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카오스 럭키짱 천일모험기를 능가하는 진정한 판타지 실장석 참피 소설 실장석과 환상 50화 : 눈두덩에 푸른 빛

 차원문이 픽 꺼지고 난 뒤에도 리베라나와 피시스에는 어떻게든 동력을 유지해보려 조종간 이곳 저곳을 만져댔다. 그러나 원초적으로 동력이 부족했기에 조종간으로 이것저것을 만진다고 해서 없던 동력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마력로에서 새어나오던 연둣빛마저 완전히 꺼졌다. 일레가 고개를 저었다.

 

마력봉 고갈……. 다 썼어요.”

안 돼, 안 돼요! 러트너 님이, 러트너 님이 지금 좀비랑 같은 방에 있다고요! 꺼내와야죠! 구해와야죠! 쭙쭙아! 너 피 잔뜩 먹었으면 그 마력 좀 지금같이 좋은 데에다 써봐, 제발!”

그런 건 못해! 할 수 있다고 해도, 내 마력으로도 가동하기는 모자랄 거라고.”

그렇다고 러트너 님을 혼자 둘 수는 없잖아!”

 

……분명 좌표는 가이더링이었어……. 가이더링에…… 좀비가 있다고……? 피시스에, 너네 격리소에 좀비도 가둬놓냐?”

격리해둔 게 있지만, 거긴 공간조율학파잖아! 괴생물학파에 가둬놓은 좀비가 공간조율학파까지 어떻게 찾아오냐고!”

……공간조율학파장이 흑마법에 손을 대고 있다는 것 밖에는…….”

아니야! 절대 아니야!”

 

에립마브의 말에 리베라나는 동공을 덜덜 떨면서 에립마브에게 몸을 부딪혔다.

 

학파장님이 그러실 리가 없어! 우리 학파장님이, 절대 그럴 리 없다구!”

그럼 가이더링에 차원문이 있을 만한 곳이 공간조율학파 말고 어디가 있는데!”

, 다른 사람일 거야! 학파장님은 아니야! 우리 학파장님은 절대 아니야!”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학파 안에, 그것도 차원문 보관하는 곳에 좀비가 돌아다니는데 그걸 방치한 시점에서 이미…….”

아니라니까아아아아! 아니야! 우리 학파장님이 그러실 리가 없어!”

 

리베라나는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카시도 어안이 벙벙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좌표를 몇 번이고 확인해봤지만 더 가이더링 길드의 좌표가 확실하다. 차원문은 확실히 열렸고 러트너는 이 자리에 없었으며 흡혈귀는 좀비를 봤다고 했다. 어느 부분에서 무엇이 잘못된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피시스에는 조종간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카부스는 절대 그럴 놈이 아니야. 카부스는 절대 그럴 놈이 아니야……. 지금 당장 차원문 만들기도 벅찰 텐데 흑마법까지 손을 댄다고? 말이 안 돼!”

차원문을 만드는 데 흑마법을 곁들였을 가능성은?”

흑마법 심문관들이 검수까지 한 방식이야.”

흑마법 심문관들이 매수를 당했거나 방식이 여러 개일 가능성은?”

그런 즉발식 논증으로 따지고 들면 세상에 설명 안 되는 일이 없어!

 

피시스에와 에립마브가 말싸움을 하는 사이 요정은 리베라나 옆에 주저앉아서는 망연자실하여 동력 없는 차원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눈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또르르 흘렀다.

 

……러트너는 일 없으리라……. , 그이는 칼을 차고서 들어갔노라. 산송장을 벨 수 있는 검이었느니라! 상대가 좀비라는 것을 알아차리었다면 곧바로 베어버릴 것이니라! 피시스에, 그리 하지 아니하겠더냐!”

…….”

어찌 함구하는 것이냐……. 그대는 러트너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냐! 그대가 어찌 그리할 수 있느냐!”

……좀비가 무서운 게 아니에요.”

 

피시스에는 차마 요정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시선을 비겁하게 피한다고 욕을 먹겠지만, 그는 차라리 욕을 먹어도 요정의 눈에 깃든 실낱같은 희망을 차마 보는 앞에서 대놓고 끊어버릴 수가 없었다.

 

좀비가 있다는 건……. 좀비를 만든 누군가가 배후에 있다는 얘기에요……. ……저희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 할 수밖에…….”

그리할 수 없느니라! 러트너는 이 몸을 살리어주었다는 말이로다! 그이는 고향에 이 몸과 함께 돌아가서 망자의 누명을 풀어야 하느니라! 그리 말하지 말거라! 러트너는! 러트너는……!”

 

요정은 피시스에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차원문은 묵묵부답이었고 러트너는 자리에 없다. 피시스에는 가능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써보았다. 아직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가능성을 찾아야 했고 그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는 감정을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억누르지 못한다면 자신도 리베라나와 요정처럼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았다.

 

……요정 님, 마음은 아프시겠지만…….”

그리 말하지 말거라!”

……러트너 씨가 좀비가 될 때를…….”

듣기 싫도다! 말하지 말거라! 산송장이라면 이제 치가 떨리거늘! 러트너가 산송장이라니! 차라리 이 몸을 죽게 놓아두지 어찌 이 몸을 살리고 러트너를 앗아가느냐는 말이로다! 차라리 이 몸이 보는 앞에서 죽으면 죽었지, 죽지도 아니하고 살지도 아니하는 저주를 내리시나이까! 루노이시여! 아흐흐흐흑…….”

 

요정은 목을 놓아 통곡했다. 러트너에게 닿기라도 바라는 건지 울음소리가 지상까지 울릴 것만 같다. 피시스에는 요정을 안아줄까 손을 뻗으려다가 결국 뻗지 못했다. 그로서도 가슴이 아팠다. 사라진 러트너에 대한 비통은 에립마브를 향한 화살이 되어 날아갔다.

 

이것이 다 네놈의 탓이로다!”

갑자기 내가 왜! 누가 들으면 차원문을 내가 만들었다고 하는 줄 알겠네!”

네놈이 윌로우플랫에서 차원문만 부수지 아니하였으면! 네놈의 흑의 계약서로 같잖은 수작만 부리지 아니하였으면! 네놈 자체가 존재하지만 아니하였더라도 러트너는 지금 이 몸의 곁에 있었을 것이로다!”

이게 진짜, 내가 흑의 계약서 안 썼으면 넌 지금 이 세상에 없었어!”

이 몸의 목숨을 살리고자 얼마나 많은 무고한 목숨이 희생을 하여야 하는 것이더냐! 차라리 이 몸의 목숨을 끝으로 네놈을 처단하였으면, 지금과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아니하였을 것이 아니더냐!”

오냐 씨발 그래, 어차피 흑의 계약서도 써놨겠다 너 죽고 나 죽어볼까?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러트너 옆으로 같이 손잡고 나들이 한 번 가? 정 걱정되면 같이 가지 왜 걔만 혼자 보냈냐? 요정 오라비가 같이 가자고 손 내밀었을 땐 발뺌하면서 나중에 가겠다더니?”

모두들 진정하십시오, 아직 아무 것도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콜드펌이 요정과 에립마브의 사이를 가로막으면서 타오르는 원망의 불꽃에 한 잔의 찬물을 끼얹었다. 콜드펌이 직접 요정을 품에 안고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입을 막는다. 요정이 바둥거리면서 콜드펌의 손을 마구 물어 뜯었지만 콜드펌은 꾹 참으면서 말했다.

 

확실한 것을 따져보아야 합니다. 차원문 가동은 성공했고, 러트너 씨는 가이더링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흡혈귀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가이더링에 좀비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해결할…… ! 이것을 전문적으로 해결하는 이들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흑마법 심문관, 그 사람들 뿐이야.”

학파장님께도, 우리 학파장님께도 가봐야 돼요, 뭔가 잘못 됐어, 우리 학파장님은……. 우리 학파는 정말 깨끗한 학파라구요…….”

……리베라나 님, , 저희도 압니다. 그러나 눈 앞의 증거나 너무도 명확하기에……. 마음의 준비를 어느 정도는 해두셔야 합니다.”

……아아…….”

 

요정에 이어서 리베라나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닐 거에요……. ……제발……. ……아니어야 해요…….”

 

콜드펌의 손에서 피가 잔뜩 흐르고 있었다. 그 피가 입가에 잔뜩 묻은 요정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으며 입 안에 남은 피의 맛에 인상을 찌푸렸다.

 

카부스……. 아닐 거야……. 아니겠지……?”

지금 저희가 해야 할 최선은, 가이더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 그래…… 그게 맞는 말이죠……. 여기서 밍기적거릴수록 러트너 씨가 더 위험해져…….”

대장님.”

, .”

 

상황을 지켜보던 드워프들은 차원문이 켜질 때만 해도 경외감을 드러냈으나 지금은 모두 경계와 의심만을 품고 있었다. 대장이 콜드펌의 손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더 가이더링 길드 행 순간이동 주문서의 재고가 있습니까? 몇 장 빌려야, 아니, 구매하겠습니다.”

……이번 만큼은 외상으로 줄게. 나중에 갚으라고. 하마터면, 하마터면 좀비가 여기로 넘어올 뻔한 거 아냐. 큰일 날 뻔했네.”

자애로움에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와서 제대로 좀 알려줘. 차원문을 계속 만들어야할지 말지. 믿는다. …… 나뮈의 열쇠야.”

확실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드워프 대장님. 대대장님께는 부디 오늘 있었던 일을 과장도 축소도 없이 그대로 보고해주십시오.”

 

대장은 양바니의 수도사 드워프를 시켜 피가 뚝뚝 흐르는 콜드펌의 손을 치료해주도록 명하면서 자기 부관에게 더 가이더링 길드 순간이동 주문서를 있는 대로 가져오라고 시켰다. 콜드펌은 손에 약을 바르면서도 요정을 붙든 손을 놓지 않았다. 요정의 이빨이 남긴 깊은 상처는 바느질이 필요할 만큼 치료가 까다로웠다. 콜드펌은 나뮈의 기도문을 읊으면서 마취 없이 손을 꿰매나갔다.

 

, 콜드펌……. , 이 몸이 잘못하였느니라……. 이 몸이 감정에 휩싸이어…….”

 

요정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콜드펌이기에 그나마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흡혈귀의 말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느니……. 이 몸이 동행하였어야 하는 것이거늘……. 마법사들을 불신하였다면 러트너도 보내지 말았어야 하였거늘……. 죽더라도 살더라도 함께 하였어야 하거늘……. 이 몸의 죄가…… 이 몸의 탓이……. 아플룩 아믹삼 아엠, 아플룩 아엠, 아플룩 아엠…….”

요정 님, 이해합니다. 러트너 님과 요정 님은 종족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주 각별한 사이셨으니. 눈 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겁니다.”

러트너가 이 몸이 마주한 첫 인간은 아니지만……. 그이가 숨을 거두는 것도 아니고 죽지도 살지도 아니하는…… 이 몸은 차마 눈 뜨고 그러한 광경을 볼 엄두가 나지 아니하여……. 아아, 러트너……. 사레사브 오욱…….”

러트너 씨를 구하고 싶으십니까?”

말하여 무엇하겠느냐. ……살아있지 아니하더라도……, 이 몸이 맞이하여주고 싶노니.”

그럼 가서 짐을 싸십시오. 지금은 가이더링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요정은 손으로 빛을 내어 콜드펌의 손을 쓸어주며 미약하게나마 사죄의 뜻을 표한다. 그리고 근육통으로 쑤시는 몸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미라익스로 올 때 가져온 짐을 모두 챙겼다. 요정의 옷은 개어놓은 기억이 없음에도 모두 깔끔히 개여있다. 러트너가 개어놓은 것이다. 개중에는 러트너의 말 안장이나 입던 옷도 있었다. 지난 밤 열심히 기계를 굴리며 땀을 잔뜩 흘린 러트너의 체취가 옷에 진하게 남아있었다. 그 옷을 정리하면서 요정의 눈물이 그칠 줄을 몰랐다.

 

러트너……. 엣 티키데네브 오눌…….”

 

 

 

차원문이 꺼진 뒤 러트너는 어두운 방 안에서 손을 휘저으면서 벽을 찾았다. 벽을 따르다보면 불을 켤 장치가 나오겠지, 하는 심산으로 이곳저곳을 뒤져본다. 벽이 꼭 바윗덩이를 만지는 것 같다. 리베라나 말로는 지하실에 차원문을 보관한다고 했는데, 지하실이 아니라 땅굴이 아닌가 싶었다. 이렇게 어두운 방 안에 저 사람은 어떻게 불도 안 켜고 다닐 수 있는지 경이로웠다.

 

밤눈이 엄청 밝으신가봐요. 설마 그쪽도 흡혈귀는 아니시겠지? 에이, 농담이에요. 마법사들이면 뭐 깜깜해도 잘 보이는 그런 마법을 하나 둘쯤은 알고 계시겠죠. 근데 전 마법사가 아니라서요. 실례지만 불좀 켜주세요.”

으으으으…….”

, . 저도 알아요. 아까 그거 흡혈귀였다는 거. 다 말씀해드린다니까요. 혹시 자다 깨셨어요?”

 

러트너는 벽을 계속 더듬으며 걷다가 발이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뭐에 걸렸는지도 모르겠고 넘어지면서 어디가 벽인지도 잘 모르겠다. 러트너는 바닥에서 뒹굴면서 괴로이 신음했다.

 

아으……. 아프다. 설마 차원문 망가트린 건 아니죠?”

……미안하오. 지금 동력이 끊겨서 불을 켤 수가 없소.”

……. 동력이요?”

차원문을 통해 들어오지 않았소? 평소에 쓰지도 않던 것을 갑자기 쓰니 과부하가 걸린 것이라오.”

 

그래도 누군가 사과의 말과 함께 손을 내밀어 어깨를 건드린다. 러트너는 그 손을 잡았다.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으아, 손이 엄청 차네요?”

얼음 탄 쇼콜라틀을 마시고 있었소. 그 음료는 쏟아버린 것 같군. 걱정 마시오. 부서진 기계는 없소.”

끄응…….”

하인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오. 당신은……. 러트너로군.”

 

옷이 더러워졌는지 보이지도 않지만 일어나면서 본능적으로 옷자락을 탈탈 턴다. 어둠 속의 목소리는 러트너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 아시네요?”

아까 본인 입으로 말했잖소. 당신 이름은 신보에서 지겹도록 본다오. 요정이 가이더링으로 들어올 때 한 번, 나갈 때 한 번, 요즘 신보에서는 요정의 소식이 빠지는 날이 없소. 당신 이름도 마찬가지이고.”

그렇죠, . 전 하는 것도 없긴 하지만.”

 

차가운 손에 이끌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일단 걷기만 했다. 걸음 소리가 벽과 천장에 부딪혀 메아리치듯 울린다. 드워프 굴의 복도와도 다를 바 없으니 지하 시설인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불빛은 드워프 굴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적다.

 

죄송한데, 저 좀 학파장님께 데려다주실 수 있나요?”

학파장?”

. 성함이 뭐였더라. 공간조율학파장님이요. 여기가 공간조율학파잖아요?”

……그렇소. 그렇소. ……하지만 지금은 동력이 끊겼으니 승강기도 작동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계단을 타는 건 많이 위험하오. 발이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땅에 머리를 박고 영영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소.”

 

어둠 속의 목소리는 굉장히 독특한 말투였고 목소리도 건조했다. 복도 벽에 목소리가 울려서 그런 걸까, 러트너는 자기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가면서 말했다.

 

듣고 보니 그렇겠네요, 아으, 아직도 삭신이 쑤시는데 계단을 타기도 그렇고.”

잠시 앉아서 동력이 복구되길 기다리시는 게 좋겠소. 묻고 싶은 이야기도 아주 많고 말이오.”

 

차가운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이리 꺾고 저리 꺾고 하다보니 방향감각도 없어지기 일보직전이다. 그래도 어떻게 발이 걸려 넘어지거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거나 하는 일은 없이 원활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마침내 차가운 손은 어딘가에서 멈추더니 드르륵 하는 소리를 냈다. 꼭 의자를 뒤로 뺄 때 바닥에 끌리면서 나는 소리 같았다.

 

의자와 탁자가 있으니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이렇게 캄캄한데 넘어지지도 않고 슥슥 잘 다니시네요?”

이곳은 나의 방이며, 마법사라면 어두운 곳에서도 밝게 볼 줄 아는 마법 정도는 익히고 다니는 법이오.”

하긴.”

쇼콜라틀이라도 한 잔 하시겠소?”

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앞도 안 보이는데 마시다 쏟겠어요.”

그렇군.”

 

어둠 속에서 어색한 침묵만이 계속 이어진다. 차라리 뭐가 보이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러트너는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 쳤다가 침묵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소리가 훨씬 어색하게 느껴진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주변에서 자꾸 기운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으으으으으…….”

?”

하품 소리요.”

…….”

그래서……. 러트너. 러트너 씨라고 불러도 되겠소? 선호하는 호칭이 있으시오?”

 

러트너는 잠시 자신에게 별다른 호칭이 있나 생각해보았다. 아저씨, 요정 오라비, 요정의 선구자이자 구원자, 앰버메이플 숲의 전 숲지기, 더 가이더링 길드 명예 마법사, 유사 흡혈귀 사냥꾼. 별로 러트너가 선호하는 호칭은 없었다.

 

……. 제 별칭이 생각보다 많기는 한데, 그냥 편하실 대로 부르세요.”

그럼, 러트너 씨. 차원문을 통해서 오셨던데……. 좌표가 이상했소. 미라익스더군. 그곳은 자연 마력이 전혀 없는 땅인데 말이오. 참으로 미라익스에서 오신 것이오? 아니면 좌표가 잘못된 것이오?”

, 미라익스에서 온 거 맞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소.”

그건 말이죠……. . ……. 시작을 하려면…… ~청 얘기가 길어지는데.”

괜찮소. 어차피 동력이 복구되려면 시간이 걸릴 텐데 심심하지 않으시겠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러트너는 처음엔 미라익스에서 차원문 동력을 구한 방법에 대해 설명하다가, 자기가 어떻게 미라익스로 가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를 미라익스로 가게 만든 흡혈귀 이야기를 하다가, 윌로우플랫의 차원문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가 어떻게 가이더링으로 가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하다가, 실장석의 마력동석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손도 못 쓸 만큼 빙빙 돌고 돌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나뮈의 수도사였다면 깔끔하고 빠르게 이야기를 끝냈을 텐데, 러트너는 어느 순간 자신이 어디까지 이야기를 했었는지, 어떤 얘기를 했고 어떤 얘기를 안 했는지 잊어버렸다.

 

…… 제가 어디까지 했었죠? ……. 흡혈귀 실장석 이야기는 했었나요?”

그렇소. 잠시 이야기를 정리해보겠소. 그러니까 러트너 씨는 와이드스트림의 사냥꾼이셨는데, 실장석의 배를 갈라보고 마력동석이 나온 것을 확인한 뒤 그것을 팔기 위해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다가, 요정도 만나고 흡혈귀의 공격도 받으며 명예 마법사가 되어 그 여파 때문에 트루피아와 미라익스까지 가게 된 것이구려. 그 중간에 쓸모는 하나도 없는 줄 알았던 마력동석이 사실 흡혈귀 실장석에게서 뽑아내면 강력한 마력을 지닌다는 사실도 알아냈고.”

, 대강 맞아요.”

그랬었군…….”

. 그랬었죠.”

 

이제야 머리가 좀 개운해졌다. 복잡하고도 엉켜있는 생각을 정리하고 한숨을 깊게 후우 쉬고 나니 모든 것이 명쾌해진다. 이 사람도 나뮈를 섬기는 사람인가보다, 러트너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둠 속의 목소리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드르르륵, 하는 소리가 러트너가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들길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다.

 

명예마법사란 말이지.”

.”

……!”

 

어둠 속의 목소리는 소리 없이 놀랐고 러트너는 그가 놀란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다면 명예 마법사 증표도 지금 가지고 계시오?”

.”

뭐라……! 잠깐 봐도 되겠소!”

보여드릴 수는 있는데, 빛이 이래서야…….”

부디 보여주시오!”

 

러트너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가락 감각만으로 명예 마법사 증표를 찾았다. 널찍하니 쉽게 꺼낼 수 있어 바로 탁자 위에 올려놓고 앞으로 스윽 밀었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스으윽, 하고 금속을 끌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반대편에서 증표를 가져간 것이다.

 

……이런.”

왜 그러세요?”

 

그때 반대편에서 캉, 하는 소리가 울렸다. 날카롭고 명랑한 소리였다. 앞이 안 보이는데 큰 소리가 들리자 러트너가 깜짝 놀란다. 그가 놀란 것은 소리 때문도 있지만 갑자기 켜지는 조명 탓도 있었다. 눈이 부셔서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가린다.

 

……! 이제 동력이 복구됐…….”

 

러트너는 실눈을 뜨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이 동굴이다. 나무로 대들보를 놓고 지지대를 쌓아 무너지지 않도록 해놓은 것이 꼭 광산의 갱도를 보는 것 같았다. 괴생물학파의 지하실과는 완전 딴판이다. 거기다 러트너 뒤에 누가 서있었는데, 기척조차도 느낄 수 없어 또 한 번 놀란다. 그러나 단순히 놀라는 정도가 아니었다. 러트너 뒤에 서있는 사람은 피부가 보랏빛이며 얼굴에 감정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고, 얼굴 전체를 가로질러 바느질 자국이 촘촘히 나있었다. 그것은 살아있지 않았다. 사람이 아닌, 좀비였다.

 

, 으아악! 좀비잖아!”

앉으시오.”

 

러트너는 앉으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허리춤의 백금검을 뽑으면서 자기 뒤에 선 좀비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나 검은 좀비에게 닿지 못하고 공중에서 멈추고 만다. 누군가 러트너의 검을 잡고 있는 것처럼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검을 잡고 있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맨손으로는, 설마 하는 마음에 러트너가 탁자의 반대편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명예 마법사 증표가 산산이 부서져있었다. 그러나 러트너가 실로 두려운 것은 부서진 증표 따위가 아니었다.

 

……오 맙소사.”

 

지금껏 러트너와 대화를 하던 사람, 머리 옆에 광원을 띄워놓은 어둠 속의 목소리는 에립마브와 분위기가 무척이나 흡사했다. 하지만 에립마브보다 훨씬 앙상하며 송곳니가 튀어나와있지 않고 얼굴은 그저 가죽만 있는 것처럼 뼈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보였다. 러트너는 전설이나 무용담에서 이러하게 생긴 괴물의 묘사를 들은 바 있었다. 산채로 자신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들어내고,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의식을 행하여 그 심장을 영물함에 넣고 마력을 공급하며 영생을 누리는 존재. 그는 그제야 왜 에립마브가 차원문 건너편에서 빨리 돌아오라고 소리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 리치, 리치! , 말도 안 돼, , 공간조율학파에, 리치가……!”

요정에게 고마워하는 게 좋을 거요. 당신이 신보에 오르내릴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지금 당신이 죽이려 하는 내 하인과 같은 신세가 되었을테니. 말하고 보니 애초에 그런 수준이었다면 차원문을 이용할 자격은 주어지지도 않았겠군.”

학파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설마, 이 사람들이……?”

안심하시오. 일부러 죽인 것은 없소. 전부 병이나 노환으로 죽은 이들이고 장례절차까지 다 마친 이들이니. 이제 산 자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이들이고 난 그 육신을 잠시 빌렸을 뿐이오.”

……도굴이라는 말을 참 고상하게도 하시네.”

 

러트너는 칼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 사방이 좀비에 자신은 리치를 대면하고 있으며 지금 자신이 산송장을 상대할 만한 수단은 백금검 하나밖에 없었고 그 백금검마저 리치가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그에겐 승리의 희망이 없었다.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오. 내 모습을 보고도 금세 평정심을 유지하는구려. 대부분은 죽이지 말라고 하거나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데 말이오. 그게 사냥꾼의 본능이라는 거겠지.”

…….”

두르마르에서 차원문 실험이 성공했다니. 같은 마법사로서 기쁘지 아니할 수 없으나……. 저들은 더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니 애석할 따름이로군.”

……더 큰 그림?”

러트너 씨, 걱정하실 건 없소. 당신은 죽이지 않을 테니. 죽이면 훨씬 문제가 커지니까. 그러니 앉으시오. 불도 켜졌는데 음료나 한 잔 들겠소?”

 

앉고 싶지 않았다. 다리를 놀려 도망가고 싶었다. 그럼에도 러트너는 앉았다. 앉을 수밖에 없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러트너를 강제로 움직여 의자에 앉혀버렸다.

 

필요없어. 공간조율학파에 리치가 있다니……. 학파장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

공간조율학파?”

시치미떼지 마. 가이더링에 차원문이 있을 곳이 공간조율학파밖에 더 돼?”

산송장은 마법을 연구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시오?”

산송장이 배우는 마법은 죄다 흑마법 뿐이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마법사도 아닌 신분으로 그런 말씀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그런 의미에서 말인데, 러트너 씨에게 묻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소.”

 

러트너는 날 선 태도를 굽히지 않으며 되물었다.

 

대답하기 싫다면?”

하지 않으셔도 좋소. 정답이 없는 질문이니 침묵도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소. 그저 러트너 씨의 생각을 물을 뿐이오.”

 

러트너가 앉은 탁자 앞에 좀비 하나가 펄펄 끓는 액체가 담긴 잔을 들고 와서 놓아줬다. 움직임이 굉장히 느렸고 시선마저도 러트너나 주전자를 보고 있지 않았다.

 

에립마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에립마브? 그 흡혈귀?”

러트너 씨도 에립마브라는 흡혈귀와 꽤 긴 시간을……. 짧지만, 산송장과 함께 한 시간 치고는 긴 시간이지. 세상에서 산송장과 가장 오래 지낸 사람이 얼마나 오래 지냈는지 아시오? 괴생물학파처럼 가둬놓고 관찰하는 게 아니라, 같이 지내면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생활하는 것 말이오.”

궁금하지도 않아. 하고 싶은 말이 뭔데!”

“2달이었소. 임신중이었던 아내가 흡혈귀로 변해버린 남편이 아내는 죽였지만, 차마 뱃속의 아이까지는 죽일 수 없었기에 이를 숨기면서 살아왔지만 결국 다른 인간들에게 걸려 흑마법사로 낙인찍히고 끔찍하게 살해당했소.”

 

좀비는 리치 앞에도 잔을 놓아줬지만 소화기능이 없는 리치는 잔에 입도 대지 않았다. 잔을 가져다놓은 리치는 귀빈에게 음료를 대접하는 시종마냥 리치의 뒤에서 쟁반을 든 채로 얌전하고 예의바르게 서있었다.

 

그러나 그 흡혈귀 아내도, 아이도, 남편도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았소. 단지 산송장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한 것이오. 그 아내는 흡혈귀가 되고 싶어서 되었겠소? 그 아이는 뱃속에서만 살았는데 어미가 흡혈귀가 될 줄 알았겠소? 남편은 아내를 흡혈귀로 만들고 싶어서 일부러 만들었겠소? 그들이 무슨 죄가 있었단 말이오.”

그건 억울한 사례지만, 흡혈귀를 산 사람으로 돌려낼 수도 없으니 죽일 수밖에 없어. 흡혈귀를 내버려두면 더 많은 사람을 죽일 테니까. 당신처럼!”

난 지금껏 사람을 죽인 적이 없소.”

 

리치는 단호하게 이야기하며 러트너 앞에 놓인 잔을 염동력으로 움직였다. 마시라는 뜻이었다.

 

죽은 사람을 좀비로 만들어 하수인으로 부려먹고 있기는 하지. 물론, 인간의 시선에서는 잘못된 것이오. 고인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그러나 아무도 이 리치를 도와주려 하지 않는데 혼자서 연구를 할 수는 없지 않겠소.”

……인공생물이라는 건 쳐다도 안 봤나보지?”

애석하게도 내가 살던 시대엔 그런 기술이 없었소. 그리고 지금은 배울 기회마저 없지. 인공생물학파에 가서 이 리치를 가르쳐달라고 하면 퍽이나 가르쳐주겠구려. 그리고 좀비가 인공생물보다 만들기 쉽다오.”

 

어느새 러트너가 들어왔던 방 입구에는 4마리의 좀비가, 그리고 방 밖에도 훨씬 많은 좀비가 진을 치고 있었다. 죽이지 않겠다는 말을 했지만 그 말을 믿을 수도 없었고 혹시나 자신이 저 좀비 사이에 끼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러트너 씨, 다시 묻겠소. 에립마브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흡혈귀일 뿐이야.”

첫인상과 지금 인상이 많이 바뀌었을 것으로 짐작하오만. 지금도 에립마브의 목을 치고 싶으시오?”

…….”

 

리치는 러트너의 침묵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리치는 러트너의 마음을 읽은 듯이 답을 재촉했다.

 

괴생물학파장이 없다고 해보시오. 에립마브의 명줄을 지금까지 이어온 흑의 계약서가 없다고 생각해보시오. 에립마브가 처형대에 묶여있소. 주위 사람들이, 당신과 가까운 요정마저도 모두 에립마브를 죽이라고 하고 있소. 당신이 그 집행자요. 당신을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소. 에립마브는 흡혈귀이며 산송장이고 수백 년간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당신과 요정까지도 죽이려고 했던 자요. 어떡하시겠소.”

 

러트너는 이를 갈면서도 의자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대답을 하기 전까지는 여기서 나갈 수 없으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그쪽도 상관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이곳은 가이더링이고 자신이 산송장에게 둘러싸였다는 소식을 에립마브가 모두에게 전했을 테니 모두가 자신을 찾아 사방팔방을 뒤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순순히 응해주는 것이 이득이리라. 시간을 끌면서 이 좀비들과 리치를 일망타진하는 것이다, 바로 그거다, 러트너는 침을 꿀꺽 삼키고 아주 천천히 대답했다.

 

……죽이지…… 않겠어.”

이유는?”

……지금의 쭙쭙이는…… 많이 변했어. 직접 나서서 드워프 대대장에게 사과까지 하러 갔고……. 처음엔 실장석 무는 것도 엄청 싫어했지만 지금은 순순히 잘 물고, 학대받던 포니카도 힘을 합쳐 도와줬고, 결국 흡혈귀이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사고를 치곤 하지만 이젠 사과도 할 줄 알아. 변했어.”

왜 그렇게 변했다고 생각하시오?”

……피할 수 없으니까 즐기나보지 뭐. 나도 몰라.”

산송장인데도? 특별한 흡혈귀인데도?”

지금 자꾸 곤란한 질문을 해서 날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속셈인가본데, 내가 무슨 대답을 해도 바뀌는 건 없어!”

 

리치는 눈동자가 없었다. 썩어서 문드러진 건지 두개골 깊숙이 들어가있어서 빛이 들지 않는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얼굴에서 감정을 제대로 읽기가 힘들어 더욱 보고 있기 불쾌했다.

 

물론 그렇소. 지금 내가 하는 질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마법학계에서 논의가 끊이지 않는 주제중의 하나요. 흑마법이 나쁜 것인가, 악인이 흑마법을 쓰는 것인가. 선인이 흑마법으로 선행을 한다면 피해자가 없음에도 그 사람을 처벌해야 하는가. 과거의 죄악을 미래에 행할 선행으로 씻을 수 있는가……. 그저 러트너 씨의 의견을 듣고 싶었소.”

…….”

그럼 두 번째로 묻겠소. 왜 실장석을 혐오하시오?”

갑자기 실장석은 왜?”

 

러트너는 에립마브에 관한 질문을 들었을 때보다 더욱 황당해하면서 되물었다.

 

러트너 씨는 사냥꾼이고, 마법사들이 실장석을 학술적으로만 바라보고 있을 때 러트너 씨는 실장석의 본능과 습성을 파악하고 이용해서 실장석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러트너 씨의 계획대로 움직이도록 조종할 수 있었소. 그럼에도 전부 괴롭히고 죽이기만 하셨소. 과하다 생각지 않으시오?”

과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 아냐!”

왜 그렇소?”

뭐 그야, 그 녀석들이 저지른 일을 내가 다 읊어줘봐? 사람들 짐더미 안에 들어가서 먹을 건 다 처먹고 똥 싸놓기, 남의 집에 똥을 쳐발라대서 산송장 끌어모으기, 가만히 있는 인간에게 똥 던지기, 물고 뜯고 공격하기, 거기다 언어랑 언나로 들으면 그런 짓을 해놓고도 이걸 다 인간의 잘못이라 하고, 인간은 노예로 만들어야 한다는 개소리를 씨부린다고! 스톤빌이라는 동네는 실장석 때문에 멸망하기까지 했는데, 이래놓고도 분충이 아니란 말이야?”

……스톤빌…….”

 

리치가 가만히 읊조렸다. 러트너는 실장석의 해악에 대해서라면 얼마든지 열과 성을 다해 토로할 수 있었다.

 

스톤빌이 어쩌다 멸망했소?”

실장석들이 산송장을 끌어모아서 멸망했어!”

하지만 다른 동네는 지금도 건재한데, 왜 스톤빌만?”

그건 스톤빌 사람들의 실장석의 마력동석을 보석인 줄 알았으니까. 그걸 가져다 팔아서 부자가 될 생각에 실장석을 잔뜩 길렀으니까.”

그래서.”

실장석이 잔뜩 있으니 산송장도 잔뜩 몰려와서 멸망한 거 아냐!”

과연 그뿐이오? 경비대는 그 산송장들을 막아내거나, 주민들을 대피시키지 않고 무얼 했소?”

경비대는!…….”

 

러트너는 쿱의 말을 떠올렸다. 스톤빌의 경비대는 주민들을 대피시키려 노력했다. 산송장을 몰아내려 노력했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 산송장이 아닌,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실장석을 빼앗아 부자가 되려한다는 망상에 시달린 주민들에게.

 

……진정으로 실장석 때문이라 생각하시오? 인간 중에는 실장석과 다를 바 없는, 실장석보다 악독한 인간도 수없이 많소. 스톤빌이 진정으로 실장석 때문에 멸망한 것이라 생각하시오?”

모든 실장석이 나쁜 건 아니고 모든 인간이 착한 건 아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가본데 그래서 뭐 모든 산송장이 나쁜 건 아니다 그런 거냐?”

 

리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고 있는 옷이 바닥에 끌릴 만큼 길어 다리가 움직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공중에 살짝 떠서 날아다니는 게 아닐까, 러트너는 리치의 모든 행동이 수상해보였다.

 

일어나시오. 보여드릴 게 있소.”

 

일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러트너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려해도 염동력으로 떼내어 끌고 오는데다 사방이 좀비 투성이이니. 리치는 러트너를 끌고 동굴의 깊은 곳인지 얕은 곳인지 모를 곳으로 데려간다. 좀비들이 그 뒤를 따르며 도망칠 곳을 봉쇄한다. 가끔 으으으으, 하는 소리를 내는 것만 빼면 리치의 말을 철저히 잘 따르는 좀비들이었다. 리치는 러트너를 이끌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물론 대부분의 산송장이 해를 끼치는 것은 사실이오. 외부적 요인이 없다면 영생도 가능하지만 그 영생을 10년 이상 누리는 산송장은 많지 않소. 대부분 그 이전에 다른 이들을 해치다가 사냥당하고 말지. 당신의 에립마브는 굉장히 특별한 경우요.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데도 사냥을 당하지 않았다는 건……. 아마 사냥한 사람이 대부분 같은 인간들에게도 버림받은 인간쓰레기였을 것이오. 그러다 사람을 하나 잘못 건드렸던 게지. 요정이랑.”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건너편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고난과 비통의 울음소리, 리치의 손길 아래 고통받는 이들이 더 있다는 말인가, 그는 어쩌면 자신과 같이 재수없게 주변을 지나다니거나 동굴 내부를 기웃거리던 모험가들이 잡혀들어오지는 않았을까 걱정스러웠다. 분명 뒤따르는 좀비를 새로 만들기 위한 재료가 될 것이다. 러트너 본인도 좀비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다. 리치는 러트너 앞에서 움직이고 있다. 지금이라도 칼을 뽑아서 뒤를 찌를까? 찌른다고 확실하게 잡을 수 있을까? 잡은 뒤에도 내가 무사할 수 있을까? 섣불리 칼 손잡이에 손을 얹을 수가 없었다. 고민과 긴장으로만 가득한 채 동굴 벽을 따라 걷다보니 문이 하나 나왔다. 잠금장치만 3개씩 걸린 두꺼운 철문이었다.

 

여기다 날 가두시겠다?”

당신은 이야기가 끝나고 바로 보내드릴 생각이오.”

 

러트너는 코웃음을 치며 받아쳤다.

 

, 와이드스트림으로 데려다 달라고 해도 되냐?”

상관없소. 마을에 리치가 나온다는 소문이 돌아 지도에서 사라지기를 바란다면야. ”

……젠장.”

 

리치는 잠금장치를 하나씩 풀어가면서 말했다. 잠금장치는 모두 마법 장치로 이루어져 마법을 모르는 러트너는 절대 열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둬놓지 않겠다니 러트너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잠금장치가 모두 풀리고 문이 열린다. 입구가 좁아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문 뒤에서는 러트너의 귀에 정말 익숙하지 않을 수 없는 울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데에에에에에엥! 데에에에에에에에엥!”

데샤아아아앗! 데스데스 데스데스데샤아아아아앗!”

데스, 데스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데스! 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 데스데스 데스데스 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데스 데스우우우! 데스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데스! 데헥, 데헥, 데헤헥!”

대체…… 이게…….”

 



실장석의 감옥, 첫인상은 그랬지만 자세히 보니 감옥과는 달랐다. 분명 철창에 갇혀있는 실장석들이 많았지만 철창에 갇혀있지 않은 실장석들이 훨씬 많았다. 그곳은 하나의 정착지처럼 만들어져있었다. 종이상자로 이루어진 집들과 방 한 구석에 만들어진 공공화장실, 방 외곽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물 속에서 물 밖으로 식물이 자라나있었다. 잎이 굉장히 넓었고 꽃도 피어있다. 사람 얼굴보다도 큰 꽃은 꽃잎이 전부 검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모닥불을 지펴놓고 있었는데 껍질을 벗기고 손질을 해놓아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를 꼬챙이에 꿰어놓고 산채로 굽고 있었다. 분명 실장석 고기겠지, 러트너는 확신했다.


철창 속의 실장석들을 둘러보던 러트너는 표정에서 혐오를 지울 수가 없었다. 실장석 철창 안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냄새가 풍겼는데,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와이드스트림 외곽의 밤나무 숲을 거닐다보면 질리도록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그 안의 실장석은 옷은 정상적으로 입고 있었음에도 가랑이에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덩치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우람하여 옷 밖으로 튀어나온 남성의 상징이 달려있었다. 철창 안에도 곳곳에 액체의 자국이 눈에 띈다. 무슨 액체의 자국일지 러트너는 부디 알지 않았으면 했지만 그에겐 지식이 너무도 많았다. 그 자국을 만든 원인이 분명할 액체가 실장석의 보고싶지 않은 곳에서 주체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러트너는 눈을 가렸다. 수컷 실장석들이 자신들의 우람한 국부를 가리키면서 러트너를 향해 껄떡이고 있었다.

 

씨발……. 수컷 실장석은 왜 없나 했더니 차라리 없는 게 나았어…….”

, 데스! 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 데스데스 데스 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 데스 데스데스!”

 

수컷 실장석도 한둘이 아니고, 대부분은 손과 벽과 바닥과 옷을 비롯한 모든 것을 사용하여 몸과 마음 속의 욕망을 분출해대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다. 철창 밖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실장석들 중에도 수컷 실장석이 몇 마리 있었지만 전혀 눈길이 가지도 않았다.

 

, 데스웅? 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

이 실장석들도 당신같은 멀쩡한 인간을 살아 생전 처음 보는 것이오. 리치의 지식이 없어 나를 평범한 인간으로 알고 있더군. 당신을 보고 놀라워하고 있으니 인사나 해주시오.”

 

러트너는 실장석들에게 중지를 세워 인사해주었다. 그런 손짓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깥에 나와있는 실장석들은 러트너에게 허리를 굽힌다.

 

보셨소? 예의를 잘 갖췄다오. 말이 아주 잘 통하는 생물이라오. 자기 뜻을 죽어도 굽히지 않으려 하는 오크, 드워프, 요정보다도 훨씬 낫지.”

어딜 실장석 따위를 요정 님이랑 비교해? 아가리를 찢어버린다?”

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 데스데스.”

 

리치가 말했다. 그것은 분명히 실장석의 언어였다. 입에 언나를 꽂은 채로 말하는 것마냥 아주 자연스럽고 물흐르듯 데스데스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금, 실장석의 언어로 말을 하는…… 거냐?”

, 데엣! 데스데스데스!”

테치테치테츄? 테치테치잇?”

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데스! 데스! 데스데스!”

 

리치가 데스데스데스 소리를 늘어놓자 철창 밖에 나와있던 실장석들은 화들짝 놀라며 각기 종이상자 안으로 들어가서는 녹색 천으로 만들어진 보따리를 들고 나왔다. 실장석의 옷으로 만든 것이 분명하고 모닥불에 구워지는 실장석을 보아하니 저 실장석에게서 벗겨낸 것이 분명했다. 자실장들이 힘을 합쳐 큰 보따리를 옮기는동안 성체 실장석들은 기다란 쇠꼬챙이도 하나씩 들어 챙겼다. 그리고 철창 앞으로 다가가서 선다.

 

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 데헤엑, 데헤엑, 데보오오오오, 데스!”

데기잇, 데큿! 그으으읏! 데기잇! 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

 

철창 안의 실장석들은 자신들을 꺼내주려는 줄 알고 솟아오른 수컷의 상징을 껄떡이며 거칠게 숨을 쉬어댔다. 그리고 철창 밖의 실장석들은 기다랗고 날카로운 쇠꼬챙이로 철창 안을 찔렀다. 철창 가까이 붙어있던 실장석들은 곧장 꼬챙이에 뇌를 뚫렸다. 철창 안의 실장석들은 모조리 죽었고 좀비들이 그 철창을 열어 실장석의 시체를 따로 챙겨다 가죽부대 안에 모았다.

 

대체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넌 사람도 아니고 실장석 리치냐?”

이 장소가 노출되었으니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오. 짐을 싸라고 전했으며 철창 안의 죄수들은 모두 죽이라고 명했소. 그리고 보셨다시피, 말을 아주 잘 따른다오.”

…………. 정체가 뭐야……?”

 

좀비들이 철창을 들고 기울이자 철창 안에서 불순한 액체들이 흘러나와 바닥에 자국을 남겼다. 철창을 든 좀비들이 러트너의 옆을 지나가는데 러트너는 본능적인 혐오감으로 몸을 피한다.

 

러트너 씨는 언어와 언나를 사용해보셨고 실장석을 다루는 것도 익숙하신데, 왜 그렇게 놀라시오.”

난 실장석들을…… 끌어들이려고 수를 쓴 거지, 이렇게 명령을 시키고 따르게 한 건……. 에립마브 밖에 못 봤으니까. 알겠다, 당신은 리치니까 이 실장석들도 다 세뇌된 거지?”

아니오. 세뇌를 시켰다면 애초에 철창에 가둬두지도 않았을 테지. 난 저 실장석들의 자유의사와 권리를 존중하며 이 방에 가둬놓는 것 말고는 아무 개입도 하지 않고 있소.”

자유의사와 권리랜다 염병 지랄…….”

 

러트너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자기가 낳은 새끼를 잡아먹고 다른 동족이 잘 되는 꼴을 못 봐서 자기보다 밑으로 끌어내리려다 다같이 몰락하는 게 자유의사고 권리냐?”

그것은 러트너 씨가 흔히 생각하는…… 악한 실장석의 특징이오. 그러나 그것은 실장석의 본성이 아니오. 실장석의 본성은 매우 다양하오. 이들은 여러가지를 추구하오. 자신의 행복, 일가의 행복, 누구는 지식을 추구하고 누구는 힘을 추구하며 누구는 그저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혹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의 파멸을 추구하오.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동족을 구하려는 실장석도 있었소. 지금은 사라졌지만…….”

아 물론 일부만 그렇겠지! 사람도 모두가 같은 게 아니듯이! 그런 걸 다양성의 부조리라고 하…….”

 

리치의 말을 쏘아붙이던 러트너는 순간 깨닫는 바가 있어 말을 멈췄다. 그는 좀비가 집어넣는 시체들 사이에서 툭 튀어나온 수컷을 보았다. 그것의 모양새는 소름끼치고 불쾌하리만큼 인간의 것을 닮았다. 굳이 수컷이 아니더라도 실장석이라는 생물의 기본적인 행동양식과 생김새는 소름끼치고 불쾌하리만큼 인간을 닮았다. 러트너는 실장석을 처음 보던 날을 떠올렸다. 오크와 드워프의 혼종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 생각은 차마 인간을 닮았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어 오크와 드워프에게 떠넘겨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다양성의 부조리…… ……인간의 부조리…….”

나뮈의 수도사들과 함께 하더니 지식의 수준이 생각보다 대단하시구려.”

…… 아니야, 이건 뭔가, 뭔가 잘못 됐어. 이게, 이게……. 아니지?”

 

리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러트너는 고개를 저으며 리치의 멱살을 잡았다. 좀비들이 러트너를 돌아봤지만 리치가 손짓을 하자 모두 방을 나가 하던 일을 계속 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이 새끼야! 사람을 좀비로 만들더니, 사람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알겠지만 요점이 완전히 어긋나셨구려. 난 사람과 괴물을 융합하여 실장석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아니오. 애초에 융합된 것도 아니고.”

 

리치는 부드럽게 러트너가 잡은 멱살을 풀어낸다.

 

난 그저 실장석을 연구하는 사람…… 리치일 뿐이오. 당신 덕분에 연구 거리가 하나 더 늘었구려. 반실장석이라. 신기하지 않소? 이 세상에서 다양성의 부조리를 가진 것은 오직 인간 뿐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건만 지금 이렇게 다양성의 부조리를 가진 또 하나의 생물이 있으니. 그러나 그 부조리를 점차 잃어가고 있으니…….”

……잃어간다고……?”

말해줘도 모를 것이오. 그럴 수밖에 없을 테니까.”

 

러트너는 속이 터지려했다. 리치가 풀어낸 멱살을 한 손으로 다시 잡으고 다른 한 손은 칼 손잡이에 얹으면서 윽박질렀다.

 

무슨 속셈을 꾸미고 있는 거야! 당장 불어! 두동강을 내버리는 수가 있어!”

하하하하, 해보시오, 러트너 씨. 나는 리치요. 잘라도 다시 붙는다오.”

……, 씨발 진짜!”

 

리치의 비웃음에 화를 참지 못하고 쑤셔오는 근육으로 칼을 뽑아서 옆으로 휘둘러 리치의 목을 쳤다. 칼이 깔끔하게 목뼈를 지나 반대편으로 뚫고 나오면서 리치의 목이 몸에서 떨어져나왔다. 그러나 리치는 멀쩡했다. 몸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공중에 붕 떠있는 머리를 잡아 목에 다시 붙이니 원래대로 돌아왔다.

 

리치에 관해 알고 계시기에 영물함을 부숴야 확실히 죽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소만.”

닥쳐, 이 씨발 인분충 산송장 새끼야! 누굴 지금 놀려먹는 거냐고!”

하하하! 재밌는 단어로구려. 인분충…….”

 

리치는 고개를 젖혀 크게 웃다가 갑자기 고개를 확 숙이고는 러트너를 째려봤다. 눈동자가 없는 줄 알았는데 눈두덩 속에 파란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보였다.

 

지금 누굴 분충이라고 하는데샤아악!”

이 새끼가 진짜 돌았나!”

 

리치가 러트너를 향해 주먹을 내지르자 러트너는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러 리치의 팔을 잘라냈다. 갑자기 리치는 이성을 잃고 실장석의 언어를 두르마르어로 구사하면서 러트너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데갸아아아악! 와타시의 섬섬옥수를! 오마에같은 똥닌겐이! 갸아아악! 오마에는 진짜 뒤진데스! 오마에는 와타시에게 뒤진데샤아아악!”

 

팔이 잘렸음에도 리치는 다른 팔을 휘두르고 얼굴을 들이밀며 러트너를 물어뜯으려했다. 러트너는 칼을 닥치는대로 휘두르고 찌르면서 리치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자신도 역공을 펼친다. 그러나 리치는 무슨 공격을 해도 그대로 멀쩡히 있을 뿐이다.

 

오마에는 와타시의 발끝도 따라올 수 없는데스! 오마에는 와타시의 운치굴독라달마노예나 걸맞는데스! 아니, 오마에는 노예도 아까운데스! 그냥 죽어버리란데스! 오마에가 숨을 쉬는 순간마다 공기씨가 낭비된단 말인데스! 와타시가 쉬어야 할 소중한 공기 씨가 없어져버린단 말인데샤아아악!”

이 미친 리치를 그냥!”

 

러트너는 칼을 리치의 정수리부터 내려쳐 아예 반토막을 내버렸다. 그러나 옷이 잘려 벗겨지고 몸에 반으로 줄이 그어지기만 할 뿐 여전히 리치는 멀쩡하다. 심장이 있었을 가슴팍에 꼼꼼한 솜씨로 바느질을 해놓은 흉터가 보였다. 몸 전체가 가죽 덮인 해골같았다. 리치는 팔을 휘둘러 러트너의 팔을 때렸다. 엄청난 고통에 러트너가 칼을 놓쳤다.

 

! 이런 썅…….”

데퍄퍄퍄퍄퍄퍄! 이게 오마에와 와타시의 수준 차이데스! 오마에에겐 수준이라는 말도 아까운데스! 오마에의 수준은 와타시의 운치, 아니 우지챠 운치의 운치 정도란 말인데스! 감히 와타시를 분충이라 부른데스! 오마에는 분충 중의 분충 상분충 인분충인데스 이 분충! 오마에가 아무리 와타시를 보면서 세레브를 부르짖어도 와타시같은 진정한 양충이…….”

 

반으로 잘렸다가 다시 붙어가던 리치는 고개를 좌우로 거세게 젓더니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이때다 싶어 러트너는 재빨리 뛰쳐나가 놓쳤던 칼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공격은 하지 않는다. 통하지 않았으니까.

 

……왜 내 옷이 다 벗겨져있는 것이오? , 그래서였군.”

, 뭐야. 진짜 미친 새끼냐? 갑자기 정신이 헷가닥 하더니 이번엔 뭐냐고!”

나는 당신에게 답을 해줄 의무도, 이유도 없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당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기억할 수 없을 테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 모르겠군……. 러트너 씨.”

꺼져! 가까이 오지 마!”

 

러트너는 칼을 겨누면서 리치가 아무렇지 않은 척 공격해오지는 않을까 예의주시했다. 자신의 떨어졌던 신체부속을 모두 원래대로 붙인 리치는 러트너를 바라보면서 나즈막히 말했다. 리치의 눈두덩에 푸른 빛이 들어온다.

 

한숨 주무시오. 그리고 차원문으로 나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모두 잊으시오.”

 

그 즉시 러트너는 바닥에 쓰러져 눈을 붙이고 깊이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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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리 말씀드리자면 마라실장이 중심이 되거나 삽화에 마라를 직접 묘사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얀 악마 씨는 무서운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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