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카오스 럭키짱 천일모험기를 능가하는 진정한 판타지 실장석 참피 소설 실장석과 환상 103화 : 끝
속이 울렁이고 세상이 뒤집힐 것 같다. 10년이나 순간이동을 하지 않았으니 이런 울렁증이 가뜩이나 심하게 느껴진다. 지난 번 트루피아를 방문했을 때 순간이동 관리소에 별로 좋은 기억은 없었으나, 지금의 순간이동 관리소는 매우 깔끔했다. 가이더링의 건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내부가 새하얗다. 물론 변소 구덩이 안으로 자신의 새끼를 낳아대는 실장석도 없었다. 요정과 러트너가 요란하게 속을 비워내고 밖으로 나오자, 가뜩이나 깔끔한 외관에 유리문까지 달린 건물은 트루피아의 벽돌로 이루어진 성과 대비를 이룬다. 순간이동 관리소를 지키는 관리원도 멀쩡히, 중무장을 하고 있다.
“두르마르 수도, 트루피아에 잘 오셨습니…… 어?”
관리원은 러트너보다는 요정의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란 모습이다. 하루이틀 있는 일도 아니니 러트너와 요정 모두 간단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대들의 국왕을 보고자 왔거늘.”
“아, 아, 저, 국왕 폐하께서는, 지금 수도에 안 계십니다. 그리고, 저, 알현을 하시려면 약속을 잡아두셔야…….”
“그리하더냐? 아쉽구나. 오늘은 못 보겠구나. 다른 일도 있으니 일없느니라.”
주변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요정을 보고는 흠칫 놀라기 일쑤다. 요정은 가끔 손이나 몇 번 흔들어주며 트루피아의 웅장한 관문을 향해 걸었다. 러트너는 그 뒤에서 그냥 저벅저벅 걸어갈 뿐이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그대와 이 몸이 함께 트루피아로 온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거늘, 어찌 그대는 아니보고 이 몸만 보는지 참.”
“10년이나 지났다는데 절 알아보는 게 이상하잖아요.”
“이 세상에 요정과 함께하는 이가 그대 말고 더 있겠느냐?”
“더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보죠……. 저는 뭐, 주변에 흔한 인간이잖아요.”
요정은 주변 사람들을 아쉬운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요정의 존재 자체가 이들에겐 신분증과도 같았기에 트루피아의 문지기도 이들을 아무 의심 없이 들여보내주었다. 니파티와 드래곤이 들렀다고 하는 트루피아는 재건을 이미 마쳤는지 왕궁까지도 러트너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붕 처마 밑에 달아놓고 말리던 실장석들의 모습이 없다. 도시의 냄새도 기억하던 것보다 악취가 덜했다. 국왕을 보러 왔으나 지금 수도에 없다고 하니 이들의 목적지는 자연스럽게 오우거 명치 주점이 되었다. 가는 길에 광장을 들리게 되니 둘은 첫 요정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대여, 기억하느냐? 이곳에서 우리 둘이 실장석을 쏘아맞추는 경기를 하였지. 맞추라는 실장석은 아니맞추고 서로의 돌과 화살이 부딪었지 아니하느냐.”
“제가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됐나 싶을 정도로 진기명기였죠. 요정 님이 단검 던지기 하려다가 손잡이로 맞춘 적도 있었고요.”
“그리했지. 그때 함께 하던 이들이 곁에 없다니 슬프구나.”
도시의 모양새를 보아하니 축제를 준비할 만한 풍경은 아니었다. 1회 요정절 이후로 나라가 뒤집어졌으니 축제를 할 여유도 없겠지, 그렇게 이해하면서 길을 계속 걷는다. 이미 도시에는 요정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쫙 퍼져있었고, 요정을 보겠다고 창문을 통해 밖을 보거나 주위에 몰려드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시장통을 지나가면 자기 물건을 가져다보이는 상인들도 떼거지다. 요정은 그런 이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길이 막히는구나.”
그 말 한마디에 인파 사이로 길이 쫙 뚫렸다.
10년만에 찾아오는 도시지만 기억속에 그 10년은 없었기에 오우거 명치 주점으로 향하는 길도 여전하다. 트루피아에서 걸으란 길은 안 걷고 지붕 위로 뛰어다니던 요정에겐 그 길이 가물가물하여 러트너의 안내를 따른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러트너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 위치에는 오우거 명치 주점이 그대로 있었다. 간판 모양이 많이 바뀌었고 외장도 한 번 뜯어고친 티가 난다.
“포니카…… 아니, 러트니카가 나를 보면 울고불고 난리가 나겠지. 기절하진 않을까요?”
“그 아이는 강한 아이노라. 많이 감격스럽기는 하겠구나.”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품고 러트너는 가게 문을 열었다.
“……흠.”
가게 안에 가득찬 것은 러트너의 예상과는 정 반대였다. 사람이 북적북적거리고 험악한 분위기가 가득하던, 험악한 사람들이 사는 맛이 나던 주점은 텅텅 비어있었다. 탁자를 지키는 주인과 그 탁자 앞에 앉아 등만 보이는 사람 한 명만이 있을 뿐이다. 그 사람의 옆에는 빈 술병이 다섯 병이나 세워져있고 추가로 한 병을 더 따고 있었다. 저 주인은 내가 아는 그 주인인가, 러트너는 주인 얼굴이 가물가물했다.
“어서옵쇼.”
“어…… 안녕하세요.”
“안녕? 하! 주점에서 똑같이 인사하는 사람은 처음 보겠, ……어? 사람이……?”
주인은 잔을 닦다가 그 손으로 자기 눈을 비비고는 헛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크게 깜박였다.
“흐이익! 요, 요정!”
“그래……. 이 몸을 보고 놀라는 이가 한둘은 아니로다.”
“……뭐? 요정?”
그 말에 탁자에 홀로 앉아 술병을 비우던 사람도 뒤를 홱 돌아보다가 등골에서 우드득 소리가 났다. 자세를 다 돌리지도 못하고 허리에 손을 얹으며 고통에 신음한다.
“아이고, 아이고 허리야…….”
“저런, 그대 일 없느냐?”
“일없…… 이 목소리…… 이 말투……. 진짜 요정이……?”
신음하던 남자는 힘겹게 자세를 곧추세우고 러트너와 요정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서로간의 눈이 마주치자, 둘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이 번쩍 뜨인다. 그리고 입을 가장 먼저 연 것은 술에 떡이 된 남자였다.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듯 머리털과 수염이 덥수룩하고 세월의 풍파를 맞으며 주름이 많이 생긴 얼굴이었지만, 그건 분명 피시스에였다.
“……내가 이제 죽을 때가 됐나, 저승사자가 다 보이고.”
“……학파장님?”
“학파장은 누가 학파장이야……. 사람 잘못 찾아왔어. 아무래도, 아무래도 오늘은 날 찾아온 게 아닌 것 같은데…….”
“예, 예. 지금은 학파장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한때 학파장이셨잖아요! 저에요! 러트너!”
“……아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당연히 말이 되죠! 저라니까요!”
술냄새를 술술 풍기는 피시스에는 아픈 허리를 이끌고 비틀비틀 러트너 쪽을 향해 다가왔다. 10년이라는 세월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얼굴은 주름과 흉터 투성이에 흰머리가 잔뜩 나있고 손마저 거칠다. 주인이 그 둘을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피마왕이랑 좀 아세요?”
“피마왕? 당신들은 책도 안 보고 살아요? 이 사람이 노키모노르켄의 서에 나온 그 괴생물학파장 피시스에라고요! 이 세상을 구한 영웅이라고요!”
“아니야, 아니야. 영웅은 무슨, 난 대역죄인이에요……. 죄인이라고요…….”
피시스에는 러트너의 손을 잡고는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느낌은 이어서 오열이 되고 오열은 통곡이 되니, 제대로 된 말을 할 상황이 아닌지라 그를 진정시켜야 했다. 주인은 러트너를 피시스에가 쓰고 있는 아이라즈의 방으로 안내해 잠시 이들이 홀로 있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런 방은 분명 아이라즈와 한때 포니카였던 러트니카의 방일 텐데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침대가 둘에 절대 인간이 쓸 것 같지 않은 거대한 침대가 놓인 방은 러트너가 기억하던 시절이랑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딱 하나, 러트너의 얼굴 그림이 놓인 탁자와, 그 탁자 위에 판자에 손발이 못박힌 채 온몸에 ‘용서 못해’라고 피로 쓰인 문구와 상처가 그득한 실장석과 그 실장석을 둘러싸고 있는, 똑같이 상처가 그득한 실장석만 빼고. 러트너가 보기에도 징그러울 정도였다. 그 실장석 뒤의 벽에는 칠판이 하나 걸려있었다. ‘실장석, 무기한, 무제한, 포획시 두당 1실, 의뢰자 더 가이더링 길드 불사의 대흑마법사 에립마브’라는 글자에 가로줄이 죽죽 그인. 러트너는 이 글이 쓰일 당시에 이곳에 있었다. 그때가 생각나 눈시울이 붉어졌다.
[……죽여주는데스…… 이젠 싫은데스…….]
피시스에를 침대에 앉혀놓고도 그는 꽤 오랜 시간을 흐느꼈다. 너무 울어서 딸꾹질이 나올 정도까지 울고 나자 몸이 너무 피로한 나머지 울음을 거부했고, 피시스에는 그제야 울음을 멈출 수 있었다.
“살아있군요……. 살아있어요……. 딸꾹, 반갑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이런 모습을 보여서…….”
“이야기는 다 들었어요. 가이더링을 들렀다 왔거든요.”
“그래요……. 그럼 내가 학파장 아니라는 것도 다 알겠네. 이젠 학파장이라 부르지 마세요. 그냥 이름만 부르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것처럼 부르세요.”
“뭐라고 부르는데요?”
“피마왕.”
너무 싸구려 호칭인지라 입에 붙지가 않아서 러트너는 그냥 피시스에가 원하는 대로 이름만 부르기로 했다.
“그럼, 피시스에…… 님.”
“님도 아까워. 그냥 씨라고 불러요.”
“피시스에 씨. 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래도 경험은 좀 있으니까 현상금 사냥꾼들 사이에서 이름 좀 날렸을 것 같은데.”
“날리긴 뭘 날려……. 파리만 날렸지……. 저는 원래 여기 죽으려고 왔었어요.”
몇 개월 가까이 괴생물학파 건물과 가이더링을 수복하고, 흡혈귀가 되어 니파티의 몸을 빌린 에립마브와 함께 돌아온 리베라나가 살 만한 장소도 마련해주고, 괴생물학파의 모든 것을 후계자 위모토볼에게 맡긴 피시스에는 그 즉시 트루피아로 떠나기로 했다. 대부분 도시의 순간이동진이 아직도 지워져있고, 다시 세울 인력도 모자랄 판이라 마차를 타야만 했다. 그리고 그에게 드래곤이 손을 내민다.
[나도 트루피아에 갚을 빚이 있으니, 동행하도록 하지.]
“……날아서 가는 건 안 됩니다.”
[어째서지? 그쪽이 훨씬 더 빠르고 좋은 것 아닌가?]
“지난 번 트루피아에 드래곤이 날아왔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서 묻는 거에요? 거기 시민들이 또 드래곤이 날아오는 꼴을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첫인상부터 안심시키면서 들어가자는 이야기군. 알겠다.]
날개가 달려있음에도 드래곤은 피시스에와 함께 마차에 오르기로 했다. 피시스에는 마차를 타고 가는 것도 너무 편안한 사치로 여겨졌지만, 트루피아에서 정당한 심판을 받기도 전에 길에서 객사하는 것이 더욱 불명예스러운 일이라 생각되어 어쩔 수 없이 마차를 탔다. 아무도 떠나는 것을 몰랐으면 하는 마음에 밤도 새가며 새벽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차를 잡는다. 트루피아로 향하는 마차는 대부분 트루피아로 가는 것이 아닌, 트루피아에서 가이더링으로 난민을 싣고 오는 마차였다. 그리고 또 난민을 실으러 트루피아로 떠나느라 가이더링으로 오는 마차는 자리가 없어도 트루피아로 떠나는 마차는 텅텅 비어있다. 피시스에가 올라타려하자 마부가 의아하게 묻는다.
“저, 손님. 트루피아로 가시려는 겁니까?”
“예.”
“지금 트루피아는 완전 난장판이라……. 가셔야만 하는 일이 있는 겁니까?”
“예.”
피시스에는 무슨 말이 들어오든 단답으로 가볍게만 답하고 마부에게 주머니에 남은 은화 몇 개를 전부 넘겨주었다. 그것이 피시스에의 마지막 자본이었다. 학파장의 증표도, 마법 가락지도, 동전도 한 푼 없이 몸만 남은 피시스에는 자신의 마지막 의무를 다하기 위해 트루피아로 떠난다. 허기를 달랠 정도의 빵조각과 입술을 적실 정도의 물만으로 버텨가며 다시 찾은 트루피아의 성벽은 물론 왕궁까지 모조리 무너지거나 녹아있고, 거리가 온통 좀비와 실장석으로 바글거리며 트루피아에 남아있던 잔존병들이 이들을 어찌저찌 막아내기만 할 뿐 도시를 수복하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그 모든 책임이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는 생각에 피시스에는 저항도 못 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송구하옵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신이 미천하여…… 나라를 이 지경으로…….”
트루피아로 가는 길도 시체가 잔뜩 널려있고, 모두 목이 잘려있다. 산송장으로 일어나지 않기 위한 마지막 자비였다. 그 사이에는 산송장을 칠 수 있는 은제 무기도 있었고, 피시스에는 그 중에서 은도끼를 하나 집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미친 듯이 쳐나가며 길을 뚫었다. 드래곤도 그 옆에서 손으로 불을 뿜어가며 실장석과 산송장을 모조리 태웠다. 좀비들은 주인이 이미 그 힘을 잃었기에 조종하는 이가 없어 그냥 걸어다니는 시체에 불과했고, 실장석은 실장석에 불과해 길을 뚫는 데 저항같은 건 없었다.
시체가 불타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니 무너진 왕궁의 잔해 쪽에서 깃발이 마구 흔들린다. 피시스에와 드래곤은 왕궁 쪽으로 길을 터가면서 중간중간 남아있는 민간인이 없나 살폈지만, 오직 좀비와 실장석 뿐이었다. 주인을 잃은 좀비들은 그저 배회하는 시체일 뿐이었고, 실장석들이 그런 지능 없는 좀비들을 노예로 삼아보겠다고 똥을 던지고, 똥을 맞았는데도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좀비한테 화를 내기도 했다. 그 화가 실장석들이 느낄 수 있는 마지막 감정이었다. 뜨거워 죽겠다는 감정을 제외하면.
“문을 열어라!”
내성의 문이 열리고 트루피아의 위병이 나와 남은 좀비들을 치웠지만, 대부분 드래곤의 불꽃보다는 못했다. 이윽고 뼈대 뿐인 트루피아의 내성에 도착한 피시스에와 드래곤은 자신을 맞아주는 이에게 고개를 숙인다. 아주 잘 아는 얼굴이었다.
“아니, 이렇게나 든든한 지원군이라니! 피시스에 학파장님 아니십니까! 그리고 옆은…….”
“안녕하셨습니까, 이삭 백작님. 그리고 전 이제 학파장이 아닙니다. 그냥 피시스에라 부르십시오.”
이삭 백작은 니파티 사태가 어느 정도 종결된 후 가장 먼저 트루피아로 병사들을 이끌고 진군하여 도시를 정리하고 있었다. 주인 없는 좀비들을 상대로 군세는 어렵잖게 우세를 접했으나, 도시를 정리하는 것과 도시의 인구를 먹여살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곡창에 보관되어 있던 양식들은 이미 난민들에게 먹이고, 벌레가 먹고, 실장석들이 털어가고 하는데 농업까지 마비된 상황이라 어느 순간 도시를 정리하기보다는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급급해진 형편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실장석을 먹으며 버티던 이들은, 분명 이들 중에서 가장 잘 먹고 있을 이삭 백작 마저도 많이 핼쑥해져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수천 명분의 식량을 나를 수 있는 드래곤은 피시스에의 부탁으로 서둘러 식량을 구하기 위해 날아갔다.
“정말 절묘한 때에 찾아오셨습니다. 트루피아를 포기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던 차인데. 안 그래도 왕세자께서 귀국하신다는 서신도 받은 차에 호재가 겹치는 것 같습니다. 학파장 자리는 그만두신 겁니까?”
“쫓겨난 겁니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대역죄인으로서. 그리고…… 여기에는 정식으로 재판을 받으러 왔습니다. 정확히는, 정식으로 처형을 받으러 왔습니다.”
“처형이라니! 니파티 사태를 종식시키고자 열심히 싸우셨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애당초 제가 관리를 잘했더라면 사태를 종식시킬 일도 없었을 것이고, 선왕께서 시해당하시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트루피아가 이 지경이 될 일도 없었을 것이고, 두르마르도 언제나처럼 건재했을 겁니다. 제 불찰로 선왕께서 불미스럽게 시해당하셨습니다. 모두 제 탓이고, 제가 대역죄인입니다…….”
“……이것은 국왕이 아닌 저로서, 특히나 저는 피시스에 씨에게 개인적인 감정도 있으니 직접 판단할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우선 왕세자께서 귀국하실 때까지, 우리가 최선을 다해 국토를 수복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렇게 왕세자가 두르마르로 귀국할 때까지 피시스에와 드래곤은 온 힘을 다해 트루피아의 좀비를 처리하고, 트루피아를 정리한 다음에는 니파티의 손에 의해 박살난 도시를 하나하나 수복해나갔다. 처음엔 드래곤이 산송장과 실장석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이 먼저였다. 도시 속에 들끓는 암덩어리를 모두 제거하고, 차근차근 무너진 도시를 다시 세울 예정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생각보다 촉박했고, 아직 트루피아의 관문도 다 세우지 못한 마당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찾아왔다.
“왕세자께서 지금 트루피아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피시스에와 어느새 호국경이라는 칭호를 달게 된 이삭 백작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태연하게 대답했다.
“드디어 때가 됐군요.”
[피시스에, 분명히 죽는 것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세상이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겠죠.”
피시스에와 이삭 백작, 그리고 아닐의 모습을 한 드래곤은 누구보다 빠르게 왕궁을 나서서 트루피아의 망가진 대로를 걸어오는 왕세자와 그의 신하들을 맞이했다. 왕세자의 얼굴에는 척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고뇌가 서려있었다.
“왕세자께 이삭 백작과 전 괴생물학파장 피시스에, 드래곤이 인사드리옵니다.”
“대체…… 대체 나라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됐단 말인가. 아바마마께서는 어쩌다가…….”
“모두…… 소인의 대역죄이옵니다. 저하.”
우선 왕세자를 왕궁으로 인도한 후, 피시스에는 사건의 전말을 모조리, 하나의 가감도 없이 왕세자에게 고했다. 드래곤과 이삭 백작의 인증까지 뒷받침되어 이들의 말은 하나도 거짓이랄 것이 없었고, 거짓을 고할 마음도 없다. 그 당시에는 노키모노르켄의 서가 아직 집필 중이던 때였기에 이들의 말이 많이 길어졌다.
“……하아……. 그러니까, 리치 말을 한 번 들어보자고 했다가 지금 이 사달이 났다는 말 아닙니까.”
“맞습니다.”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산송장 꼬이는 괴물 가지고 산송장이 뭘 하자고 했으면 들을 줄을 알아야지…….”
“송구하옵니다. 이 죄는 오직 죽음만으로만 사죄할 수 있을 것으로 아뢰옵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피시스에 당신만의 목숨으로 사죄할 것이 아닙니다. 수십만 명이 죽었습니다, 최소 수십만. 국토의 절반이 황폐화됐고 인구가 갑자기 반이나 줄었단 말입니다. 아바마마까지 포함해서! 이걸 고작 사람 한 명의 목숨만으로 사죄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이 사건의 책임자, 주동자들을 당장 다 잡아들여서, 저잣거리에 효수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피시스에는 말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시체에 침을 뱉고 갈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뿐이다. 이삭 백작이 그 옆에서 잔뜩 긴장하여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힘겹게 움직이고 있었다.
“실로, 세자 저하의 말이 옳습니다만, 이미 그 책임자와 주동자들이, 대부분 사망 또는 실종된 관계로…….”
“그래, 지금 내 앞에 있는 피시스에와 드래곤만이 거의 유일한 책임자와 주동자겠지. 나머지는 다 죽었으니까. 아바마마께서도 그 책임자이자 주동자였는데 그 대가로 시해당하셨으니까! 듣자하니 가이더링에서는 이 계획을 애초부터 반대했다고 하던데, 아바마마께서 진행하자고 했던 것 아닙니까!”
“어, 어느 정도는…….”
“아바마마는 항상 그게 문제였어……. 사람이 너무 느슨해. 왕궁에 흡혈귀를 초대하질 않나, 드워프가 왕궁에 쳐들어와서 무기를 빼들고 난동을 부리는데도 그냥 감옥에 가두는 정도로 끝내고. 결국은 이렇게 안 좋게 끝날 줄 알았지…….”
왕세자는 한때 쿠타오 3세가 앉던 왕좌에, 지금은 잔해 속에 부서진 나뭇조각과 그 위에 얹힌 천조각에 불과한 더미 위에 앉아 혀를 찼다.
“하…… 그래서, 이 사태는 어떻게 끝났습니까.”
[지금은 죽고 없는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피시스에는 물론이고, 나뮈의 열쇠와 흡혈귀, 러트너라는 사냥꾼까지 합세하여 니파티를 물리쳤다. 특히 마지막에는 러트너의 도움이 컸다. 그가 니파티를 적절히 처리하는 법을 알리지 않았다면 지금도 온 세상에 카오스 실장석이 가득했을 것이다.]
“적어도 그거 하나는 봐줄 만하군요……. 자기들이 엎지른 물 자기들이 어떻게든 치우기나 했으니……. 하…….”
자리에 앉아서 혀를 차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정신사납게 걷다가 또 앉으려다가 일어나고 제자리에서 빙빙 돌던 왕세자는 끝내 걸음을 멈추고 한때 창이 있었으나 지금은 지붕마저도 없는 벽을 통해 아직도 폐허가 된 트루피아를 바라보았다.
“종합하면, 드래곤은 니파티를 도와 국왕 폐하를 시해한 역도이고, 피시스에는 그 니파티를 세상에 풀어놓은, 그리고 또 직접 해치운 장본인이다 이 말이죠. 아바마마의 명으로.”
“……그렇사옵니다.”
“진짜 머리아프네……. 이런 건 삼대를 멸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피시스에는 고개만 떨어트린 채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친족들까지 이 일에 휘말리게 만든 것도 서러운데 자신 때문에 모두 죽게 생겼으니 그 죄책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왕세자는 말을 꽤 오래 멈추고 있었는데, 할 말이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이삭 백작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하, 분명히 법에 따르면 그리하오나…… 우리가 드래곤을 어찌 죽이겠사옵니까. 또한 국가 치안도 불안정한 지금, 괴물을 통제할 이가 분명히 필요할 것인데 그런 상황에 괴생물학파장을 바로 처형하는 것은 두르마르의 재건을 훨씬 늦추는 일인줄로 감히 아뢰옵니다.”
“그걸 누가 몰라서 가만히 있는 줄 압니까? 지금 나라의 힘이 별 똥덩어리같은 괴물들 때문에 반토막이 났는데, 타국의 시선과 견제가 두렵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이들을 살려두면, 국왕을 시해한 이들을 왕세자라는 놈이 처벌도 안 한다고 정통성에 트집을 잡을 것이 뻔한데!”
“송구하옵니다.”
“바깥을 보십시오, 아니, 주변을 보란 말입니다. 도시 꼬라지가, 왕궁 꼴이 이 모양인데 느긋하게 누구 처형하고 있을 시간이 있습니까? 더구나, 이 도시에서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식량까지 조달할 능력이 있는 것도 드래곤 뿐인 마당에. 하아……. 이 나라가 언제부터 이렇게 약해졌습니까. 드래곤의 암흑기에 수백 마리 드래곤을 우리 손으로 직접 때려잡을 땐 언제고, 이젠 드래곤 없으면 제 손으로 일어나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그 말에 평소에는 무표정을 유지하던 드래곤이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왕세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왕세자도 드래곤을 쳐다보니 드래곤은 시선을 치웠다.
“당신들, 집행은 잠시 유예하겠습니다. 이 나라가 원상태로 돌아가서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두르마르 법적으로 집행 유예니까, 그때까지 다른 범죄 행위가 적발되면 즉결처분할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아…… 물러나세요.”
“그럼…… 아직도 집행 유예중인 거예요?”
“법적으로는…… 그래요. 처음엔 트루피아가 완전히 재건되고, 국왕 폐하의 대관식도 끝맺었을 때 한 번 찾아갔죠. 이제 죽여달라고. 그랬더니 아직 다른 도시가 제 기능을 못 한다고 계속 유예하더군요. 그래서 다른 도시가 제 기능을 찾고 나서 또 찾아갔죠. 이번엔 미라익스랑 교류가 끊겨서 강철 공급이 모자라니 안 된다 그러고, 그 다음에는 디신시데랑 전쟁이 발발해서 안 된다 그러고…….”
“중간에 전쟁까지 있었다고요?”
“예, 뭐……. 공식적인 선전포고는 있었는데, 드래곤이 개입하자마자 저쪽의 일방적인 항복으로 끝났죠.”
피시스에는 옷소매로 눈물진 얼굴을 닦으면서 코를 계속 훌쩍였다. 말 한마디마다 한숨이 섞여있으니 그 무게감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그리하여서 아직도 집행일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냐?”
“항상 그렇죠.”
“헌데…… 그대가 하는 말로 들어보아하니 국왕이 그대를 죽일 마음이 없는 듯하거늘. 벌써 10년이나 지나지 아니하였느냐.”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겠죠. 망극하게도. 대역죄인을 대놓고 살려주기는 그러니까, 언제든 사형을 시킬 수 있는 명분은 만들어놓고, 그런 거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국왕이 그대의 죄를 사하였으리라는 생각은 아니하느냐?”
“사하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피시스에는 더 나올 눈물이 없어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흘릴 수 있다면 언제라도 눈에서 물을 펑펑 쏟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도 자려고 누우면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서. 카부스가 나한테 손가락질하는 것만 같아서, 내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던 사람들이 실장석 똥에 파묻혀 죽어가는 모습이 눈에 선해서……. 니파티 이 새끼는 뒤지지도 않고, 에립마브를 방패 삼아서 좋다고 연명하고 있고……. 니파티보다 에립마브가 소중하니까 내버려두고 있는 거지만, 성질같아서는 그냥…… 그냥……. 후, 오늘같은 날은 특히 더 그래요. 나 혼자만 있는 날엔…….”
“아 맞아. 왜 혼자 계세요? 아이라즈랑 포니, 아니, 러트니카랑 같이 지낸다면서요. 그 둘은 어디갔어요?”
“걔네 둘이요? 와이드스트림에 있겠죠. 러트너 씨 추모하러.”
러트너는 그 말을 듣고는 눈을 바보같이 꿈벅였다.
“지금이 요정절 시기죠……. 1번밖에 안 하고 끝난 요정절. 지금은 희생제로 바뀌어서 매년 이맘때면 거기로 가요. 러트너 씨 덕분에 자기가 이렇게 산다면서. 이름까지 러트니카로 바꿨는데 오죽하겠어요? 러트너 씨는 이제 영웅 다 됐죠. 와이드스트림이 이젠 추모객으로 북적거려요. 추모가 아니라 순례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영웅은 무슨, 여기까지 오는 내내 저 알아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는걸요. 요정 님만 알아보지. 다들 제가 영웅이다, 영웅이다 하는데 막상 제가 누군지, 뭘 했는지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걸요.”
“추모까지 하는 사람이 설마 돌아다니고 있을 줄 누가 생각이나 하겠어요. 그래, 국왕 폐하도 거기 계시겠네요.”
“국왕 폐하도요? 우리 동네가 유명세는 엄청 타겠네…….”
“엄청 탔죠. 유자테아에 순간이동 관리소도 생겼고. 근데 저는…… 못 가겠더라고요. 무슨 낯짝으로. 그런데, 허, 미안해서 안 갔더니, 러트너 씨가 아예 직접 저를 찾아오시네요. 인연도 이런 인연이 다 있어…….”
피시스에는 허탈하게 웃으면서도 딸꾹질을 계속했다. 러트너는 요즘 들어 놀라운 소식을 연달아 접하는 것이 하도 익숙해져서 자기 고향이 유명세를 탄다는 소식도 덤덤히 받아들였다. 피시스에가 이렇게 마음고생을 하는 것이 마음아플 뿐이다. 이런 홀대를 받을 사람이 아닌데, 실장석을 향한 적개심이 점점 커져갈 때 바로 옆에서 신음하고 있는 실장석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뭐에 쓰는 거예요?”
“저거 러트니카 거예요. 러트너 씨의 원수를 잊지 않겠다면서 매일 자기가 잡은 실장석 수 만큼 칼집을 새기고 있죠. 저것도 이제 5대째니까, 새긴 수가 1만은 넘을걸요?”
“으엑……. 애가 좀…… 거칠게 컸네요…….”
“아이라즈 밑에서 컸는데 어느 정도 예상은 해야죠. 걔가 15살때는 아주 골목대장이었다니까요. 러트너 씨 험담하는 얘기가 조금이라도 들리면 바로 그 사람 코를 작살내놓고 그랬어요.”
“어…….”
“근데 뭐 그때는 다 힘들었던 시기고…… 러트니카만 거칠었던 때가 아니니까.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좀 험하게 보내긴 했죠.”
유년기가 험난하긴 했지, 러트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 러트니카를 만날 생각을 하니까 조금은 떨렸다. 자기를 보게 되면 목이라도 조르려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된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주점이 점점 붐비는지 아래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많이 들렸는데, 그중 유달리 한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러트너!]
“네? 요정 님, 저 부르셨어요?”
“아니 불렀느니라.”
아무래도 아래에서 부른 것 같아 러트너는 문 쪽으로 나가보고, 피시스에는 술기운은 많이 남아있어 헤롱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러트너가 문에 손을 대려는 찰나 문이 알아서 열리더니 그 안으로 한 여자가 들어온다. 머리칼이 선명하게 붉은 여자였다.
[러트너! 이제야 일어났는가!]
“하이고, 드래곤이시구나.”
여전히 염화술로 대화하면서 입술이 꿈쩍도 안 하는 건 똑같다. 러트너와 요정은 드래곤과 악수를 나누면서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가이더링에서 연락이 왔다. 네 고향으로 막 떠나려던 찰나에 급히 온 것이다.]
그 말에 누워있던 피시스에가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외쳤다.
“잘 됐네! 어차피 고향 가실 거, 드래곤이랑 같이 가시면 되겠네. 극적인 입장 아닙니까? 사라진지 10년이 넘은 사람이 갑자기 드래곤 등에 타서 귀환하면, 이건 소설감이지 소설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피시스에, 올해는 몇 병이나 마셨지?]
“다섯……. 러트너 씨가 돌아와서 기념으로 좀 줄였다.”
[어쩐지 말소리가 또렷하더라니. 조금만 더 줄여라.]
러트너와 악수를 나누던 손을 드래곤이 바로 잡아끈다. 드래곤의 힘이라 인간이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러트너는 그저 끌려가야만 했다.
[러트너, 이곳에서 볼일이 더 있는가?]
“어…… 원래는 학파장, 아니, 피시스에 씨랑 국왕 폐하 뵈러 왔던 건데. 지금 다들 와이드스트림에 있다고 해서, 지금은 볼일이 없네요.”
[잘됐군. 어서 밖으로 나가지. 순간이동보다 빠르게 데려다줄 테니.]
“어어, 잠깐만요! 인사는 해야죠.”
그 말에 드래곤은 러트너의 손을 말도 없이 홱 놓아버려서 휘청거리다 넘어질 뻔했다. 아직 사람 덜 됐군, 애초에 사람도 아니지만, 러트너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시스에에게 말했다.
“그럼 가볼게요. 자주 들를게요! 이젠 괴물 사냥꾼이시고, 저도 사냥꾼이니까 가끔 같이 나가자구요.”
“부탁 하나만 합시다.”
“뭐든지요.”
피시스에가 러트너 쪽으로 고개를 힘겹게 돌리면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아니, 러트니카만을 위해서라도 행복하게 살아줘요. 한참 아이라즈도 앓아눕고 러트너 씨도 모습을 감췄을 땐……. 그 아이 진짜, 말도 못하게 힘들어했으니까. 지금도 그때 많이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니까…….”
“꼭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드래곤.”
[말하라.]
“러트너 씨 영웅 대접 잘 해줘. 다른 사람 말은 안 들어도 러트너 씨 말은 꼭 들어주고. 다른 모든 인간들을 위해서.”
[내가 러트너의 말만 들어주면 다른 이들이 불합리하다고 여기지 않겠나?]
“그래야 사람들이 러트너 씨랑 드래곤 너를 존경해. 해달라는 말 다 들어주면 존경이 아니라 요구를 하게 된다고.”
[인간의 사고방식이니 인간이 잘 알겠지. 그 말대로 하마.]
피시스에는 그렇게 말을 하고 고개를 한쪽으로 푹 떨어트렸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은 모습같아 요정이 피시스에를 슬쩍 쳐다보고는 콧수염이 덥수룩한 코 앞에 손가락을 슬쩍 가져다 대보았다. 공기의 흐름이 잘만 느껴진다.
“곯아 떨어지었구나. 얼마나 속이 상하였으면…….”
“제가 무사하다는 걸 아시니까 이젠 조금 덜 드시겠죠.”
피시스에의 방을 나와 1층으로 내려오니 방금까지만 해도 텅 비어있던 주점은 발디딜 곳 없이 꽉 차있었다. 위에서 내려오는 러트너를 보고는 모두의 얼굴에 각자 다른 방식으로 경외감을 보인다. 그리고 모두가 한입으로 외치고 있었다.
“러트너! 러트너! 러트너!”
“드래곤 만세!”
“국왕 폐하 만세!‘
러트너는 쑥스러워서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인간 앞에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평소 모습을 숨기던 요정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드래곤은 문밖으로 나가는 길까지 막혀있으니 인파를 무표정한 얼굴로 슥 돌아보고는 말했다.
[비켜라.]
그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이곳저곳으로 마구 비키려 했지만 드래곤도 발디딜 곳이 없는 마당에 인간들이 발을 디딜 곳이 있을 리 없었으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가게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문 쪽으로 빠져나왔다. 그렇게 만들어진 길로 걸어가는데 아직 가게 안에 남은 사람들이 손 한 번 잡아보겠다고 달려드니 적응하기 참 어려웠다. 러트너는 당황스러운 웃음과 함께 드래곤에게 이끌려 나갔다. 오우거 명치 주점의 입구에도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서 드래곤은 계속 러트너를 이끌었다.
“날아가는 거 아니었어요?”
[광장으로. 여긴 너무 좁다.]
낯부끄러운 관심 속에 힘겹게 광장까지 찾아가니 광장은 그래도 공간이 넓다. 아닐의 모습을 한 드래곤은 사람들에게 광장에서 비켜나도록 손짓한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자 거대한 날개의 형상으로 분홍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아닐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분홍빛 드래곤만이 있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커진다. 드래곤이 러트너를 염동력으로 들어 자기 등에 올려주자 그 환호성은 극에 달했다.
“이 몸도 올라타도 되겠느냐?”
[러트너, 어찌하겠나.]
“뭐 이런 것까지 저한테 물어봐요? 같이 싸운 사이에 그런 건 안 물어도 돼요.”
드래곤은 고개를 끄덕였고 요정은 염동력의 도움 없이도 자기가 알아서 뛰어올라 러트너의 앞에 앉았다. 안장이라 할 것도 없고 몸체도 투명해서 앉은 자세는 불안정한데 앉아있는 느낌은 굉장히 편안했다.
“러트너, 저들에게 한마디 하여줄 말은 없느냐?”
“어…… 글쎄요, 생각이 잘 안 나는데…….”
“간단하게, ‘두르마르 만세!’ 그 정도도 무난하지 아니하겠느냐. 아니면 그대가 사모하는 이의 이름을 외치어도 좋겠고.”
어느 쪽이든 러트너에게는 낯뜨거운 일이라, 그나마 아무나 다 외칠 법한 말을 적당히 머릿속에서 굴리며 외치기로 했다.
“두, 두야호!”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호가 터져나오고 드래곤은 창공을 갈랐다. 요정의 폭소 때문에 더욱 새빨개진 러트너의 얼굴과 함께.
“두야호!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만큼 신이 났던 게로구나!”
“그래서 안 한다고 했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절반이라도 가는걸…….”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드래곤도 날 비웃다니, 그냥 계속 누워있을걸.”
“아유, 놀리어서 미안하도다. 다음부터는 강요하지 아니하마.”
두르마르의 창공은 차고 높은 고도는 여전히 무섭다. 더구나 미라익스로 날아갈 때의 기억도 생각나니 긴장이 더했다.
“저이들은 드래곤에게 원한이 깊을 것인데 이리 환호를 하다니 앙금은 다 털어내었나보구나.”
“아잇, 요정 님! 떨어트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틀린 말도 아닌데 뭐 어떻나. 나도 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했다. 하지만 내 실수를 다잡으려면 아직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 10년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피시스에 님께 들었어요. 전쟁에도 참전했다면서요?”
[서로 도와주어도 모자랄 판국에 전쟁이라니, 대화로 해결하고자 디신시데의 국왕을 두르마르로 데려왔었지. 대화는 할 줄 아는 인간이더군. 바로 항복하면서 두르마르에 지원을 약속했으니.]
바로 항복할 수밖에 없었겠구나, 러트너는 그 디신시데의 국왕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당혹스러웠을지 생각하는 게 퍽 재밌었다.
“그 외에 큰일은 없었어요?”
[쿱 노키모노르켄, 너도 알겠지. 한때는 나뮈의 열쇠였다가 지금은 이생물학파장으로 일하는 나뮈 신도 말이다.]
“그럼요. 트루피아 오기 전에 뵙고 왔는걸요.”
[그렇다면 그가 쓴 책도 읽어보았겠군. 순간이동보다 빨리 가려고 했는데, 이 이야기를 하려면 시간이 좀 길어질 듯 하다만.]
“지금도 충분히 빨라요.”
[좋다. 책이 나왔을 적의 이야기인데…….]
[국왕이여, 스카이퀴에스의 농지에서 이제 싹이 튼다고 한다. 곧 농업 기능도 온전히 복구될 것이다.]
니파티 사태 3년 후, 왕궁의 재건이 끝나고 매일같이 도시들을 순회하며 상황을 보고하던 드래곤은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스카이퀴에스의 상황을 보고하고자 재건된 왕궁으로 돌아왔다. 새 국왕은 왕좌에 앉아 드래곤이 왔는데도 심각하게 책 내용만 쳐다보고 있었다. 드래곤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책의 제목을 훑는다.
[내 말 들었나?]
“……그래.”
[노키모노르켄의 서……. 그것은, 나뮈의 열쇠가 쓴 책인가?]
“쿱 노키모노르켄이라는 마법사다. 한때는 나뮈의 열쇠였다고 하는데, 이 책을 썼다는 이유로 파문당했더군. 어처구니가 없지 않나? 선왕이 시해당한 기록을 검열하려 들어? 그따구로 일하면서도 지식의 교단이라고 잘도 간판을 달고 있다니, 대체 나라 꼴이 어떻게 돌아가려는 건지 원.”
새 국왕은 신경질적으로 책장을 넘긴다. 드래곤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자신의 할 말을 전했다.
[그래. 올해는 스카이퀴에스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수고했고, 지금은 다른 얘기를 좀 하지.”
[무슨 얘기지?]
“이 책에 쓰인 바로는, 카오스 자실장이 하나가 아니었다고 하던데.”
일절 고민도 없이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니파티가 주범이었고, 러트너가 소환한 리도미라는 카오스 실장석이 있었다. 원래는 리치였다고 했지.]
“너도 봤단 얘기군.”
[그렇다.]
“왜 알리지 않았지? 분명히 카오스 실장석 이야기는 다 끝난 거라고 했는데, 왜 한마리가 빨빨히 살아있느냔 말이야!”
[리도미는 인간을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실장석이 인간과 공존할 수 있을 때까지 가르치면서 배울 것이라고 했다.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곳에서.]
“공존? 누가 드래곤 아니랄까봐 꽉 막힌 소리만 지껄이고 앉아있구나. 지난 3년 내내 두르마르를 돌아다니면서 느끼는 바가 아직도 없어!”
국왕은 드래곤에게 노키모노르켄의 서를 집어던지며 역정을 냈다. 드래곤은 손을 올리지도 않고 염동력만으로 책을 잡고는 왕좌의 팔받침에 사뿐히 올려다놓았다.
“누가 실장석 편 들었던 놈 아니랄까봐 끝까지 실장석을 믿는구나. 두 번 배신을 당하고, 두르마르가 아예 무너져서 모두가 죽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것이냐!”
[…….]
“당장 그 분충을 찾아라. 찾아서 죽이고 그 목을 내 앞에 가져와라. 이건 명령이다!”
드래곤은 고개를 푹 떨어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다.]
“뭐? 두르마르를 위해 어떤 명령이라도 다 따르겠다던 맹세는 어디 가고? 마지막 드래곤의 명예는 드래곤 네가 죄다 말아먹었나!”
[내 능력으로는 리도미를 죽일 수 없다. 너무 강력하다.]
“잘났다. 잘났어! 사태를 해결한 게 아니라 덮어두고 모르쇠였던 거잖아!”
[그리고 리도미가 죽으면 이 세상 모든 실장석이 카오스 실장석으로 변한다.]
“뭐라?”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에 안 드는 이야기만 나오니 화만 나던 국왕은, 어느 순간 화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올라오고 나니 화를 담아놓는 그릇이 점점 끓어올라 넘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국왕은 드래곤에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세상 어딘가에서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는 암덩어리를 그냥 내버려둘 생각이냐? 카오스 실장석이 눈 한 번 돌아가면 세상이 망하는 건 시간 문제인데, 그걸 그냥 두고 보겠다고? 적어도 위치는 알아야 할 것 아냐!”
[……위치를 알아내면 리도미가 이리로 올 것이란 생각은 않는가? 리도미는 우리가 찾지 않기를 바랐고 우리고 리도미가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우리가 먼저 찾아가면 우리가 먼저 그 약속을 깬 것이 된다. 리도미가 그 점에 분노하여 선전포고를 할지도 모른다.]
“당연히 약속을 깨겠지, 분충새끼인데! 실장석의 말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미친 소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못 잡으면 위치라도 파악해. 무슨 꿍꿍이를 부리고 있는지라도 알아오란 말이다!”
[하지만…….]
“반역자 새끼가 혓바닥이 뭐 이렇게 길어!”
결국 드래곤은 어쩔 수 없이 리도미를 찾아 어디인지도 모르는 세상의 창공을 떠돌아야 했다. 드래곤은 알 수 없다고 했지만, 모를 수도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력을 지닌 리도미는 조금이라도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존재라면 그 위치를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그 마력에 이끌려 곳곳에서 괴물도 모여 웬만한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바실리스크, 만티코어, 퓌톤에 크토니안까지도 목격되곤 한다. 드래곤이 그 마력을 찾아 날아간 곳은 세계의 남쪽 끝, 너무 극에 달한 나머지 꽁꽁 얼어 붙어버린 땅, 그 어떤 인간도 발을 붙일 생각을 못한 얼음투성이 대륙이었다. 그곳에 리도미가 있었다. 드래곤이 대륙에 제대로 접근하기도 전부터 알아채고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온다.
[돌아가란데스. 이곳은 위험한 땅인데스.]
[나다, 리도미. 드래곤이다.]
[와타시를 아는데수? 그렇다면 더욱 더 이곳으로 올 이유가 없다는 걸 잘 알 것인데스.]
드래곤은 리도미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대륙의 중앙에서 뿜어져나오는, 평범한 이들은 볼 수 없는 황금빛 광채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알았다. 대륙의 가장자리에서 정지비행을 하며 드래곤은 리도미에게 말했다.
[물론이다. 나도 널 방해할 생각은 없다. 앞으로도. 하지만…… 내가 섬기는 인간은 너를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와타시는 닌겐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맹세한데스.]
[나는 너를 믿는다. 하지만 그 인간은 너를 믿지 못해. 같은 실장석인 니파티에게 너무 많은 것을 잃은 인간이다. 그 인간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이 다 그렇다. 네가 어디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딘가에는 살아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리고 내게 널 찾아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설령 내가 싸우러 왔다고 해도, 나는 널 죽일 수 없다. 그것 하나는 확실히 알아. 그래서 나는 너와 싸울 마음이 없다.]
[……분충 한 마리 때문에 이게 뭔 난리란 말인데스.]
리도미가 한숨을 쉬자 대륙의 바람이 그 한숨과 하나가 되어 드래곤에게 불어왔다.
[어떻게 하면 와타시의 진실을 증명할 수 있는데수.]
[나도 모른다. 인간의 원한은 깊고, 그들의 천성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장석 너희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실장석, 너희에게는 공통점이 많다. 둘 다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똑같이 혐오하는 산송장과는 믿고 손을 잡으면서 똑같이 살아있는 실장석은 믿지 못하겠다고 하니. 아!]
[무슨 생각이 있는데수?]
[흑의 계약서다.]
흑의 계약서가 무엇인지, 그것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던 리도미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혀를 쯧 찼다.
[그것은 위험한 물건인데스. 와타시의 카오스 파워마저 흩어버릴 물건인데스. 오마에타치는 그것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는데스.]
[하지만 계약을 충실히 이행한다는 가정 하에 상호간의 완전한 신뢰를 보장할 수 있는 물건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를 잘 믿지 않는가. 인간에게 우리의 신뢰를 보여주려면 결국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인간은, 그리고 실장석은 자신의 말을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 있는 종족이기 때문에 물증이 없으면 서로를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와타시는 와타시의 말을 뒤집지 않는데스!]
[너는 주인의 모든 것을 앗아간 인간의 말을 믿지 않았던 적이 있다. 니파티에게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간 앞에서도 그런 말을 하면서 믿으라고 할 수 있겠나?]
[…….]
한동안 대답이 없으니 꽤나 긴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드래곤은 알 수 있었다. 리도미는 실장석 중에서 가장 현명한 자였다. 가장 합리적이고 옳은 결정을 할 것이라고 드래곤은 믿었다.
[이래야만 닌겐이 믿는다면 어쩔 수 없는데스. 바로 준비해오겠는데스.]
[계약 내용은 생각해놓았나?]
[……생각해보니 와타시타치는 말만 있고 글이 없는데스.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으니, 오마에가 대신 써주는데스. 이 참에 하나를 만들어야겠는데스.]
[알겠다. 흠……. 선계약자와 후계약자는 무조건적, 영구적 강제 평화조약을 체결하며 어떠한 조건에서도 서로에게 선전포고하거나 선제공격할 수 없다. 위반시에는 즉사로 하지. 이 정도면 괜찮겠나.]
[닌겐이 이 땅으로 오는 것도 안 되는데스.]
[그건 어렵다. 세상에 인간이 한둘도 아니고, 나는 그 모든 인간을 감시할 여력이 없다. 이곳은 네 땅이고, 네가 충분히 지킬 수 있지 않은가. 너는 나보다 유능하고 강하다.]
[어쩔 수 없는데스. 그저 와타시타치만의 계약으로 끝내는데스. 분충 하나를 방금 잡은데스 .바로 보내겠는데스.]
공중에서 천천히 기다리고 있는데 눈앞에 바로 산채로 가죽이 벗겨지고 머리는 온전히 달려있는 실장석 한 마리가 나타났다. 아직도 선혈이 뚝뚝 흐르는 가죽을 목 아래로 달고서 피눈물을 철철 흐르고 있었다.
[……죽…… 여…….]
성대가 없는 목에서 바람소리가 힘겹게 죽여달라는 형체를 빚는다. 드래곤은 그 가죽에서 흐르는 피로 계약 조건을 새기고 분홍빛으로 빛나는 자신의 피를 뽑아 그 가죽에 떨어트렸다. 그러자 가죽이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자신이 넘볼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며 드래곤이 물었다.
[실장석을 가르치겠다더니 너무 처참하게 죽인 것이 아닌가?]
[이 자는 사육실장이 되겠다고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의 자를 죽인데스. 자라고 불러줄 가치도 없는데스.]
그리고 잠시 후 같은 가죽이 다시 나타났는데, 황금빛으로 빛나는 자국이 찍혀있었다. 가죽 전체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뿜어져나오니 계약이 온전히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쁘게 해서 미안하다. 순순히 말을 들어주어 고맙다.]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겠는데스.]
그렇게 드래곤은 금빛으로 빛나는 흑의 계약서를 들고 다시 두르마르로 분홍빛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 계약서는 지금 두르마르 왕궁 금고에 보관되어있고.]
“그래서 국왕 폐하께서는 만족하셨어요?”
[만족하지 못했다. 하지만 죽일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상대하란 말인가. 내가 죽일 수 없는 것을 국왕이 무슨 수로 죽이겠는가.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국왕은 나를 두르마르에서 추방하겠다고 하더군.]
“추방하겠다 해도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닐 것 같은데…….”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러하게 그대의 등에 타고 있으니, 당연히 추방당하지는 아니하였을 것일 터.”
[말이 추방이지, 내가 직접 내 발로 나왔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 사이에 디신시데에서 선전포고를 했던 것이지. 그 다음은 아는 대로다.]
“전쟁에서 공을 세워 다시 국왕 폐하의 환심을 샀군요. 어휴, 이해는 가지만, 참, 어렵네요.”
[그에게서 어딘가 네 모습이 비치더군. 그래서인가. 국왕이 그랬던 것도.]
“네? 뭘 그랬는데요?”
[도착하면 알려주지. 그 편이 재밌을 것 같다.]
“드래곤이 재미라는 것도 알다니 별일이네.”
[재미? 인간들이 가장 재미있어하는 이야기를 들려줘야겠군.]
인간을 정말 모르는 드래곤이 과연 인간이 정말 재밌어하는 이야기를 한다니, 무슨 이야기인지 어디 들어나보자고 러트너는 귀를 기울였다.
[디신시데와 전쟁이 하루 만에 끝난 이후로 두르마르의 영향력이 의심을 사고 있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진실이었다. 따라서 왕가의 영향력과 정통성을 강화시킬 수단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곳곳에서 나왔다.]
“어휴, 정치 얘기잖아요. 정치 얘기 재미있어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 뿐이거든요?”
[그 의견 중 하나가 국왕과 내가 결합하여 반드래곤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푸헥!”
“케헥!”
러트너와 요정이 동시에 사레가 들러 기침을 하니 드래곤은 껄껄껄 웃었다.
[뭐랬나.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라니까.]
“그, 그래서요. 진짜 낳았어요?”
[물론 말도 안 되는 의견이었지. 이 세상에 드래곤이 나 하나 뿐인데, 지금의 국왕이 퇴위하고 반드래곤 자식이 즉위하면 나는 고작 왕가의 정통성을 이유로 내 자식과 관계를 맺어야 한단 말이다. 드래곤에게는 윤리라는 게 없는 줄 알더군.]
“국왕 폐하는 남자일 테고…… 그럼 낳는 쪽은 드래곤일 텐데…… 여자셨어요?”
“그대와 인간은 신체 구조 자체가 다른데, 그, 가능하더냐?”
[그렇다. 인간과 요정의 관점 차이를 알 만하군.]
러트너와 요정의 얼굴이 똑같이 빨개져서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얼굴은 시릴 줄을 모른다.
[정치보다는 그쪽에 흥미가 더 있는 듯하니 지금껏 아무도 몰랐던 드래곤의 번식 방법도 알려주도록 하지. 어차피 남은 드래곤도 없어 내가 번식할 상대도 없고.]
“아뇨, 굳이 그럴 필요는…….”
[우리 드래곤은 너희 인간과 달리 성별이 하나 뿐이다. 아니……. 두 성별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하나? 두 드래곤이 만나서 짝짓기를 하면, 두 드래곤 모두 자식을 잉태한다. 너희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겠군. 그러니까 드래곤과 다른 종족의 생식기는…….]
“그만! 거기까지 하죠! 요정 님 계시는데 남사스럽게 무슨 드래곤 거시기 얘기에요.”
[왜. 너희 둘 다 이미 같이 목욕까지 하면서 볼 거 다 본 사이라고 책에서…….]
“그만 하자니까요!”
“거기까지 하렷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우릴 놀려먹으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구나, 인정하기 싫었지만 러트너는 잠시 드래곤의 번식 이야기에 흥미를 가졌던 자신이 한심했다.
[순수하게 재밌어서 웃어보는 것이 몇백 년 만인지 모르겠군. 이 감정을 수백 년 전 동족들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고맙다, 러트너.]
“자기가 웃긴 얘기 하고 자기가 웃고 자기가 고맙대.”
[너 아니면 이런 이야기를 허물 없이 나눌 이가 누가 있겠는가. 서두르도록 하지!]
이야기를 하느라 속도를 늦추던 드래곤은 다시 가속을 붙였고 곧 단풍이 선명한 붉은빛으로 숲 전체를 물들여 마치 숲 전체가 불타오르는 듯한 단풍나무 숲의 상공에 다다른다. 러트너는 그 숲을 보는 순간 벅차오르는 눈물과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앰버메이플 숲…….”
“실로 오랜만이로구나.”
“어, 저기, 저기! 저기가 분명 와이드스트림 길목이에요!”
10년을 넘게 찾아오지 못한 길이지만 척 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다. 길 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드래곤은 날개를 퍼덕이며 천천히 내려앉는다. 드래곤이 내려앉으면서 몸이 살짝 붕 뜨는 느낌이 드는데 꼭 떨어지는 것만 같아 러트너의 등에 소름이 돋는다. 이윽고 드래곤은 먼지구름과 낙엽을 휘날리며 착지했고 러트너와 요정을 염동력으로 내려주었다.
“돌아왔다, 돌아왔어…….”
감격이 북받쳐올라 러트너는 말을 이을 수가 없고, 눈물을 훔치면서 코를 훌쩍였다. 요정이 그의 등을 토닥여주고 드래곤은 다시 아닐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러자 드래곤의 몸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커다란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러트너, 저것 좀 보거라.”
“뭐가 있어요?”
러트너의 기억에는 기껏해야 이정표나 있는 길이다. 그런데 요정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러트너가 기억하지 못하는 커다란 석상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러트너, 두르마르의 구세주’라고 새긴 동판이 붙은 석상은 잘린 실장석의 목을 하늘 높이 우렁차게 들고 있는 러트너의 모습이었다. 러트너는 가뜩이나 드래곤 생식기 이야기로 빨개진 얼굴이 더 빨개졌다.
“하이고, 진짜 이게 뭐야……. 사람 부담스럽게…….”
“러트너, 석상을 만들어주는 것이 어디 보통 영광이더냐? 흠. 석상보다 실물이 더 낫구나.”
“자세라도 좀 평범한 걸로 해주든가…….”
“보다보면 익숙할 터이다. 자, 어서 그대의 고향으로 가자꾸나. 길이 두 갈래이거늘 어디로 가면 되겠느냐?”
“다들 저 추모하고 있댔잖아요. 추모를 어디서 하는데요?”
드래곤에게 묻자 답은 아주 간단히 나온다.
[추모비다. 네 집에 세워져있지.]
“제 집이요? 그럼 제 집은요!”
[네 집도 멀쩡하다.]
“아, 그래요? 난 또, 멀쩡한 집 다 무너트리고 거기에 비석 세웠다는 줄 알았네. 그럼 거기로 가죠.”
그렇게 말하는 러트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다. 한걸음 한걸음이 긴장되어있고 감격에 가득 차있다. 사람의 발자국이 너무 많이 나있는 것이 옥의 티지만, 이 모든 길이 자신이 걸어온 길이었다. 지금이라도 길 반대편에서 두건을 뒤집어쓰고 바구니를 양손으로 든 데아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올 것만 같다. 풀냄새와 흙냄새, 실장석의 똥냄새가 전혀 섞이지 않은 이 냄새는 바닥에 누워도 좋을 만큼 향긋했다. 이게 고향이지, 러트너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테쨔아아아아아아아아악! 테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구해주는테찌이이이이이이이이! 살려주는테찌이이이이이이! 아타찌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테찌이이이이이이이이이!]
살아있음을 느끼려는 찰나에 자실장의 괴성이 들려오니 감성이 팍 식어버린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았던 러트너는 자신의 고향을 더럽힌 분충에게 더할 나위 없는 분노가 솟아올랐다. 마침 비명소리는 러트너가 가는 길 쪽에서 들리고 있었고, 내용을 듣자하니 멍청한 분충이 누군가에게 잡힌 것이 분명하기에 바로 죽는 꼴좀 보자고 신이 나서 뛰어갔다.
“……생명과 죽음을 관장하시어, 삶이 모두 그 안에서 하나가 됨을 알고, 죽음은 우리를 떠나가는 것이 아닌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는 것을 믿사오니…….”
[테찌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뾰족뾰족씨 싫은테찌이이이이! 번쩍번쩍씨 싫은테쨔아아아아아아! 찌야아아아아아아아!]
“산 자를 축복하고 망자를 애도하여, 억울하게 희생된 수십 만의 영혼을 부디 달래소서.”
[찌갸앗! 게, 게헤에에에에에엑! 헤에에에에에에에에엑!]
자실장의 비명소리는 누군가의 기도 소리와 함께 목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기도 내용을 들어보니 생명의 신 양바니에게 내리는 기도가 분명했다. 나무로 된 벽이 보인다. 저것은 러트너의 집이었다. 내 집이다, 내 손으로 내가 세운 내 보금자리다, 요정과 처음 만났던 바로 그곳, 한평생 몸 누일 유일한 자리다. 러트너는 자신의 집으로 단박에 뛰어갔다.
“……어?”
러트너의 집 앞 풍경을 보니 당황스러워 발길이 절로 멈춘다. 사람들이 추모를 하고 있을 것이라는 건 들어서 알았지만, 사람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몰랐다. 분위기도 엄숙하며, 윤기가 흐르는 검은 바위 비석 앞에서 로브를 걸친 수도사가 자실장의 목에 칼을 꽂고 그 피를 은대접에 담고 있었다. 흰 로브에 붉은 무늬가 그려진 걸 보니 양바니의 수도사가 분명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람들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고, 수도사도 달려오는 러트너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늦으셨네요. 괜찮습니다. 이제 막 시작하려던…… 찰…… 나…….”
수도사의 노르스름한 눈이 러트너를 마주치고, 그 눈은 러트너를 뒤따라오던 드래곤과 요정과도 마주쳤다. 러트너와 수도사는 서로 눈을 마주친 채 그대로 가만히 굳어있었다. 그러다 수도사는 손에 쥐고 있던, 피가 다 빠져나간 자실장과 제례용 칼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리고 품 속에 손을 넣더니 양바니의 표식을 꺼내 소리쳤다.
“일어선 것은 모두 누워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수도사는 이번엔 유리병을 꺼내더니 그 유리병을 그대로 러트너에게 집어던졌다. 투명한 찬물이 러트너에게 끼얹혀 온몸이 축축해졌다.
“으아! 푸허!”
“갑자기 이것이 무슨 짓이더냐!”
난데없이 물벼락을 맞은 것도 모자라 러트너가 물로 얼굴을 씻으며 어푸푸 소리를 내는데 수도사는 어느새 러트너 앞까지 달려와서는 이번엔 얼굴에 주먹을 갈겼다.
“컥!”
“이보거라!”
러트너가 얼굴에 주먹을 맞아 쓰러지고, 요정이 다급히 수도사의 손을 붙들려 했다. 수도사는 요정의 손도 거칠게 뿌리치고 쓰러진 러트너의 멱살을 잡고는 말했다.
“야, 이 또라이같은 양반아! 당신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돈 벌러 나간다던 양반이 뭔 짓을 했길래 집을 10년동안 비워두다가 이제 슬금슬금 기어들어와!”
“수도사여, 오해로다! 이것 놓고 이야기하거라!”
“으윽……. 기억하고 있었구나.”
“당연히 기억하지! 내가 어떻게 잊겠어! 내가…… 내가 어떻게……. 대체…… 대체…….”
방금까지 얼굴에 기세 좋게 주먹을 박던 수도사를 곧 러트너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갈색 머리에 노르스름한 눈을 한, 한때 양조장에서 포도주를 빚던 딸아이는 늠름하고 단정한 양바니의 수도사가 되어있었다.
“왜…… 왜 이제 왔어요……?”
“미안해, 나도 빨리 오고 싶었는데.”
“진짜……. 진짜 용서 안 할 거야…….”
올해 희생제 추모식은 그렇게 취소되고, 대신 러트너의 귀환을 축하하는 작은 축제가 열렸다.
와이드스트림은 러트너가 기억하는 것보다 많이 커져있었고, 그 큰 동네에도 러트너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바람같이 퍼졌다. 러트너 혼자 사는 집에 사람이 가득가득 들어차고 바깥에서 창문을 통해 구경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북적인다. 살면서 자기 집이 이렇게 북적이는 꼴은 러트너도 데아르도 처음이었다. 그 와중에 집에 들어갈 수 있던 이들은 모두 러트너와 잘 아는, 대체 왜 잘 아는지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 없는 관계의 이들이다. 양바니의 수도사나 괴물 사냥꾼, 나뮈의 열쇠, 영주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드워프 대장, 요정, 두르마르 국왕과 드래곤까지. 그리고 그 와중에 앉아있을 수 있는 건 러트너와 데아르, 국왕 뿐이다. 건물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당장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만으로도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10년 만에 돌아오는데 안은 생각보다 깨끗하네?”
“10년 동안 누가 청소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깨끗했겠어요? 10년치 청소비 다 받아낼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돈 벌러 집 나간 거였잖아요? 돈 얼마나 벌어왔어요?”
“어……. 200골 있었는데, 난리통에 다 써버렸어.”
“그럴 줄 알았지 내가.
매년 겨울 마다 마시던 그리네 브랜디를 10년이나 타의로 참아온 러트너는 마침내 황금같은 한 잔을 기분좋게 넘겼다. 그 맛은 말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고향에 돌아왔음이 이제야 실감난다.
“이것도 아저씨 생각하면서 매년 빚은 거라구요. 평생 제삿상에만 올리는 줄 알았잖아요.”
“고마워. 또 미안하고. 근데, 왜 갑자기 양바니 수도사를 하게 된 거야? 양조장 일은 어떡하고.”
“다 아저씨 때문이잖아요! 동네에 한 명밖에 없는 바늘 님을 때려눕혔다면서요! 그것도 흡혈귀랑 편먹고!”
뜨끔하다. 러트너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는 데아르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아빠한테 처음 들었을 땐 아저씨가 진짜 미친 줄 알았는데, 책으로 보고 알았어요. 오히려 아저씨가 우릴 구해줬다는걸.”
“으…… 응.”
“어쨌든 아저씨 때문인 건 사실이에요. 이 동네에서 바늘 일 할 사람이 저 밖에 없었다구요.”
“그…… 분은 멀쩡하시니? 예전 바늘 님은…….”
“유자테아에서 장의사 일하세요. 언제 한 번 다시 뵈러 가야죠?”
“그래야지. 응.”
방금까지만 해도 달았던 술이 갑자기 쓰다. 러트너가 잔을 내려놓자 데아르가 바로바로 잔을 다시 채웠다. 독한 술을 연달아 마시기는 좀 그래서 러트너는 내려놓은 잔을 다시 들진 않았다.
“진짜 할 말이 많은데, 전 시간이 많으니까 다른 분들께 양보할게요. 특히, 국왕 폐하께는 예를 갖추셔야죠?”
“아, 흠! 맞아! 폐하! 제가 무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먼저 폐하께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 건데……. 러트너라고 하옵니다. 평범한 사냥꾼이옵니다.”
상석에 앉은 러트너의 바로 옆에 앉은 국왕은 러트너의 인사를 가볍게 받아주며 데아르가 따라주는 브랜디를 목 뒤로 넘겼다.
“괜찮네. 인사를 하기도 전에 얼굴에 성수와 주먹부터 맞았는데 인사를 할 정신이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러트너라고 하네. 두르마르 국왕일세.”
“……예?”
러트너의 얼빠진 표정에 주위 사람들이 다들 피식거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국왕도 싱글벙글 웃으면서 다시 말한다.
“러트너. 두르마르 국왕.”
“어…… 저, 폐하, 제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확신이 안 들어서 감히 여쭙는 것인데……. 폐하의 존함이 러트너라고 하셨사옵니까?”
“제대로 들었네.”
“어. 아. 그, 그렇사옵니까! 전 또, 제가 잘못 들은 줄 알고. 제가 국왕 폐하와 동명이인이었을 줄이야, 아렌지께서 가호하시나 봅니다. 그, 선왕께서 쿠타오 3세이셨으니, 그래서 자연히, 폐하께서는 쿠타오 4세일 줄 알고…….”
“그럴 만하네. 짐의 본명은 쿠타오 트루피아였고, 원래 즉위명도 그렇게 정할 예정이었다가 바꾸었으니.”
“……바꾸셨사옵니까?”
“그렇다네. 아바마마께서는 훌륭한 왕이셨지만, 두르마르의 가장 암울한 시기를 지낸 왕이시기도 하네. 쿠타오라는 이름은 두르마르의 암흑기를 뜻하는 말이 되어버렸고. 짐은 두르마르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기존의 즉위명을 바꾸기로 했네. 두르마르를 구원한 영웅의 이름으로, 그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말일세.”
“그, 그럼, 일부러 러트너라는 즉위명을 쓰신 겁니까?”
“제대로 맞췄네.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러트너 공이 멀쩡히 살아서 돌아올 줄은 몰랐지. 벌써 10년 전 얘기인데. 이거 즉위명을 바꾸든가 해야겠네.”
“아, 아니옵니다! 어찌 폐하께서……. 제가 바꾸면 되는 일이옵니다.”
“그것이야 말로 말도 안 될 일이지. 두르마르를 구한 영웅의 이름은 후세에 그대로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짐이 왜 즉위명을 러트너로 바꾸었겠는가. 그래, 러트너 씨는 성이 어떻게 되는가? 성이 러트너이고 이름이 따로 있는가?”
“소인은 성이 없사옵니다. 러트너가 곧 성이자 이름이옵니다.”
“저런. 이 기회에 하나 만드는 것은 어떤가. 별명이 요정의 러트너였으니, 요정 님이 하나 지어주시는 것도 좋을 듯하고.”
러트너는 지금껏 사람들이 자신에게 국왕의 이름을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일었다. 요정은 국왕의 제안을 가만히 듣고는 말했다.
“요정에게 있어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청혼이라는 것을 알렷다. 지금 이 몸더러 러트너에게 청혼을 하라는 것이더냐?”
“아하! 그랬었지, 요정 님을 실제로 보는 것이 처음이라 순간 잊었습니다. 하하, 국왕이나 되어서 이런 실수를 하다니 참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요정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러트너를 슬쩍 쳐다보더니 그 가벼운 미소를 흘려내고는 말했다.
“정 그리하면, 어차피 러트너는 성이 곧 이름이거늘 러트너를 성으로 하면 되지 아니하겠느냐.”
“그 또한 좋은 의견이십니다! 이로써 두르마르에 러트너 가문이 새로 만들어지고, 러트너 씨는 가문의 시조가 되는 거지요!
내가 가문의 시조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런 고민을 할 새도 없이, 러트너의 앉은 키보다 키가 작은 드워프가 다가와 바로 손을 내민다. 그의 옆에는 콜드펌이 붙어있었다. 원래도 나이가 많아보이긴 했지만, 이젠 머리가 아주 하얗게 센 노인이었다.
“러트너! 어떻게 10년이나 지났는데 변한 게 없냐?”
“안녕하셨어요, 대장님. 무사하시네요.”
“내가 할 말이다 인마.”
“콜드펌 님도 반가워요. 미라익스에서 사절로 일하고 계신다면서요?”
“하…… 러트너 씨. 설마 살아있는 모습을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서로 쿱에 대한 이야기는 알아서 꺼내지 않았음에도 머릿속으로는 같은 일을 생각하고 있다. 러트너는 약간은 찜찜한 마음에 손을 움직이다가 옆구리에서 이물감을 느낀다. 그리고 번개같이 떠오른 생각에 그 이물감에 손을 뻗어 밖으로 꺼냈다.
“아, 대장님. 이거요. 덕분에 이겼어요.”
“뭐야, 나한테는 선물도 준비했냐? 이건…….”
금장으로 화려하게 치장되고 대장의 이름이 드워프어로 쓰여있는 드워프 쇠뇌다. 대장은 그 쇠뇌를 보자마자 탄식하면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이게, 이야, 하! 이걸 다시 보는 날이 오네! 근데 난 필요없어. 너 가져라. 기념품으로.”
“이거 없으면 뭐 쓰시는데요?”
“10년동안 드워프는 놀고 먹기만 한 줄 알았냐? 우리도 새 거를 만들었다고.”
그렇게 말하며 대장은 새로운 쇠뇌를 꺼내들었는데, 화려하게 치장된 것은 러트너가 가지고 있는 쇠뇌와 비슷하면서도 관이 양옆으로 2개가 달려있었다.
“이건 한 번 장전해서 두 번 쏠 수 있다고. 그거보다 두 배나 좋은 거야.”
“와. 이거 가져가시고 그거 저 주시면 안 돼요?”
“마법 쓰는 인간놈이 요정에 드래곤까지 있으면서 뭘 더 바라냐! 어차피 탄도 없지? 필요하면 말해. 싸게 줄게.”
드워프 대장과 러트너는 껄껄 웃으면서 서로의 쇠뇌를 집어넣었다. 옆에서 콜드펌도 펜을 움직이면서 거든다.
“러트너 씨, 미라익스에서도 영웅 대접 받으시는 거 아십니까? 드워프를 구원해준 용기사라고 명성이 자자합니다.”
“용기사는 무슨……. 드래곤이 다 한 걸요.”
“러트너 씨가 아니었으면 드래곤을 누가 데려왔겠습니까. 오면서 석상 보셨습니까?”
“봤죠.”
“그것도 드워프가 만들어서 선물한 겁니다.”
“어, 어쩐지! 상 모양새가 범상치 않더라니, 역시 드워프 솜씨였군요.”
차마 부끄럽다는 말은 할 수 없어서 자랑스럽게 웃는 드워프를 치켜 올려준 러트너는 부끄러워도 오래 보면 정이 들겠거니 하면서 대장과 잔을 부딪었다. 그 다음은 유자테아의 영주 드롤의 차례였다. 그는 러트너를 보자마자 눈가의 흉터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러트너 씨에게 얻은 흉터요. 주먹이 아주 매웠지요.”
“그때……는 정말, 저도 마음이 아팠지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안 죽은 게 용할 정도요. 오히려 고마웠소. 거기다, 지금 유자테아가 순례객만으로도 얼마나 북적이는지 아시오? 이젠 순간이동 관리소까지 생기고 어지간한 대도시가 부럽지 않소!”
바로 옆에 서있던 아쿠아힐의 영주, 한때는 백작이었지만 지금은 공작이자 호국경인 클레르케 이삭 공작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한다.
“아쿠아힐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평화롭습니다. 카오스 자실장과 드래곤이 격전을 벌인 곳이라 해서 순례객이 많이 찾지요. 왕궁이 재건되기 전까지는 러트너 폐하께서도, 아, 러트너 1세 폐하께서도 아쿠아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셨고. 다시 뵐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진짜 그땐 아찔했어요. 거기서 죽겠구나, 싶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빨빨히 잘 살아있네요.”
영주들과도 술잔을 부딪고 나니 거구의 오크 옆에 앉아있던, 피부가 갈색으로 짙게 탄 여자가 다가와서는 바로 러트너에게 대뜸 손을 내민다. 손에 굳은살이 배긴데다 악력도 보통이 아니고, 얼굴은 처음 보지만 바로 옆에 오크가 있으니 이게 누구일지는 러트너가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아저씨! 나 알아보겠어요?”
“세상에, 포, 아니, 러트니카, 엄청 컸구나!”
“저 이름 러트니카로 바꾼 거 어떻게 아셨어요?”
“피시스에 님한테 들었지. 내 이름이 이렇게 인기가 많을 줄은 나도 몰랐는데…….”
러트너가 기억하던 꼬맹이 포니카는 어디가고 온몸에 근육이 탄탄하게 붙은 당당한 여전사 러트니카만이 남아있다. 그 분위기는 마치 아이라즈가 인간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오크다운 거구를 자랑하는 아이라즈는 주름과 흰머리가 많이 나있다. 오크도 흰머리가 나는구나, 러트너는 그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그래, 그동안 어떻게 잘 지냈니?”
“힘들었죠. 우리 언니는 부대장 자리도 내려놓았구요. 그래도 지금은 살 만해요. 저 이젠 흡혈귀도 잡을 수 있어요!”
“다행이네. 나 욕하는 사람들은 다 밟아주고 다녔다는 얘기가 있는데. 실장석 몸에 칼집도 새기고…….”
그 말에 뒤에서 아이라즈가 한숨을 쉬면서 러트니카의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러트니카는 사람들의 이빨을 많이 털었고, 실장석의 목을 많이 땁니다. 시집 가기는 틀렸다.”
“데이람 워이 에라, 레우? 위달 윕무륵. 아저씨를 욕할 수 있는 것도 다 아저씨 덕분인데 감히 누굴 욕해요? 욕하고 싶으면 나부터 이기라고 해요.”
아이라즈는 두르마르어가 많이 늘었고, 러트니카는 오크어가 많이 늘었다. 이제는 독주도 마실 수 있는 러트니카는 잔을 부딪고는 브랜디 한 잔을 쭉 들이키고는 한 잔을 바로 더 받아 들이켰다. 러트너가 보기에는 무리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잘 마셨다.
“아저씨 아직 결혼 안 했죠.”
“할 새가 있었겠니. 10년 내내 누워있었는데.”
“잘됐네. 우리 언니 좀 데려가요.”
“뭐?”
“타후?”
러트너와 아이라즈가 동시에 러트니카를 황당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독주는 독주인 건지 술기운에 얼굴이 조금 붉다.
“그 에립마브 아저씨 있잖아요. 우리 언니가 결투장 보냈는데 끝까지 대답 안 했다면서요. 그리고…… 그대로 끝이었잖아요.”
“그렇다고 내가 에립마브를 대체하기에는 좀…… 아이라즈가 싫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결혼까지 얘기하기도 그렇잖니.”
“아 왜요~. 우리 언니가 뭐 어때서. 지금 안 데려가면 주름 쭈글쭈글 할망구 돼서 데려갈 사람도 없어지게 생겼는데. 아아! 아아아! 스트루흐 티 러치스!”
“국왕 폐하 앞에서 경박한 소리를 하지 마십시오! 에투님 아 로프 투오 텍.”
“10년만에 아저씨 다시 보는데 진짜 너무…….”
아이라즈가 러트니카를 귀를 잡아당기며 내쫓다시피 데리고 나가니 집이 갑자기 확 넓어진 느낌이다. 안의 사람들이 모두 황당하면서도 가볍게 웃어 넘기는데 옆에서 데아르가 브랜디 뚜껑을 닫고는 병을 소리내어 쾅 내려놓았다. 러트니카는 잠시후 아주 차분한 얼굴로 들어와서는 국왕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아는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과 담소를 나누니 시간이 지나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브랜디 병은 텅 비었고 술을 마시지 않은 드래곤과 요정을 제외하면 다들 조금씩 취기가 올라있다. 그들이 시간의 흐름을 눈치챈 것은 창밖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이 점차 주황빛이 돌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아니, 언제 시간이 이렇게…… 벌써 해가 지고 있지 않은가.”
“즐거운 시간은 빨리 흐르는 법이지요. 폐하, 오늘은 이만 환궁하셔야 할 듯하옵니다.”
“그리하지. 간만에 퍽 즐거운 시간이었네. 러트너 씨와 요정 님도 돌아왔으니, 이제 요정절을 다시 개최해도 되겠네. 하하. 올해가 가기 전에 바로 개최할 수 있도록 내 노력해봄세.”
“옥체 성히 환궁하시옵소서.”
그때까지도 러트너의 집 앞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사냥꾼 러트너가 아닌 러트너 1세 국왕이 나와서는 남의 집 앞에서 폐 끼치지 말고 돌아가라고들 명하니 그 인파도 금방 흩어진다. 드워프 대장은 술을 너무 마셔서 휘청거리느라 콜드펌의 부축을 받아 나가고, 러트니카는 아이라즈의 품에 기대 잠들어있었다. 아이라즈가 그런 러트니카를 번쩍 들고 걸어서 나간다. 드래곤과 요정마저도 나갈 채비를 하는데 데아르는 가만히 있었다.
“아빠.”
“응?”
“먼저 들어가세요.”
밖에서 기다리던 그리는 사람들을 배웅해주느라 그 말을 못 들은 러트너를 보더니 피식 웃으면서 한 마디만 남기고 나갔다.
“오냐.”
드래곤은 그냥 단어 그대로 받아들이고 별 관심 없이 하늘 위로 솟구쳐올랐다. 그때까지도 러트너는 요정을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이며 배웅하고 있었다. 그 뒤에서 데아르가 다가와 러트너의 등을 콕콕 찌른다.
“둘이 아주 누가 보면 부부사이인줄 알겠어요?”
“아냐, 부부는 무슨. 나는 요정 님 목숨 살려드렸고, 요정 님은 내 목숨 살려주셨고. 친하지 않을 수가 없을 뿐이지.”
“네, 알아요. 책에서 봤으니까. 근데 다들 요정 님, 요정 님, 하시고, 책에서도 그냥 요정이라 나와있어서 궁금해서 그런데, 존함이 어떻게 되세요?”
모두가 궁금해하는 사안이고 또 정말 요정을 곤란케 하는 질문인지라, 러트너가 나서서 대신 말해주려 했다. 그리고 요정은 그 말에 손을 내밀면서 답했다.
“데아르.”
데아르가 그 말에 대답한다.
“네?”
요정은 싱긋 웃고는 데아르가 손을 잡아 악수를 할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야 말했다.
“그이를 잘 부탁하노라.”
그리고는 자기가 먼저 손을 놓아버리고 숲 속을 향해 유유히 걸어간다. 나무껍질과 같은 색깔의 머리카락은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형태를 알 수 있다가도 눈을 한 번이라도 깜박여버리면 그대로 나무줄기에 융화되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도 없었다. 계속 멍하니 손을 내밀고 있던 데아르는 손에 남은 요정의 감촉이 사라질 때가 되어서야 소리쳤다.
“아니 존함이 어떻게 되시냐니까요!”
“자, 자. 데아르. 요정은 이름이 없대. 결혼한 요정만 이름이 있다나봐. 그래서 요정은 이름을 지어주는 게 청혼이라고 하셨어.”
“그래서 지금까지 그냥 요정 님, 요정 님 하던 거예요?”
“어차피 요정 님도 한 명밖에 안 계시니까 헷갈릴 일도 없었는걸. 너도 이제 들어가야지.”
그 말에 데아르는 러트너를 뾰루퉁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멱살을 잡고 집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문에 자물쇠를 걸고, 손잡이에 의자까지 세워 막고, 창문에는 장막을 친다. 장막의 섬유 사이로 햇살이 조금 새어들어오긴 해도 집안은 어두컴컴했다.
“갑자기 왜 이래, 불안하게.”
“오늘 집 안 들어갈 거예요.”
“그리가 걱정 안 하니?”
“아직도 내가 애인 줄 아네. 아저씨 내가 올해 몇 살인지 알아요?”
“10년 지났으니까…… 스물일곱. 아니지, 정확히는 11년 하고 10개월이랬으니까 생일 지나서 스물아홉이겠네. ……세상에, 네가 어느새 이만큼이나 컸구나.”
10년이나 지난 것 치고는 데아르는 여전히 10년 전의 모습이 군데군데 남아있다. 어쩌면 그냥 10년 전에 자랄 만큼 다 자라서 성장이 멈춰버린 게 아닐까, 러트너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엄마도 절 열아홉에 낳았다구요! 진작에 좋은 사람한테 시집가서 애낳고 집안 잘 꾸리고 살 나이인데…….”
“그러게, 우리 데아르가 참 나쁜 구석이라곤 성격밖에 없는데 사람들이 왜 안 데려갈까.”
“아우, 이 머저리같은 양반을 대체 어떻게, 돈 벌러 나간다고 하더니 10년 동안 안 돌아오는 사람만 기다리느라 다 차버려서 그랬다, 어쩔래요!”
데아르가 러트너의 가슴팍을 밀치니 러트너는 침대에 다리가 걸려 그대로 침대 위로 넘어지고, 데아르가 바로 러트너의 얼굴 위에 자기 로브를 벗어 던져버리니 시야가 완전히 가린다. 러트너는 옴싹달싹 할 수가 없었다. 얼굴을 뒤덮은 로브를 치웠을 땐 어두운 방 안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얼굴이 새빨개진 데아르가 러트너를 올라타서 짓누르고 있었다.
“아저씨 그거 알아요? 맨날 속으로는 다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모른 척 할 때마다 입술이 움찔거리는 거?”
“내, 내가?”
“또 또 움찔거리는 거 봐. 진짜 얄미워. 나 말고 이런 거 아는 사람 누가 있다고…….”
그 말에는 찬반이 반반씩 공존하느라 러트너가 뭐라 할 수가 없었다. 분명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긴 알았지만, 자기 입술이 움찔거린다는 얘기는 전혀 몰랐다. 자기보다 자신을 더 잘 아는 데아르에게 약간 소름이 돋는다. 벨트로 허리를 꽉 조여맨 데아르는 평소에 자기가 아는 그 양조장 딸아이가 맞나 싶을 만큼 요염해보인다. 그런 여자가 수염이 덥수룩한 러트너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는다. 손에서 느껴지는 맥박만으로도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있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러기는 러트너도 마찬가지다. 서로의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리가 이거 알면…….”
“이미 아세요.”
러트너의 그 얄미운 입술을 데아르가 자신의 얼굴 쪽으로 당겨간다. 러트너는 데아르의 튜닉 허리띠를 풀고 단추를 하나 둘씩 끌렀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눈을 감는다.
[오마에에에엣! 똥닌게에에엔!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있는데스! 당장 튀어나오란데샤아아아아아앗!]
그리고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방금까지 자신들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깨달아버리고 만다. 데아르는 러트너의 얼굴을 놓았고, 러트너도 단추를 다 끄른 데아르의 튜닉에서 손을 놓는다. 서로 당황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가운데, 밖에서 들리는 소리만 요란했다.
[와타시가 튀어나오라면 당장 튀어나와야지 안 나오고 뭘 꾸물대는데샤아아아아앗!]
“아, 으, 아, 아으으으으으으으! 저 분충새끼 진짜아아아아아아!”
데아르가 튜닉 단추를 다시 채우지도 못한 채 자기가 직접 걸어잠근 문을 박차고 뛰쳐나간다. 그 문 앞에는 하늘에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다는 듯 당당한 자세로 데아르를 올려다보는 실장석이 한 마리 있었다.
[감히 이 세레브한 와타시가 명하는데 후딱후딱 나오지 않고 뭔 지랄인데스! 이곳에서 와타시의 자의 냄새가 나는데스. 와타시의 자를 받기로 한 이상 오마에는 와타시를 받아야만 하는 의무가 있고 와타시의 행복권을 보장해야 하는데스! 이건 오마에가 거부할 게 아닌데게뱟!]
옷이 반쯤 풀어헤쳐진 데아르는 장홧발로 문 앞의 실장석을 짓밟으며 수도사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장화를 한 번 찍을 때마다 실장석의 팔다리가 부러지고, 이내 한계를 넘어 짓밟힌 팔다리는 너덜너덜해져서 팔다리의 기능을 할 수 없는, 그저 덜렁이는 고깃덩이에 불과했다. 러트너도 허둥지둥 데아르의 로브를 챙겨서는 문앞으로 나가 데아르에게 먼저 로브부터 걸쳐준다.
“자, 자, 데아르, 들어가있어. 이거는, 이거는 내가 처리할게.”
“진짜, 진짜 거의 다 와서 이게 무슨…… 아후! 아후……. 저거 아주 내장을 뽑아서 그 내장으로 목을 매달아버려요!”
[데헤에에에에에에에에에엥…… 데헤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엥…….]
혹시나 누가 보기라도 할까 데아르를 등으로 밀어 집안으로 들여보내고 자신은 마침 문 옆에 있는 소쿠리를 집어 그 안에 실장석을 밀어넣었다. 거사를 앞두고 몸에 실장석의 기운 따위는 묻히고 싶지 않았다. 그 소쿠리를 짊어지고, 고기 써는 손칼을 꺼내든 러트너는 집에서 가까운 개울로 향했다. 평소에는 무릎 깊이고 비가 와서 물이 불어도 러트너의 허벅지 이상으로 올라오지 않는 얕은 개울이었다.
[와타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데스……. 이런 횡포 용납 못하는데스……. 똥닌겐은 다 죽여버릴것인데스……. ]
소쿠리 안에서 실장석이 세상이 망한 듯 서럽게 울며 똥을 싸대는 소리가 들리니, 러트너의 머릿속에 잠재되어있던 기억이 새록새록 깨어난다. 자신의 죄를 모르는 생물, 자신의 행실을 모르는 생물,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생물. 실장석은 아는 게 없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 뿐이지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실장석에게 당한 치욕을 평생 잊지 못하며 살아가지만, 실장석은 자신이 당한 치욕도 은혜도 모두 잊어버린다. 오직 본성만이 남아있다. 자신이 아니면 모든 것이 의미없다는 추악한 본성만이. 데아르는 실장석을 처참하고 끔찍하게 죽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러트너는 알았다. 자신의 처지가 처참하고 끔찍해질수록 실장석은 행복을 느끼며, 그 처지가 극에 달해 죽을 때면 황홀경으로 죽을 뿐이다. 이 아무 것도 모르는 생물들은 자신이 누군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다른 이들의 관심을 바라는 것 같았다. 러트너는 그런 최후는 바라지 않았다.
[오마에! 그 똥닌겐을 당장 와타시 앞에 대령하란데스! 그 자의 눈깔을 뽑고 내장을 가른 다음 머리를 잘라서 내장 속에 처박아버릴 것인데샤악! 오마에는 와타시를 보살필 의무가 있는데샤, 데, 데뎃? 데, 데고로로로록! 데보로로로로로록!]
러트너는 실장석을 개울 속에 던졌다. 원래 수영도 못 하고, 수영을 할 수 있다고 해도 팔다리가 다 끊긴 실장석이 물 속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나마 투실투실하게 찐 살 덕분에 몸이 물 위로 뜨는 게 고작이다. 그리고 물 위로 뜨는 부분은 오직 눈 뿐이라 물살에 휩쓸려 가면서도 실장석과 러트너는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베고로로로로로록, 데부루루루루룩…….]
실장석의 눈에서 인간을 향한 극한의 증오가 느껴졌지만, 러트너는 그런 감정을 대놓고 무시한 채 개울에 손을 씻었다. 물살을 따라 실장석의 소리는 멀어졌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얼마나 흘러갔는지도 관심 없이 러트너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 관심을 주지 않는 게 최선일 거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집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옷가지를 전부 의자 위에 걸어놓은 채 침대 이불 속에 누워있는 데아르가 있었다.
“분충 하나 잡는데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요?”
“손 좀 씻느라고. 분충 만지면 더럽잖아.”
“역시 아저씨라니까. 아저씨, 양바니가 생명의 신인 거 알죠?”
“알지. 왜?”
“고치는 것 뿐만 아니라 만드는 것도 잘 한다고요.”
10년만에 찾아온 자기 집의 문을 걸어잠그고, 의자까지 문앞에 대어놓아 출입을 확실히 막는다. 그날 러트너의 집 안을 들여다본 사람은 없었지만, 그날 러트너의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와이드스트림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전국으로 소문이 퍼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러트너의 귀환 후 몇 주가 지났다. 실장석의 존재와 이들의 행적, 셀 수 없이 많은 희생과 다시는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입은 끝에, 알려진 모든 세상에서 실장석을 향한 증오심은 커져만 갔다. 실장석의 존재를 불허하는 법률이 각국마다 하나씩은 있었고, 실장석만을 처치하는 제2, 제3의 키아시토 사단이 이름은 바뀔지언정 그 역할은 바뀌지 않은 채 세계에서 실장석의 존재를 지워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장석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으며 세계와의 균형을 이뤄나갔다. 실장석은 쥐와도 비슷한 존재로 전락해갔다. 어떤 면에서는 쥐보다도 못했다. 쥐는 위험이 닥치면 숨거나 도망칠 줄도 알았고, 인간에게 직접 모습을 드러내 인간을 공격하거나 도발하지도 않았고, 쥐똥 냄새에 산송장이 이끌리는 일도 없었고, 적어도 귀여운 구석은 있어서 키우는 사람이라도 있었으니까. 점차 인간의 도시에서 실장석이 모습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실장석의 존재가 허락되는 곳은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닿을 가치가 없는 곳 뿐이었다. 인간의 손길도 받을 수 없는, 손재주라고는 없는 실장석의 손과 사회성이라고는 없는 실장석의 머리만으로 자신들의 문명을 일구어 나아가야 했다. 노동이라는 고난을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었던 실장석들은 모두가 낙원을 꿈꿨다. 이상하게도 그 낙원의 모습은 모든 실장석에게 똑같이 보였다. 황금빛 광채로 눈부시게 빛나는, 마치 신과도 같은 실장석에게 모두가 동등하게 지배되는 세상. 실장석은 인간과도 같이 부와 사치와 유흥을 책임없이 마음껏 누리며, 인간은 실장석같이 하루 하루 먹고 살기에도 급급하게 생을 이어나가면서도 정당한 권리조차 누릴 수 없는 세상. 실장석들의 평등이란 그랬다. 그런 행복한 상상이 유일한 삶의 낙이 되어 실장석들의 존재를 계속 이어나갔다. 오늘 밤에도 내일은 낙원이 도래할 것을 꿈꾸며 수많은 자를 낳았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필사적으로 노력한 끝에 두르마르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나갔고, 이제는 오래 전 단 한 번 열린 이후로 다시는 열린 적이 없었던 요정절마저 다시 개최됐다. 축제의 이름은 여전히 요정절이었고, 축제에 요정이 참여하는 것도 다르지 않았지만, 올해는 크게 다른 것이 있었다. 올해의 요정절 주인공은 요정이 아니었다.
“어때, 몸에 딱 맞지?”
“드워프 솜씨를 누가 의심해요?”
“자, 거울 한 번 봐라. 야, 옷이 날개라더니, 이건 진짜 날개도 달려있다고. 죽이지 않냐?”
머리와 수염도 단정하게 정리하고, 평소 잘 걸치지도 않는 로브까지 두른 러트너는 겉모습만 보면 귀족이나 왕족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어떤가, 러트너. 내 허물은 몸에 잘 맞는가?]
“뭔가, 신랑이 아니라 전설의 용사가 된 기분인데요.”
“그대로 입고 나가면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해도 돼. 자 봐라?”
“어어! 어어어!”
드래곤은 매년 허물을 벗고, 평소에는 자기가 벗은 허물을 그대로 먹어치우지만 올해는 그 허물을 드워프 대장 날림캠이 직접 재단하여 옷을 두 벌 만들어냈다. 그중 한 벌이 바로 러트너가 입고 있는 검은 옷이다. 보이지 않는 드래곤의 허물은 드래곤의 화염으로 잘 그슬리니 비늘 무늬가 선명하게 보이고, 그 무늬에 빛이 반사되어 번쩍번쩍 화려했다. 드래곤 허물로 옷을 지어준다고 하니 입이 떡 벌어지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대장은 마침 옆에 있던 머리 정리하는 가위를 들어 러트너의 옷 위에 바로 찔렀다. 러트너가 기겁하며 물러났지만 가위에 속절없이 찔리고 말았는데, 눌리는 느낌만 조금 있을 뿐 아프지는 않았다.
“봤지? 시험을 좀 해봤는데, 쇠구슬탄까지 막더라고. 활동성 좋게 만들었으니까, 어디 목숨 위험할 것 같다 싶은 곳 갈 땐 이거 입고 가.”
“제발, 사람 찌를 때는 말이라고 하고 찌르시든가요!”
“그래서 자 봐라, 하고 말해줬잖아! 자식 까탈스럽긴.”
“가위도 안 드는 허물을 어떻게 옷으로 만드셨어요?”
“드래곤 이빨로.”
“아.”
그렇게 옷을 다 차려입은 러트너는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대기실을 몇 바퀴 돌다가, 밖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그에 맞춰 러트너의 부담감도 점점 커진다. 그렇게 돌고 있는데 누군가 러트너를 찾아온다. 드디어 나갈 때가 된 건가,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다름 아닌 러트너의 친지들이었다.
“러트너 씨! 결혼 축하드립니다!”
“이생물학파장님! 아이구, 콜드펌 님에 피시스에 님도. 와줘서 고마워요. 사실, 안 올 리가 없을 거라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이 역사에 길이 남을 큰 행사에 불참하다니 실로 불행한 일 아니겠습니까. 저, 명목적으로는 드래곤의 동행인으로 온 겁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안 와요? 난 이 동네 사는데.”
“러트니카랑 아이라즈는요?”
“신부 대기실에. 당신 오늘 장가 가는데, 다른 여자한테 신경 쓰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죠. 가만있을게요.”
니파티 사태 까지만 해도 떨어질 일이 없었던 이들, 니파티 사태 이후로는 오히려 더 만나기 힘들어진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니 그 감회가 새롭다. 그간 풀지 못했던 이야기도 풀고, 이 세월이 되도록 다 같이 결혼을 못, 또는 안 하고 있는 와중에 먼저 결혼하게 되는 러트너를 향한 축하와 애도도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있을 수 없는 두 명을 위해서 이것도 준비해왔습니다.”
이생물학파장 쿱이 그 말을 하며 꺼낸 것은 둥근 수정구였다. 가락지 낀 손가락을 튕기고 수정구 위에서 빙글빙글 돌리니 수정구 안이 김이 서리듯 뿌옇게 변하다가 그 안에서 익숙하고 창백한 얼굴 둘이 나타난다.
[안녕하세요, 러트너 님!]
[야! 요정 오라비! 장가간다며! 아, 이걸 내 눈으로 직접 못 보네. 진짜 아깝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에립마브 내외 아니야?”
책상 위에 말라붙은 실장석 시체가 널브러진 채로 고드니스와 에립마브가 박수까지 쳐주면서 러트너를 축하해주었다. 흡혈귀에게 결혼 축하를 받다니 데아르가 알면 가만 안 두겠지, 러트너는 고마워하면서도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요정 오라비라길래 당연히 요정한테 장가 가겠지 싶었는데, 무슨 양바니 수도사랑 눈이 맞았냐? 이젠 양바니 오라비야 아주!]
[그러게. 요정 님이 어디가 마음에 안 드셨어요? 요정 님이 러트너 님이 마음에 안 드신대요?]
“요정은 기운이 너무 좋아서 인간이 첫날밤을 못 버틴대요. 그래서 요정 님이 절 포기하셨어요.”
[어머, 어머. 어머. 그랬구나. 어머.]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쉽네요. 여기 오셨으면 했는데.”
[시집가는 자리에 흡혈귀가 끼어있으면 분위기 다 깨지는데, 양바니 수도사 결혼식이면 오죽하겠어요? 그래서 원래 선물도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고드니스가 수정구 앞으로 무언가를 들어보이는데, 실장석의 마력동석으로 만든 장신구였다. 마력동석은 정교한 모양으로 면을 수백 개를 깎아놓았는데, 저 돌을 다 빼내려고 얼마나 많은 목숨을 앗아갔을지, 보기만 해도 흐뭇했다.
[근데 흡혈귀한테 선물 받았다고 하면 그것도 그렇잖아요. 그래서 그냥 축의금만 보내기로 했어요.]
[쿱한테 받아. 알아서 내줄 거야. 야 쿱! 이 통신구 창가에 놓는 거 빼먹지 말고! 결혼식도 꼭 녹화해야 한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보고 싶어서라도 하나도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그때 시종들이 안으로 들어오니 쿱은 급히 수정구를 천으로 덮었다. 시종들은 곧 시작한다며 하객들을 자리로 인도하고자 했다. 쿱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뒤 인사만 하고 나가겠다며 시종들을 잠시 물렀다. 그리고 바로 수정구를 덮은 천을 다시 거둔다.
[곧 시작한다네! 이야, 이제 총각이 아니라 유부남 러트너다.]
“내가, 내가 진짜 장가를 가긴 가는구나.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구나.”
[잘 지내고! 마누라 때문에 놀러오기는 힘들겠지만, 가끔 편지는 써 인마! 쿱 앞으로 쓰는 거 잊지 말고.]
“당연하지! 너도 잘 지내!”
드래곤과 드워프 대장까지 하객의 자리에 참석하고자 나가고, 러트너만 혼자 남은 가운데 왕궁의 시종들이 그를 데리러 왔다. 목이 메어서 침도 잘 넘어가지 않을 정도다. 심장 소리에 다른 소리가 모두 묻혀 들리지 않고, 그는 그저 앞선 시종의 뒤통수만 보면서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눈부신 태양이 러트너를 비추어 눈살을 찌푸린다. 정신이 확 들자 귓가에 울리는 것은 각국에서 모인 수십만 하객의 환호 소리였다. 왕궁에서 트루피아의 광장으로 향하는 길까지 붉은 융단이 쫙 깔려있고, 그 융단 위로 형형색색의 꽃잎이 휘날렸다. 만인의 환호와 시선을 받으며 융단을 따라 걷고 걸으니, 신랑 신부가 가장 가깝게 잘 아는 이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잘 아는 얼굴들이 앉아있다. 데아르의 친지 중 부모 되는 그리와 소피아는 흐뭇한 얼굴에 손수건을 한두 번씩 갖다대고 있었다. 그 끝에는 이 계절에 필 수 없는 꽃들로 화려하게 치장된 아치 아래 누군가 서있다. 이번 요정절의 주 행사, 러트너의 결혼식에 주례를 맡아줄 성직자와 두르마르의 국왕이었다.
“러트너. 옷이 아주 잘 어울리는구나.”
“감사합니다, 요정 님.”
“신랑, 긴장한 티가 역력하네.”
“보는 눈이 이렇게 많으니, 말해 무엇하겠사옵니까.”
“이번에는 두야호라 할 일 없느니라. 그대는 이 몸이 하는 말에 크게 대답만 하거라.”
루노의 성직자로서 주례 자리에 선 요정은 흐뭇하게 웃으며 러트너의 모습을 긴밀히 눈에 담은 뒤 외쳤다.
“신부는 입장하거라!”
궁중악단의 우렁찬 나팔 소리가 들리고, 러트너가 걸었던 길을 따라 새하얀 드레스를 걸친 이가 걸어온다. 러트너와 마찬가지로 드래곤의 허물로 재단했으며, 드워프의 감각이 가미돼 날개와도 같은 장식이 달린 옷을 입고, 풍성한 꽃다발을 든 데아르는 순백의 드래곤 같았다. 긴장 속에도 서로의 얼굴을 보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신랑과 신부가 제자리에 서자 악단의 연주는 멈추고, 환호성이 가득하던 도시도 조용해졌다. 그 적막함 속에 주례의 말이 이어진다.
“이 몸이 그대들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내었던 날, 이 몸을 환대하고자 축제를 열어주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하느니라. 모두가 큰 아픔을 겪었으나, 그날의 영광이 오늘 다시 찾아왔노라. 이 모든 것이 그대 러트너의 공이자, 세상의 희망을 놓지 않은 그대 모두의 공이라. 이 몸은 루노를 따를지라도, 오늘은 모든 신의 이름을 빌어 모두를 축복하노라!”
그 말에 곳곳에서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잠깐 울리다가 주례가 손짓하니 금세 그친다.
“자연과 이치의 신 루노께서 그대들의 앞날을 자애로써 보살피시기를 기원하고, 운과 운명의 신 아렌지께서 신랑의 운명을 가지고 노시었고, 생명과 죽음의 신 양바니께서 신부의 삶을 이끄시었으니 이제는 그대들의 생에 오로지 행운과 번영만이 가득하기를 바라노라. 집안이 번영하려거든 부부가 같이 화목하여야 할 것이야. 신랑 러트너.”
“네, 네!”
“어허, 소리가 작구나. 신부를 사랑하는 만큼 크게 소리치거라.”
“네에엣!”
“그대는 신부 데아르 콜라를 평생의 배필로 맞이할 것을 맹세하겠느냐?”
“네에에엑!”
목에 힘을 주어 소리치다가 소리가 약간 엇나가자 주례와 하객을 포함한 모두가 폭소한다. 러트너도 머쓱해서 그냥 활짝 웃었다.
“목청 한 번 좋구나. 그래, 신부 데아르 콜라.”
“네!”
“또랑또랑하니 당차도다. 그대는 신랑 러트너를 평생의 배필로 맞이할 것을 맹세하겠느냐?”
“네!”
대답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주례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무리는 국왕의 몫이었다.
“이로써, 신랑 러트너와 신부 데아르 러트너는, 신의 축복과 국왕의 명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하겠다!”
수십만의 관중에게서 나오는 환호성은 절정에 달했다. 데아르와 러트너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아 입을 맞췄고, 그와 함께 지금껏 겪었던 모든 고생이 쏜살같이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러나 잊을 수 없고, 잊어서는 안 되는, 다른 세계에서 찾아온 불청객 실장석의 값어치도 없는 마력동석을 팔기 위해 집을 떠났다가 실장석에 의해 세계가 멸망할 뻔한 위기를 막아내고 금의환향한 이야기. 어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을 실장석과 환상같은 이야기.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그 모든 고생이 현실이라는 사실, 그 모든 것이 실장석이라는 작고 더러운 괴물 하나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자신이 별 이상한 미친놈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는 실장석을 증오하면서 감사했다. 세상은 점차 실장석이 있는 그대로의 평화에 물들어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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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진짜 끝입니다. 완결이에요.
처음 기획은 100편으로 잡아놨는데, 쓰다보니 100편으로는 택도 없을 것 같아서 쳐내고 쳐내고 쳐냈는데 결국엔 100편을 조금 넘겨버렸네요. 그러다보니 스토리가 맥락이 안 맞는 것도 있고, 산으로 가고, 급발진하고, 처음에 쓰던 거랑 비교하면 설정 안 맞는 부분도 있고, 난리도 아니었고요. 쓰고 싶었던 얘기도 참 많았는데, 쓰다가 대학까지 졸업해버리니 백수가 되어버려서 현생도 챙겨야 했고요. 거기다 원래 쓰려던 이야기가 쓰다보니 도무지 개연성이 안 맞길래 바꾼 것도 있고, 그래서 지금 엔딩도 원래 구상하던 것과는 많이 바뀌었지요. 당연히 아쉬운 부분도 많고, 아예 갈아엎고 다시 쓰고 싶은 부분도 있고요. 그래도 완결을 지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족합니다. 지금까지 이 곶통스러운 독자학대물을 103편, 2년 가까이 봐주신 여러분께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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