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카오스 럭키짱 천일모험기를 능가하는 진정한 판타지 실장석 참피 소설 실장석과 환상 61화 : 애교

 정신을 차렸을 때, 리베라나는 검은 자갈을 밟고 있었다. 검은 탁상지와는 조금 다른 자갈이다. 어딘가 끈적끈적하고 역한 냄새도 난다. 가이더링에서 맡아본 적이 있는 냄새다. 역청과도 비슷했다. 바닥을 제외하면 주위 풍경은 잘 보이지 않았다. 맑은 하늘도 보이고 리베라나가 서 있던 검은 탁상지 비슷한 지형도 보이는가 싶더니 그 지형이 물결치며 건물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수정구슬을 통해 보는 듯 왜곡된 저 형상은 분명히 아파트다. 그러나 가이더링의 아파트와는 양식이 달랐다. 무엇보다 옥상에 커다란 마력 구체가 떠 있지 않다. 거기다 리베라나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마치 아파트가 숲을 이룬 것처럼 빽빽하고 촘촘하고 광대하게 늘어서 있다. 저 모든 아파트가 하나하나의 마법 학파일지, 아니면 하나의 학파가 저 모든 아파트를 소유했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이렇게 거대하고도 강력한 마법 도시, 마법 국가의 이야기를 리베라나는 옛날이야기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오마에는 뭐인테챠!]

 

실장석의 소리, 리베라나는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지금 주위 공간을 살피느라 실장석의 말이 들린다는 것도, 자신이 실장석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것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물결치는 공간은 아파트를 비추다가 자연스럽게 풀과 나무가 가득한 숲으로 바뀌었다. 숲처럼 보이지만 숲은 아니다. 숲 바닥에 벽돌로 길을 깔아놓고 길 중간마다 나무로 길게 만든 의자가 있었으며 철제 통도 군데군데 놓여있었다. 철제 통은 가까웠고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도 같았다. 리베라나는 통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다가 깜짝 놀랐다. 철제 통이 알아서 잘리더니 내용물이 전부 보였다. 온통 쓰레기투성이다. 놀라서 고개를 뒤로 뺐더니 철제 통은 멀쩡한 상태 그대로였다. 리베라나는 선 자리에서 고개를 앞으로 뺐다 뒤로 뺐다 하며 쓰레기통을 열지 않고도 내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피부도 마찬가지로 내부를 뚫고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징그러워한다. 쭙쭙이가 말한 투시 마법이 이런 걸까, 생생하고도 징그러웠다. 세상에 자기 자신의 근섬유를 자기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겠지, 리베라나는 자신의 골수까지 뚫어보고 골수를 넘어 손으로 눈을 가리고도 반대편을 볼 수 있었다.

통 밑에는 1마리의 성체와 5마리 자실장의 일가가 모여있다. 성체가 통을 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다가도 다른 실장석이 통에 접근하면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먼저 통을 열려고 하던 실장석은 벌거벗은 실장석에 맞아 죽고 5마리의 자실장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벌거벗은 실장석은 도망치던 자실장 중 2마리를 잡아 그 자리에서 씹어먹고 나머지 자실장도 여유롭게 따라가서 잡아먹었다. 풍경은 다시 한번 바뀌었다.

어두침침하고 축축한 골목, 해는 떠 있으면서도 그 광명을 누릴 수 없는 구석의 종이상자 안에서 4마리 실장석 일가가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이미 다 먹어 치워가고 있어서 흔적만으로는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실장석의 내장까지도 뚫고 볼 수 있는 리베라나는 내장 속에서 소화액과 똥으로 비비고 섞이는 물건의 정체가 무언가의 껍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리베라나는 본 적이 없는 물건이다. 과일인지 가족의 가죽인지는 몰라도 실장석 일가는 그 껍질을 맛있게, 하지만 배부르지는 못하게 먹었고 배를 문지르며 아쉽게 푸념을 했다. 더 먹고 싶은테치, 바깥은 위험한데스, 그런 소리였다. 그제야 리베라나는 자신이 실장석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나 더 이상의 말은 들을 수 없었다. 그 소리를 하자마자 웬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기어 와서는 종이상자 안으로 뛰어들었다. 실장석의 옷 조각과 피와 살이 마구잡이로 튄다. 고양이는 실장석 한 마리를 죽이고 잡아먹는 대신 성체의 목을 물어 꺾어버린 다음 나머지 3마리 자실장은 손으로 후려쳐 죽였다. 그 뒤 여유롭게 실장석들을 손으로 굴리며 가지고 놀다가 잡아먹었다. 성체 실장석만큼은 자실장들이 모두 잡아먹힐 때까지 두 눈을 번뜩이며 살아있었고, 마지막 자실장이 먹힐 때까지 원한에 가득 차 통곡하다가 스스로 마력동석을 깨부숴 죽었다. 풍경이 또 한 번 바뀐다.

또 다른 숲이다. 바닥에 벽돌 대신 형형색색의 무언가가 깔려있다. 직접 밟아보니 푹신했다. 돌도 아니고 나무도 아닌 것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 숲에는 미라익스에서 마력동석을 갈 때 쓰던 인력기도 있었고, 모양새는 특이하지만, 마법사들이 운동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기구와 비슷하게 생긴 물건도 있었다. 그리고 인간들도 많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옷을 뒤집어쓰고, 얼굴은 흰 천으로 가리고 눈에는 유리로 된 듯한 통짜 안경을 썼다. 마치 실장석 보관소에서 일하는 괴생물학파생 같았다. 하얀 옷이 로브가 아니라는 것만 빼면 분위기는 흡사하다. 더구나 등에도 흰 통을 메고, 손에는 한 손으로도 들 수 있는 마법봉을 들고 물안개를 뿜어대고 있었다. 아, 마법사가 맞는구나. 그러나 이 마법사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리베라나도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알아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법사들은 특히 숲 곳곳의 수풀을 뒤지며 수풀 속에 숨어있는 실장석들이 밖으로 도망치도록 유도했다. 개중에는 특이하게 생긴 쇠막대를 들고 실장석들을 때려죽이는 마법사도 있었다. 못을 뽑을 때 쓰는 배척과도 비슷하게 생긴 막대기다. 마공탄을 쓰기에도 아까웠나 보다. 간신히 쇠막대를 피한 실장석들은 열심히 도망치며 거칠게 숨을 쉬느라 다른 마법사들이 뿜어대는 안개를 그대로 들이마셨다. 그러다 도망을 멈추더니 가슴을 부여잡고 기침을 하다가 피를 한 움큼 토하며 쓰러져 죽었다. 인간들은 조직적으로 실장석들을 말살하고 있었다.

 

[닌겐은 모조리 악마테치!]

 

또다시 실장석의 말이 들린다. 어떤 실장석이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주변에 실장석이 널려있고, 모두 죽어가고 있다. 풍경이 다시 바뀌었다. 이번엔 실내다. 내부 가구 상태를 보아하니 가이더링에서나 쓸법한 모양새의 가구가 잔뜩이고 책도 쌓여있으니 이곳도 마법사의 집이 틀림없었다. 실장석의 비명으로 가득하고 사람의 광기 어린 웃음으로 가득한 집. 마법사이지만 흑마법사일까? 리베라나는 자신의 지팡이가 아직도 옆에 있음에 안도하고 그 지팡이를 집어 여차하면 마력을 사용할 준비를 한다. 전투마법은 하나도 모르지만, 조명탄 정도라면 사방에 쌓인 책더미나 이불에 불 정도는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 마법사는 유리로 된 수조 안의 자실장 한 마리를 산채로 칼집을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한 명의 요리사와도 흡사하다.

 

[테챠아아아아아앙! 아픈테챠아아아아아앙! 제발 살려주는테챠아아아앙! 아타찌가 잘못한 테쨔아아아아아아앙!]

 

인간이 무엇인가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실장석의 언어도 알아듣게 된 리베라나가 해석할 수 없는 언어다. 두르마르어는 확실하게 아니다. 두르마르어밖에 모르는 리베라나에게 다른 언어의 장벽은 너무 높았다. 인간은 혀를 날름거리는 자실장의 혓바닥에도 칼집을 내어 하나의 벌집처럼 만들었다.

자실장의 수조 옆에는 다른 수조가 여럿 더 있었다. 다른 자실장이 잔뜩 모여있는 수조다. 어떤 자실장은 수조 안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자실장을 보면서 다가올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공포에 질려 울고 있고, 어떤 자실장은 다른 자실장이 고통받는 모습을 웃으면서 즐기고, 어떤 자실장은 양팔을 뺨에 붙여가며 인간에게 아첨하고 있다. 이 인간은 괴생물학파의 마법사일까? 주변에 쌓여있는 책의 제목은 리베라나가 읽을 수 없었다. 이 인간은 딱히 마법을 쓸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그저 실장석을 학대하는 데만 열중하고, 날붙이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틀림없다. 자신이 자주 가던 괴생물요리학파의 주인이 생각난다. 이 사람도 실장석 요리를 연구하는 사람인가 싶었다. 팔, 다리, 혀, 등, 배에 모두 촘촘하게 칼집을 낸 마법사는 이어서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그 상처에 갈색의 무언가를 발랐다. 순수한 용액이 아니라 무엇인가 잘게 간 것이 떠다녔는데, 리베라나는 그중에서 눈에 익은 씨앗을 구분해낼 수 있었다. 음식에 쓰이는 양념인 모양이다. 그때였다.

 

[테, 테에에에엥! 닌겐상! 천사상! 아타치타치를 구해주러 천사가 내려오신테치! 당장 이 똥닌겐을 쳐죽이고 아타치타치를 구해내란테챠아아아아앙!]

 

수조 속의 자실장들이 리베라나를 보면서 손짓하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양념을 바르던 인간도 깜짝 놀라 칼집을 내던 칼을 들고 뒤를 돌아본다. 리베라나도 화들짝 놀라 마공탄을 준비했지만 그 인간과 리베라나가 눈을 마주친 순간 풍경은 다시 바뀌었다. 리베라나는 십자로 길이 난 광활한 거리 가운데 서있었다. 리베라나는 멀리서 웬 상자가 우르릉대는 소리를 내는 것을 들었다. 꼭 드워프 동력거가 내는 소리와도 비슷했다. 상자는 우르릉대다가도 가끔 빵빵거리는 소리를 내곤 했는데 이상하게 크기가 들쭉날쭉 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부릉부릉 떠는 상자는 자세히 보니 움직이고 있었다. 리베라나가 서 있는 바로 그 위치로. 길가에는 여러 인간들이 있었는데 리베라나를 향해 소리치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리베라나는 가만히 서 있었고, 부릉거리는 상자가 곧 자신을 덮칠 것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인간의 눈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리베라나는 상자를 막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본능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다음 순간, 주변은 다시 검은 탁상지의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다. 리베라나는 그중 공간조율학파장의 얼굴만큼은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을 느꼈지, 하지만 고드니스는 내 말을 듣지 않았어…….”

[학파장님! 여기가 어디에요?]

 

학파장은 대답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고 있기는 한건지 주위가 어색한 침묵으로 가득하다.

 

[또 누구인테치!]

[아아, 걱정하지 말란데스. 사려가 깊고 상냥한 닌겐데스.]

[닌겐은 모조리 분충인테치! 쳐죽여버리는테치!]

[부디 와타시를 봐서라도 조금만 참아주시는데스. 와타시타치는 응당히 행복하고 자유롭게 사육될 수 있는데스. 사육할 닌겐이 다 죽어버리면 사육실장이 될 수 없는데스.]

[텟, 오마에는 똑똑한 노예테치! 오마에는 아타치의 전속노예로 전격배정테치!]

 

두 마리의 실장석이 대화하고 있었다. 그보다 신기한 건 어떻게 자신이 실장석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 리베라나가 재차 물었다.

 

[여긴 어디지? 잠깐, 잠깐…… 키, 키아시토! 야! 키아시토!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리베라나 양, 안심하시오. 당신은 무사하오.]

[난…… 난 죽은 거야? 그래서 실장석 말도 알아들을 수 있고, 학파장님도 내 말을 못 알아들으시는 거야?]

[아니오. 당신은 무사히 살아있소. 그저 이 공간이……. 현세와 이어지지 않을 뿐이오. 그리고 실장석의 말을 알아듣는 건 바로 우리의 부름에 응한 자가 실장석이기 때문이고.]

[그게 죽었다는 말이랑 뭐가 다른데!]

 

키아시토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리베라나는 키아시토를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그것이 모순이라는 사실을 리베라나가 알았음에도 너무도 자연스러워 모순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키아시토는 리베라나와 완전히 같은 자리에 겹쳐서서 실장석과 대화를 하고 있다.

 

[이곳은……. 이곳이라고 해야 할까. 어떠하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이곳은 이곳이오. 나는 이것을 증명하고자 수없이 많은 세월을 노력했지만 이제야 해내고 마는구려. 삶의 끝을 앞둔 순간에 모든 것이 짜맞춰지는구려.]

[나…… 방금 실장석들이 엄청 죽어 나가는 걸 봤어. 끝없이 늘어선 아파트의 숲도……. 실장석의 말도 알아들을 수 있어! 허, 헉! 나, 그러면, 지금, 실장석이랑, 섞인 거야? 인간 실장석이 된 거야?]

[아니오. 우리를 이곳, 실장석의 고향으로 이끌어준 존재의 마력으로 잠시나마 말이 통한 것이오.]

[실장석의 고향? 후타비아 찬넬?]

[눈앞에 증거가 있으니 이제 진실을 밝힐 때가 되었구려. 실장석은 우리가 속한 세상의 것이 아니오. 차원이라는 얇은 막으로 교차하는 다른 세상의 것이오.]

 

리베라나는 자신의 터질 것 같은 뇌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세상이…… 다른 세상……?]

[최초의 차원문으로 최초의 실험이 실패하던 날, 그 공간……. 아니, 차원의 폭풍에 휘말린 나는 거기서 실장석을 처음 보았소. 다른 인간들로부터 조직적으로 사냥당하던 실장석은 나를 보자마자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매달렸고, 나는 그 실장석을 구해주기 위해 손을 뻗었소. 정신을 차렸을 땐 그 실장석과 내가 사고 현장에 덩그러니 놓여있었소.

나로서도 충격적인 일이었소. 하지만 실장석은 살아남았다는 것에 만족했던 모양이오. 아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잘 몰랐을 거요. 난 이 사실을 후타비아 찬넬에 알리려 했지만, 이 세상에서도 실장석은 별로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소. 그야 실장석이 먼저 똥을 발라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모두가 이 실장석을 때려죽이려 하기에 존재를 숨길 수밖에 없었다오. 그러나 그 실장석은 나에게 만큼은 얌전했소. 나는 그 실장석을 열심히 연구하여 실장석의 언어를 익혔고, 코이치라는 이름도 붙여주었고, 그 언어를 기반으로 실장석의 말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와 언나를 개발했소.]

[……맙소사, 그것도 당신이?]

[나는 코이치를 지키기 위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숨어 살았고, 그 사이 코이치도 많은 새끼를 낳고 또 퍼트렸소. 거기서부터 이야기가 틀어진 것이오. 사람들은 내가 사고에 관해 무언가를 숨기는 것은 알고 있었소. 그러나 그 사실이 입소문을 타고 타더니 내가 차원문 실험을 고의로 조작해 사고를 냈다고 왜곡되었고, 내가 지나가는 곳마다 실장석이 퍼지니 내가 실장석을 만들었다고 소문이 난 것이오. 어느새 후타비아 찬넬은 나를 잡기 위해 키아시토 부대를 만들고, 그 부대로 하여금 실장석까지 모조리 추적해 말살할 것을 지시했소.

몇 년 동안 잘 숨어다녔고, 코이치도 내 말은 아주 착실하게 잘 들어주었지만, 결국 코이치는 자신의 새끼들이 보는 가운데 수명이 다해 자연사하고 말았소. 그때 여러 회한이 느껴지더구려. 나도 살아있는 한 언젠가 죽을 것이고, 내가 죽으면 내 결백은 물론이고 실장석도 인간과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저 세계에서 받던 취급을 똑같이 받을 것이오.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나는 살아야만 했소. 금단의 방법을 써서라도.]

[리치가…… 되기로 하셨군요…….]

 

키아시토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리치가 된 만큼 내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졌지만……. 이제 한 명을 찾았구려. 나를 믿어주어 고맙소. 당신에게 저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소.]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안 가요. 다른 세계……. 그 인간들이 실장석을 조직적으로 사냥하는 이유도,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것 아니에요!]

[이유……. 물론 있소. 유흥이오.]

[유흥? 재미로?]

[저 세계는……. 죽은 세계나 마찬가지오. 인간에게 잠식되어 죽어가고 있소.]

[죽어간다고요? 아니, 아파트가 숲처럼 늘어서 있는 강대한 마법세계인데?]

[저 세계에는 오직 인간만이 존재하오. 오크, 드워프, 퀴클롭스, 사티로스, 켄타우로스, 요정 같은 종족은 물론이고 만티코어, 그리폰, 하피, 슬라임같은 괴물도 없으며 구울, 흡혈귀, 리치같은 산송장도 없소. 오직 인간만이 존재하오.]

 

키아시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리베라나는 오크도 드워프도 요정도, 괴물도 산송장도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았다. 다른 종족이 없다는 사실은 껄끄러웠지만, 괴물도 산송장도 없는 세상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세상이 그리도 안전하니 마법국가도 세울 수 있었으리.

 

[다른 종족은 좀 그렇지만, 괴물도 산송장도 없는 세상은 꽤 괜찮게 들리는데요.]

[나도 자세한 역사는 알지 못하오. 몇 번 저 세계를 방문하면서 배움을 넓힌 결과……. 저 세계에도 과거 우리와 같이 여러 종족이 있었다는 사실은 배웠소.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종족들의 이야기가 뚝 끊어지고 오직 인간의 이야기만이 전해지고 있소. 아마 다른 종족들은…… 인간의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을 것이오. 그중 실장석이 유일하게 인간의 파도를 버텨낼 수 있었던 종족이었소. 인간과 마찬가지로 다양성의 부조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사냥할 다른 종족이 사라지자 사냥할 것이 실장석 밖에 남지 않은 것이오. 실장석마저 없어지고 나면, 인간을 사냥하겠지.

인간들은 실장석이 잘못 되었다고 이야기하오. 그것도 인간의 기준이지. 자신들의 세계에서 인간들에게 핍박당하고 학대당했으니 좋은 감정이 생기겠소? 마치 인간들이 일단 산송장이라고 하면 대뜸 공격부터 하는 것처럼. 실장석도 인간을 보면 대뜸 적대하는 것이, 저들에게도 사정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오. 하지만 이제는 그 사정을 설명할 수 있겠구려. 당신이 증인으로 남을 테니.]

 

그리고 수정구슬같이 보이던 주변 풍경이 일그러지며 구겨지기 시작했다. 리베라나는 자신을 향해 구겨지며 다가오는 공간을 팔을 뻗어가며 막아보고자 했다. 그렇게 손을 내미는 리베라나 본인도 막을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공간과 부딪히는 순간 리베라나는 눈을 질끈 감았고, 다음 순간 손바닥에 거친 흙이 느껴졌다.

 

“어, 어! 고드니스! 고드니스!”

“리베라나! 이녁은 무사하느냐! 리치는 어디로 갔…….”

“키아시토! 네놈의 행패를 더는 묵과하지…… 어?”

 



리베라나는 무사했고 주변은 미라익스의 검은 탁상지 풍경 그대로다. 차원문도, 키아시토도, 모두 그대로다. 그러나 딱 하나 그대로가 아닌 것이 하나 있었다. 차원문 한가운데 서있는 키아시토의 머리 위에 무엇인가가 떠있었다. 마치 생물같았다. 머리도 달려있고 팔다리도 달려있다. 생물의 모습을 본따서 만든 인공생물인가, 차원문 주위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여러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 생물의 정체를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실장석의 모습을 하고 공중에 둥둥 떠있었으니.

 

[사방이 똥닌겐인테치! 쳐죽여버리는테치!]

“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데스!”

 

자실장은 입도 열지 않고 말을 했고, 분명히 실장석일 텐데도 언어 없이 그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정작 키아시토도 똑같이 말을 하고 있지만 키아시토의 실장석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요정만큼은 그 속뜻을 알 수 있었다. 싸우지 말고 대화부터 하자고 자실장을 구슬리고 있었다.

 

[오마에도 시끄러운테치! 오마에는 노예, 아타치는 주인테치! 감히 주인에게 대드는 건방진 노예부터 척살해버리는테치!]

“데, 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

 

키아시토는 리베라나를 감싸며 공중에 뜬 자실장에게 손을 뻗었다. 자실장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키아시토를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적록의 눈이 대낮에도 눈에 띄게 번쩍였고 마력차단막을 펼친 키아시토는 자신의 힘에도 벅찰 만큼의 마력이 흘려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버틸 만했다.

 

“마공탄 준비!”

“안 되오! 공격하지 마시오!”

“준비된 사수로부터 발사!”

 

흑마법 심문관들과 전투마법사들이 자실장을 향해 살상용 마공탄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자실장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자실장에게 향하는 마공탄은 자실장의 몸에 닿기 바로 일보 직전에 저절로 사라져버렸다. 마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자 마법사들은 지팡이 끝에 돌을 꽂고 마공탄을 쏘아댔다. 마공탄에 실려 물리력을 지닌 돌멩이는 자실장을 코앞에 두고 벽을 만난 것처럼 튕겨나버렸다.

 

“공격해서는 안 되오! 제발! 러트너 씨! 리베라나 양을 받아주시오!”

“뭐, 뭐?”

“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으아야아아!”

 

자실장을 향해 뻗은 손을 빼지 않으면서 키아시토는 리베라나의 허리에 걸친 손을 휘둘러 리베라나를 뒤쪽으로 멀리 던졌다. 러트너는 경악하면서 뛰쳐나갔고 리베라나가 먼저 바닥에 닿기 전에 자신의 등을 세게 부딪히면서 받을 수 있었다.

 

“엄마야!”

“커흑! 잡았어요! 괜찮아요?”

“저 말고 러트너 님이 괜찮아요?”

“물리와 마력 차단을 동시에 할 수 있다고?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어!”

“루노가 그대를 거부하리라!”

 

요정의 일갈에 마른 하늘을 두 쪽으로 가르는 날벼락이 차원문을 내리쳤다. 그러나 자실장에게는 하나도 내려꽂히지 않고 키아시토만 그슬릴 뿐이다. 번개에 적잖은 타격을 받은 키아시토는 자실장의 마력을 받아내기 위해 양손을 뻗어야만 했다.

 

“저, 저러한 것이 어찌 산송장이 아니라는 말이나이까! 루노이시여!”

“데기잇……. 데스데스데스! 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 데스데스!”

[똥노예 주제에 같잖은 재주나 배웠다고 입만 산 테츄? 오마에는 아타치의 발밑도 닿지 못하는테치!]

“데스데스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데스!”

 

키아시토는 양손을 거칠게 휘둘러 자실장의 마력을 흩어내면서 자실장이 마공탄에 정신이 팔린 사이 바닥에 양 손을 짚었다. 손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바닥에 마법진을 그려낸다. 차원문과 자실장과 키아시토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마법진이 그려지자 키아시토는 그 마법진의 중앙에 뛰어들어 주먹을 박았다. 그러자 사방에서 전투마법사들이 쏘아대던 마공탄이 자실장 코앞이 아니라 마법진의 경계 앞에서 막혔다.

 

“결계진?”

“부디, 내 말을 들어주시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단 말이오! 데스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데스 데스데스 데스데스!”

[말을 듣는 건 노예나 하는 것인테치! 아타치는 오마에타치의 주인테치! 어딜 노예가 주인을 기어오르고 하극상을 일으키는테챠앗!]

“데스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데스.”

[테에에에? 테퍄퍄퍄퍄퍄퍄! 노예 주제에 고귀한 아타치에게 어딜? 어디 한 번 해보란테치! 아타치의 옷자락이나 잡을 수 있으면 오마에 말을 들어줄 마음이 생길 수도 있는테치!]

 

키아시토가 양손을 뒤로 뺐다가 앞으로 휘젓자 결계진 안에서 강력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결계진 안에 있던 먼지와 나뭇가지와 돌멩이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몰아치면서 일어난 먼지구름이 결계진의 반구 형태를 그대로 드러낸다. 자실장은 그대로 공중에 떠서 키아시토가 얼마나 발악을 잘 하는지 시덥잖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결계진 밖에서도 전투마법사들은 지팡이에 마력동석을 갈아끼우면서 자기가 아는 군사마법을 죄다 떠올려보고 있었다. 이들에겐 마력을 차단하는 적이나 물리를 차단하는 적을 상대하는 교범이 머릿속에 다 입력되어있었지만 물리와 마력을 동시에 차단하는 존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잠시 성질을 가라앉히게 두어야겠소.”

“대체 저게 뭐…… 으아아아아악! 이건 또 뭐야!”

 

리베라나를 일으켜주고 자기 옷에서 먼지를 털어내던 러트너는 어느새 자기 옆으로 다가온 키아시토 때문에 다시 넘어져 옷에 먼지를 묻히고 말았다. 키아시토는 아주 담담하게 자신 뒤편으로 검은 탁상지의 순간이동진을 가리킨다. 흑마법 심문관들은 결계진을 향해 겨누고 있던 지팡이를 키아시토에게 겨누면서 다가왔다.

 

“키아시토 이 새끼야! 실장석은 네가 만든 게 아니라더니, 이젠 아예 마법을 쓰는 실장석을 만들어!”

“내가 만든 것이 아니오! 리베라나 양이 그 증인이오!”

“리베라나 양도 너 때문에 목숨이 위험했잖아!”

“리베라나 양, 방금 전까지 차원문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하시겠소?”

 

방금 자신을 집어던진 것에 약간 화가 나있었지만 결계진 속의 실장석과 차원문 안에서 자신이 들었던 얘기를 생각하면 납득이 아예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리베라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이 본 모든 것을 그대로 이야기해주었다. 리베라나는 그저 놀라기만 했을 뿐이지만 학파장이나 요정이나 나뮈의 열쇠는 아주 기절초풍하지 않는 것이 대단할 정도로 경악하고 있었다.

 

“다, 다, 다, 다, 다, 다른 세계?”

“실장석이,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괴물이라고?”

“온 세상이 아파트로 가득찬 마법 강대국이라니…….”

“……요정이……. 없다는 말이더냐……?”

“제가 본 바로는 그랬어요.”

 

순식간에 모든 시선이 키아시토에게 쏠렸다. 키아시토는 아직도 결계진 속에서 피어오르는 먼지 구름을 보고 있었다.

 

“오늘에서야 증명할 수 있게 되었구려. 리베라나 양의 말은 믿을 수 있소?”

“이, 이건 말도 안 돼! 다른 세상이라니! 그건……. 그건…….”

“나는 핍박받는 자들을 구하고 다른 종족들의 안위를 위하여 일해온 것이오. 모두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하여. 부디 실장석을 공격하지 말고 대화로 해결해주시오. 이미 한 평생을 핍박받으며 살아온 존재란 말이오! 사랑을 모르고 자란 인간이 흉악범죄자가 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실장석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실장석이 우리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오.”

“그, 그럼, 실장석은, 저, 섞인 게 아닌 거야? 차원문도, 애초에 혼종을 만드는, 그런 게 아니고?”

“그렇소. 하지만 설득력은 혼종 쪽이 훨씬 높았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들어주지 않았는데 거기서 ‘차원문은 다른 세계로 통하는 기계요!’ 라고 말하면 설득력이 얼마나 더 높아질 것 같소?”

 

키아시토가 말하는 사이 결계진 안의 먼지가 걷히고 자실장의 모습이 드러난다. 공중에 둥 떠서 양 눈이 번뜩이며 빛나는 자실장은 키아시토가 결계진 밖에 있고 자기 혼자 결계진 안에 남은 꼴을 보면서 당황해 외쳤다.

 

[이게 뭐인테챠! 똥노예에에에에엑! 아타치를 속인테챠아아아아아앗!]

“데스데스데스데스, 데스 데스데스데스 데스데스 데스데스데스데스.”

[당장 아타치를 풀어내란테치! 오마에부터 쳐죽여버리겠는테챠아아아아악!]

 

자실장은 입을 움찔거리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말이 잘 들렸다. 인간도 쉽게 할 수 없는 염화(念話)술을 사용할 줄 아는 자실장이다. 공중에 떠있는 것도 그렇고 키아시토가 직접 봉인한 것도 그렇고 절대 보통내기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어느새 쿱과 콜드펌은 언어를 귀에 꽂고 종이에 둘이 하는 말을 기록하고 있었다. 러트너는 숨기려는 티도 없이 대놓고 기록을 살폈다.

 

[오마에의 증오심을 와타시는 이해하는데스. 하지만 꼭 죽여서 문제를 해결할 필요는 없는데스. 증오는 더 많은 증오를 낳을 뿐인데스. 일단 화를 가라앉히는데스. 오마에가 와타시타치를 죽이지 않을 것을 약속하면 와타시타치도 오마에타치를 죽이지 않겠는데스.]

[지금 노예 주제에 주인에게 거래를 제시하는테샤아아악!]

[와타시타치는 다른 자들을 노예로 삼지 않는데스. 굳이 다른 자의 행복을 짓밟으면서 올라갈 필요는 없는데스. 와타시타치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데스.]

[와타시가 두 눈 똑똑히 뜨고 살아있는데 다른 분충이 행복한 꼴을 두고 보란테샤아아아아악!]

 

키아시토와 자실장의 언쟁은 그렇게 돌고 돌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계속 같이 행복해지자고 얘기하는 키아시토와 자기만 행복해야 한다는 자실장, 이 얘기만 계속 기록하다가 종이가 다 떨어질 지경이었다. 러트너는 보고 있자니 답답해졌다.

 

“하아, 이거 안 되겠네. 저 자실장부터가 분충이잖아. 분충이랑 대화가 될 거라고 생각해?”

“다른 세계의 인간들이 당신과 똑같이 생각했기 때문에 실장석과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이오!”

“너도 산송장이었으니까 알잖아. 우리 설득시키려고 엄청나게 고생하고 이제야 믿어주는 거? 비켜봐, 내가 한마디 해볼게.”

 

러트너는 쿱의 언나를 받아다 실장석의 언어로 설정을 조정한다. 키아시토는 쉽게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넌 너무 이상주의자야. 실장석에게 이상은 오직 고통과 군림밖에 없다고.”

“제발 함부로 나서지 마시오! 러트너 씨, 당신 때문에 실장석이 인간을 더 증오하게 될 수도 있소!”

“심문관 여러분, 키아시토 영물함좀 꼭 잡아줘요.”

 

키아시토는 자신의 영물함과 러트너의 언나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당황한 빛을 숨기지 않았다. 

 

[오마에, 지금 와타시타치를 노예라고 한데수?.]

[당연한테치! 오마에는 똥노예테치! 아타치가 선택하고 노예는 복종하는테치! 오마에에게 선택권은 없는테치!]

[근데 그게 말인데스, 와타시타치는 이미 주인사마가 있는데스. 한 하늘 아래 두 주인사마를 섬길 수는 없는데스.]

[당연히 아타치가 오마에의 주인인테챠악!]

[데……. 와타시의 주인사마는 강력한데스. 오마에같은 건 한 주먹에 끝내버리실 것인데스. 오마에는 겨우 자실장이 아닌데수? 와타시의 주인사마는 오바상 마마인데스.]

[이 세상에 아타치보다 강한 건 없는테챠아아아아악! 아타치는 오마에의 똥주인을 아타치의 총구 힘만으로 끝내버릴 것인테치!]

[데픗, 말로만 하면 누가 믿는데수?]

“그만 하시오! 도발하여 좋을 것이 없단 말이…….”

 

키아시토가 러트너의 팔을 붙들자마자 있지도 않은 심장이 시큰거리는 격통에 가슴을 부여잡으며 손에 힘이 풀리고 무릎을 꿇는다. 흑마법 심문관들이 자신의 영물함에 마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러트너를 말려야 했지만, 도무지 말릴 수가 없었다. 수석심문관은 리치의 동태를 주시하면서도 러트너가 걱정스러워 조언했따.

 

“러트너 씨, 키아시토의 말도 틀리지 않아요. 저 자실장은 자기가 물리력과 마력을 무력화시키는 줄도 모르고 무력화시킬 수 있어요. 지금 당장은 비위를 조금 맞춰주는 것이…….”

“맞춰주고 있는 거예요. 어른의 시선으로 애들을 대해봤자 애들은 못 알아먹잖아요? 마찬가지로 애들의 시선으로 어른을 대해봤자 어른도 못 알아먹고. 인간의 시선으로 실장석을 대해봤자 인간만 피곤해지는 거라고요.”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 실장석과 대화하는 법을 아는 사람은 러트너밖에 없었다. 러트너는 실장석과 대화하는 법을 아는 자신에게는 자괴감을, 자신은 평범하게 말하고 있는데 속을 벅벅 긁어대는 듯 번역해주는 언나에게는 고마움을 느꼈다.


[오마에……. 지금 아타치의 능력을 의심하는테츄? 오마에에게 당장 아타치의 카오스 파워로 쓴맛을 보여주겠는테치!]

[데에. 주인사마랑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스. 주인사마도 그 카오스 파워의 전문가인데스.]

[테, 거짓말테치! 아타치는 세계유일테치!]

[거짓말은 오마에가 하고 있는데스. 와타시의 주인사마는 확실하게 카오스 파워의 전문가데스.]

[거짓말은 오마에가 하고 있는테챠아아아앗!]

[거짓말인지 아닌지 보여주면 믿겠는데수?]

[있지도 않은 증거를 조작해서 가짜 뉴스로 아타치를 선동하려는 것인테치! 오마에의 하찮은 속셈에 넘어가지 않는테치!]

[데에. 불리하니까 발뺌하는 것인데스. 역시 와타시의 주인사마가 훨씬 강한데스. 데프프프.]

[테챠아아아아악! 어디 한 번 보잔테치! 그 잘난 오마에의 주인을 데려와보란테챠아아아악!]

[오마에 대가리는 장식인데수? 주인사마를 부르는 노예가 어디있는데수? 오마에가 따라오란데스. 데픗, 노예도 아는 사실을 모르면서 어디서 주인행세를 하려드는데수?]

[아타치가 오마에의 주인이란 말인테챠아아아아아아악!]

[따라오려니까 겁나는데수? 쫄은데수?]

[테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러트너는 자실장의 신경을 아주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하나도 겁 안 난다는 것처럼 피식거리며 웃어대기까지 하는 러트너의 표정관리에 자실장은 이성을 잃고 결계에 마구 마력을 뿜어댔다.

 

“그만, 하시오, 제발……. 결계가…….”

“전원 주목!”

“주목!”

 

수석심문관의 외침에 마법사들의 함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리베라나도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가 깜짝 놀라며 입을 닫았다.

 

“결계진 준비! 총원 20! 각자 위치로!”

“총원 20! 각자 위치로!”

 

지시에 맞춰 20명의 전투마법사와 흑마법 심문관들이 자실장이 갇혀있는 결계진 밖에서 더 크게 원을 그리고 바닥에 지팡이 끝을 꽂았다. 자실장이 마력을 뿜어내고 있는 결계진은 점점 색이 뿌옇게 바래고 있었다.

 

“구축!”

“구축!”

 

밖에 일제히 외치는 함성에 맞춰 더욱 커다란 결계가 생긴다. 자실장은 키아시토가 만든 결계를 부수고 러트너를 향해 돌진했지만 전투마법사들이 구축한 결계에 막혀 마구잡이로 주먹과 발을 날려댔다. 20명이나 붙어서 만든 결계는 키아시토가 혼자 만든 결계보다 배로 튼튼했다.

 

[당장 이리 오지 못하겠는테챠아아아악! 오마에도 쫄은테챠! 오마에도 쫄은테챠아아아아악!]

[데에. 와타시를 죽일 속셈인데수? 역시 오마에는 겁이 나는 것인데스. 주인사마를 직접 볼 용기가 없어서 애꿎은 노예한테 화풀이를 하려는 것인데스.]

[오마에에에에에에에에엑!]

[오마에가 그렇게 당당하면 직접 와타시의 주인사마를 영접해보란데스. 겁나는데수?]

[오마에는 치졸하게 이딴 수나 쓰고 있지 않냔테챠아아아아악!]

[그야 와타시는 주인사마가 있지 않은데수? 꼬우면 오마에도 주인이 되란데스. 데픗, 와타시의 주인사마가 두 눈 뜨고 살아있는 한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말인데스.]

[오마에에에에엑! 테쉬이이익……. 테쉬이이이익…….]

 

계속 염화술로 소리를 질러대던 자실장은 입은 제대로 열지도 않았는데 생각만으로 목이 쉬기라도 했는지 쉬익쉬익거리면서 숨을 골랐다. 러트너는 실장석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다. 앞에서 뭘 하든 관심 없다는 것처럼 요정만 바라보고 있었다. 요정은 러트너의 눈을 통해 지금 이 행동조차 모두 계산된 것을 파악했다.

 

[오마에, 이거 치우란테치.]

[치우면 죽여버릴 거 아닌데수? 싫은데스.]

[안 죽일테니까 치우란테치!]

[방금 전까지도 죽여버리겠다고 했으면서 와타시가 오마에를 믿을 것 같은데수?]

[아타치는 세상 유일의 카오스 실장테치! 아타치의 카오스 파워를 걸고 오마에는 죽이지 않을 것인테치! 오마에의 주인을 아타치가 직접 척살하고 아타치가 오마에의 주인으로 강림할 것인테치!]

[데프프, 와타시의 주인사마를 죽인다니 택도 없는데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것인테챠악!]

[그럼 와타시의 주인사마를 찾아가서 결투라도 신청할 것인데수?]

[당장 아타치를 오마에의 주인분충에게 안내하란테치! 오마에가 얼마나 한심한 분충을 주인으로 삼고 있는지 아타치가 똑똑히 가르쳐주는테치!]

[말만 그렇게 해놓고 와타시를 죽여버릴 속셈 아닌데수? 와타시는 오마에의 하찮은 수에 넘어갈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은데스.]

[지금 당장은 아타치가 오마에를 친히 살려주도록 하는테치!]

[데에. 두고보자는데스. 같잖은 수를 쓰다간 오마에는 주인사마한테 바로 척살데스.]

 

러트너는 언나를 거두고 피시스에에게 실장독을 준비해줄 것을 부탁했다. 피시스에는 언제나 로브와 가락지에 갖가지 괴생물을 상대할 수 있는 조치를 갖추고 있었고 실장독도 물론 준비되어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저 카오스 실장인지 뭔지 하는 것에게 통할 지는 알 수가 없어 두려웠다.

 

“키아시토. 쟤가 누구 죽이려고 하면 바로 막아. 그게 네 목적이잖아? 서로 공존하는 거. 실장석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돌면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잘 알겠지?”

“크윽, 러트너……. 순진한 시골 청년인 줄로만 알았는데…….”

“나도 가끔은 내가 놀랍다.”

 

러트너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결계진을 거둬줄 것을 요청했다. 수석심문관은 러트너가 했던 경고를 똑같이 키아시토에게 하면서 손을 높이 들었다.

 

“결계진 해제 준비!”

“해제 준비!”

“하나! 둘! 셋! 내려!”

“내려!”

 

전투마법사들도 의심은 가득했지만 수석심문관의 명이 내려오니 바닥에 꽂은 지팡이를 다시 뽑는다. 카오스 자실장과 인간들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결계가 사라지자마자 전투마법사들이 반사적으로 카오스 실장 쪽을 겨누었지만 그 사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았다.

 

[보란테치. 아타치는 노예에게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참된 주인테치! 당장 오마에의 주인을 참교육하러 가는테치!]

[데에. 하지만 이 정도는 와타시의 주인사마도 베풀 줄 아는 아량데스.]

 

정말로 카오스 자실장은 인간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뒤에서 흑마법 심문관들이 흑발의 흡혈귀 자실장을 가둬놓던 철창을 들고 기다리고 있기는 했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저런 철창 따위로 카오스 자실장을 가둘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해 누구도 가두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카오스 자실장은 둥둥 떠서 러트너를 졸졸 쫓아다녔다. 실장석 하나를 자기 마음대로 다루는 모습을 보면서 키아시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정말 적대를 그만두다니……. 러, 러트너 씨. 다, 당신은, 무슨, 인간 실장석이오?”

“뭐야, 임마?”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실장석을 다룰 줄 아는 러트너와, 그 실장석이 존재했다는 다른 세계를 다녀온 리베라나. 온 세상의 관심이 쏠릴 것은 당연히 예상할 수 있었고 지금 모인 사람들마저도 너무나 궁금한 게 많은 나머지 하늘에서 울리는 소리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휘이이이익! 휘이이이이익!”

“웬 휘파람 소리래.”

“그러게.”

 

자실장이 낸 소리인가 싶어 모두가 카오스 자실장을 쳐다볼 때 피시스에만큼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별로 좋지 않은 기억만 가득한 새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대충 세어보기에도 서른은 넘어보이고 독수리보다 훨씬 커다란 새들이다. 그러나 얼굴만큼은 불쾌할 만큼 인간을 닮았다.

 

“울타리 보초가 다 여기에……. 헉! 하피다! 무리하피다!”

“하피! 하늘을 주시해라!”

 

전투마법사들이 하늘을 향해 지팡이를 겨누지만 사거리 밖이고, 하피들도 주변을 선회하면서 상황을 살피기만 할 뿐이다. 언제라도 빈틈을 보이면 바로 덮치러 내려올 기세였다. 인간들도 하늘을 주시하면서 가이더링으로 순간이동할 준비를 해나간다. 다섯 명당 한 장 꼴로 순간이동 주문서를 받은 이들은 서로간에 적절한 공간을 유지하며 순간이동 주문서를 차례차례 펼쳐갔다.

 

“키이이이이익!”

“내려온다!”

“사격준비!”

 

그때 하피들이 공중에 멈춘다. 강하할 준비를 마쳤나, 전투마법사들은 하피들이 사거리 안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피시스에는 의아하게 하피들을 쳐다보았다. 괴생물학파장의 눈에 보이는 하피들은 공중에 그대로 멈춰있었다.

 

“뭐야, 하피가 제자리에서 활공을 하고 있는데? 태풍이 불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데…….”

“제자리 활공을?”

 

주변은 태풍이 몰아치기엔 날씨가 너무 맑다. 하늘을 쳐다보던 리베라나는 자신의 안경을 천리안 안경으로 바꾸어 썼다.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피들의 모양새를 보면서 입을 틀어막았다. 깃털이 우수수 뽑혀나가며 떨어지는 하피들은 산채로 가죽이 벗겨지고 있었다.

 

“가, 가, 가, 가, 하피 가죽이, 버, 벗겨지고 있어요!”

“날아다니고 있는데 갑자기 가죽이 벗겨진단 말이야?”

 

그때 사람들은 하나같이 카오스 자실장을 돌아보았다. 카오스 자실장도 인간들을 따라 하늘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여가며 하피를 주시하던 카오스 자실장은 마지막 하피의 가죽이 완전히 벗겨진 뒤에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하피들은 깃털도 날개도 가죽도 잃고 하늘에서 그대로 추락한다. 어찌나 높이서 날고 있는지 땅으로 떨어지는데만 해도 서른은 넘게 세야 할 시간이 지나고, 땅바닥과 마주한 하피들은 첨탑에서 떨어진 실장석처럼 그대로 붉은 곤죽이 되었다.

 

“……오 맙소사.”

[기대하란데스. 오마에의 주인이라는 분충을 와타시가 저 꼬라지로 만들어버릴 것인데스.]

 

러트너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전투마법사와 흑마법 심문관들이 공간조율학파장의 지시에 따라 실험 장소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사이 러트너와 키아시토를 비롯한 비전투원들은 더 가이더링 길드로 돌아왔다. 카오스 자실장은 가이더링에 우뚝 솟은 아파트를 보면서도 가당찮다는 듯 코웃음이나 치고 있었다. 가이더링의 아파트보다 훨씬 높은 아파트가 수백 척은 늘어서있는 강대국에서 왔으니 당연하겠지, 리베라나는 실장석만해도 이 정도의 마력이라면 그 나라의 인간들은 얼마나 대단한 마력을 구사할지 두려웠다. 그런데 이들은 가이더링의 정문이 아니라 가이더링의 성벽을 빙 돌아서 가고 있었다.

 

“문은 저쪽인데요.”

“아, 이것도 기밀 정보인데. 그치만 이미 리치도 봤고, 지금 이……. 히오스 실장인가 뭔가 하는 것도 다 봤으니까 서로간에 기밀이라 할 것도 없겠네요. 괴생물학파만의 비밀 통로가 있어요.”

 

말로만 듣던 비밀통로라는 단어에 리베라나가 신기해하며 묻는다.

 

“와, 괴생물학파는 비밀통로도 있어요?”

“엄청 커다란 괴물을 잡았는데 그걸 시내로 곧장 데려갈 수는 없잖아. 순전히 괴물 전용 통로야.”

 

성벽을 따라가다보니 언덕으로 가려져 구석진 곳에 어지간한 도시에서도 보기 힘든 하천이 나온다. 냄새가 지독했다. 거기다 러트너는 물론이고 리베라나도 가이더링에서 딱히 물이 흐르는 곳을 본 적이 없었는데 이 하천은 가이더링에서 못 볼래야 못 볼 수 없을 만큼 넓었다. 그 입구도 손이 닿으려면 한참을 뻗어서 어깨가 빠지고도 닿지 않을 만큼 높다. 사람 열 명 분의 드워프 동굴만큼 크지는 않았다.

 

“아니 이렇게 큰 곳을 난 여태까지 왜 모르고 살았을까?”

“표면으로는 가이더링 하수도. 들어가자.”

[치픗, 운치굴에 사는 주제에 주인사마 타령이나 하는테츄? 두고 보잔테치. 오마에 주인은 한 주먹에 척살하고 오마에는 죽여달라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철저히 죽여버릴 것인테치.]

 

안으로 들어갈수록 지독한 냄새는 점점 심해진다. 피시스에 말로는 마력으로 한 번 정화를 거친 물이라고 했다. 실제로 요정도 가끔 물 속에서 물고기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물에 뛰어들거나 물을 마셔보고 싶지는 않았다. 냄새는 정화가 안 되는가, 그렇게 여기고 말 뿐이다. 어두침침한 하수도 끝에서 피시스에가 벽돌로 된 벽을 만져보더니 유난히 튀어나온 벽돌에 괴생물학파장의 증표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주위 벽돌들이 뒤로 밀려나면서 커다란 승강기가 드러난다. 러트너는 이 승강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레테크 격리소로 통하는 지하 10층까지 내려갈 때 쓰는 승강기다.

 

“이거 그거잖아요? 그, 그, 맨날 실장석 격리소에서 갈아타던 거.”

“여기로 이어져있어요. 밖에서 괴물을 잡아오면 이걸로 격리소까지 옮기는 거고. 타시죠.”

 

분명 여러 번 타본 그 승강기일 텐데도 감회가 새롭다. 카오스 자실장도 둥둥 뜬 채로 러트너를 따라들어가 승강기에 탔는데, 계속 공중에 떠있다보니 승강기가 내려가도 카오스 자실장은 따라 내려가지를 않아서 승강기 안에서 보면 꼭 위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카오스 자실장이 승강기 천장에 닿자 승강기가 내려가지를 못해 경고음을 울렸다.

 

“하이고, 살다 살다 이런 상황은 처음 겪겠네.”

[오마에! 당장 내려오란데스!]

[아타치가 왜 그래야하는테츄?]

[주인사마 보려니까 쫄아서 내려오지도 못하겠는데수?]

[테샤아아아아아악!]

 

러트너의 말에 자실장은 찰떡같이 아래로 내려왔고 승강기도 그제야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승강기가 점점 지하로 내려가는 동안 카오스 자실장만 쳐다보면 키아시토는 분주하게 손가락을 놀린다.

 

“내가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으면 다른 이들이 전투태세로 돌입할 테니 다시 나를 좀 묶어주시오.”

“아, 그렇겠네. 보자, 보자……. 이런. 백금줄 가진 게 없는데. 있었다고 해도 어차피 의미는 없었겠지만.”

“러트너 씨, 잠시 검을 뽑아주시겠소?”

 

키아시토는 단순하게 자기 팔을 나란히 붙여 차렷 자세로 서고 러트너가 검으로 왼팔부터 시작해 몸통을 뚫고 오른팔로 나오도록 고정해 자기 자신을 속박하도록 했다. 가만히 서있는 리치에게 백금검을 아주 천천히 부드럽게 찔러넣고 있자니 러트너는 여러가지로 감정이 착잡했다.

 

“난 또 칼을 밧줄로 만들거나 할 줄 알았는데.”

“그럼 러트너 씨가 검을 쓸 수 없지 않소. 속박도 하면서 리치에게 검을 꽂아놓았다는 시각적 정보도 확실하니 이 얼마나 좋은 방법이오.”

 

확실히 얼핏 보면 리치는 검에 몸을 꿰뚫려 심각한 손상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 날카로운 검 끝이 뚫고 나와 있기에 키아시토는 웬만하면 자기 오른쪽에는 누군가를 두려 하지 않았다.

 

“러트너 씨. 당신은 내가 수백 년간 만난 여러 존재 중에서도 독보적이구려. 나 역시도 실장석과 대화를 시도했고 대화를 통하지 않는 실장석은 험하게 대했을진대……. 내가 양충만 바라고 있을 때 당신은 양충이 아닌 것마저 포용하는 법을 알았구려. 요정 님과 함께해서 그런 건가, 마음을 읽는 솜씨가 훌륭하오.”

“마음을 읽어? 난 이 멍청이들을 속여먹고 있을 뿐인데.”

“마음을 읽지 않고서는 속일 수도 없는 법이오. 속이는 행동이 얼핏 그릇된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 의도가 선하다면 거짓이라도 선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소. 당신은 이 카오스 자실장이라는 것과 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소.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성과라오. 요정 님이 당신을 찾은 것도 다만 우연은 아닌 모양이오.”

 

눈앞에서 대놓고 멍청이라고 해도 카오스 자실장은 알아듣지 못한다. 인간의 말은 알아듣지 못하는 건 다른 실장석과 똑같군, 러트너는 실장석 눈치를 봐가면서 어휘를 고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피시스에는 쉬익쉬익대는 자실장을 보면서 불안한 눈빛을 지우질 못했다.

 

“그나저나 러트너 씨, 곧 있으면 격리소에요. 이제 곧 거짓말이 들통날 텐데……. 누굴 주인으로 내세우려고요? 그 주인이랑 싸우겠다잖아요!”

“러트너 님, 설마 쭙쭙이랑 싸움을 붙이실 건 아니죠? 키아시토도 벅차다잖아요! 쭙쭙이가 못 이겨요!”

 

러트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었다는 건지 뭘 어쩌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한 피시스에가 다시 묻는다.

 

“어떡하실 거냐구요!”

“학파장님. 제 아무리 카오스 실장석이라도 드래곤은 못 이기겠죠.”

“드래곤? 아니 드래곤 멸종한 지가 언……. 아!”

 

오히려 그 말에는 키아시토가 놀란 빛을 보인다.

 

“드래곤? 허, 가이더링에서는 드래곤도 보호하고 있소? 대단하구려. 쉽게 이룰 수 있는 업적이 아닌데. 그러나 싸움을 붙이겠다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오. 드래곤이나 카오스 실장석, 둘 중 누가 죽어도 큰 손해이지 않소.”

“싸움은 붙이되, 죽일 필요는 없겠지.”

“자실장의 성격을 봐서는 누구 하나가 죽지 않고서야 물러날 것 같지 않소만…….”

 

승강기 문은 열리고 레테크 격리소를 지키던 인원들이 학파장에게 경례를 붙이려다가 키아시토의 모습을 보고 경악을 하면서 지팡이를 겨눈다. 이 모든 걸 예상한 피시스에가 서둘러 키아시토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한다.

 

“잠깐! 이거 보이시죠? 칼을 꽂아놨으니까 너무 걱정들 하지 마세요.”

“하지만 학파장님. 학파장회담에서 리치를 격리 수용하는 건 부결되지 않았습니까? 분명 실험체로 써서 처형하겠다고……. 저 자실장은 뭡니까? 흡혈귀 밥은 이미 줬습니다만, 떠다니네?”

“지금 이것도 실험의 일환이에요. 그리고 리치는 우리랑 싸울 생각이 없으니까 너무 힘들 빼지 마시구요.”

 

키아시토가 몸을 칼에 뚫린 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격리소를 지키는 흑마법 심문관들은 당황스러운 눈빛을 보이다가도 다름 아닌 요정이 리치와 함께 있는데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괜찮겠거니 하며 들여보냈다. 러트너가 카오스 실장에게 말한다.

 

[보란데스. 주인사마의 대저택데스. 오마에는 꿈도 못 꿀 주인사마의 권력데스.]

[치프픗, 분충 따위에게는 아까운 아방궁테치. 이제 모두 아타치의 것이 될테치!]

 

자실장은 탐욕스럽게 웃고 있다. 피시스에는 걱정하지만 러트너에겐 좋은 신호였다. 탐을 낸다는 것은 카오스 자실장이 보기에도 군침 도는 시설이라는 뜻이다. 자실장이 입구에 서서 크게 소리쳤다.

 

[여기 똥주인은 당장 기어나오란테챠아아앗!]

 

레테크 격리소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잘 들리는 염화소리에 모두가 피시스에를 돌아봤다. 정작 피시스에는 그 눈빛들을 모른 척하면서 다른 쪽으로 눈빛을 옮기고 있었다. 레테크 격리소에서 가장 거대한, 얼핏 보면 벽과도 착각할 것처럼 문짝도 하나 달리지 않은 커다란 격리실을 향해. 자실장의 부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응답을 받았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보이지 않는 분홍빛 용이 난데없이 괴성을 지르는 건 하루에도 몇 번씩 있는 일이지만 지금의 괴성은 살아있지 않는 생명체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낄 정도다. 키아시토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요정은 소리를 질러대면서 러트너에게 붙었지만 러트너는 이미 혼절할 듯 어지러움을 느껴 바닥에 쓰러지기 전에 미리 주저앉아 숨만 고르고 있을 뿐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자 드는 생각은 속옷이 축축한데 이게 땀인지 말 못 할 다른 분비물인지 궁금했다. 리치와 싸울 때도, 에립마브와 싸울 때도 가슴이 떨린 러트너였지만 지금의 떨림은 그 떨림과 다르다.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만 같은 죽음의 공포였다.

 

“요, 용의 포효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듣게 될 줄은, 미처 몰랐소. 대단하시구려.”

“허억, 허억, 요정 님, 요정 님, 저, 저…….”

“러트너……. 아바마마…….”

“리, 리베라나, 너는, 괘, 괜찮니?”

“무섭네요…….”

 

그나마 리베라나는 벽과 지팡이를 짚고 후들거리며 서 있을 수 있었다. 격리된 괴생물들마저도 혼란에 빠져버리는 공황의 포효를 마주한 카오스 자실장은 그래도 여전히 공중에 떠있었다. 러트너는 언나에 대고 자실장을 어떻게 도발할지 이런 저런 말들을 생각해두고 있었으나 지금은 언나를 손에 잡을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카오스 자실장은 보이지 않는 분홍빛 용의 격리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 소리를 듣고도 제정신으로 공중에 떠있을 수 있다니…….”

“다른 실장석이었으면 진작에 죽었겠죠…….”

“설마, 이 실장석도 이 포효를 지르지는 않기를 바라오.”

 

카오스 자실장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양팔을 옆구리로 가져갔다. 마치 소리를 지르기라도 하려는 모양새다. 염화술을 쓰기에 입을 잘 움직이지도 않던 자실장이 숨을 깊게 들이쉬는 모습에 설마가 사람 잡는다며 키아시토가 고개를 저었다. 가슴팍이 부풀어 오를 만큼 잔뜩 숨을 들이마신 자실장은 옆구리에 붙인 손을 천천히 위로 올린다. 러트너는 요정의 귀를 손으로 막아주지만 막는다고 소용이 있을지 걱정만이 앞섰다. 눈을 꾹 감고 고개를 최대한 한쪽으로 기울여 귀를 어깨에 붙였다. 한 쪽 귀나마 아낄 수 있기만을 바라며. 카오스 자실장의 손이 어깨높이에서 점점 더 위로 올라간다.

 

“텟츄웅~.”

 

카오스 자실장은 양 뺨에 손을 붙이고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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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카오스 자실장이 울부짓엇따 하지만 투명드래곤은 졸라쌔서 다 이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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