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카오스 럭키짱 천일모험기를 능가하는 진정한 판타지 실장석 참피 소설 실장석과 환상 34화 : 덧없는 화

 학파장 님~. 요쟁이가 왔어요~.”

, 누구? 어이구! 어이구! 아이고 리베라나! 무사했구나! 아휴, 갑자기 드워프들이 쳐들어오길래 무슨 일 났을까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데!”

 

이제는 공간조율학파의 유명인사가 다 된 리베라나는 그 유명세를 만끽하며 으스대면서 학파장 카부스 욘손을 다시 만났다.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리베라나가 카부스에게는 너무도 감격스럽다. 요정과 길드 마스터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었는데도 카부스는 오직 리베라나만 각별하게 챙겼다.

 

고생했어, 고생했어. 앞으로 팔 나을 때까지는 푹 쉬고! ? 유급휴가 내줄 테니까.”

유급휴가는 무슨? 아직 끝난 거 아녜요.”

그런 말 하지 말고! 환자가 푹 쉬어야지 어딜 돌아다녀.”

마스터, 얘기좀 해주세요.”

 

길드 마스터가 트루피아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고 짧게 설명하니 카부스가 혀를 쯧쯧 찼다. 그는 드워프 성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바로 납득을 했지만 그보다도 차원문 연구를 빌미로 잡힌 것과 리베라나가 또 트루피아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 언짢았다.

 

하여튼 드워프라는 것들은 진짜……. 자기들이 나서서 만들어주겠다고 해서 맡겼더니 그걸로 협박을 해? 어휴, 일 틀어지면 진짜 다음부터는 절대 안 맡기고 우리가 직접 해야겠어.”

여기서 의뢰한 게 아니었어요?”

왜 하겠어요? 거리는 멀지, 단가도 비싸지, 드워프 성깔 더럽지. 그래도 정밀도 하나는 진짜 믿어줄 만하고 그쪽에서 먼저 접근을 하면서 싸게 해주겠다니까 좋다고 맡긴 거요. 참내, 무슨 속셈인가 했더니 가이더링 멱살 잡으려고 그랬던 거였나.”

 

카부스는 투덜거리면서 드워프에 대한 푸념을 잔뜩 늘어놓았다. 아주 잠깐밖에 마주하지 않은 러트너도 드워프가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드워프와 거래를 했을 정도라면 그 만난 시간이 러트너보다 훨씬 많을 테니 얼마나 짜증날 지 대강 짐작이 간다.

 

근데, 마스터는 여기 왜 왔어요? 피시스에랑 그 흡혈귀는?”

그 둘은 괴생물학파로 먼저 갔어. 우린 쿱 수도사 님이 실장석 조사를 근본적인 부분부터 확실하게 하시려고 후타비아 찬넬로 떠나시겠다 하시길래 떠나기 전에 인사나 한 번 드리러 왔지. 비용은 길드 마스터 앞으로 달아두고.”

한 분만? 다른 분들은 안 가시고? 뭐 콜드펌 열쇠 님은 차원문 담당이니 안 가시겠지만.”

그렇습니다. 저 혼자만 갑니다.”

으음. 알았어요. 따로 준비할 거 없으면 바로 갈까요?”

쿱 씨, 그동안 함께 다닐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나뮈의 열쇠와 함께 하니 제 지식이 지금껏 살아온 세월보다 훨씬…….”

러트너. 그러한 이야기는 올라가서 하거라.”

어으, 높은 데는 좀……. 알았어요, 알았어요! 간다구요!”

 

러트너를 끌고 가면서 공간조율학파 아파트의 옥상으로 올라오니 트루피아로 떠나기 전 그 풍경에 허파를 시원하게 뚫어주는 찬바람까지 더해지니 이젠 슬슬 춥다. 러트너는 가능하면 저 멀리 까마득한 지평선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 숙여 아파트 바닥만 바라보았다. 공간조율학파 아파트 옥상의 커다란 순간이동진을 카부스와 공간조율학파생들이 조율하면서 쿱에게 여러가지 유의사항을 전달했다.

 

후타비아 찬넬 동부의 오기유라는 관문도시로 이동시켜드릴 거예요. 신분증이랑 통행증은 가지고 계시죠?”

그렇습니다. 조사를 나오기 전 교단에서 발급받은 것이 있습니다.”

하기사 나뮈의 열쇠인데 알 건 다 아시겠지.”

 

잘 할 것이다. 모두들 쿱을 믿는다. 후타비아 찬넬에 순간이동 요청 신호를 보내고 기다리는 동안 다들 쿱과 손을 한 번씩 잡으며 아쉬움과 격려의 인사를 나누었다.

 

아까도 말씀드리다 말았지만 쿱 씨와 함께 하면서 제 지식이 지금껏 살아온 세월보다 훨씬 많이 늘었어요.”

저도 러트너 씨와 함께 하면서 교단에 몸 담은 세월보다 훨씬 새롭고 많은 지식을 배우게 되어 영광입니다.”

 

쿱과 처음 만나던 때를 러트너는 떠올린다. 첫인상은 실장석 똥냄새로 구리구리했었지, 적어도 끝인상은 그런 악취 없이 깔끔하게 끝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식은 힘이고 무지는 약이니 동지의 손으로 미래의 대들보를 이루어내길 기원합니다.”

테켈리-.”

 

같은 신을 섬기는 수도사들간에 긴 말은 필요 없었다. 쿱과 콜드펌은 서로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과연 피시스에랑 쿱 노키아노르만 씨중에 누가 더 먼저 실장석의 기원을 파헤칠 수 있을지 궁금한데요.”

업계 최고봉과 한낱 열쇠를 비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쯤 되면 일부러 이름을 틀리는 것이 아닐까 쿱은 합리적 의심을 해보았다. 노키모노르켄이 그렇게 어려운가, 괴생물학파장은 잘만 말하더만. 쿱과 길드 마스터 에카르드 한은 단단히 악수를 나누었다.

 

으으으으으. 결국 이렇게 가시는 거네요. 흐으으으으.”

누가 보면 죽으러 가는 사람인 줄 알겠습니다.”

 

사람들의 인사를 하나하나 듣고 자기 차례가 오자 리베라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쿱은 리베라나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준 다음, 할 수 없는 악수 대신 포옹으로 인사했다.

 

, 그대의 여정에 루노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요정 님, 요정 님을 만나뵐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지식의 수도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습니다.”

 

키 작은 요정을 안아주기 위해 쿱이 무릎을 살짝 구부리자 요정은 쿱을 안아주면서 그의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리베라나가 꺅꺅거리며 환호성을 지르고 쿱은 입꼬리가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어쩔줄 몰라했다.

 

신호 왔어요!”

몸 조심하거라.”

, . , 그럼…… 그럼.”

 

반짝이는 순간이동진 위에 쿱이 서고 다들 쿱을 향해 손을 흔들거나 폴짝폴짝 뛰면서 확실하게 배웅을 해주었다. 쿱은 아직도 입꼬리를 움찔이다가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서야 사람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럼 가보겠습니-.”

 

번쩍이는 빛과 함께 쿱은 두르마르의 땅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쿱이 서있던 자리에는 먼지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진짜 가셨네요.”

언젠가 다시 뵐 수 있습니다.”

……훌쩍.”

리베라나, 쿱 씨한테 마음 있었어? 왜 이렇게 울어?”

헤어지는 게 안 익숙하단 말이에요!”

 

한 명의 빈 자리는 생각보다 크지만 또 그렇게 크지만도 않다. 언젠간 채워지기를, 또 한 편으로는 채워지지 않고 쿱이 그리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승강기를 타고 옥상에서 내려왔다. 카부스가 아파트 입구까지 나와 배웅해주는 동안 러트너는 머리가 복잡했다.

 

저기 요정 님.”

무어냐.”

……아뇨, 나중에 물어볼게요.”

 

지금은 무언가를 물어볼 만한 정신머리가 아니었다.

 

 

 

[데샤아아아앗! 와타시를 여기서 꺼내란데샤아아아앗!]

[싫은데스! 무서운데스! 살려주는데스!]

[데갸아아악! 진작 꺼내지 않고 뭐했던데스! 늑장부린 죄로 콘페이토 100개를 진상하란데스! ? , , 싫은데스! 다시 넣으란데스! 다시 넣으란데스! 데갸아아악! 네모네모씨는 싫은데샤아아아아아악!]

 

괴생물학파의 지하는 소란스럽지 않을 날이 없다. 특히 실장석들을 보관하는 지하 5층은 더욱 그랬다. 평소에도 자신들의 억압된 운명에 통곡하는 실장석들이 어느날 갑자기 전부 죽어버리면서 소란이 잠시 줄어드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말 그대로 잠시였을 뿐, 사방천지에서 되는대로 잡아들인 실장석들로 수천 개의 철창은 점점 차올라 이제 1천 마리를 웃돈다. 거기다 생명을 쥐고 있는 마력동석까지 회복연고에 박아놓으니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이어도 절망에 빠져 죽을 수조차 없다. 그리고 실장석들에겐 마력동석을 스스로 깨지 않는 이상 자살을 택할 용기조차 없었다.

격리실 한 구석에는 사지가 구속되고 눈에 붉은 액체를 계속 떨어트리면서 몸의 기운과 영양소가 다 빠질 때까지, 죽지도 못하고 죽음만을 기다리며 찾아오지 않는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계속 자를 낳는 동족이 있다. 그 동족이 낳은 자는 어미의 손길을 느껴볼 새도 없이 아래로 떨어진다. 떨어진 곳에는 어미와 같은 실장석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실장석들은 이미 실장석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온 피부가 시체처럼 창백하고 눈알은 허여멀겋고 실장석에게는 없는 비정상적인 송곳니가 자라나 말 그대로 괴물같은 모양새다. 그 실장석 괴물들은 아래에서 떨어진 자실장의 목을 가차없이 물어뜯고 피를 쪽쪽 빨아마셨다.

 

[, 테쨔아아아아악! 마마아아아아! 구해주는테찌이이이이이! 미친 오바상이 아타찌를 죽이는테찌이이이이이!]

 

사지가 묶인 어미는 자를 구하지 못하고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극한에 몰려 그저 의미없는 데, , 소리만을 낼 뿐이다. 자실장은 이런 저주받은 세상에 자신을 낳은 저주받은 어미를 저주한다. 그리고 자실장이 삶의 희망을 놓아버릴 때쯤 누군가 괴물 실장석들의 손에서 자실장을 구해낸다. 목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자실장은 그래도 자신이 가엾음을 알고 구해주는 이가 있음에 안도하며 기쁨으로 맑고 고운 눈물을 흘린다.

 

[테에에에에에엥…… 세레브한 아타치에게 대체 이게 무슨 짓인테치……. 똥마마는 아타치를 낳아놓고도 왜 아타치를 구하지 않는테치……. 오마에는 똥닌겐보다 못한테챠아아아아악!]

 

어미에게 잔뜩 성질을 내는 자실장은 인간들의 손에 이끌려 괴물 실장석들이 갇힌 유리수조의 바로 옆 수조로 들어간다. 수조는 굉장히 크지만 그 안마다 칸막이가 쳐져있어 한 마리당 할당된 공간은 굉장히 좁다. 자실장 한 마리만 딱 서있을 수 있을 공간, 너무 좁아서 무릎꿇고 앉을 수조차 없는 갑갑한 공간에 자실장이 갇힌다.

 

[? 지금 아타치를 이딴 똥하우스에서 사육할 생각인테츄? 오마에에에에엑! 아타치가 얼마나 세레브하고 고귀한 자실장인데 아타치를 이딴 똥통에 쳐박는테챠아아아악! 아타치가 파킨하는 꼴을 보고싶은테챠아아아아악! 아타치가 죽으면 오마에타치는 세상에 도게자를 해야 하는 똥물인생이란 말인테챠아아아아악!]

 

자실장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인간들을 협박하지만 전혀 통하지 않는다. 이제 진심으로 열받은 자실장은 어디 그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똑똑히 느껴보라며 스스로의 마력동석을 깨부수기 위해 증오로 온 몸을 감싼다. 그리고 곧 좌절하고 만다.

 

[어째서…… 어째서 파킨하지 않는테츄? 저 똥노예타치에게 아타치가 옳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단 말인테치! 아타치가 옳은테치! 아타치가 세상의 진리란 말인테치! 아타치가 틀릴 리 없는테치! 진리는 언제나 아타치 하나란 말인테챠아아아악!]

 

죽지도 못하고 절망에 빠져있던 자실장은 오직 고난만이 가득한 격리실의 풍경을 풀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무릎에 힘이 풀렸지만 앉을 수도 없다. 좁디 좁은 유리칸막이에 몸을 기대고 멍하니 침만 흘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자실장의 말은 반쯤 옳았다. 자실장은 자신이 원해마지않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들에게 자신이 옳았는지 각인시켜주는 것에는 실패했다. 무의식에 잠긴 채 4시간이 지나자 옷을 멀쩡히 잘 입고 있는 자실장은 추위를 느꼈다.

 

[추운…… 테치……. 마마……. 두 번 타는 보일러로 빵빵하게 불좀 넣어주는테치…….]

 

인간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작업에 들어가고 철창에 갇힌 실장석들의 절규에도 방 온도에 관해서는 아무 얘기 없었지만 자실장은 추위에 벌벌 떨었다. 추워도 너무 추웠다. 손발을 비비면 따뜻해지기라도 할 텐데 공간이 좁아서 비비기도 힘들고, 비비면 비빌수록 더 추워지기만 한다. 자실장은 어느새 비비던 손발로 자신의 옷을 매만지고 있었다. 몸에서 땀이 나는 것 같다. 옷이 땀을 머금어 젖어버리고 그 옷이 바람을 맞아 땀이 마르면서 추운 몸을 더욱 춥게 한다. 춥다. 춥기만 하다. 자실장은 이젠 춥다는 생각 말고는 할 수가 없었다. 너무 추워서 뇌가 얼어붙는 기분이다. 그래도 결국 사람들은 자실장의 원을 들어주기로 했나보다. 추위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따뜻한…… …….]

 

자실장은 그렇게 마마보다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저체온증으로 죽었다.

 

[……그르르르르르르…….]

 

그리고 다음 날, 자실장은 잠에서 깨어나듯 죽음에서 깨어났다. 깨어난 몸에 온기는 어디가고 그저 뼛속까지 스미는 한기 뿐이다. 뼈를 가르고 들어오는 냉기는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실장은 정신줄을 놓았다. 빠져나갈 수 없는 유리 칸막이 안에서 자실장은 자유를 갈망하는 것도 아닌, 증오를 부르짖는 것도 아닌, 그저 이성을 잃고 광기에 빠져 지르는 소리일 뿐이다.

 

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갸아아아아아아아악!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성이 사라진 본성으로 가득한 광기는 실장석의 몸속에 내재된 마력동석의 잠재력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렸다. 자실장은 자신의 몸을 휘감는 어마어마하고도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힘을 느꼈다. 자실장의 몸이 점점 공중으로 떠오른다. 자력으로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었던 좁디좁은 감옥을 아주 간단하게 빠져나온다. 그러나 자신이 빠져나오는 줄도 모르고 계속 괴성을 질러댔다. 몸에 넘쳐나는 힘, 그에 반비례하는 이성. 이 둘은 절대 함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자실장은 지금 일생에서 가장 힘이 넘쳐나는 그 순간에도 그 힘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힘은 전혀 섞이지 않은 다른 원천의 힘으로 감옥에서 빠져나온 자실장은 공중을 붕 날아 감옥 수조의 바로 옆에 놓인 차가운 철제 탁자에 놓였다. 자실장이 느끼는 추위에 비하면 철제 탁자는 매우 따뜻했다. 탁자 위에는 길다랗고 얇고 날카로운 금속판이 하나 놓여있다. 원천 모를 힘이 자실장을 철제 탁자에 압박하다시피 눌러 고정시켰다.

 

캬아아아아아아악! 카야아아아아아악! 크와아아아아아아-.”

 

, 은과 철이 섞인 날카로운 금속 판이 자실장의 머리를 끊어버리고, 뻣뻣하고 질긴 가죽을 치즈 자르듯 가볍게 갈라냈다. 검고 탁하게 변한 내장들 사이에서 영롱하고 화려한 마력동석이 빛을 내고 있었다. 인간 하나가 다가와서 그 마력동석을 가져다가 나무로 칸막이를 쳐놓은 보관함에 마력동석끼리 붙지 않도록 잘 구분해서 보관한다. 보관함 1개에 100개의 마력동석이 들어가고 그런 보관함 100개가 모여 1개의 관물함을 이루었다. 아직 가득찬 보관함은 2개밖에 되지 않지만 3번째 보관함도 곧 가득찰 것으로 보인다. 머리가 떨어진 자실장은 동족들의 비명과 떨어진 몸을 보면서 마지막 순간에나마 이성을 찾았다. 그리고 짧은 삶의 주마등을 돌아보면서, 지금껏 겪어온 모든 고난이 전부인 삶을 돌아보며 억울함에 가득 찼다.

 

[아타치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테츄……?]

 




성대 없는 머리의 유언은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 자실장의 머리통은 마력동석 빠진 몸과 함께 쓰레기통에 떨어져 다른 실장석들의 육체와 섞여 구분할 수 없는 더미가 되었다. 그리고 꽉 찬 쓰레기통은 괴생물학파의 잡일 담당 집고블린 곱곱이의 손에 들려 소각로 안으로 들어가 사라진다.

이성도 없고 자유도 없는 이곳은 매일매일이 지옥과도 같다. 자유를 향한 갈망과 비인도적이고 잔혹한 감금조치, 거기다 끊이지 않는 생체실험까지 이어지는데 인간들에겐 일말의 부끄러움,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는지 실장석 한 마리를 꺼낼 때마다 히죽히죽 웃어대고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실장석의 배를 가르면서도 일부러 천천히 얕게 자르면서 한 번이면 끝날 것을 대여섯 번에 걸쳐 고통스럽게 가른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그런 족속이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실장석들이 진심으로 버틸 수 없었던 건 다른 동족들이었다. 다른 동족들이 갇혀있는 건 괜찮았다. 그러나 자신이 갇혀있는 것이 너무 싫었다. 세상 모든 실장석이 자기 자신만큼은 세상 다른 모든 실장석들보다 우월한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이치를 알지도 못하는 멍청한 인간들은 자신을 다른 동족들과 같은 취급하고 있었다. 도저히 같아질 수 없는 존재임에도. 그런 하향평준화를 실장석들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실장석들은 어서 이 철창을 빠져나가 자신에게 걸맞는 대우를 누리고자 했다. 다른 동족들은 빼고 오직 자신만. 그런 실장석이 세상에 한 마리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실장석은 철창에 갇혀있지 않았고, 다른 실장석들은 그 실장석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정신으로 견딜 수가 없어 광기에 포효했다.

 

[, , 오마에! 오마에 사육실장인데스! 뭘 멍하니 보고만 있는데스! 어서 와타시타치를 이 똥닌겐의 더러운 손아귀에서 구해내란데스!]

[데샤아아아아아아악! 저딴 분충은 왜 자유를 누리는데샤아아아악! 와타시보다 잘난 것도 아닌 주제에에에에에엑!]

[당장 이리 들어오란데샤아아악! 와타시를 석방하고 저 자를 처넣으란데샤아아아아아악!]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실장석은 인간의 곁에 콕 붙어서는 실장석들이 갇힌 철창을 한 바퀴 슥 둘러보았다. 얼굴에 감정이 없다. 아주 당연한 것을 보는 마냥, 철창 속에 자신과 같은 동족들이 수없이 갇혀있음에도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고 있었다. 구해줘야 한다거나 가엾다거나 하는 말은 전혀 없었다. 이미 인간의 앞잡이로서 다른 실장석들의 운명을 비웃고 있었다. 정작 얼굴에 웃음기는 하나도 없었음에도.

 

수가 많이 늘었네.”

 

언제나처럼 작업에 열중하던 괴생물학파생들은 갑자기 들리는 학파장의 목소리에 놀라 승강기쪽을 쳐다본다. 그리고 다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실장석 재고에 대해 알아서는 안 될 흡혈귀가 학파장 옆에 서서 아직 다 채우지 못한 실장석 철창을 둘러보고 있었다.

 

, 학파장 님! 언제 돌아오셨어요? , 근데 흡혈귀랑…… 드워프…… 까지?”

방금. 그리고 걱정 안 해도 돼. 사실 얘 말이야, 저번에 실장석 다 죽은 거 알고 있었는데도 얌전하게 있었거든.”

왜 그딴 소리를 해? 그런 소리를 하면 얘들이 경각심을 못 느껴서 작업도 제대로 안 할 거 아냐!”

내가 관리 잘 할 테니까 넌 걱정 마. 마력공학파에서 사용허가인증은 들어왔어?”

“추가 표본이 더 필요하다고 해서 보내놨어요. 며칠 더 걸릴 것 같아요.

 

학파장 피시스에와 흡혈귀 에립마브, 그리고 포박된 드워프의 옆에는 이마에 상처가 난 실장석 한 마리가 졸졸 쫓아다니고 있었다. 철창 속 실장석들은 자유로운 실장석이 이 격리실을 거니는 것을 도저히 맨 눈으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또 생 눈을 자기 손으로 뽑을 용기는 없어 철창에 몸을 부딪으며 소리만 질러댈 뿐이다. 자유로운 실장석은 그 모습을 보면서 아주 통쾌해했지만, 저들을 조롱하며 웃고 싶어도 에립마브의 경고가 의식의 가장자리에서 머문다. 입꼬리가 조금이라도 올라가려 하면 그 경고는 자극이 되어 실장석의 뇌와 심장을 마구 찔러댔다. 고통스럽지만 울 수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눈물을 보이면 자극은 더욱 강해진다. 실장석은 무표정했다. 그래야만 고통없이 편안했고 주인도 화를 내지 않았다. 실장석은 에립마브를 주인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억압이 제일 통탄스러웠다.

 

이 드워프는 왜 묶여있나요?”

왕궁에서 무기를 들고 깽판을 쳤거든. 그것도 국왕 폐하 앞에서.”

허억!”

, 그래서 드워프를 흡혈귀로 만들어버리라는 형벌인가요?”

뭐래? 얘 형벌은 드워프 대장이 결정한댔어. 그때까지 볼모로 잡아두려고 보낸 거야.”

죄수라 생각하지 말고 손님이라 생각하고 잘 해드려.”

[오마에에에에에에엑! 어딜 가는 데샤아아아아악! 분충 주제에! 와타시보다 잘나지도 않은 주제에 어딜 당당하게 걸어다니냔데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괴생물학파생들은 에립마브에게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지만 학파장이 그렇다는데 달리 할 말은 없었다. 에립마브가 데려온 실장석도 철창에 넣으려고 하는데 이 실장석은 또 에립마브의 비상용 회복약이라고 한다. 괴생물학파생들은 소리도 지르지 않고 기분나쁜 웃음도 짓지 않고 똥도 싸지 않는 얌전한 실장석을 보고 신기하게 여겼지만 곧 에립마브가 세뇌시켰다는 사실을 듣고 나자 다들 기겁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이젠 인간들도 자신을 도와주기는 커녕 혐오스럽게 바라보며 물러나는 시선에 에립마브의 실장석은 절망과 비탄만을 느낀다.

이들은 괴성지르는 실장석들을 뒤로하며 지하로 훨씬 깊이 들어가는 커다란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 레테크 격리소, 새 집인데 왜 이렇게 들어오기가 힘드냐, 에립마브는 수없이 늘어선 격리시설들이 너무도 익숙하고 반가웠다. 격리시설중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보이지 않는 분홍빛 용의 격리실마저도 오늘만큼은 자신을 환영해주는 것 같다. 용도 에립마브의 존재감을 느낀 걸까, 용의 포효가 모두의 등골을 뒤흔들었다. 에립마브의 실장석은 시끄럽게 울면 죽여버린다는 뼈저린 경고가 있었음에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며 참고 참았던 속의 내용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 데에에에엥! 데에에에에엥!”

, 이 새끼 더럽게! 세뇌보다 저 드래곤이 더 무서운가보네.”

, 이 미친 인간들……. 대체 뭘 가두고 있는 거야……? 흡혈귀에, 드래곤에, 다음은 뭘 가두려는 거냐?”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아나? , 당신이 지낼 방은 저쪽이요.”

 

에립마브도 입주한 지 며칠도 못 쓰고 끌려나왔다가 이제야 다시 찾아온 불사의 대흑마법사 에립마브격리실. 피시스에가 문을 열자 에립마브가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가고 실장석도 함께 들어가며 드워프도 툴툴거리며 들어간다. 그리고 이들이 들어가자마자 문 옆에서 대기하던 흑마법심문관들이 이들을 격리한 밧줄을 풀었다.

 

……이제 알겠다. 날 흡혈귀로 만들어서, 이젠 이 격리소에 흡혈귀 드워프를 가둬놓겠다는 거냐?”

 

갑갑한 투구를 자기 손으로 벗어 피시스에에게 넘기면서 에립마브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내가 저런 놈이랑 같이 살아야 한다니.”

무슨 일이 있어도 쭙쭙이가 귀하를 공격할 일은 없을 겁니다. 학파장 직위를 걸고 맹세하죠. , 어차피 그쪽은 대산송장 장비도 없을 테니 당연히 쭙쭙이 공격은 못 할 거고. 식사는 학파 식사시간에 맞춰 조식 중식 석식 3번이 제공되는데 추가 배식이나 간식같은 건 없으니까 필요하면 미리 많이 가져다달라고 하십쇼. 그리고 쭙쭙이는 실장석으로 식사를 대신 하는데, . 어차피 깨어있는 시간이 안 겹치니까 같이 밥 먹을 시간은 없으려나.”

 

드워프는 격리실이라는 이름의 감옥 생활을 듣고 있었지만 머리에 담아두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흡혈귀랑 살아야 한다는 것만으로 걱정이 가득하다. 피시스에가 하는 말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젠장, 유서를 쓰고 왔어야 하는 건데.”

종이랑 펜을 가져다 드릴까요?”

됐어. 누굴 먹물로 아나.”

 

피시스에와 드워프가 격리소에서의 생활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에립마브는 자신의 편안한 침대에 몸을 누이며 최근 며칠동안 제대로 취하지 못했던 충분한 수면을 취하려 해본다. 역시 가이더링의 침대가 좋다. 왕궁의 침대나 자기 소굴의 이끼 깐 바위랑은 비교를 한다는 것 자체가 실례다. 아마 드워프에게도 이런 침대는 없겠지, 에립마브는 드워프가 침대에 눕는 상상을 하다가 웃겨서 잠을 깰 것 같아 그만두었다. 에립마브의 실장석도 에립마브를 따라 침대 위로 올라가려고 침대 밑에서 발을 콩콩 굴렀다. 손이 딱 침대 위까지 닿을 만큼 큰 실장석은 침대보를 잡고도 자기 자신을 끌어올릴 힘이 없어서 미끄러져 떨어지고 뒤통수가 아픈 그대로 누워버렸다.

 

성함은 어떻게 되시죠?”

알아서 뭐하게.”

계속 드워프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샤르프.”

샤르프. 알겠습니다. 바로 침구류도 가져다드리죠.”

 

드워프 분대장 샤르프는 피시스에가 격리실 문을 닫아 잠그고 나가자 격리실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화장실 문도 한 번 열어보고, 인간의 기준으로 만들어져 올라가기 번거로운 의자와 금이 간 탁자에도 한 번 올라가보고, 딱히 안에 들어있는 건 없는 관물대도 한 번 열어보고, 관물대 위에 올라간 물건이 수상하여 탁자 위에 다시 한 번 올라가서 보니 그냥 장기판과 장기말이라 허탈해하기도 한다. 드워프는 탁자 위에서 뛰어내렸는데 바닥을 안 보고 대충 뛰어내리다가 실장석의 배를 밟고 말았다.

 

[데벡! , 켁 케헥, …….]

좀 얌전히 있어. 잠좀 자자.”

, 볼 것도 전혀 없는 따분한 곳이구만.”

너 지금 죄수 신분으로 온 거 잊었냐? 배가 부르니까 이젠 놀고 싶은 생각도 막 드나보네.”

뭐야? 이게 어디서 흡혈귀 주제에!”

내 덕분에 여기 온 거라는 사실 잊지 마라. 지금 네 친구 드워프들은 트루피아 어둡고 축축한 지하감옥에서 너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무슨 말만 꺼내도 간수들이 조용히 하라며 윽박지르고, 놀고 싶은 생각은 커녕 자기 고향 생각만 하고 있을 거다. 분대장이라는 놈이 부하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네.”

 

샤르프는 에립마브의 말에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흡혈귀와 같이 갇히게 된 것은 억울했지만 부하들만큼은 아닐 것이다, 그는 부하들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지금 이 편한 자리가 굉장히 불편했다. 그는 바닥에 앉았다.

 

……나한테 뭘 할 생각이냐.”

생각 없어. 하지만 이런 말 해도 안 믿겠지. 난 흡혈귀고 넌 드워프니까.”

그렇지.”

널 흡혈귀 드워프로 만든 다음 네 부하들이랑 투기장에서 죽을 때까지 싸우게 시킬 거야.”

……진짜냐?”

왜 이 말은 또 믿는데? ,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럴 거면 아예 묻지를 마라. 믿지도 않을 대답을 왜 물어봐?”

 

천장을 보고 누워있던 에립마브는 벽쪽을 돌아보고 누웠다. 샤르프는 에립마브가 한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확신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흡혈귀가 되는 상상을 해보았다. 흡혈귀를 잡아 죽인 수는 굉장히 많았지만 스스로 된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바로 옆에 흡혈귀가 누워서 자고 있고 여차하면 자신을 죽이는 것은 물론 같은 흡혈귀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삶에 있어서 더할 나위 없는 크나큰 위기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렇게 큰 위기의식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침구류 왔어요.”

 

가져다 주겠다던 침구류도 막 도착을 했다. 그 소리에 에립마브는 잠을 깨고 말았다. 소리가 커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소리가 이상하게 익숙했다. 꼭 옆에 요정을 끼고 다니는 멍청한 사냥꾼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뭐야, 쭙쭙이 벌써 자? , 맞다. 흡혈귀지.”

자장가라도 불러주러 왔냐?”

 

드워프의 침구류는 베개와 침낭이다. 인간 기준으로 만들어져 크기가 크긴 했지만 잠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에립마브는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격리실에 멍청한 사냥꾼과 꼴보기 싫은 요정이 들어와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팔이 부러진 말괄량이 마법사와 아는 거 많다는 수도사도. 말괄량이 마법사는 어째서인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있고 눈이 부어있었다.

 

넌 팔 상태 보러 간다고 안 했냐? 팔을 잘라야 한대?”

……훌쩍, 쿱 님이 떠나신다니까 너무 슬퍼서…….”

으이그, 꼴랑 그런 거 가지고 울기는.”

넌 피도 눈물도 없는 흡혈귀니까 모르겠지!”

 

리베라나와 에립마브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드워프는 요정을 말 없이 째려보고만 있었다. 요정은 그런 드워프에게 곁눈질만 조금 할 뿐 그 이상의 관심은 주지 않았다. 러트너가 자기소개를 하면서 손을 내밀기도 했지만 샤르프는 바닥에 침낭을 펴고 안으로 들어가 몸을 둥글게 말 뿐이다. 정말 커다란 애벌레처럼 보였다. 잠시나마 실장석의 구더기같은 애벌레를 생각한 러트너는 불순한 생각 말자며 자기 머리를 한 번 때렸다.

 

쭙쭙아, 벌써 잠들면 안 돼. 곧 있으면 점심시간이라구.”

내가 너네 때문에 평생 안 먹던 점심이란 걸 다 먹네.”

 

점심시간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격리실 밖에서 데스데스 소리가 시끌벅적하다. 에립마브는 아예 침대에서 일어나 의자의 상석 자리에 앉고, 리베라나에게 손수건을 빌려서 식사예절 차리듯 목에 두른 뒤 제발로 걸어오는 식사를 기다렸다.

 

너희도 서있지 말고 앉아. 짐이 귀빈 여러분을 위해 궁중 최고의 요리를 준비하였으니 사양 않고 많이 드시길 바라오.”

이 얘기 국왕 폐하께 전해드리면 너 또 쇠뇌 맞는다.”

.”

 

그래도 다들 고분고분하게 에립마브가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이런 자리에 앉아서 대접한다는 만찬이 실장석이라니, 러트너는 왕궁 연회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깊게 명상을 한다. 어차피 내가 먹을 게 아니다, 내가 먹을 게 아니다, 격리실 문이 벌컥 열리고 녹색의 물결이 휘몰아친다. 10마리의 실장석이 들어오고 격리실이 갑자기 시끄러워지니 샤르프도 침낭 밖으로 고개만 슥 내밀었다. 샤르프의 식사도 함께 제공되었고 샤르프는 에립마브의 바로 맞은편이자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자리에 힘겹게 올라앉았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거칠게 내쳤다.

 

[데에? 데프프프, 와타시타치를 데려가서 사육할 예비노예타치인데스웅?]

[오마에! 밀지 말란데스! 늦게 온 오마에가 잘못이니 새치기할 생각 말고 조용히 짜져있으란데스!]

[, 저기 저 자는! 데갸앗! 와타시를 건방지게 꼬라본 그 분충이 아닌데스!]

[오마에의 사육실장 자리는 와타시가 차지할 것인데샤악!]

[데갸앗, , ? 뭐인데스! 어떤 건방진 분충이 와타시의 앞길을 가로막는데샷!]

 

에립마브의 회복약 실장석을 본 다른 실장석들은 철창 뒤에서 당했던 수모를 똑똑히 기억하고 그 울분을 풀기 위해 괴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하지만 다섯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이들은 금세 학파생들과 괴생물학파장의 물리차단막에 가로막혀 이리 밀리고 저리 끌리며 격리실의 화장실로 쑤셔박혔다. 그리고 딱 한 마리의 실장석만 화장실에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있다. 그 실장석은 화장실의 다른 실장석들을 보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분나쁜 웃음소리를 냈다.

 

[데프프프뿌뿌, 데뿌뿌뿌뿡~. 허접한 분충타치는 와타시의 세레브에 전율하란데스웅~.]

[데갸아아아아아앗! 이런 게 어딨는데스! 불공평한데스! 부조리한데스! 와타시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내놓으란데샤아아앗!]

 

실장석들의 절규와 발악으로 시끌시끌하니 러트너와 요정은 이미 귀를 막고 있었다. 자유로운 실장석은 염동력으로 들려서 에립마브의 바로 앞 탁자 위에 올라앉는다. 실장석은 그때까지도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춤은 에립마브가 손을 뻗는 동시에 멈췄다.

 

[데고로로로록…….]

[……? , 데에에에에에엥! 저게 뭐인데스! 저게 뭐인데스!]

[데갸아아아아앗! 검은 악마가 나타난데샤아아아앗! 와타시의 피를 빨아먹는데샤아아아아앗!]

[꺼내주는데스! 살려주는데스! 와타시를 이 지옥에서 빼달란 말인데스우우우우우우!]

 

공포에 질리고 절망에 휩싸여 심장이 벌컥벌컥 뛰고 금방이라도 마력동석이 바스라질 것 같았지만 이들의 마력동석은 전부 회복연고 속에 박혀있어 자신들의 시한부 삶을 그저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실장석들이 소리를 얼마나 처절하게 지르건 말건 실장석의 핏줄기는 에립마브의 손아귀를 향해 끊임 없이 흘렀다.

 

쭙쭙이 너 한 끼에 10마리밖에 안 먹어? 수도에선 한 몇백 마리 먹은 것 같은데.”

대낮에 바깥을 돌아다니느라 마력 소모가 심하니까. 그 오크 녀석한테 처맞은 것도 있고.”

, 맞다. 그 오크 있잖아. 너한테 이거 전해주라더라.”

나한테?”

결투장이래.”

 

러트너가 가지고 있던 결투장을 에립마브에게 전하자 에립마브는 손톱으로 밀봉을 풀고 내용물을 꺼내 펼쳐보았다. 그리고 글자를 몇 번 읽어보더니 쳇, 하고 바로 종이를 넘겼다.

 

내가 오크어는 못 한다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도 편지를 오크 글자로 써서 보내놨네. , 나뮈충. 너 오크어는 얼마나 하냐?”

“일부 어휘밖에는 모른다.”

쓸모가 없어, 진짜. 요정 너는?”

“모른다.”

자랑이냐?”

 

다들 아이라즈의 결투장을 돌려보면서 알아볼 수 없는 글자의 나열을 해석해보려고 애를 쓴다. 그런다고 글자를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은 또 아니었다. 그 글자를 훑어보던 피시스에가 넌지시 말했다.

 

드워프라면 오크어를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샤르프는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묵묵히 식사만 했다.

 

난 그런 말 모른다.”

모르지만 보면 알 겁니다. 드워프어와 오크어는 언어학적으로 뿌리가 같고 문자에서도 유사한 부분이 많으니까.”

근데 나뮈충 넌 왜 못 하는데?”

원어민이 아니면 알기 힘든 미세한 차이거든. 부탁드리겠습니다.”

 

피시스에가 샤르프 쪽으로 종이를 슬쩍 밀어보내니 샤르프는 곁눈질로 아이라즈의 도전장을 슬쩍 보았다. 그는 빵을 씹는 속도를 점점 늦추다가 국을 한 숟갈 떠먹고 꿀꺽 삼켰다.

 

……흡혈귀에게. , 진짜네. 알아는 보겠어. 악필 드워프가 쓴 글씨체같은데.”

 

샤르프가 입을 열고 천천히 결투장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에립마브는 간만에 쭙쭙이가 아닌 자기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 것에 놀라고 저 이름을 쓴 것은 오크이자 그 이름을 불러주는 게 드워프라는 사실에 한탄했다.

 

……너에게 아록캄……? 기다려봐, 문자 알아보면서 해석까지 해주기도 더럽게 힘드네, 아록캄이 뭐냐? 어쨌든 그걸 신청하고자 직접 이 결투장을 쓴다. 텝스…… …… 승낙. 승낙해도 좋고, 거부해도 좋다. 너는 오크도 아니고 거기다 흡혈귀지만 상관없다. 너의 힘을 본받고 싶다. 왈디오가 내려준 힘이 다하기 전에 와라. ……이건 뭐라고 쓰여있는 거야. 아브……. 이름인가본데? 아브내래즈 알드내스킬라.”

아마 오크식이면 아보나이라즈 아르드나스켈라 정도가 될 것 같은데, 아이라즈의 본명인가봅니다.”

오크 치고는 고급지네.”

 

다들 드워프의 말과 피시스에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는데 콜드펌만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누가 봐도 웃음을 참는 모양새다. 다들 콜드펌의 모습에 의아해하고 샤르프는 아주 대놓고 불쾌함을 드러냈다. 콜드펌은 웃음기를 떨쳐내고자 기도문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웃기냐? 이 먹물 놈이.”

, 죄송합니다, 그게, 드워프 님을 비웃는 것이 아니라, 그게…… 크흡, 크흐흐흐흐…….”

왜요. 재밌는 얘기가 떠올랐으면 저희도 같이 웃어요.”

이 이름이 우스운 것이더냐? 이 몸은 잘 모르겠구나.”

 

콜드펌은 간신히 웃음을 참는가 싶다가도 에립마브를 쳐다보고는 다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마침 실장석 한 마리의 피를 다 뽑아마신 에립마브는 올라가기 싫어 발버둥치며 목이 터져라 절규하는 새로운 실장석을 탁자 위에 올리며 콜드펌을 재촉했다.

 

난 너네가 혼자 킥킥댈 때나 너네들끼리 귓속말할 때가 제일 싫거든? 지금껏 있었던 일로 미뤄보면 분명 나한테 안 좋은 일일 거야.”

어흠! ! ! 커흡, . 그럼 저, 말씀을, 드리겠……. 푸흐흐흐흐흐…….”

아 작작 웃어! 하나도 재미 없으니까!”

[웃지만 말고 와타시를 구하란데샤악! 똥닌게에에에엔!]

얘도 너더러 웃지 말란다!”

 

콜드펌은 피가 빠져나가며 오그라지는 실장석을 보면서 흑마법과 관련된 생각, 실장석과 관련된 생각, 끔찍하고 더러운 생각을 하며 열심히 웃음을 참았다. 입을 열지 않고 코로 숨을 쉬어가며 마음을 정리하고 생각을 정돈했다. 이제야 에립마브를 보고도 제대로 말을 꺼낼 수가 있다. 그래도 이미 올라간 입꼬리는 다시는 내려가지 않았다.

 

아이라즈가 쭙쭙이를 아주아주 동경하는 모양입니다. 힘을 숭상하는 오크의 문화도 문화지만 거기에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구석이 꽤 있었나봅니다.”

“?”

첫 번째로, 오크에게 있어서 아록캄은 절대 쉽게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그 결투의 결과에 스스로의 목숨을 걸겠다는,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로 뛰어들겠다는 말입니다. 보통 지도자 자리를 거는 결투나 전쟁의 승패가 걸린 전투, 그런 큰 싸움을 아록캄이라고 칭합니다만, 굳이 목숨을 걸지 않으면서도 아록캄이라는 말을 쓰는 때가 또 하나 있습니다.”

 

거기서 콜드펌은 헛기침을 하면서 목구멍 위로 기어올라오려는 웃음기를 죽여버리고 말을 이었다.

 

두 번째로, 그 아록캄이라는 말을 뒷받침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편지를 직접 작성했고, 왈디오가 내려준 힘이 다하기 전에. 이 말은 다르게 하면 죽을 때까지 쭙쭙이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겠다는 말입니다. 오직 그 싸움만을 위해서.”

한이 단단히 맺혔나본데요.”

반대입니다. 결투라는 말만 떼버리고 나머지 문장을 읊어보십시오.”

……. 아록캄을 신청하고자 이 편지를 직접 쓴다. 승낙해도 좋고 거부해도 좋다. 네가 오크도 아니고 흡혈귀지만 상관없다. 죽을 때까지 쭙쭙이가 찾아오기를 기다려…….”

……이거 완전 연애 편지 아니에요?”

 

에립마브에게 빨려나가던 실장석의 핏줄기가 멈추고 피를 빨리던 실장석은 무릎을 털썩 꿇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잠깐만.”

그렇습니다. , 이 결투장은, 크흡, 아이라즈가 쭙쭙이에게 보내는……. 크흐흐흐흐…….”

……연애편지?”

 

다들 할 말을 잃은 가운데 콜드펌만이 끅끅거리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한계에 달하고 만다. 콜드펌은 폭소를 터트리며 책상을 마구 두드렸다.

 

크흐하하하하! 좋으시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한 명도 해내지 못한 애인을 만들어서 오다니!”

쭙쭙아 축하해! 식은 언제 올려? 자식은 얼마나 낳을 거야?”

장하다 쭙쭙이! 주례는 내가 서줄게!”

이야! 쭙쭙이 애인 생겼다! 아이고야! 다들 뭐하고 있어요! 청첩장 돌려야지!”

루노와 왈디오의 축복이 그대와 함께 하기를!”

크허허허허! 오크랑 잘 살아봐라! 그 오크는 시집오면 어떡하냐! 여기서밖에 못 살 텐데!”

 

에립마브는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우물우물거리다가 아직 의식이 남아있는 실장석의 남은 피를 마저 빨아들이는 데 집중했다. 빨아들이면서도 에립마브는 가장 호들갑이 심한 리베라나를 곁눈질했다. 빨아들이고 남은 시체는 모두 자신의 회복약 실장석에게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회복약 실장석은 말라붙은 사체의 끔찍한 몰골에 몸을 떨면서도 참을 수 없는 허기와 살고자 하는 욕망 하나로 수분이라곤 하나 없이 딱딱한 동족의 사체를 열심히 갉아먹었다.

 

그래서, 그래서, 싸울 거지? 사귈 거지?”

싫어. 승낙하든 거절하든 내 자유라며? 안 싸워.”

야아~. 그래도 응? 고백하는 순정이라는 게 있는 건데. 너무 냉정한 거 아냐? 한 번 만나주라.”

순정은 염병,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능력만 보면서 사귀는 게 순정이냐? 나보다 센 놈 있으면 바로 날 죽인 누군가에게 한눈 팔걸. 그리고 야, 나도 순정이 있어. 근데 니들이 이런 식으로 내 순정을 짓밟으면은, 어 그때는 괴물이 되는 거야!”

흡혈귀가 순정이라니 지랄도 이런 지랄이 다 있냐! 크허허허허허허!”

이 몸이 하고 싶었던 말이로다! 푸흐흐흐흐흐흐!”

 

샤르프는 먹던 식사도 내팽개치고 배를 잡고 폭소했고 요정도 드워프의 말에 동조했다. 젠장, 오크는 또 왜 나서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에립마브는 두 번째 실장석의 피를 다 빨아들여 쪼그라트려 던져버리고 다음 실장석을 대령했다.

 

[, 오마에타치! , 웃지 말란데스! 와타시가 죽게생긴데스! 와타시가, 와타시가 죽으면! , 나라에 큰 죄를 짓는 것인데스! 내란음모죄란 말인데스! 와타시를 구하란데스!]

절대, 안 싸울 거야. 지금껏 내 힘을 노리고 나한테 접근한 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둘인 줄 알아? 결국엔 죄다 마지막에 내 뒤통수를 치려다가 저 실장석처럼 됐다고. 만약 그게 소원이라면 바로 피부터 빨아줄 테다.”

아이라즈가 여기로 따라왔으면 쭙쭙이가 먼저 빨리지 않았을까…….”

넌 제발 이상한 소리좀 그만 해!”

 

성가시다, 성가셔, 에립마브는 후타비아 찬넬어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피를 빨리는 실장석을 똑똑히 응시했다. 자신의 피가 빨려나가는 모습과, 자신의 피를 빠는 인간의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그저 웃음거리로만 여기며 자신을 구하지 않으려는 인간에게 둘러싸인 실장석은 비탄을 느끼면서 죽었다.

 

 

 

드워프 사절이 올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쭙쭙이 네가 해줄 일이 많아. 마력동석 실험만으로도 바쁘겠지만 윌로우플랫에도 한 번 들러야 돼.”

거길 왜?”

가서 사죄해야지.”

.”

드워프에게 좋은 인상 남기고 싶으면 알아서 잘 해야지? 내일 바로 윌로우플랫부터 들를 거니까 반성문을 쓰든지 뭘 하든지 진심 어린 마음을 제대로 준비해놔.”

알았어.”

샤르프 님도, 편안히 있다 가시길.”

 

10마리의 실장석을 모두 빨아마시고 말라비틀어진 사체만을 남긴 에립마브는 아직도 실실 웃는 요정과 리베라나를 흘겨보고는 침대에 누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고민하다가 잠들 것 같다. 그럼 꿈 속에서라도 생각하지 뭐, 그렇게 여기하며 눈을 감았다. 샤르프도 다시 침낭 안으로 기어들어가 몸을 둥글게 만다. 에립마브가 남긴 사체를 갉아먹던 회복약 실장석은 공포와 비탄으로 가득찬 동족들의 얼굴과 비명이 계속 기억에 남아 입안에 남은 딱딱한 살점을 차마 삼킬 수가 없었다. 구역질이 나오고 게워내고 싶었지만 속이 울렁일 때마다 에립마브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회복약 실장석은 눈물을 흘리며, 그 눈물이 입 안으로 흘러 딱딱한 살점을 조금이나마 불려서 씹기 편하게 만들어 억지로라도 삼켰다.

 

그동안 리베라나랑 콜드펌 씨는 공간조율학파에서 잘 지낼 거고, 요정 님은 어디 계획이라도 있으세요?”

, 딱히 없노라. 러트너와 가이더링을 돌아보며 구경이라도 할 생각이었느니라.”

어머나~.”

이녁이 생각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로다.”

그래요? 밤에는 어디서 주무시게요. 아파트에서?”

마법사들이 자꾸 들락거려서 잠이 안 오니 여관에서 잘 생각이다.”

이히히~.”

 

리베라나의 웃음소리가 꿈에 나올까 징그러웠다. 이젠 다들 익숙하면서도 리베라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으면 또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거늘!”

처음엔 다들 그러죠~. 근데 단 둘이 구경도 하고 밥도 같이 먹고 잠도 한 방에서 같이 자다 보면~. 두구두구두구두구 빠밤!”

얘는 정말 요정 님께 못 하는 말이 없어.”

아야! 환자를 때리는 게 어딨어요!”

루노의 저주를 받으라.”

아야야!”

더 세게 치거라.”

! 콜드펌 님까지 정말 너무하세요!”

 

피시스에는 격리소에 남고 더 이상 격리소에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다시 지상으로 올라오고 나서는 다들 미뤄뒀던 개개인의 일을 맡으러 뿔뿔이 흩어진다. 쿱과 헤어질 때 나누던 애틋한 인사는 필요 없었다. 여차하면 내일도 만날 수 있었으니까. 리베라나와 콜드펌이 공간조율학파로 돌아가고 단 둘이 덜렁 남은 러트너와 요정은 가이더링 구경을 하기 전 한동안 묵을 여관을 찾았다. 이들은 딱히 가이더링의 지리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고 어느 여관이든 자신들이 알고 지내던 평범한 여관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가이더링에 처음 도착했을 때 쿱과 함께 묵었던 그 여관을 다시 찾았다. 하루 묵는 데 5실이나 드는 여관비도 이제는 가볍다. 러트너는 금화 한 닢을 건네고 304라고 쓰인 팻말에 엮인 열쇠를 받는다. 34번째 방, 304번째 방이라고 읽지 않을 수 있는 자신이 은근 자랑스러웠다. 지난번 묵었던 방과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침대보의 무늬가 조금 다를 뿐이다. 방에 짐을 대강 내려놓은 러트너는 바로 나가지 않고 일단 침대에 누워보았다. 푹 꺼지지 않고 철렁이며 러트너의 몸을 받쳐주는 구름같은 침대, 역시 침대는 가이더링이다. 이 침대만 따로 사서 집에 들여놓는다고 하면 과연 돈이 얼마나 들지 궁금했다.

 

으아이고.”

하아, 가이더링 침대가 좋구나. 일개 여관 침대만 해도 이리 좋거늘. 어찌 수도에서 이러한 침대를 쓰지 아니하는 것이란 말이더냐.”

분명 마법으로 속을 채웠겠죠.”

 

둘 다 침대 위에 누워 똑같이 팔다리를 대자로 뻗었다. 이대로 확 자버리고 싶다. 흡혈귀라도 된 것처럼 낮잠 한 번 푹 자고 싶다. 푹 자도 뭐라 할 사람이 없고 잘못 될 일도 없다. 여유로웠다. 언제까지 여유로울 수 있을지 몰라도 지금 이 여유가 좋았다.

 

러트너.”

.”

아까 무언가를 물으려다 그만두지 아니하였느냐. 그것이 무엇이더냐?”

 

쿱과 헤어질 때를 말씀하시는 것이로군, 러트너는 잠시 그 질문이 뭐였는지 잊고 있었다. 그러다 쿱과 헤어지는 과정을 천천히 되짚어가며 그 질문을 기억해냈다.

 

요정들이 입을 맞추는 건, 사람이 하는 거랑 비슷한 의미인 거죠?”

그대들도 작별할 때 볼이나 이마에 입을 맞추지 아니하느냐?”

그렇죠. 친한 사이일 때만, 그리고 다시 보기 힘들 것 같을 때만. 딱 그렇게 정해진 건 없지만서도…….”

쿱은 이 몸과, 또 그대와 생사를 함께하였고 타국으로 나가는데 입 한 번 맞추어 주어도 되지 아니하느냐.”

 

그렇지, 그렇지. 당연한 이야기였다. 난 애초에 이걸 왜 묻고 싶어했지? 그저 학술적인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나뮈의 열쇠들과 같이 다니다보니 그 학구열이 옮겨붙은 것이다. 러트너는 요정에게 감사를 표했다. 요정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러트너의 곁으로 와서 누웠다.

 

쿱이 부러우냐?”

? 아뇨? 쿱 씨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죠! 그리고 뭐,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여자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런 걸 부러워할 이유도 없죠! 그리고 뭐, 상대가 요정 님이라 그런 거지 사실 다른 사람이 해주는 거랑 큰 의미 차이는 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뭐, 부러울 게 있어요? 전 요정의 선구자로 기록될 거고 요정이 허락한 존재만 들어갈 수 있다는 땅에도 들어가봤고 거의 일거수일투족을 같이 하는 수준인데 겨우 입맞춤 한 번 가지고 꼭 질투하는 것처럼 보이는마냥…….”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러트너만 아쉬워질 뿐이다.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눈빛을 읽을 줄 아는 요정 앞에서는 부끄러운 발버둥에 불과했다.

 

……요정 님 앞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 몸은 그대와 항상 붙어다니니까 얼마든지 하여줄 수 있노라. 말만 하거라.”

제가 리베라나인 줄 아세요?”

 

러트너와 요정은 킥킥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요정이 얼굴을 확 들이미니 러트너는 놀라서 얼굴을 뒤로 확 뺀다. 바라보고 있으면 빠져버릴 것만 같은 그윽한 눈동자가 코 앞에 떠있다. 입술이 가까웠다. 러트너는 숨조차 쉬지 않았다. 지금 이 상태로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닿아버릴 것만 같다. 러트너는 천천히 고개를 계속 뒤로 빼는데 어째 아무리 뒤로 빼도 얼굴이 떨어지는 것 같지가 않다. 내가 그렇게 천천히 움직이는 건가, 러트너는 계속해서 침대를 팔로 짚어가며 뒤로 빼다가 갑자기 휘청했다. 팔이 짚어야 할 침대가 없어서 아래로 훅 쏠리고 말았다.

 

으악!”

 

그제야 요정도 놀라서 앞으로 잔뜩 수그린 몸을 다시 뒤로 뺀다. 침대 위에서 바라본 러트너는 하반신만 침대에 걸쳐있는 아주 한심한 모습이었다. 요정은 깔깔 웃으면서 러트너의 무릎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대는 참말이지, 어리숙하니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구나!”

아으으…….”

 

요정이 내미는 손을 받아 몸을 일으킨 러트너는 이마가 새빨갛다. 피는 나지 않고 머리가 얼얼했다. 러트너가 이마를 짚고 아파하는데 요정이 그 손을 옆으로 슬쩍 치우더니 그 새빨간 이마에도 입을 맞춰주었다. , 하는 소리가 어지러운 귓가에도 선명하다.

 

, 이제 부러울 것 없겠느냐?”

…… 이거 아파서 입맞춤 두 번은 받아야겠는데요.”

응큼한 것.”

 

그래도 요정은 순순히 두 번도 해주었다. 입술에서도 요정의 오묘한 빛이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빨갛던 이마가 시원해지고 아픔도 가라앉았다. 자기도 왜 부러워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쿱보다 두 배나 많은 입맞춤을 받았는데 어째 남는 것은 두통 뿐이다. 러트너는 다시 침대에 누워 지끈거리는 잔통이 남은 머리를 베개에 묻었다.

 

화 났느냐?”

화 안 났어요.

 

화가 난다. 그 화가 누구를 향한 덧없는 화였는지 러트너는 알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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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에피소드를 쓰고 주화입마가 왔는지 쓰던 내용을 자꾸 갈아엎게 되네요. 당분간 직스는 좀 줄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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