는 것이 더욱 싫었다.

 

하지만 괴생물학파에 보호격리한다는 계약 내용도 있었으니 이 또한 지켜야 할 터.

“물론 확실하게 시킬 것이옵니다.

“그리할 것이라 믿네. 헌데 그것을 드워프들에게 확실히 믿게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 촬영수정과 투영수정이 있으니 그걸로 에립마브의 일거수일투족을 계속 찍으면 어떻사옵니까?”

근데 하루 종일 찍으려면 수정이 한두 개로는 안 끝나는데. 그걸 또 최소 닷새 넘게 찍고 또 여기까지 가져와서 보여주려면…….”

저와 쿱 동지가 쭙쭙이의 일상을 기록하는 건 어떻사옵니까? 종이는 수정보다 운반도 편합니다.”

글 읽기 싫어하는 드워프들을 글로 설득하기는 힘들 겁니다. 무엇보다 글은 수정이 가능하니 말입니다.”

 

마법사들도 비마법사들도 생각할 만한 방법은 마법적인 방법밖에 없었다. 닷새 동안 쉬지 않고 확실하게 감시할 만한 방법이 마법적인 방법이 아니고서야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감시할 인원을 하나 붙여놓지 않는 이상, 그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러트너가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다.

 

감옥의 드워프 한 명을 쭙쭙이랑 같이 지내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 계속 해보시오.”

어차피 드워프도 여기에 갇혀있어야 하는 신세이잖습니까? 기왕 갇혀있는 거 쭙쭙이랑 갇혀있으면 장소만 다를 뿐이지 갇혀있는 건 똑같고. 갇혀있는 동안 쭙쭙이가 드워프에게 아무 짓도 안 하고 얌전하게 있으면 드워프도 쭙쭙이를 어느 정도 신뢰해줄 겁니다. 그리고 다시 이곳에 모였을 때 드워프가 무사한 것을 보고 다른 드워프들도 쭙쭙이를 그렇게 위험하게 여기지 않을 테죠.”

…….”

 

국왕도 괴생물학파장도 나뮈의 열쇠도 물론이고 요정도 듣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러트너가 했던 말의 대부분은 일단 드워프를 쭙쭙이와 가둬놓자고 말해놓고 대충 둘러댄 말이었지만 말해놓고 보니 또 그럴싸했다. 러트너는 다시금 자신의 임기응변 능력에 감탄하며 아렌지께 감사했다.

 

러트너 그대도 알게 모르게 사리를 구분할 줄 아는구나!”

헌데 그것도 쭙쭙이가 제대로 협조해줄 때 얘기인데…….”

나한테 꼭 언제는 선택권이 있었던 것처럼 말한다. , 잠깐 하나만. 날 가이더링에 넣는다고 쳐. 치는 게 아니라 넣을 수밖에 없겠지. 그럼 나 이 투구 안 써도 돼?”

 

에립마브는 투구를 벗어던져보려고 머리를 좌우로 마구 흔들었지만 단단히 조인 턱끈은 도무지 풀릴 생각을 않는다.

 

같이 들어갈 드워프가 싫다고 하면 계속 쓰고 있어야…….”

내가 왜! 드워프더러 쓰라고 해! 내 격리실인데 내가 손님 사정 봐줘야 하냐?”

아니에요. 무조건 투구 없이 살게 해야 돼요. 드워프랑 쭙쭙이 둘 다.”

 

웬일로 요정 오라비가 내 편을 들어준담, 에립마브가 러트너의 말에 고개를 반짝 들었다.

 

지금 투구를 왜 씌워놨습니까? 쭙쭙이가 정신지배나 세뇌같은 거 걸까봐 그런 거잖아요? 투구를 벗겨놓고도 정신지배랑 세뇌를 안 쓰는 걸 확인하면 나중에 드워프들이랑 만나도 투구를 씌울 필요가 없어질 거예요. 지금도 사실 요정절 내내 쭙쭙이가 이곳 사람들한테 피해 끼친 것도 없었잖아요? 정신지배로 피해를 끼칠 뻔하긴 했지만, 인명피해는 없었고요.”

네가 웬일로 날 변호를 다 해주냐. 진짜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왕관 한 번 쓰고 나니 머리가 잘 돌아가냐?”

학파장 님 때문이지 너 때문이 아니거든?”

러트너 폐하께서 저렇게 열변을 토하시는데 감사하다고 해야지, 쭙쭙아!”

감사는 얼어죽을, 다 이론상 얘기 아냐. 드워프가 좋다고 할 때 얘기지!”

 

에립마브의 반론은 국왕이 쉽고도 허탈하게 반박해주었다.

 

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나? 짐이 국왕이거늘.”

…….”

 

애초에 왜 허락을 받을 생각부터 했지? 에립마브는 점점 혼란해졌다. 혼돈과 파괴의 신 가망이 자신에게 크나큰 은총을 내리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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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의 마지막 스크가 되겠군요. 정작 이 스크 1화는 2019년의 3번째 스크였는데 말이죠. 과연 2020년에는 끝날런지.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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