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카오스 럭키짱 천일모험기를 능가하는 진정한 판타지 실장석 참피 소설 실장석과 환상 102화 : 노키모노르켄의 서
그렇게 이겼구나.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의식 없이 누워있기만 해서 그런가보다. 요정과 느긋하게 나란히 앉아 과일이나 먹고 있을 수 있다는 게 어마어마한 사치처럼 느껴졌다. 사치가 맞을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을 겪을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겠어, 러트너와 요정은 서로의 옆구리를 감싸안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데 느껴지는 기척이 더 있다. 러트너는 기척이 느껴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자리에 있는 또 하나의 요정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헉, 요, 요정 님이 둘?”
“무엇을 그리 놀라느냐. 이곳은 요정의 땅이거늘.”
“네? 하지만, 아, 아. 아. 맞다. 맨날 요정 님만 보고 살아가지고, 요정도 종족이라는 게, 다른 요정이 있다는 걸 가끔 까먹는다니까요. 저기, 안녕하세요.”
다른 요정을 향해 고개를 까닥 숙여 인사하자 인사를 받은 요정은 후다닥 달아났다. 저러니 사람들이 찾고 싶어도 못 찾지, 러트너는 요정이 건네는 개암을 깨물어 먹다가 곧 방금 달아났던 요정이 수십 명의 또 다른 요정들을 몰고 오는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러트너가 아는 요정보다 키가 작은 이도 있고 러트너보다 큰 이도 있고, 겉보기엔 러트너의 요정보다 나이가 많아보이는 이도 있다. 머리칼이 갈색인가 하면 녹색이나 붉은색, 노란색도 있고 외모도 제각각이지만 남자든 여자든 뾰족한 귀와 맑은 눈동자는 모두가 한결같다. 이렇게 모여있으니 마치 단풍이 든 나무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세상에, 이렇게 많은 요정을 보는 사람은 분명 내가 처음일 거야.”
“오모흐 키흐 트세 시욱?”
“무릇손 물루켑스 타레바블라스 이욱 리브 엣시 러트너 오모흐 키흐 엔트세?”
“무웃 로마!”
“……이거 요정말이죠? 다들 뭐라 하시는 거예요?”
“그, 그대가 누구인지 궁금하여 묻는 것이로다! 세이욱! 에티! 에티!”
요정은 겁만큼이나 호기심도 많은 모양인지, 러트너의 얼굴 곳곳을 손가락으로 콕 찌르고는 후다닥 달아나 멀리 나무 뒤에 숨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꼭 야생동물을 보는 듯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또 요정이 읽어버릴지도 모르니 러트너는 가능하면 불건전한 생각을 숨겼다. 그런데 이번엔 질문 공세가 러트너에게 날아온다.
“이름은 지어주시었습니까? 이름은 무엇으로 하시었습니까?”
“혼약은 맺으시었습니까? 합궁은 하시었습니까?”
“멀쩡히 살아있는 것을 보아하니 합궁은 아니 맺으신 것으로 보오.”
“남사스럽게 이 무슨! 귀한 객 앞에서 요정 망신 다 시키는구나, 썩 물러가지 못할까!”
요정이 새빨간 얼굴로 호통을 치니 다른 요정들은 실실 웃으면서 숲의 나무 위와 수풀 사이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게 숨은 잎사귀 사이로도 모습이 슬쩍 보여 러트너와 요정을 보며 눈웃음짓는 것이 잘만 보인다. 요정이 저렇게 찾기 쉬운 거라면 평소엔 왜 안 보인담, 러트너는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흠, 흠. 다들, 두르마르말 잘 하시네요?”
“하아…… 이 땅에서 나고 자란 것들이니라. 인간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어 그대에게 다소 무례하였구나.”
“방금은 좀, 위엄 있으셨어요. 꼭 궁중 귀족처럼.”
“루노의 거울은 요정 사이에서도 희귀한 이로다. 그대들에게는…… 고위 수도사라고 하면 말이 맞겠구나. 온전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서도.”
“……진짜 높으신 분이셨어요?”
“요정 사이에 지위고하는 없노라. 단지 이 몸은 루노의 뜻을 조금 깊이 깨우치었을 뿐이니, 다른 요정들도 이 몸에게 가르침을 받을 뿐이노라. 그대는 이 몸의 총애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감사하여야 할 것이야!”
요정은 손에서 반딧불같은 빛을 내어 러트너의 손을 쓸었다. 그리고 자신의 다리에 올려두었던 나뭇잎과 과일을 통째로 러트너의 허벅지 위로 옮기며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 러트너를 긴장시킨다.
“러트너.”
“네.”
“이 몸과 그대 이전에도, 인간과 마주한 요정, 그리고 요정을 마주한 인간이 하나는 아니었느니라. 단지 우리처럼 가까이 지내며 다른 이들에게 모습도 드러낸 적은 이번이 처음이로다.”
“와, 진짜요?”
“수십 년에 한 번쯤, 인간에게 눈이 맞아 배필로 맞이하고 싶어 요정의 땅으로 끌고 오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구나. 허나 요정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보면 그대도 대강 알렷다. 이 땅에 찾아오는 인간은 모두 무사히 나가지 못하였느니라.”
“……왜요?”
다리를 슬슬 흔들고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요정이 대답을 머뭇거리고 있으니 그 모습을 보던 수많은 다른 요정들이 수풀 속에서 한 목소리로 말한다.
“첫날밤에 기운이 다 빨려서!”
“켁!”
“에테캇 무스 수투콜!”
또 한 번 소리를 빽 지른 요정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머리칼로 얼굴을 가렸다.
“……저 말대로다. 인간의 체력으로는, 그, 요정을 따라오지 못하더구나…….”
“어…… 아……. 아아…….”
“그러니 그대가 이 몸을 실로 정열적으로 사모하더라도, 이 몸은 그대를 받아줄 뜻이 없느니라. 그대를 오래도록 보고 싶으니.”
수풀 뒤에서 안타까운 에이…… 소리가 들린다. 요정은 물러가라 해도 물러가지 않는 동족들에게 러트너의 생명이 위협받을까 그의 입에 과일과 견과류를 무더기로 쑤셔 넣고, 손을 잡아끌어 씹을 새도 주지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뒤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요정어들이 요정의 땅을 벗어날 때까지 러트너의 뒤를 따라와 배웅해주었다.
“……그래서 여기가 어디죠?”
“근처에 도로가 있으니 그쪽으로 나가 마차를 잡아타자꾸나.”
“마차를 타고 어디로 가는데요?”
“물론, 그대의 고향이지.”
바깥은 언제 재앙이 닥치기라도 했냐는 것처럼 말끔했지만, 깨끗하지는 않다. 숲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큰길을 찾을 수 있었고, 가끔 길 위로 활기차게 지나다니는 마차도 보였다. 길가에는 예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울타리가 쳐져있었는데, 울타리 옆에서는 실장석들이 놀고 있었다. 어느새 러트너의 마음 속에는 실장석을 향한 본능적인 증오가 자리잡고 있었고, 이것들을 보자마자 속에서 분노가 치민 러트너는 자실장을 걷어차 울타리 너머로 날리고 성체는 손으로 집어들어 길에 바로 내던졌다.
[테벡!]
[테벳!]
[지벳!]
[갑자기 이게 무슨 무례데스! 똥닌게에에에엔! 데베갓!]
“그대가 무례하다고 하는구나.”
“네. 알아들었어요. ……왜 알아들을 수 있는 거지?”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어 다른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보려 했지만, 그 전에 실장석 일가는 저 멀리 길가에서 달려오던 마차에 치어 붉은 안개로 산화되었다. 마차는 실장석 일가를 치어버리고 나서는 속도를 점점 늦추다 정차했는데, 멈춘 위치에서 바로 러트너 쪽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야, 이 미친 새끼들아! 너네 지금 길바닥에 분충 던졌지!”
주변에 사람이라고는 러트너와 요정밖에 없었으므로, 누가 범인인지는 명확했다. 러트너와 요정은 우선 마차 쪽으로 헐레벌떡 달려간다. 마차는 상당히 중무장이 되어있어 누가 보면 현금이라도 수송하는 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안에 탄 건 모두 사람들 뿐이다.
“차축에 시체 끼이면 처리하기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아니 분충 들어오지 말라고 울타리까지 쳐놨는데, 그걸 일부러 집어쳐넣으면 어떡하라고!”
“그대여, 이이가 실장석을 끔찍이도 싫어하니, 감정이 북받치어 자기도 모르게 저지른 일이로다. 이 몸이 사과하마. 보상은 할 터이니, 이 몸을 보아서라도 화를 누그러트리어 주지 아니하겠느냐.”
“보상?”
마부는 러트너와 요정을 슥 훑어보았다. 누더기같은 옷을 걸친 러트너와 너무 단촐한 옷을 하나만 걸친 요정은 겉보기엔 아무 금전도 없어보였다.
“얼마나 주실 건데?”
“지금은 현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없구나. 이 마차는 어디로 가는고?”
“뭐, 돈이 없으면서 보상을 하겠다고?”
“이 몸과 이이는 많은 이들에게 신용을 사는 몸인즉, 그대들이 어디를 가더라도 우리를 모르는 이들이 없으리니. 보상은 그대가 바라는 만큼 하여주마.”
“아니 당신들도 오늘 처음 보는데, 어떻게 믿고 태우라고!”
요정은 말 없이 머리를 넘겨 자신의 뾰족한 귀를 보여주고, 그와 동시에 명예 마법사 징표까지 꺼내어 마부에게 내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마에 주름이 펴질 것 같지 않던 마부는 그 징표를 받자마자 얼굴이 새햐얘진다.
“가, 가, 가이더링, 명예 마법사, 니, 니, 니, 님프? 요정?”
“이리하여도 이 몸을 아니믿느냐?”
“따, 딱 맞춰서 잡으셨네요! 저희 지금, 저기, 가이더링 가는 길이거든요! 어, 어, 어서 타시죠! 저기, 안에 자리좀 만들어드려! 안쪽으로다가!”
“가이더링이라. 그곳도 일없겠지. 고맙구나. 그대의 여정을 루노께서 가호하시기를.”
그렇게 가지고 있는 돈은 하나도 없었지만, 러트너와 요정은 마차를 얻어타고 바로 가이더링으로 향할 수 있었다. 승객들이 러트너와 요정을 바라보며 갖가지 질문을 떠올리고, 또 그 질문을 하고 싶은 욕구를 꾹 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요정은 그런 마음을 읽고 대답하기 어렵지 않은 질문에는 자기가 먼저 대답해주기도 했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사람들의 질문은 오히려 쏙 들어간다. 마차는 해가 중천에 뜬 다음에야 더 가이더링 길드의 관문 앞에 도착했고, 마부는 도착하자마자 평소에는 나오지 않는 관문지기를 불렀다.
“요정 님이 오셨어요!”
다른 이도 아니고 요정이 왔다는 소식은 인간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곧 관문지기들이 헐레벌떡 뛰어나온다. 요정도 러트너와 함께 마차에서 내려 관문지기들을 맞아주었다. 관문 밖에서도 보이는 가이더링의 모습은 건재하다. 러트너는 지금 바로 이곳에서 시조물이 기어다니던, 드래곤이 니파티와 처음 손을 잡던 때가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지금은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흔적 하나 없이 깨끗했다.
“헉, 진짜 요정 님이잖아!”
“반갑구나. 이 몸이 이 마차에 조금 실례를 범하여 배상의 의무를 지고 말았으니, 염치없으나 그대들에게 손을 좀 빌리어야 하겠구나.”
“물론입니다! 그, 지금 길드 마스터께서 바로 마중을 나오고 계시니, 잠깐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천천히 오라고 하거라. 다칠라.”
그래도 많이 봐서 익숙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요정 님은 유명 인사구나, 러트너는 요정이 얼마나 부담스럽고 귀찮을지가 걱정부터 되었다. 아무래도 자기는 그냥 조용히 사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가이더링의 관문이 열리면서 안에서 옷을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로브의 모양을 보아하니 전부 다 학파장이었고, 그중 한 명은 바로 알아볼 수 있다. 가장 화려하게 치장하고 나온 더 가이더링 길드 마스터 에카르드 한이었다.
“이, 이, 이럴 수가, 요정 님! 세상에! 이게 얼마만입니까!”
“많이 변하였구나. 마스터.”
“그리고 이쪽은…… 오, 오 맙소사. 이제 일어나셨군요! 이제야!”
길드 마스터는 러트너가 기억하던 얼굴이 아니었다. 전체적인 이목구비나 얼굴형은 비슷하지만, 고생을 얼마나 했으면 10년은 팍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다. 그의 옆에는 시간의 교단 문양이 박힌 로브를 입은 사람이 서있었다. 시간의 신 히를 섬기는 수도사, 러트너가 요정의 목숨을 살리고자 요정의 땅으로 함께 동행한 적이 있었던 히의 고리였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예상하던 시간은 30년이었는데.”
“30년이요?”
“예상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11년하고도 10개월밖에 안 지났습니다. 적당히 뭉뚱그려서…….”
“네? 10년? 아니, 아니. 10년이요? 시간이 10년이나 지났다고요?”
러트너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있으니 옆에서 요정이 손뼉을 짝 치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 형제자매들에게 치어 미처 하지 못하였던 말이 있었구나. 실은 말이다…….”
러트너를 노이류플람에게 맡긴 요정은 쉴 새도 없이 가이더링으로 달려나가 시간의 신 히를 섬기는 히의 고리를 찾았다. 평소 더 가이더링 길드의 시간조율학파에서 시계를 만들고 고치는 일을 하던 히의 고리들은, 시조물이 가이더링을 덮치자 히의 권능으로 시조물의 시간을 늦춰가며 주민들이 탈출할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다. 사방이 죽음과 절망으로 가득하고 시체가 타오르며 검은 연기가 치솟는다. 요정은 그런 이들 사이에 나타나서 외쳤다.
“루노가 그대를 거부하리라!”
고막을 찢을 듯한 벼락이 시조물을 내리치며 잿더미로 만들어버린다. 사람들은 그 벼락을 내리친 자의 모습을 보고는 안도하며 반가워했다.
“요정 님! 다시 오셨다는 건, 우리가 이겼군요!”
“아직 모르노라. 러트너가 위중하다. 그대들의 손길이 조금 더 필요하노라!”
“러트너 씨가요?”
“가슴에 구멍이, 의식도 없고, 몸이 차고, 러트너가, 흐으으…… 아바마마께서 돌보아주시고 계시기는 하다만…….”
히의 고리들은 서로간에 눈빛을 교환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중 한 명이 나섰다. 요정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 그 옆에서 목숨줄을 붙들어주고 있던 그 히의 고리였다.
“저는 요정 님과의 인연이 있으니, 제가 빠르게 갔다오겠습니다.”
“고맙구나, 루노께서 그대에게 평생을 축복하실지어다! 이 몸이 안내할 터이니, 서두르자꾸나!”
요정은 수도사의 손을 덥석 잡았는데, 갑자기 주변의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이 느리게 움직이면 그냥 가다가 멈췄겠구나, 하겠지만 타오르는 불, 피어오르는 연기, 땅으로 떨어지는 나무판자까지 느리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은 히의 고리 뿐이었다.
“잠시 우리의 시간을 빠르게 돌렸습니다. 한시가 급하니.”
“그대의 권능에 감사하노라.”
가뜩이나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는 요정이 시간 가속까지 받으니 영향을 받지 않는 이들의 눈에는 광풍이 몰아친 것처럼 느껴졌다.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히의 고리는 요정보다 뛰는 속도가 느렸기에, 걷는 속도로도 요정을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요정보다 훨씬 시간을 빠르게 돌렸다. 그리고 다시 찾은 요정의 땅으로 오고 나서야 빠르게 돌린 시간을 원래대로 늦췄다.
“이곳을 다시 방문할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요정 님이 직접 초청해주시다니.”
“그대들이 이 몸을 살리는 데에 큰 힘을 다하여주었으니 그 은혜를 어찌 잊겠느냐. 그 은덕을 러트너에게도 조금 나누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이 몸의 과욕이겠느냐?”
“전혀 아닙니다. 러트너 씨는 요정 님의 은인이자 요정의 구원자인데, 이제 요정이 러트너 씨의 구원자가 될 때입니다.”
딱 한 번만 와본 곳인데 그 길은 이상하게도 익숙하다. 요정의 안내를 따르지 않아도 충분히 노이류플람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히의 고리는 한때 요정이 누워있던 곳에 대신 누워있는 만신창이의 러트너를 발견했다. 언틋 보기에는 시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아바마마, 시간의 수도사를 데리어 왔나이다.”
“그대가 우리 딸아이를 금세 일으키어주었지, 그게 벌써 엊그제 같구나.”
히의 고리는 노이류플람에게 고개숙여 인사하며 물었다.
“러트너 씨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가슴에 구멍이 뚫렸고, 몸에는 독소가 잔뜩 쌓여있다네. 그 독소 때문에 내장도 많이 상했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요정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요정은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해 울음을 터트린다. 노이류플람도 마음이 아팠으나 가뜩이나 말소리도 느린데 위로를 하다가 더 늦어질까봐 서둘러 말을 이었다.
“요정인 이 몸에게도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군. 이대로 30년은 누워있어야 할 듯하네.”
“……30년.”
“가능하겠는가.”
히의 고리는 울고 있는 요정을 굳은 얼굴로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그 말에 요정은 가슴이 철렁하여 소리친다.
“불가능하다니! 그대는 이 몸의 시간도 돌리지 아니하였느냐! 어찌 러트너는 아니된다고 하는 것이냐! 혹시…… 혹시…… 러트너가…… 30년을 버틸 수가 없는…… 그런 건…….”
요정이 말을 잇지 못하자 히의 고리가 그 등을 토닥여주었다. 요정이 히의 고리를 주먹으로 몇 대 때리긴 했지만 노여움은 없었다.
“저희가 히의 권능으로 누군가의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것은 2년이 한계입니다. 물론 그보다 더 앞당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합니다. 권능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들의 눈에는 그저 손을 슬쩍 댔더니 시간이 엄청 흐른 것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러트너 씨는 지금 의식이 없으시니 괜찮으시겠지만, 제 정신은 30년의 고독을 견딜 수 없을 겁니다.”
“……그리하더냐……. 그대마저도 버티기 힘들더냐…….”
“그리고, 이 권능은 예정된 시간을 앞당기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러트너 씨의 수명을 30년이나 깎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지난번 요정님의 시간을 2년 당겼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정은 인간보다 수명이 한참 길 테니 2년 정도는 티끌 같겠습니다만, 인간에게는 그 시간의 차이가 큽니다. 제가 시간을 무사히 당긴다고 해도, 러트너 씨는 30년을 늙은 채 깨어나시게 될 겁니다. 러트너 씨가 30년 후에도 무사하다는 전제 하에.”
30년, 수백 년을 가까이 살아와 자기가 정확히 몇 살인지도 모르는 요정에게도 30년은 길었다. 인간의 몸으로는 견디기도 힘든 시간이다. 요정의 생각은 냉철해진다. 지금 세상은 혼란스럽다. 세상이 혼란한데 그 상태로 러트너를 깨웠다간 더더욱 큰 고생을 할 것 같았다. 요정에게 허락받는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이 땅은 안전하다. 땅이 아예 무너지지 않는 이상 안전하다. 요정은 러트너의 얼굴을 쓸어주었다.
“30년이요?”
이야기를 들은 러트너가 충격에 빠져 말한다.
“제가 30년이나 누워있었다고요?”
“정확히는 11년 하고…….”
“그거나 그거나요! 잠깐인 줄 알았는데, 10년이나 누워있었다고요?”
“요정 님도 그 이후로 10년 동안 모습을 감추셨다가, 지금 처음 모습을 보이신 겁니다. 아마 옆에서 계속 러트너 씨를 보살펴드리고 계셨을 겁니다.”
“10년이……. 아니, 30년이나 10년이나……. 이게 대체…….”
“아무래도 요정과 인간은 자연치유력이 다른가 봅니다. 요정 님이 같은 상태였다면 정말 30년이 그대로 걸렸을 겁니다.”
눈을 감았다 떴는데 10년이 지나갔다니, 러트너는 요정의 땅은 인간의 땅과 시간 개념이 달라서 하루가 10년처럼 흐른다는 동화가 생각났다. 그 동화는 확실히 거짓이라고 말해줄 수 있었지만, 지금 이런 일을 겪고 나니 무작정 거짓이라고 매도할 수만도 없을 것 같았다.
“그 사이에…… 대체 무슨 일들이…… 아냐, 아냐. 지금 이 자리에서 하기엔 너무 많겠죠. 10년 치 일인데. 그, 기록 같은 거 없어요? 있다고 해도 10년 치겠지만……. 처, 천천히 느긋하게 보죠! 예. 이젠…… 시간도 많으니까.”
10년 만에 돌아온 러트너를 반기고자 가이더링의 높으신 분들이 모두 나와있으니 러트너는 인사를 안 할 수가 없었다. 길드 마스터는 물론이고 학파장도 한 명 한 명씩 손을 잡아가며 인사한다. 대부분의 학파장은 러트너가 모르는 사람이었고, 아는 사람은 인공생물학파장과 공간조율학파장 두 명 뿐이었다.
“하, 러트너 씨. 진짜 오랜만입니다.”
“노일람 학파장님. 아직도 이 자리를 맡고 계시다니 대단하세요.”
“러트너 씨! 무사하셔서 정말 반가워요! 저 기억하시죠?”
“어…… 드워프 굴에서, 레니엘크 카시? 이젠 학파장이세요?”
“학파장을 맡을 만한 사람이 저밖에 없더라고요. 나머지는……. 그때 난리통에 다들…….”
“……참 좋은 사람들이, 불필요하게 희생됐죠.”
분명 내가 아는 학파장이 한 명 더 있었던 것 같은데, 10년 사이에 변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지라 러트너는 뭐가 변했는지도 알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의 소개를 받고는 자기가 무얼 잊고 있었는지 불현듯 떠올렸다.
“얘기는 정말 많이 들었어요! 학파에서도 종종 봤었는데, 그 이후로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네요. 괴생물학파장 위모토볼이라고 합니다!”
“……위모토볼? 괴생물학파장? 어라? 피시스에 학파장님은요?”
그 이름이 나오자 학파장들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새로운 괴생물학파장 위모토볼은 러트너의 말에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그, 전 학파장님은요. 사건이 마무리된 다음에, 흑마법 심문소로 넘겨졌어요. 혈마법 사용, 카오스 자실장과 드래곤의 격리 실패 혐의로…….”
말만 들어도 어떤 결말을 맞았을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러트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그럴 수가. 그럴 수가! 그렇다는 건, 그렇다는 건, 학파장님이, 학파장님이…… 돌아가셨다고요?”
“돌아가시진 않았어요. 그 혈마법을 카오스 자실장과 싸우는 데 썼으니 어느 정도 정상참작은 했는데…….”
“원래는 재판장에서 정식으로 해야 하는데, 도시 꼴이 말이 아니니까 좀 간략하게 하겠습니다.”
시조물로 인해 무너지고 불타오르는 가이더링의 잔해를 수습하는 사이, 피시스에의 죄를 묻는 간단한 재판이 열렸다. 이런 재판에는 심문소에서 심판관을 배정해 재판을 여는 것이 정식이었지만 심문소마저 무너진 마당에 그럴 여유는 없었으므로, 심판관의 역할도 길드 마스터가 맡아야 했다. 원고 피시스에는 공허한 눈빛으로 둥글게 선 군중들 가운데 주저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괴생물학파의 옥상에서 드래곤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원고 피시스에. 흑마법 사용과 격리 실패로 인한 직무유기 혐의에 관해 할 말 있습니까.”
“……없습니다.”
“비록 원고는 자신이 일으킨 사고를 수습하고자 사용했다고 하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처형을 면할 수 없습니다.”
“……동의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약간의 예외사항을 두고자 합니다.”
피시스에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길드 마스터는 피곤해보였다. 모두가 그렇다. 지금같은 시기에는 피곤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평소같았으면 손에 돌이라도 들고 피시스에를 쳐죽이려 달려들었을 텐데, 지금은 잔해 어딘가에서 또 시조물이 기어나올지 몰라 두려운 눈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원고는 혈마법을 사용했으나 대 드래곤 주문을 사용하기 위함이었고, 이는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니파티를 처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니파티를 처단할 수 있었습니다. 흑마법 심문의 원칙은 먼저, 그 마법의 사용이 정말 불가피했나를 따져봐야 합니다. 대부분의 흑마법 사용 사례가 굳이 다른 대체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흑마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처벌받은 것인데, 지금 이 사례는 대 드래곤 주문을 사용하기 위한 대체제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흑마법 사용에 대해서는 정상참작을 하고자 합니다.”
길드 마스터는 피시스에에게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그냥 설렁설렁 말을 하고 있었다. 이미 할 말을 다 정해둔 것처럼, 머릿속에 대본이라도 하나 써둔 것처럼 아주 수월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격리 실패에 관한 점은, 상대가 전례없는 괴물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지금껏 레테크 격리소에 격리되어있던 괴물은 모두 격리 전 몇 번의 교전을 겪으면서 특성을 파악하고 그에 맞춰 격리실을 설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니파티는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니파티의 특성을 잘 모르는데도 레테크 격리소에 잠깐이나마 넣어둘 수 있었던 피시스에의 용기를 칭찬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드래곤은 정말 누구도 몰랐던 요소였던 만큼, 그리고 지금 그 당사자가 저 위에 있는 만큼……. 원고에게 물을 죄가 아니라고 봅니다. 따라서, 이 또한 정상참작합니다.”
“저를 살려두시겠다는 겁니까? 이 대역죄인을? 이 사람들이 엄청 반발할 텐데?”
피시스에가 혼란에 가득차 묻자 길드 마스터는 피곤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답했다.
“물론 죽이는 게 맞습니다. 죽이는 편이 쉽습니다. 그래서 예외사항을 두려고 하는 겁니다.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건을 그냥 쉽게 해결해버리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까? 싸움은 끝났고 재건만이 남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무너진 도시를 다시 세우려고 피땀흘려 일하는데 죽음으로 이를 피하고자 하는 게 옳다고 보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두르마르에 사형 제도가 있는데도 흉악범들을 무조건 처형하지 않습니다. 흉악범에게 갱생의 여지가 있거나, 그냥 죽이기에는 능력이 아깝거나, 그냥 죽이기에는 너무 자비롭다는 이유로 강제노동형을 선고할 때도 있습니다. 제 마음도 그렇습니다. 셋 중 어떤 것일지는 여러분이 알아서 생각하십시오. 지금 한 사람의 손길이 급급한 상황에, 아까운 인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피시스에, 더 가이더링 길드에서는 당신에게 무기한 강제노동형을 선고합니다. 이의 있습니까?”
“없습니다. 제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럼 목숨 바치지 말고 가서 일이나 하세요. 이건 가이더링에서만 결정한 일이니까, 일 끝나면 트루피아에서 정식으로 재판 받으시고요.”
피시스에는 바닥에 머리가 닿도록 조아리면서 눈물을 철철 흘렸다. 길드 마스터는 뻐근한 몸을 이끌고 일어나려다가 생각나는 것이 있어 말한다.
“아, 그래도 규정은 규정입니다. 전과 기록이 있는 마법사는 학파장 지위에 오를 수 없고, 이미 학파장 지위에 오른 자가 전과 기록이 있다면 기존의 학파장 지위도 박탈합니다. 지금 괴생물학파장 후보가 있습니까?”
“……아직 없습니다. 흑의 계약서에 후계자까지 포함된다는 얘기를 적어놔서 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괴생물학파 건물 복구하면서 후계자까지 정해오세요. 시간 넉넉히 드리겠습니다. 이의 있는 사람들은 저 찾아오시고요. 자, 다시 일하러 갑시다.”
피시스에의 재판은 그렇게 허무하다시피 끝이 났고,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눈물을 뚝뚝 흘리던 피시스에는 곧 눈물을 말끔히 닦고 괴생물학파로 다시 향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지만, 니파티와 드래곤이 한바탕 휘저어놓아서 내부는 엉망 그 자체다. 유리창은 모두 깨져있고, 승강기가 고장나 레테크 격리소로는 정상적인 방법으론 들어갈 수도 없었으며, 격리되어있던 괴물들이 전부 풀려나와 안에서 날뛰고 있었다.
“드래곤! 얘기 들었죠! 빨리 정리하러 갑시다!”
[그러지.]
“건물은 천천히 고쳐도 되니까 사람들부터 구해요!”
“그렇게 학파장님은 몇 년에 걸쳐 괴생물학파를 예전처럼 고쳐놓으시고, 학파장 자리를 제게 맡기고 어딘가로 떠나셨어요. 지금은 어디 계신지 몰라요.”
그리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힘든 싸움을 하고 이겼는데, 제대로 대접도 못 받으시다니. 마법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러트너는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건지, 이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건지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러나 본인이 그렇게 선택을 했다고 하니 피시스에에게 직접 따져봐야 할 일이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랬군요…….”
러트너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학파장들과의 인사를 마무리한다. 마부에게 약속했던 배상은 길드 마스터가 서류 한 장을 써주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이거 필요하실 거예요.”
길드 마스터가 그렇게 말하며 건넨 것은 명예 마법사 징표였다. 러트너의 이름이 쓰여있는. 처음 받았을 때와 완전히 똑같은 모양의 물건이다.
“새로 만드신 거예요?”
“아뇨. 들판에 떨어져있는 걸 추적해서 회수한 거예요. 지금껏 박물관에 전시해두고 있었는데, 설마 이렇게 다시 쓰일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얼굴이 비쳐보일 만큼 번쩍번쩍하니 보관을 잘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다. 러트너는 그 징표를 관문의 안내기에 갖다댔고, 알아서 열리는 관문을 보며 처음 이곳에 발을 들이던 날을 떠올렸다. 리베라나가 그리웠다. 러트너가 위모토볼에게 묻는다.
“레테크 격리소는 그, 전 학파장님이 다 고쳐놓았을 테고. 그럼 새 특별한 흡혈귀도…… 잡아두고 계시겠네요?”
“어…… 아뇨. 흡혈귀는 없는데요.”
“네? 없다고요?”
“아, 러트너 씨, 저기, 산송장은 이제 다른 학파에서 맡기로 했거든요. 일단 저, 옷부터 새 걸 하나 맞추시고 가시죠.”
길드 마스터가 끼어들더니 길드 마스터 전용 통신기를 불러 러트너를 이생물학파라는 곳으로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처음 들어보는 학파지만, 가이더링의 학파 대부분이 러트너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기에 이생물학파라고 특이할 것은 없었다. 길드 마스터는 알겠지, 러트너는 안내기를 따라가기 전에 요정의 옷을 맞추었던 옷가게 '가죽 클럽'이 아직도 있나 찾아가보았지만 다른 가게로 바뀌어있었다. 물어보니 가이더링이 함락될 때 시조물에게 공격당해 무너졌다고 했다. 결국 다른 가게에서 새 옷도 맞추고, 많은 사람들이 러트너와 요정의 뒤를 따르고, 그렇게 뒤를 따르는 모습에 이목이 집중되어 러트너와 요정을 모르거나 관심없던 사람들도 절로 따라붙는다.
가는 길에 가이더링의 광장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광장에는 커다란 비석이 여럿 세워져 있었다. ‘분충을 살려두지 말라’ 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내용이 쓰여있었는데, 니파티 사건 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비석이다. 비석에는 온갖 사람들의 이름이 쓰여있다. 러트너도 잘 아는 이름도 몇몇 보인다. 로티스 유크니, 오들라오, 카부스 욘손, 고드니스 리베라나. 익숙한 이름들을 더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울컥할 수밖에 없어 러트너는 그 앞에서 잠깐 눈물을 보였다. 그 눈물을 탓하는 이는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어마어마한 인구를 거느리게 된 러트너는 이생물학파 건물에 도착했는데, 건물 자체도 높이가 상당한 아파트지만 다른 학파에 비해 줄을 선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산송장학파 치고는 인기가 하늘을 찌르네요?”
“이생물학파…… 저흰 보통 실장석학파나 분충지옥이라고 부르죠.”
“……분충지옥이요?”
“처음엔 실장석 연구를 위해 만들어졌다가, 연구라는 명목으로 10년 전에 있었던 일을 평생 잊지 말자고, 실장석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고 학대하는 곳이기도 하죠. 이용료는 없는데, 한 명당 한 마리까지만이에요.”
“똥벌레 새끼들은 빽하면 새끼들 싸질러서 수백 마리씩 불어나는데 한 마리씩 죽여서 언제 수를 줄여요?”
“그렇게 제한을 두면 사람들이 아쉬워서라도 한 마리를 진득하게 오래 괴롭히더라고요. 그게 더 중요하니까.”
줄을 서있던 사람들은 처음엔 누가 새치기를 하는가 싶어 따지려다가 그 사람이 길드 마스터라 한 번 놀라고, 그 뒤로 학파장들이 전부 모여있어 두 번 놀라고, 맨 앞에 서있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 요정이라 세 번 놀란다. 그 놀란 인파를 뒤로 하고 이생물학파 건물 안으로 들어섰는데, 내부 구조는 가이더링의 다른 아파트와도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안내원이 입장 줄을 무시하고 바로 들어오는 길드 마스터를 보며 바로 인사한다.
“마스터, 안녕하세요. 이쪽은…… 힉!”
“학파장 지금 안에 있지. 러트너 씨가 오셨다고 전해드려.”
“네, 네, 네. 근데, 요, 요정 님은, 그게 좀…….”
“괜찮아. 연락해.”
안내원은 요정의 눈치를 보면서도 학파장에게 통신을 걸었고, 길드 마스터는 러트너와 요정을 학파의 승강기로 안내했다. 승강기도 다른 학파랑 크게 다를 건 없다. 지상으로 15층까지 있는 건물이었다. 러트너와 요정이 승강기에 타는데 길드 마스터는 따로 타지 않고 말만 전한다.
“15층에 학파장실로 가세요.”
특별한 흡혈귀를 찾는데 분충지옥으로 안내를 한다라, 러트너는 이미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승강기가 천천히 올라가는데, 승강기문 사이를 실장석들의 비명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데갸아아아아악! 아픈데샤악! 아픈데샤아아아아아악!]
[그만해주는데샤아아아아악! 잘못한데샤아아아아아악!]
[와, 와타시는 살려주는데스! 와타시의 자는 죽여도 좋은데스! 와타시의 자를 학대하란데스! 자는 또 낳으면 되는데스! 데갸아아아아아아아악!]
[그마아아아아안! 차라리 죽이란데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웃으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입꼬리가 움찔거리며 알아서 올라간다. 저 분충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을지 상상만 해도 즐겁다. 그리고 당연하다. 분충은 죽어야 한다. 이 세상을 추하게 만드는 분충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오직 자신만이 남아있어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러트너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12층에서 승강기가 한 번 멈추고는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기 전까지 러트너는 복도가 깔려있을 것을 예상했는데, 승강기 문이 열리자 그를 맞이하는 것은 예상치도 못한 사람이었다.
“……아, 러트너 씨! 요정 님!”
“……쿱 씨?”
“쿱? 그대가 어찌 여기 있느냐?”
보라색 로브를 걸치고 잔주름이 는 쿱이 승강기에 올라타려다 러트너를 보고 깜짝 놀라서 물러났다.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반갑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마주치게 되니 서로 놀라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쿱의 어깨 너머로는 괴생물학파의 실장석 보관소와도 비슷한, 하지만 실장석을 보살피는 대신 쳐죽이는 데 혈안이 된 사람들도 가득찬 공간이 있었다. 모두 손에 날붙이는 기본으로 하나씩 끼고 있고, 실장석의 얼굴에 서리는 두려움을 보면서 히죽대다가 러트너와 요정이라는 말에 놀라 승강기쪽을 바라보았다. 러트너도 덩달아 신이 난다.
“이게…… 참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네. 참, 무사하셔서 다행이네요.”
“제가 할 말입니다. 아, 내리셔도 됩니다. 마침 여기를 보여드리려던 차였습니다.”
“아, 저기, 그 학파장님 뵈러 왔는데…….”
“얼마 안 걸립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한 마리 잡고 올라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의 관심이 잠깐 다른 곳으로 쏠린 그 잠깐의 시간이 실장석들에겐 평생에 둘도 없을 유일한 휴식의 여유였다. 그러나 그 휴식시간도 온몸에 퍼진 고통과 함께 지내야 하니 휴식 자체도 고문이다. 더구나 이제 끝났나 싶어도 곧 더 많은 괴롭힘이 이어질 테니 심리적인 고문도 덩달아 이어지고 있었다. 쿱은 러트너를 데리고 방의 가운데로 데려갔는데, 실장석의 발이 잠길 정도의 얕은 수조에 수많은 실장석들이 바글거리면서 통곡하고 있었다. 빠져나가보겠다고 동족을 짓밟고, 배가 고프다고 동족을 잡아먹고, 두려움에 질려 바닥에 똥을 싸지르고, 그렇게 싸지른 똥은 수조에 고인 물에 쓸려 내려간다. 보기만 해도 비위생적이고 끔찍한 광경에 러트너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제발 구해주는데스으으으! 제발 이 악마들에게서 와타시를 구해주는데스으으으으!]
[와타시도 구해달란데스!]
[다른 자보다 와타시가 우선인데스! 와타시를 먼저 구해달란데스으으으!]
“분충지옥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었네요.”
“이렇게 많은 실장석이 하루만에 동나고, 또 하루만에 다 채워집니다. 앗, 저기! 바닥에는 떨어트리지 마십시오! 그쪽도! 상자 밖에서 뺐으면 한눈 팔지 마십시오. 바닥으로 뛰어내려서 다리가 부러지더라도 도망치려 합니다! 다른 사람 옷에 얼룩이 튀면 당사자 책임이라는 점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흐흠, 그래서 이 많은 실장석을 대부분 바깥에서 공수해오는데도 말입니다. 정말 지긋지긋한 생물입니다. 한 마리 골라보십시오.”
러트너는 언어 없이도 실장석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자신이 참 싫었고, 그래서 자신에게 가장 강력하게 어필하느라 눈이 자꾸 쏠리는 실장석 한 마리를 마음속으로 짚어둔 다음 말했다.
“언나를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언어도 필요하십니까?”
“됐어요.”
쿱은 자신이 차고 있던, 원반이 달린 목걸이를 벗어 러트너에게 걸고 원반에 손가락을 콕콕 찍었다. 그러자 러트너가 하는 모든 말이 실장석이 하는 데스데스소리로 바뀌어 나온다. 요즘은 이런 것도 나오나 보네, 러트너는 시대의 변화를 확연히 느끼며 말했다.
[거기 오마에.]
[데에에! 와타시는 정말 무고한데스! 와타시는 닌겐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은데스! 그냥 골판지에 살면서 자들과 지내고 있었을 뿐인데스! 닌겐의 밥을 훔치지도 않은데스! 닌겐에게 탁아를 한 적도 없는데스! 투분을 한 적도 없는데스! 그냥 자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스! 제발 와타시를 살려주는데스! 이 지옥에서 와타시를 구해주는데스으으으!]
[음, 오마에에게서는 진정성이 느껴지는데스. 오마에는 운이 좋은데스. 와타시는 오마에를 이곳에서 구원해줄 착한 닌겐인데스.]
[데스데스! 데스데스우우우우우! 제발 와타시를 구해주는데스!]
[지랄맞는 소리인데스! 저 자의 엉덩이에 똥딱지가 말라붙은 게 안 보이냔데수! 와타시의 속옷씨를 보란데스! 순백처럼 깔끔한데스! 와타시야말로 진정한 양충인데스!]
그렇게 말하자 모든 실장석이 갑자기 옷을 들추고 속옷을 보여주기 시작하는데 옷이 깨끗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물론 러트너가 찍은 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에 러트너는 턱을 괴고 고민하는 척 했다.
[흠…….]
[진짜인데스! 와타시의 몸 씨 마음 씨 소중한 돌 씨를 다해서 맹세하는데스!]
[그렇다면 좋은데스. 이 자를 꺼내주는데스.]
[데, 데에에! 참말인데수! 말 바꾸기 없는데스!]
“그럼 꺼내드리겠습니다. 빈 자리가…….”
쿱이 가락지 낀 손으로 염동력을 써서 실장석을 들어올리고, 공중에 떠오른 실장석은 감격에 겨워 실실 웃으면서 상반신에서는 기쁨의 눈물을, 하반신으로는 기쁨의 분비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러트너는 말 없이 손을 들어 제지한다.
[역시 아닌데스.]
[데, 데?]
[운치나 찍찍 싸대고, 냄새도 나고, 못생기고, 살도 뒤룩뒤룩 쪘고, 옷도 더럽고……]
[데에에에! 데에에에!]
[이런 추한 거짓말쟁이가 양충일 리 없는데스.]
[아닌데스! 아닌데스! 와타시는 진심인데스! 와타시는! 와타시는!]
[분충인데스. 내려놓으란데스.]
쿱은 순순히 들어올렸던 실장석을 다시 내려놓았고, 제자리로 돌아온 실장석은 너무나 큰 충격에 빠진 나머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꺽꺽거린다. 러트너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한 쪽 입꼬리만 올려 피식하고 웃어주었다. 그러자 그 실장석은 입에서 피를 토하더니 청량한 파킨 소리와 함께 그대로 숨졌다. 러트너는 목걸이를 풀어 쿱에게 돌려주었다.
“잘 썼어요.”
“그대는 이제 세 치 혀만으로 실장석을 죽이는구나. 아주 도가 텄도다.”
“고통스럽게 죽이는 데는 이게 최고에요. 정신적으로 죽이는 거. 육체적으로는 아무리 괴롭혀봤자 자기가 문제라는 걸 모르거든요.”
그리고 실장석들은 알아볼 수 없는 섬뜩한 눈빛으로, 수조 안에서 죽은 자를 조롱하며 시체를 물어뜯어 기념품으로 챙기는 수많은 자들을 흘겨본다.
“마음같아서는 이것들도 이 자리에서 다 죽여버릴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재미를 뺏으면 안 되겠죠?”
“물론입니다. 옷 더럽힐 여지도 없이 빠르십니다.”
“그럼 이제 학파장실로 올라가죠?”
분충이 죽었으니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울부짖는 실장석들을 뒤로하며 러트너와 요정과 쿱은 승강기에 올랐다. 12층에서 15층까지, 고작 3층까지 올라가는 시간 동안 어색한 침묵이 승강기 안을 감돌았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하나, 무엇부터 물어봐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승강기 문이 또 열리고 펼쳐진 광경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서고였다. 벽 전체가 책꽂이다. 사람 키보다 훨씬 높아서 저런 높이에 있는 책은 어떻게 꽂았고, 또 어떻게 꺼내나 걱정될 정도로 높다. 날아다니는 인공생물들이 책을 정리하고는 있었지만 그 걱정은 생각보다 허무하게 해소되었는데, 책꽂이 구석에 사다리가 놓여있었다. 쿱 같은 나뮈의 신도들이 환장하고 좋아할 것 같은 장소다.
“여기가 학파장실입니다.”
“여긴 뭐……. 학파장이 나뮈 신도인가봐요.”
“예. 그렇습니다.”
쿱은 종이 냄새 풀풀 풍기는 책꽂이의 숲을 통해 방의 가운데까지 들어갔다. 그곳엔 방 하나의 크기만한 공간에 학파장의 책상이 놓여있고, 주변이 책꽂이로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학파장의 책상에 앉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학파장님은요? 외출중이신가?”
쿱은 말없이 싱긋 웃으면서 책상 뒤로 돌아가 푹신한 학파장 전용 의자에 걸터앉았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쿱 노키모노르켄, 이생물학파의 학파장입니다.”
자리에 앉아있는 쿱은 러트너가 기억하던 때보다 머리도 길었고, 얼굴에 잔주름이 늘었다. 하지만 지식을 갈구하는 그 총명한 눈빛 만큼은 그대로였다. 러트너는 그의 모습을 한눈에 담은 다음 학파장의 책상 위에 놓인 명패로 눈길을 옮겼다. 러트너와 요정 둘 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요?”
“무어라?”
“이생물학파장? 쿱 씨가?”
“독실한 성직자이던 그대가, 나뮈의 열쇠는 그만두었느냐?”
러트너와 요정이 동시에 물으니 쿱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만 뒀습니다.”
“아니 왜, 그만 둔 거는 그렇다 치고, 학파장 자리는 진짜 의외인데요. 쿱 씨가 마법을 그렇게 잘 다루셨나요?”
“10년 전에는 아니었습니다. 성직자를 관둔 이후로 마법의 길을 열심히 닦았고, 지금은 어디 가서 마법사라 소개해도 부끄럽지 않을 몸입니다. 그래도 절대적인 수준은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서 한참 떨어집니다. 제가 학파장이 된 직접적인 이유는 이 책 덕분입니다.”
미리 준비해놨다는 듯 책상 위에는 책이 여러 권 쌓여있었다. 표지는 조금씩 다르지만 책의 제목은 전부 ‘노키모노르켄의 서’로 똑같다. 러트너가 요정의 땅에서 봤던 바로 그 책이었다.
“제목부터 저러니 쿱 씨가, 아니, 학파장님이 썼을 것 같기는 했어요.”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이 책 하나로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뀌었지 뭡니까. 학파장 자리도 자리고, 교단에서 쫓겨나고…….”
니파티 사태가 진정된 지 몇 주 후, 쿱과 콜드펌은 모습을 감춘 러트너와 요정을 기다리며 지금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종이를 모아 정보를 대조하고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실장석의 암흑기’라 이름지은 그 책에는 쿱과 콜드펌의 공동저자 서명, 그리고 이 책을 쓰는 데 도움을 준 모든 사람의 이름(물론 요정은 제외하고)이 적혀있다. 마침내 맡은 의무를 다할 수 있으리라 여겨 기쁜 마음으로 나뮈 교단의 본부를 찾은 쿱과 콜드펌은 절차대로 나뮈의 자물쇠에게 책을 맡겼다. 내용을 검토받는 데 적어도 몇 주는 걸릴 것이라 예상했던 쿱과 콜드펌은 그날 당일에 바로 서기장의 호출이 들어오자 놀라면서도 기대하며 서기장을 찾았다. 흡사 법정처럼 마련된 서기장실에는 닝케 더케드 서기장을 중심으로 4명의 자물쇠들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쿱 노키모노르켄 동지, 킨 콜드펌 동지. 동지들의 기록은 잘 읽어보았으나, 이 책의 내용은 지극히 불온하여 출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금서로 지정하며, 어떤 방법으로든 재배포를 금할 것을 명합니다.”
전혀 예상 못했던 응답이었고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쿱은 얼떨떨하니 말까지 덩달아 떨려서 묻는다.
“그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것은 사건의 기록입니다! 카오스 자실장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가 모두 적힌, 후세를 위한 기록입니다! 실전된 기록까지 복원하여 담은 귀한 기록이란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실장석이 다른 세계에서 넘어왔다는 사실부터, 그 실전된 방법을 깨우친 것까지 모든 것이 불온합니다. 기록을 읽어보니, 쿱 동지께서는 흡혈귀에게 자발적으로 세뇌를 받아 대 드래곤 주문의 사용법을 머리에 새기셨다던데. 지금도 기억하고 계실 테고.”
“그 덕분에 니파티를 쓰러트리고, 지금 우리들이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겁니다. 이 방법을 기록해두지 않으면 언젠가 또 새로운 니파티가 나타났을 때 또 대응이 늦어지고, 마찬가지로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니파티가 나타나지 않도록, 방법 자체를 실전시키는 것이 원초적인 해결법이라 말하고 있는 겁니다. 대 드래곤 주문 또한, 그것이 인간에게 쓰였을 때 얼마나 큰 위험을 불러올지 모릅니다.”
“새로운 니파티가 어떤 방법으로 나타날지 모릅니다. 새로운 대 드래곤 주문이 또 어떤 방법으로 개발될지도 모릅니다! 다른 세력이 새로이 개발된 방법으로 또 재앙을 불러온다면, 우리가 이 방법으로 맞설 것이며, 또 다른 방법을 개발할 겁니다! 정보는 차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나뮈의 뜻입니다!”
“쿱 동지. 이 기록에 따르면 쿱 동지는 흑마법을 직접적으로 긴밀히 접하였고, 그 정보를 직접적으로 기록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파문 조치는 물론이고, 마법사였으면 처형도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두 동지의 노고를 살펴 지금 이렇게나마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세상에는 존재해서는 안 될 금단의 지식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세계의 지식과, 실장석을 죽여야만 하는 이유까지 묻어버리시겠다는 겁니까? 이미 드래곤마저 이 세상에 풀려난 차입니다. 드래곤과 인간이 손을 잡고 커다란 악을 물리쳤다는 사실마저 묻으시려는 겁니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한 마당에?”
“물론 감출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알려져서는 안 될 지식은 검열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지식을 검열하는데 어찌 정보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실장석을 죽여야 하는 이유를, 드래곤이 실장석의 편을 들었다가 인간에게 다시 붙은 이유를, 대 드래곤 주문을 복원한 방법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정보에 거짓이 없을 때 진리를 마주할 수 있는 것인데, 지식의 교단에서 지식을 차단하다니 그것이 정녕 교단이란 말입니까!”
“쿱 동지! 경솔한 언행은 삼가십시오! 지식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야 말로 신성모독이라는 사실을, 나뮈의 열쇠로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신성은 인간 따위가 모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뮈의 가르침에 존재해서는 안 될 지식같은 건 없습니다. 금단의 지식같은 것도 없습니다! 지식은 지식일 뿐이며,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지식을 오용 및 악용하는 자들을 처벌하는 것이 올바른 일입니다. 지식은 죄를 범할 수 없는 것인데 대체 무슨 죄가 있어 금지하고, 그 지식을 선하게 이용하고자 하려는 자들이 피해를 봐야 한단 말입니까!”
“지식은 죄가 없으나 인간은 죄가 많습니다! 우리도 같은 인간으로서 인간을 완벽히 통제할 수 없기에, 완벽함에 가까운 지식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쿱은 서기장에게 열성적으로 이 기록을 보존해야만 하는 이유를, 기록을 보존하지 않아 지금의 재앙이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을 성토했다. 하지만 서기장은 물론이고 나뮈의 자물쇠들도 그런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정녕 그 뜻을 굽히지 않겠다면, 우린 쿱 동지를 파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녕 그 정보를 있는 그대로 공개하지 않으시겠다면, 저 또한 이 교단에 더 이상 몸을 담지 않겠습니다.”
파문 이야기까지 거론되는 상황에 이르자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콜드펌이 쿱을 건드리면서 물었다.
“쿱 동지, 파문이라니,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우리가 이 기록을 왜 했고, 왜 해야만 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수도사로서 지식을 수집하는 의무를……”
“전 교단이 아니라 나뮈에게 제 뜻을 바쳤습니다. 교단이 저보다 높다 한들 나뮈보다 높을 수 없습니다. 그 교단이 제 뜻을 억누르겠다면 그것은 곧 나뮈의 뜻을 억누르는 바, 저는 이 교단을 더 이상 나뮈의 교단으로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그 지식이 위험한 것은 사실입니다. 세간에 개방하기에는 조금…….”
“위험하다는 것조차 알리지 않으면 어째서 위험한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껏 대 드래곤 주문이 왜 위험한지 알지도 못한 채 금지했습니다. 그 실상은 어땠습니까? 위험이 아니라 드래곤의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그 죄책감만 아니었으면 대 드래곤 결계진으로 진작 니파티의 공세를 막았을 것이고, 수십 만의 인명도 덧없이 희생될 일도 없었을 겁니다! 저는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쿱의 뜻은 확고했고, 서기장은 고개를 저으면서 선고했다.
“우리의 결정과, 당사자의 뜻이 일치하니 더 이상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쿱 노키모노르켄, 이 시간부로 당신은 나뮈의 교단에서 파문하며, 나뮈의 교단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혜택에 접근을 불허합니다. 이 조치는 추후 별다른 변동 고지가 있을 때까지 영구적으로 유효합니다.”
“이의 없습니다.”
“나가는 길에 징표와 기도책은 모두 반납하십시오. 권유가 아닙니다.”
나뮈의 교단에서 직접 내려받은 펜과 종이, 지도책 겸 기도책을 제자리에 전부 내려놓은 쿱은 그 즉시 등을 돌려 서기장실을 나갔다.
“콜드펌 동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콜드펌 동지는 끝내 저를 따라오지 않으셨습니다.”
“……파문이라니. 그대가 지금껏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였거늘, 그 대가가 파문이라니! 너무 부당하도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다양성의 부조리를 지닌 인간 아니겠습니까. 저와 반대되는 생각을 하는 인간이 있으면 저와, 그리고 요정 님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파문당하는 즉시 가이더링으로 향했고, 기록을 재차 책으로 엮어 길드 마스터에게 제출했습니다. 문제도 많았고, 나뮈 교단과 가이더링 사이에 어마어마한 마찰이 있었지만, 그 결과는 지금 보시다시피.”
그 결과가 지금 러트너의 손에 들려있는 ‘노키모노르켄의 서’였다. 러트너는 아무리 봐도 이 책에서 뺄 구석이 뭐가 있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굳이 빼고자 한다면 자신의 이름을 빼고 싶었다. 자기가 아니라 세상 누구라도 자신의 위치를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콜드펌 님은 지금껏 연락이 안 되시는 거예요?”
“안 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했습니다. 파문당한 사람과 수도사가 연락을 취해서 좋을 건 없으니 말입니다. 간접적으로 소식은 좀 들었는데, 지금 미라익스에 계신다고 합니다. 드워프와 나뮈 교단 사이에 첫 교류를 성사시킨 역사적 사절로 말입니다. 그거 아십니까? 미라익스가 원래는 드래곤의 고향이었답니다. 드래곤 전체 말고, 우리와 함께 싸운 그 드래곤 말입니다. 드래곤도 지금 미라익스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생사라도 알 수 있다는 건 다행이네요.”
“이 책도 출간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나뮈 교단에서 하도 극성을 부려댄지라. 초판이 나왔을 때는 나뮈 교단에서 악착같이 긁어모아다 죄다 분서했습니다. 콜드펌…… 씨도 거기에 앞장서셨고. 아마 이제 세상에 남은 초판은 얼마 없을 겁니다.”
“그거 요정 님이 한 권 갖고 계시던데요?”
“이 몸이 가져온 것이 아니라, 누가 숲에 공물이라고 놓아둔 것을 받아온 것이니라.”
“잘 간직하십시오. 역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는 물건입니다. 책 자체의 내용은 초판인 만큼 수정할 부분도 많습니다. 아! 이제 개정 5판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러트너 씨가 오셨으니!”
신나서 책상 서랍 속의 필기구와 종이를 꺼내드는 모습은 러트너가 아는 쿱의 모습 그대로였다. 저렇게 열정적인 사람을 파문조치하다니 지식과 정보를 관장하는 교단도 그렇게 아는 건 많이 없나보네, 러트너가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자, 심기가 불편하시다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사이에 불편할 게 어딨어요.”
“좋습니다. 자……. 러트너 씨는 다른 세계로 가셨고, 그곳에서 실장석의 몸에 갇혀 정신이 실장석의 의식으로 덮어씌워지지 않았습니까.”
생각만 해도 불쾌한 이야기였지만 불편할 거 없다고 대답하기도 했고, 이런 불쾌함을 떨쳐내려면 정면으로 맞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러트너는 위화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랬죠.”
“그 당시 당사자로서 심정이 어떠셨는지, 실장석의 마음이라는 것이 어떠한지, 그런 심리적인 부분을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
그 당시를 회상하자면 불편하다기보다는, 이상했다.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했었나,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달지도 않던 콘페이토 따위에 영혼을 판 것처럼 행동하고, 지금의 마음이라면 다른 세계의 인간들에게 협력하며 그 세계 생활에 적응하고, 글자는 물론이고 역사까지 배워 그 세계의 원주민 못지않게 생활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 세계에 있을 당시에는 그런 건 없었다. 오직 증오와 분노, 자신이 아니면 모든 것이 의미없다는 극한의 자기애, 그런 와중에 자신이 누군지는 기억 못하는 흐릿한 자의식이 뿐이었다. 러트너는 자신이 느끼던 바를 솔직히 말했다. 그의 어투는 공허했고,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요정은 눈물이 차올라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도대체, 어찌 그러한 일이…… 그대가 그리도…… 괴로운 일을…….”
“그 세계 인간들 말로는 애초부터 인간 뿐이었대요. 다른 종족은 하나도 없이. 그랬대요. 요정도, 드워프도, 오크도, 실장석도. 태초에는 짐승과 인간 뿐이었대요. 자기들이 실장석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에…… 그건 이 책에 써있네요. 근데 쿱…… 아니, 학파장님.”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대체 이 얘기가 여기 왜 쓰여있는 거죠? 이걸 아는 사람은 저 한 명 뿐일 텐데?”
“책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정보원이 한 명 있습니다.”
대체 어떤 정보원이 나밖에 모를 다른 세계 이야기를 알고 있을까, 드래곤이려니 생각하며 자기가 제대로 훑어보지 않았던 장을 찾아본 러트너는 책장에 떡하니 쓰여있는 단어를 보더니 몸이 굳어버렸다.
“…….”
“예. 그 사람입니다.”
“하지만, 죽, 아니, 머릿속에, 에? 잠시만요. 살아있어요?”
“그에 대한 답은…….”
쿱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승강기 쪽으로, 정확히는 승강기 바로 옆에 붙은 책꽂이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책꽂이 앞에서 작업하고 있는 정20면체 모양의 인공생물을 가락지 낀 손가락질로 불러내더니 품에서 작은 금속 원판을 꺼내 보여주었다. 러트너는 그것이 명예 마법사 징표인 줄 알았는데 이젠 명예 마법사가 아닌 학파장의 징표였다. 인공생물은 그 학파장의 징표를 들고는 12칸짜리 책꽂이 중 8번째 칸에 학파장의 징표를 가져다 놓았다. 그러자 책장이 스르르 옆으로 움직인다. 그 뒤에는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직접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문이 열리자 그 안은 다른 승강기와 다를 바 없다. 단추가 2개라는 것만 빼고. 윗 단추 하나와 아랫 단추 하나. 러트너는 자기가 알아서 아래쪽 단추를 눌렀고, 쿱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자 승강기 문이 스르르 닫힌다. 이 승강기 안에서는 지금 얼마나 왔는지 층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도착하면 조용히 문만 열릴 뿐이다. 그 문 뒤에는 부담스러울 만큼 어두운 복도가 기다린다. 복도 끝에 보이는 것은 촛불 하나 뿐이었다. 밤눈이 밝은 요정은 그 촛불 속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있었고, 보기 전부터 이미 이 건물 전체에서 풍기는 불길한 기운에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승강기에서 내리긴 했지만 발을 잘못 디디기라도 하면 넘어질 것 같아 러트너와 요정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셨어요?”
저벅, 저벅, 발소리가 다가온다. 러트너와 요정을 향한 것이 분명하고, 요정은 그 발소리가 다가올 때마다 속에서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도 요정은 참고 있었다. 그런 혐오감이 어떤 존재를 마주할 때 올라오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발소리가 멈춘다. 그리고 짝, 하는 박수소리가 울린다. 뒤를 이어서 주변이 정말 희미하게, 내부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만 은은히 빛났다. 깊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갈색 머리를 풀어내린 새하얀 얼굴이었다. 러트너를 보면서 감격에 벅차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얼굴이.
“……진짜…… 진짜 살아계시네요!”
“……리베라나 님?”
흡혈귀 특유의 칠흑같이 검은 옷을 입고, 얼굴은 그와 대비되게 새하얗고 수척한 리베라나가 러트너를 보면서 반가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처음 러트너를 마주했을 때 양 팔을 벌릴 것처럼 움찔거리더니 팔짱을 단단히 끼면서 미소만 지어보인다. 러트너는 그런 리베라나를 자기가 직접 안아주어 반가움을 표했다. 온몸이 서늘하다. 목소리도 서글픈데 건조했다. 요정은 인상을 찌푸린 채 흘겨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10년만에 다시 뵙는데…… 여기로 찾아오신다니까…… 저처럼 되지는 않았나 해서…….”
“리베라나 님이 제안하셨다면서요. 그 방법. 제가 누구 덕에 살았는데요.”
“요정 님도, 안녕하세요. 여기까지 오실 정도면, 쿱 학파장님은 뵙고 오신 거죠?”
요정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리베라나는 천천히 러트너의 손을 잡았다. 흡혈귀의 손이 인간에게는 얼음장같이 차고, 인간의 손이 흡혈귀에겐 달군 돌처럼 뜨겁다. 러트너의 손에 흐르는 피와 맥박의 유혹을 꾹 눌러 참으며, 리베라나는 그를 지하 5층의 어둠 속 깊은 곳으로 안내했다. 흡혈귀를 따라 어둠 속으로 따라간다는 것이 제정신으로 할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러트너와 요정은 믿고 따랐다. 희미한 불빛이 다 사라져 모두 어둠에 잠길 때쯤 또 한 번 박수 소리가 울렸는데, 이번엔 주변에 보랏빛 불꽃이 떠올랐다. 불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열이 있는 불은 아니었고 밝기도 훨씬 약했다. 그래도 승강기 입구에서 비치던 희미한 불빛보다는 훨씬 밝다. 그곳은 작은 방이었는데, 한가운데 튼튼해보이는 탁자가 하나 있었고 갖가지 책이 널브러져있었다. 그 책상 위에는 명패와 액자가 하나 놓여있다. 리베라나가 살아있을 적의 모습을 똑같이 그려놓은 그림이었다.
“……명예학파장 고드니스…… 에립마브……?”
“네. 헤헤. 리베라나라는 이름은…… 두고 왔어요. 이런 모습 부모님이 보고 싶지 않으실 테니까.”
“하긴 또 특별한 흡혈귀가 되려면, 그…… 흡혈귀랑 많이, 긴밀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했었죠. 에……. 뭐, 성을 갈아도, 네. 그렇겠네요.”
에립마브 이름을 들으니, 에립마브 생각이 나니 그리움이 커져만 간다. 러트너는 슬프게 웃으며 이제는 리베라나가 아닌 에립마브에게 축사를 건넸다.
“그러면 저, 에립마브라고 부르면 될까요?”
“고드니스라고 부르세요. 학파장님이라고 불러주시면 더 좋고요!”
“아아. 흠, 그러면, 고드니스 학파장님. 왜 여기 계세요? 분명히 괴생물학파에 계실 줄 알았는데.”
“전 사실 가이더링에 발도 못 들일 줄 알았어요. 전 학파장님이 손을 많이 써주셨죠.”
“애초에 이생물학파가 뭐하는 곳이에요? 괴생물학파랑은 뭐가 달라요? 그거를 쿱 학파장님께 물어봤어야 하는데.”
러트너는 학파장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강조한다. 고드니스는 그 말에 싱글싱글 웃어보인다. 러트너에게는 어쩐지 슬픔을 감추려는 웃음처럼 보였다.
“이생물학파는요! 지금은 뭐, 실장석학파라 봐도 되지만. 다른 세계의 생물을 연구하는 학파에요. 근데 그런 생물이 지금은 실장석밖에 없잖아요.”
“굳이 학파 건물까지 따로 세울 필요가 있었어요? 괴생물학파의 층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잖아요.”
“그 얘기까지 하려면 좀 길어지는데. 앉으세요! 앉으세요.”
도구 하나 없이 맨손만으로 염동력을 사용해 손을 직접 대지 않고 의자를 가져다주니 러트너와 요정은 그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학파장실에 놓이는 그 의자와 같은 것이라 아주 푹신했다.
“러트너 님. 인종이랑 괴물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가 뭔지 아세요?”
“말이 통하는 거요.”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엄밀히 말하면 아니에요. 인어랑 어인은 말을 못 하고 초음파로 소통하지만 인종이거든요.”
“아, 그랬어요? 인어를 뭐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중요한 건 말이 아니라, 교배 여부에요.”
그래, 이 사람은 내가 아는 리베라나가 맞구나. 러트너는 얼굴에 웃음기를 띄면서 고드니스를 바라보았다.
“진짜에요! 생물학적으로 인종의 정의가 그렇다니까요! 인간이랑 교배가 가능한 종족은 다 인종인 거예요! 그래서 인어도 인종이고, 드래곤도 인종이고, 고블린도 인종이고. 생물학적으로는요.”
“믿어요. 근데 그게 이생물학파랑 무슨 상관인데요?”
“근데 이 정의대로면, 실장석을 인종으로 인정해줘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단 말이죠.”
그 얘기를 듣자마자 기분이 심히 불쾌해져 얼굴에 띈 웃음기가 싹 가신다. 쿱에게 다른 세계에 갔을 때의 이야기를 했을 때보다 더욱.
“인륜, 감정적인 이유는 둘째 치고. 인종으로 인정하게 되면……. 실장석을 이제 마음껏 괴롭힐 수가 없어요. 생물학적으로, 법적으로 사람 취급이니까 실장석을 괴롭히면 범죄가 되고, 실장석이 먼저 우리에게 잘못을 해도 두르마르 법에 따라 법적인 절차를 거쳐야 문제없이 보복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그딴 세상에서 살 바에야 차라리 두 번 죽으렵니다. 앗, 그, 학파장님 앞에서 실례되는 말을…….”
“틀린 말도 아닌데 뭘요. 그렇다고 이제 와서 생물학적 정의를 바꿀 수는 없잖아요! 이미 인종으로 분류된 수많은 종족들은 어떡하고요. 거기서 이생물학 얘기가 나왔죠. ‘실장석은 우리 세계의 생물이 아니기에 서로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게 쿱 학파장님이 하셨던 말씀이었고요. 꼼수이기는 한데, 다들 실장석을 같은 인종으로 인정하기는 싫었나봐요. 만장일치로 동의하더라고요. 덕분에 오늘까지도 우리는 실장석을 마음껏 괴롭힐 수 있는 거랍니다.”
안심된다.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기는 있구나. 실장석을 향한 증오가 영원히 변치 않기를 빌며, 러트너는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책 보셨죠.”
“학파장님 책 말씀하시는 거죠? 하루에 세 번은 읽죠.”
“제가 다른 세상에 갔다는 얘기도 보셔서 아실 테고요.”
“그럼요.”
“거기 간 사람은 저밖에 없는데, 그걸 아는 사람이 누가 또 있죠?”
그 물음에 서글프게나마 미소를 짓고 있던 고드니스의 창백한 얼굴에서 그 미소마저 사라진다. 그리고 이내 체념한 듯이 다시 웃음기를 되찾고 입을 열었다.
“자기야, 이제 나와도 돼.”
그 말과 동시에 요정의 눈으로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또 하나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들어보니 분명히 사람이 맞고, 방금 하는 말을 들었던 러트너는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을까 하며 조마조마 가슴을 졸였다. 그리고 빛이 들어오는 곳까지 발소리가 다가오자 러트너는 입이 쩍 벌어졌고, 요정은 아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말도 안 돼!”
“여. 리부시사히.”
분명히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반홈의 빛으로 불타 사라졌을 흡혈귀가, 고드니스라는 이름이 없이 순수히 에립마브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었던 흡혈귀가 지금 멀쩡히 살아서 요정과 러트너를 맞이하고 있었다. 러트너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생전의 야릇한 미소와 말라붙은 목소리까지 지닌 채.
“네놈은, 네놈은 분명히 타죽었거늘! 이 몸이 똑똑히 보았거늘! 피시스에도 네놈을 애도하며 통곡하였거늘, 네놈이 어찌……! 산송장이라 하더니, 두 번 죽은 몸을 다시 살리어냈느냐!”
“그랬었지. 존나 뜨겁더라. 너는 10년만에 보는 사람한테 반갑게 인사는 못 할망정 삿대질부터 하냐.”
“시체까지 아니 남았는데 어찌 살아있느냐는 말이다!”
“알려줄 테니까, 하나만 약속해.”
손톱을 바짝 깎아 단정한 손으로 입에 손을 가져다 댄다. 저 죽일 듯한 표정, 그 표정을 볼 때 드는 서릿함, 러트너에겐 정말 눈물나게 익숙한 감각이다.
“비웃으면 뒤져 진짜.”
에립마브는 자신의 가슴팍에 도형의 모양을 그렸다. 그러자 가슴팍에 선이 그이더니 쩍 갈라지면서 내용물이 그대로 드러난다. 요정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고드니스가 그 갈라진 가슴 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심장을 꺼내려는 건가, 러트너도 어느새 등받이에 바짝 몸을 붙이고 있었다. 머릿속 안에서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실장석이다. 그 실장석을 보자마자 러트너는 뇌가 굳은 듯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니, 니, 니, 니, 니, 니, 니, 니, 니, 니, 니, 니, 니…….”
“하아……. 그래, 그 새끼 맞다.”
“이 씨발 분충 새끼! 좀 뒤지란 말이야아아아아악!”
“안 돼요!”
러트너가 손을 내리쳐 성체실장의 머리통을 터트려버리려는 찰나 고드니스가 러트너의 손을 턱 잡는다. 그 악력과 냉기가 온몸을 뒤틀리게 할 만큼 저리니 러트너는 몸을 아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은 니파티일지 몰라도, 정신은 쭙쭙이라구요! 죽일 거면 정신상태가 니파티일 때 죽이세요!”
“죽이지 말라는 말은 안 하는구나…….”
고드니스는 러트너의 손을 놓아주고 실장석도 다시 에립마브의 흉곽 안에 집어넣었다. 갈라졌던 가슴팍이 다시 붙으며 에립마브의 몸이 움직인다.
“그래, 난 죽었지. 되살아날 수도 없고. 지금의 나는 분충 껍데기 속에 정신만 남아있을 뿐이야. 이거? 이거는 인공생물이고. 피시스에 부탁으로 만든 거야, 요즘 기술 좋더라. 실장석 몸으로도 인공생물을 조종할 수 있다는 건 좀 웃기지 않냐?”
“어…… 떻게?”
“그게…… 보자, 어디부터 설명을 해야 하나……. 이거는 나보다 더 잘 하는 놈이 있지. 야, 키아시토!”
그러자 에립마브의 몸을 본딴 인공생물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통통 두들겼는데, 정신을 잠깐 잃었다가 되찾은 것처럼 고개를 휘휘 젓더니 러트너와 눈을 마주쳤다.
“오, 오오 이럴 수가.”
목소리는 에립마브인데 그 어투는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것은 아니겠지, 러트너 씨! 실로 당신이오?”
“……키아시토.”
“그렇소! 나 키아시토요! 이미 죽은 몸에, 정신만 남아있지만 말이오. 러트너 씨는 몸도 마음도 무사해보이는구려. 참으로 다행이오.”
“내가 진짜, 살면서 별별 일을 다 겪는다. 쿱 학파장님의 책에 내 이야기를 써넣은 것도 다 너였어?”
“고된 여정이었소. 이를테면…….”
[그 분충은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기나긴 싸움이 끝나고, 리베라나는 드래곤과 나란히 앉아 지친 몸을 쉬었다. 차가운 손 안에서는 힘을 모두 잃고 평범한 자실장이 된 니파티가 곤히 자고 있다. 손에 힘을 조금만 줘도 슬라임처럼 터져나갈 몸이다. 리베라나는 그 자실장을 보면서도 살의라곤 없었다.
“죽이면 안 돼요. 그건 너무 자비롭죠. 내가 누구 때문에 지금 이 꼴이 됐는데.”
[산송장으로 만들 생각인가?]
“그건 또 안 되죠. 산송장으로 만들었다가 마법을 쓰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그럼?]
죽이고 싶은 마음과 죽이기 싫은 마음이 공존하면서, 리베라나는 지금 이 자실장에게 아무 짓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두기도 싫다. 무언가는 해야 하는데, 뭘 해야할지 떠오르지 않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이 너무 싫었다. 리베라나는 에립마브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려 니파티에게 에립마브와 자신이 겪은 모든 고통을 그대로 안겨주고 싶었다.
“실장석끼리는 통하는 게 있다고 하셨죠. 정신이 공유된다고.”
[그렇다.]
“그렇게 할 거에요. 세상 모든 실장석과 정신을 연결해버린 다음, 다른 실장석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도록. 죽지도 못하도록. 인간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면, 수천만 마리의 실장석이 죽는 고통을 혼자 느껴보라고 해야죠.”
[너 혼자 할 수 있겠나.]
“그럼요. 이젠 늙어죽을 일도 없는걸요.”
리베라나는 자신의 창백한 손을 바라보며 쉴 필요 없는 한숨을 쉬었다. 날이 점점 더워지면서 몸이 피로해졌다. 언제는 너무 추워서 미칠 것 같더니, 열기가 느껴지자 죽을 것만 같다. 하늘은 아직 어둡지만, 동쪽 하늘에 점차 여명이 밝아온다. 구름만 살짝 비칠 정도로 옅은 빛인데도 한여름의 백열처럼 뜨거웠다.
“니파티는 죽었다고 전하세요. 똥오줌 싸지르면서 살려달라고 구걸하다가 자기 피에 숨이 막혀 죽었다고.”
[어디로 갈 생각이지?]
“비밀이에요. 알려주면 또 저랑 친했던 사람들한테 전해줄 거잖아요?”
해가 점점 떠오르며 세상이 불구덩이같이 느껴진다. 리베라나는 해가 직접 보이기 전에 눈을 질끈 감으며 공중에 떠올랐다.
“제가 살아있다는 얘기도 하지 마세요. 그냥 죽은 사람으로 남게 해줘요.”
[이해하기 어려운 주문이지만, 알겠다.]
그렇게 리베라나는 시그니 산의 공터에 몸을 누인 드래곤을 뒤로 하고, 누구도 몰랐으면 하는 에립마브의 비밀 동굴을 향해 서쪽으로 날아갔다. 머리카락이 햇볕에 그슬리기 바로 직전 아슬아슬하게 동굴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한때 에립마브의 동굴이었던 곳에 주인은 리베라나 뿐이었다. 리베라나는 에립마브가 쓰던 책상에 니파티를 올려놓고 에립마브가 자던 침대에 누워 에립마브가 쓴 책을 펼쳤다. 주위 모든 것에 그의 흔적이 가득했다. 눈물이라도 나오면 억울하지라도 않겠는데,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이겼어…….”
리베라나는 승리의 기쁨을 눈물 없는 울음으로 대신했다.
니파티가 잠든 동안 리베라나는 심리분석학파에서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 정신계열의 흑마법을 연구했다. 산송장은 잘 필요도 없고 살아있을 때의 피로도도 없을 줄 알았건만, 깨어있는 것 자체가 몸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마력을 어마어마하게 잡아먹었다. 한 때는 이대로 잠들어버리면 그대로 영영 잠들어서 정말 송장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대체 이런 몸으로 에립마브는 어떻게 대낮에 돌아다닌 거람, 리베라나는 그 생각으로 악착같이, 짐승과 실장석의 피를 빨며 버텼다.
“테? 테치테치테치! 테치테치테치테챠테…….”
“너도 좀 자라.”
가끔 니파티가 깨어날 때면 수면 마법으로 바로 재우고 계속 연구에 들어갔다. 에립마브의 글은 하필이면 죄다 후타비아 찬넬어로 쓰여있어 연구 시간이 배로 걸린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두문불출하고 정신 마법을 연구하기를 몇 달 째, 리베라나는 니파티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테? 이건 또 뭐인테츄?]
[어, 됐다.]
[테, 오마에는 또 뭐인테챠! 어디서 말하는 것인테챠!]
[휴우, 이제 정신에 접속했으니, 지배는 언제 하고 독심술은 언제 한담.]
에립마브를 통해 본 사람의 머릿속에는 붉고 불길한 기운이지만 뭔가 있다는 존재감이 있기라도 했는데, 니파티의 머릿속은 그냥 회색에 아무 것도 없다. 존재감마저 없어 마치 공허 속에 홀로 남은 느낌이었다.
[어서 오시오, 리베라나 양. 기다리고 있었소.]
[엥? 니파티, 너니?]
[아타치가 아니라 분충인테챠! 보이지도 않는 병신이 자꾸 아타치한테 깝치는테챠!]
[네가 아니라고? 그럼 누가……?]
이제 겨우 정신에 접속할 정도인 리베라나는 정신 속의 형상을 구체화하기엔 한참 일렀다. 목소리가 뭐라고 하든 믿어야만 했다. 특히 실장석의 머릿속에서 아주 정중한 말투의 인사가 들린다면 더욱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누구야! 누군데 내 이름까지 알고 있어!]
[나요. 키아시토요.]
[키아시토……? 키아시토! 정신은 살아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진짜였군요!]
[결국 해내셨구려. 여러분이 이겼소. 축하드리오.]
축하한다는 말은 공허하다. 마치 니파티의 머릿속처럼. 리베라나도 가볍게 받았다.
[이기긴요. 니파티는 잃은 게 하나도 없는데 우린 너무 많은 것을 잃었어요. 상처 뿐인 승리라고요. 이제…… 그 빚을 갚을 거예요.]
[정신 마법을 배워서 니파티의 정신을 다른 모든 실장석과 연결해서 말이오.]
[어떻게 아셨죠?]
[정신이 잠재되어있을 뿐 외부의 일을 모르는 것은 아니오. 그리고, 그 방법은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소.]
키아시토의 의식은 그렇게 말하며 리베라나에게 지금껏 독학하느라 쉽게 깨우칠 수 없었던 지식을 전수해주었다.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리베라나는 키아시토를 믿었고 지금껏 몇개월 간 했던 고생이 헛고생처럼 느껴질 만큼 키아시토의 가르침은 간단명료하고 확실했다. 키아시토의 의식과 접촉하고 난 지 사흘만에 리베라나는 정신지배, 세뇌, 독심술을 단박에 익힐 수 있었다.
[진짜 스승님이 한 명 있는 게 훨씬 낫네요. 근데, 왜 방법은 추천 안 한다면서 가르쳐주는 건 순순히 다 가르쳐주는 거예요?]
[이제 독심술을 써서 니파티의 의식을 깊숙이 들여다보시오. 니파티를 죽이고 싶어도, 괴롭히고 싶어도 차마 그럴 수 없을 것이오.]
리베라나는 키아시토를 믿었고, 그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따랐다. 니파티의 정신 속으로, 니파티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그동안 니파티가 보고 듣고 겪은 모든 일이 한순간처럼 눈앞에 스쳐지나가는 것을 목도한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리베라나는 앞으로는 평생 흘릴 수 없을 줄 알았던 눈물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에립마브……?]
[헉, 뭐, 뭐야. 여긴, 이건, 어? 잠깐만, 이거 뭐야. 고드니스? 고드니스! 너 맞아?]
[에립마브! 에립마브! 나야! 고드니스! 고드니스 리베라나라구!]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에립마브는 그 안에 있었다. 니파티의 의식 속에서 벚꽃잎이 숨막히게 흩날렸다.
“키아시토 덕분에 니파티를 죽이겠다는 생각도 접었죠. 니파티를 평생 괴롭히는 것보단 에립마브랑 평생 사는 게 훨씬 나으니까요.”
“지금도 그 실장석의 의식은 이 몸의 잠재의식 속에서 관심을 요구하며 괴성만 지르고 있다오. 러트너 씨는 이해하실 것이오. 직접 겪어보셨으니.”
그 괴성, 눈을 감고 집중하면 지금도 머릿속에서 환청으로 울리는 듯한 그 짜증나는 소리. 러트너는 잊을 수가 없는 바로 그 괴성이다.
“……그 새끼 잠깐 불러내봐.”
“죽이실 생각이오?”
“아니. 놀려주려고. 그랬는데 뒤지면 자기 손해지 뭐.”
“근데 아마……. 불러내도 별 일은 없을 것이오. 흠, 흠.”
에립마브의 껍데기는 고드니스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고드니스는 잔뜩 걱정하면서 에립마브의 가슴팍에서 다시 니파티의 몸을 꺼냈다. 러트너가 주먹에 힘줄이 튀어나오도록 힘을 꽉 주고 있는 가운데, 실장석의 입에서 니파티라는 단어가 나오자 머리가 부들부들 떨리더니, 온 방이 떠나갈 것처럼 괴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이 새끼는 10년 내내 변한 게 없냐? 야. 야!”
러트너가 니파티의 따귀를 거세게 때린다. 고드니스가 놀라서 손을 붙들었지만 이미 니파티는 번개같은 한 대를 얻어맞고 책상 위에 나자빠져서 계속 같은 괴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뭐하시는 거예요!”
“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 그,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나는 멀쩡히 살아있는데 너는 몸 뺏겨서 좆같지, 이 말 해주려고 했는데 저럴 줄은 몰라서.”
“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10년도 넘게 제 몸의 주도권을 못 찾다가 이제 한 번 내줬는데 제정신이겠어요? 버릇 잘못 들겠다.”
고드니스는 러트너의 손을 놓고는 니파티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엇나간 정신을 바로맞추고 키아시토를 원래 정신의 자리에 맞췄다. 머릿속에서 세 가지 목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여있는데 에립마브는 낄낄 웃고 있었고 키아시토는 쯧쯧 혀를 찼으며 니파티는 여전히 괴성만 계속 질러대고 있었다.
“윽, 아파라……. 손맛이 맵기도 하시구려. 뭐, 대충 이렇소.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갈 테고. 제정신을 잃어버린 게지.”
“죽여달라고 비는 꼴을 보고 싶었는데, 이것도 뭐 나름대로 형벌이겠네.”
적어도 니파티를 때릴 때 볼이 손바닥에 닿는 차진 감각은 온몸을 전율시킬 정도다. 러트너는 그걸로 만족하기로 하면서 질문을 이어나갔다.
“……다른 세계는 내가 아니라 네가 갔어야 하는 건데. 대체 왜 내가 간 거야. 아니, 왜 실장석의 몸에 갇혀서 가버린 거야?”
“그에 관해서는 공간의 수도사들과 좀 이야기를 나눠보았는데……. 내가 직접 한 것은 아니오. 이생물학파장님의 의견을 빌렸소. 오스 교단의 말로는, 우리 세계에는 차원문이 있지만 다른 세계에는 차원문이라 할 만한 것이 없어서, 물질적 형태가 있는 육신은 넘어가지 못하고 정신만이 넘어갔다고 추측하더구려. 이런 일이 전례가 없다보니 그들도 모르고, 앞으로 연구도 금지되어서 평생 모를 것 같소.”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런 세계로 다시는 가고 싶지도 않고.”
“동의하오. 실장석의 몸에 갇힌다는 것이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오. 나도 처음 알았소. 실장석의 몸에 갇히면 정신마저 실장석과 동화될줄이야. 그 세계에도 마력이 있었다면 이렇게 의식을 분리시켜 온전하게나마 보존할 수 있을 것 같소만…….”
“그 얘기는 그만하자. 지금도…… 조금 남아있는 것 같단 말야.”
“알겠소.”
에립마브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키아시토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다. 러트너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아직도 실장석의 권리가 그렇게 중요하냐?”
“지금은 아니오. 러트너 씨와 몸을 나누어보니 알겠더구려. 인간은 실장석과 공존할 수 없소. 가르치려 해도 가르칠 수 없는 것들이지. 리도미가 더더욱 기특할 뿐이오. 지금의 실장석에게 권리가 주어지면 다른 모든 지적생명체들의 권리가 침해당할 것이오. 하지만 언젠가는, 실장석도 우리와 비슷한 윤리의식과 도덕, 책임의식을 가질 것이라 믿소. 리도미가 언젠가는 세상 모든 실장석을 변화시킬 것이라 믿소.”
“제발 나는 그 전에 죽었으면 좋겠다.”
“이해하오. 그럼, 흠, 저…… 쭙쭙이 씨, 당신 차례요.”
에립마브 인공생물은 다시 고개를 흔들고는 비릿하고 능글맞은 미소로 돌아왔다. 요정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러트너는 저 미소가 차라리 좋았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개운하기만 하다. 에립마브는 러트너를 한심하게 쳐다보면서도 입은 웃고 있었다.
“너도 참 힘들겠다. 10년이나 실장석 몸으로 살고 있으면.”
“내 말이. 실장석 자연수명이 생각보다 길더라. 근데, 이 몸도 좀 삐걱거려. 죽거나 뇌가 삭을 때쯤 되면 몸을 바꿔야 할까봐.”
“몸을 바꿔? 어떻게?”
“지금 내 몸이 실장석이라는 걸 보면 감이 오지 않냐? 이제 평생을 실장석으로 사는 거지 뭐. 거지같다.”
그 말을 하면서 에립마브가 고드니스의 어깨에 팔을 착 걸치는데 고드니스는 그런 에립마브의 손을 꼬집었다. 인공생물의 손을 꼬집는 거라 아프지도 않다.
“나는 누구 때문에 평생을 이렇게 살게 됐는데?”
“그거는 내가 항상 미안하다고 하잖아…….”
“됐어, 너 오늘 잠 안 재울 거니까 있다가 봐.”
흡혈귀도 부부의 모습을 가질 수는 있구나, 신기한 기분이지만 요정은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기에 러트너도 굳이 이를 꼬집진 않았다. 바로 화제를 비튼다.
“그래서…… 이 자리? 이 공간? 이 장소. 이 장소는 어떻게 구하신 거예요? 이런 비밀스러운 장소는, 그냥 얻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쿱 학파장님께 부탁해서 길드 마스터에게 편지를 넣었죠. 저희가 면식이 좀 있잖아요. 학파장님은 제가 흡혈귀로 되살아났다는 걸 알고 계시더라고요? 드래곤이 말해줬겠죠, 분명히. 입이 싼 종족이라니까. 제가 여기 있다는 거, 기밀이에요. 어디 가서 말씀하시면 안 돼요! 길드 마스터가 흡혈귀랑 손잡고 있다는 얘기는 소문만으로도 악영향이라구요.”
“아하. 그럼 여기 지하에서 하루 종일 계시는 거예요? 차원문 연구는 못 할 테고. 요즘은 무슨 연구 하세요?”
“아, 전 밤에 산송장 사냥 다녀요!”
“……네?”
방금 흘리던 눈물이 쏙 들어간다. 러트너의 말에는 오직 감정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황당함이 들어있었다.
“흡혈귀가 여기 있다는 건 기밀이면서, 밤에 나가서 산송장 사냥을 다니신다고요? 사람들한테 안 들켜요?”
“깊은 밤에 화장 짙게 하면 사람들도 못 알아봐요. 쭙쭙이는 대낮에도 사람들 옆에서 잘만 돌아다녔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흠.”
“세상 모든 산송장이 저랑 쭙쭙이같지는 않으니까요. 대부분은 제정신도 아니죠. 제가 여태껏 구한 사람이 서른 명도 넘을 걸요? 그리고 가끔 원치 않게 산송장이 된 사람이 한 명쯤 나와요. 그런 사람들은 상담도 해주고. 아 맞아. 피시스에, 그…… 지금은 학파장님이 아니지만. 그분도 괴물사냥꾼으로 일하고 계세요. 가끔 같이 만나요.”
황당했지만 10년째 이러고 있다면 그만한 성취감은 있을 것이다. 피시스에라는 이름도 듣자마자 반갑다. 역시 죽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바로 소식부터 물었다.
“아, 그래요? 어디서 지내는지도 아세요?”
“트루피아요. 지금도 계실 지는 모르겠네요. 괴물사냥꾼은 멀리 나가는 일이 많거든요. 아이라즈랑 러트니카하고 같이 지낸다던데요?”
“러트…… 예? 잠깐만요, 잠깐만요. 러트니카는 또 누구에요. 포니카에요 혹시?”
“아 맞다. 원래 포니카였지 참. 이름을 언제 바꿨더라? 기억이 안 나네요.”
“아니 진짜, 10년 사이에 뭐가 이렇게 많이 바뀌었어요!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네!”
러트너가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머리를 헝클어대자 고드니스는 히히 웃어대고 옆에서 에립마브가 거든다.
“걔 너 기리겠다고 이름도 러트니카로 바꿨어. 개같은 시절 이름은 쓰기 싫다더라고. 이것도 거르고 걸러서 지은 거다. 원래는 너랑, 나랑, 고드니스랑, 아이라즈랑, 걔 통역사 있지. 키드였나? 걔랑 이름 다 섞어가지고, 뭐였지? 몰라, 복잡해서 기억도 안 나. 결국 아이라즈가 뭐라 해서 그냥 러트니카로 바꿨을걸.”
“……나도 지금 머릿속이 복잡하다…….”
“새 국왕 얘기까지 들으면 아주 자빠질 텐데.”
“그래, 쿠타오 3세 폐하는 시해당하셨지. 새 국왕 폐하는 누구신데? 쿠타오 4세?”
“야, 우린 산송장이야. 즉위식에 끼워주지도 않는다고. 피시스에랑 있을 때가 좋았지. 네가 직접 트루피아로 가서 보는 게 빠를걸. 그래, 가는 김에 피시스에한테 인사도 좀 하고. 걔 많이 힘들어하더라.”
그렇게 말하는 에립마브와 고드니스는 서로를 쳐다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저것들이 분명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데, 러트너는 뭔가 찝찝해도 이 둘이 숨긴다고 해봐야 러트너에게 가벼운 골탕 정도나 먹일 정도밖엔 생각나지 않았다. 더구나 국왕을 가지고 장난을 칠 이들도 아니었으니.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고드니스의 통신기가 갑자기 울린다. 이 통신기로 연락을 할 사람은 쿱 밖에 없었고, 몇 번 대답하던 고드니스는 금방 통신기를 내려놓았다.
“지금 사람들이 러트너 님 보려고 이생물학파에 진을 치고 있다고 해서, 나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곧 있으면 학파장실을 뚫고 들어올 기세라나봐요.”
“하, 10년만에 친구좀 보겠다는데 좀 가만두지.”
“오늘만 보고 끝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틈틈이 놀러오세요. 편지도 좋구요. 저희가 찾아가고는 싶은데, 저희가 찾아가는 동네에는 안 좋은 소문만 돌 테니…….”
“그럴게요. 요정 님 표정 안 좋다.”
그 말에 요정은 반갑다는 듯이 먼저 일어나 성큼성큼 승강기 쪽으로 향한다. 그래도 요정은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에 러트너도 간단히 목례만 하고 승강기에 올랐다. 에립마브와 고드니스도 자리에서 손만 살랑살랑 흔들 뿐, 둘을 따라가지는 않았다.
“요정 님, 죄송해요. 많이 불편하셨죠.”
“그대는 이 몸이 왜 불편한지 아느냐.”
“그야 산송장이랑 계속 같은 방에 앉아있어야 하니까…….”
“반은 알고 반은 모르는구나.”
승강기는 5층까지 오른 상태다. 요정이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이 몸은 지금껏 산송장은 악한 것이며 산송장이 되고자 하는 이들도 전부 악한 줄로만 알았느니라.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아니하다. 이 몸은 산송장이 되거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싶을 정도이니라. 그대가 산송장이 되었다면 이 몸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그대의 숨통을 끊었으리야.”
“알죠.”
이미 한 번 그러셨잖아요, 까지 대꾸하려던 러트너는 하려던 말을 있는 힘껏 목 뒤로 삼켰다.
“헌데……. 리베라나, 아니, 고드니스와 에립마브를 보고 나니 이 몸의 신념이 과연 옳은 것인가 회의감이 드는구나. 원치 아니하여 산송장이 되는 이도 있을 것이거늘. 산송장이 되어서라도 살고 싶은 이들이 있을 것이거늘. 키아시토도 그러하도다. 결과는 좋지 아니하였지만, 모두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어 온 것이 아니겠느냐. 이 몸은……. 다시는 산송장을 이전과 같은 눈으로 볼 수 없을 것 같아, 그것이 두렵고 불편한 것이니라.”
“키아시토는 실장석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기를 바랐잖아요. 산송장과 인간이 공존할 날도 오지 않을까요?”
“그대는 그러한 세상을 바라느냐? 망자가 생명을 바라는 세상이 아닌, 생명이 망자를 바라는 세상을?”
“저는 아니죠.”
“그대의 말은 참되구나. 죽음이라는 것은 때로는 축복이니라. 그러한 세상을 아니보아도 될 것이니.”
승강기는 다시 15층, 학파장실로 올라왔고 그 앞에서 기다리던 쿱이 서둘러 요정과 러트너를 의자에 앉히고 책장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허겁지겁 학파장실의 문을 열어 사람들을 들인다. 러트너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그를 취재하겠다고 모인 수많은 나뮈 신도들이 펜과 종이를 들이밀며 러트너에게 한 마디씩을 부탁했다. 이 정도면 나도 나뮈 교단에서 나오고 싶겠다, 러트너는 쿱의 심정이 은근히 이해가 갔다.
“어휴, 진 다 뺐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러트너에게 묻는 얘기는 대부분 노키모노르켄의 서가 얼마나 진실되냐는 말 뿐이었다. 러트너는 그런 말에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참이라고 인증해준 이야기를 굳이 자신이 증명해줄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러트너는 그 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고 싶었다. 몇 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해주고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역시 고향입니까?”
“그 전에 트루피아를 좀 들리려고요. 피시스에 학파장님도 볼 겸 해서. 포니카는 이름을 러트니카로 바꿨다면서요?”
“러트니카, 하하. 귀엽지 않습니까? 러트너 씨도 이제는 만인의 영웅입니다. 두르마르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세상의 영웅. 거의 드래곤 슬레이어 아닐과 동급입니다.”
감격스러운 일이지만, 러트너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부담감이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 제가 영웅같지가 않아요. 아니, 이 책을 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아녜요. 제가 무슨 영웅이에요. 중요한 할 일은 다른 사람들이 다 했는데. 전 영웅들 곁에서 그냥 같이 싸웠을 뿐이죠. 그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대접도 못 받고, 왜 나만…….”
“러트너 씨가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아…… 그렇죠. 사람들은 진짜 중요한 게 뭔지 모르죠.”
“맞습니다. 사람들은 누가 영웅인지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니파티에게 맞서 싸웠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이 세계를 구한 사람이 있다는 게, 그 세계를 구한 사람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자랑스러운 겁니다. 그뿐입니다. 부담스러워 거절하면 겸손하다고 칭송받을 겁니다. 영웅이라는 칭호를 즐기면 대장부라고 칭송받을 겁니다. 칭송할 사람이 있고, 칭송할 수 있는 세계가 있으면 그걸로 된 겁니다. 잃어버린 10년을 보상받았다고 생각하십시오.”
“위로가 되네요. 고마워요.”
“제가 고마워야 할 일입니다. 받아가십시오.”
그 말을 하며 쿱은 러트너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종이 두루마리였다. 펼쳐봐도 마법을 모르는 러트너에게는 그저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두루마리일 뿐이다.
“무슨 주문이에요?”
“순간이동 주문서입니다. 트루피아행.”
“하긴 10년이나 됐으면 순간이동 재개할 때도 됐죠.”
허탈한 웃음만 나온다. 러트너는 주문서를 곱게 받아 챙겼다.
“지금 바로 옥상으로 가시겠습니까?”
“네. 가죠. 바깥으로 나가면 또 사람들이 귀찮게 할 것 같아요. 이젠…… 좀 쉬고 싶네요. 10년이나 쉬었는데도.”
학파장실에서 밑을 내려다봐도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벌써부터 피곤하다. 쿱은 러트너와 요정을 데리고 학파장실을 나가 계단을 올랐다. 승강기로는 올라갈 수 없는 이생물학파의 옥상, 거센 바람이 불어오니 두루마리를 놓칠까 손에 힘을 준다. 10년만이지만 높은 곳은 여전히 무섭고, 주문서의 사용법은 알고 있다. 변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변한 것에 비하면 너무도 소소했다. 러트너는 펄럭이는 주문서에 손가락을 힘겹게 휘갈겼고, 옥상 위에 순간이동진이 그려졌다.
“언제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몸 간수 잘하십시오.”
“저도 찾아뵐게요. 노키모노르켄 학파장님.”
“요정 님도, 아직도 이름이 없으십니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저 이야기는 절대 노키모노르켄의 서에 안 쓰이게 해야지, 러트너와 요정 모두 같은 마음을 품으며 번쩍이는 순간이동진의 빛에 싸여 사라졌다. 학파장만이 홀로 남은 옥상에서 둘러보는 세상은 사치같은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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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이게 마지막 편이 됐어야 하는데, 쓰다보니 분량 조절에 실패해서 1편 더 쓰게 됐습니다. 에필로그가 2편짜리라고 생각해주세요. 다음 편이 진짜 마지막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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