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카오스 럭키짱 천일모험기를 능가하는 진정한 판타지 실장석 참피 소설 실장석과 환상 82화 : 동맹
“모두 안으로 들어와요! 빨리!” “늦으면 죽어! 빨리빨리 들어가!”
가이더링 전체에 소름을 돋게 하는 소리가 울린다. 아파트 옥상 위에 떠있는 마력구체들이 주기적으로 원래의 알록달록한 색에서 붉은 빛으로 변했다가 다시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으면 무슨 수를 써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가이더링의 관문도 활짝 열려 줄지어 선 모두를 누구건 상관없이 받아들였다. 온갖 수레와 마차와 난민, 윌로우플랫의 주민들까지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간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새도 없이. 길을 막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았다. 전투마법사와 흑마법 심문관들의 절제된 무력 앞에 길을 막는 존재는 지위고하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길 앞에서 무조건 치워진다.
[공성 경보, 공성 경보, 시민 여러분은 모두 가까운 건물 안으로 피신하십시오. 공성 경보가 해제되기 전까지 건물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다시 알립니다. 시민 여러분은 모두 가까운 건물 안으로 피신하십시오. 공성 경보가 해제되기 전까지 건물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안으로 들어와요!” “여긴 꽉 찼어, 다른 건물 찾아봐요!” “으아, 으아, 으아아!”
신분증이 있어야만 출입할 수 있는 가이더링의 건물도 일부를 제외하면 지금은 가리는 사람이 없다. 관문에서 가장 가까운 건물부터 점점 멀리, 여관이든 상점이든 화장실이든 구분없이 사람들이 들어찬다. 사람들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얼마나 안전한지는 실제 상황이 닥치기 전에는 고려상황이 아니었다. 전투마법사들은 일단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보이는 건물이면 난민들을 밀어넣고 보았다.
“이봐요! 당신들도 빨리 들어…… 러트너 씨! 밖은 위험합니다, 어서 건물 안으로 피신하세요!” “안 그래도 가는 중이에요!”
러트너 일행도 다급히 공간조율학파를 향해 뛰어갔다. 지금 상황에서는 유일하게 몸을 맡길 수 있을 곳이다. 가장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학파의 아파트들은 아주 일부를 제외하면 난민들에게도 굳게 닫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공간조율학파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부류중 하나였다. 러트너 일행이 들어가는 걸 보면서 문을 두드리는 난민들이 있었지만 그런다고 문이 열리지는 않는다.
“여긴 제한구역입니다! 돌아가세요!” “저기도 제한구역이래서 돌아온 게 여긴데 여기도 제한구역이면 대체 어디를 가라는 거야!”
러트너 일행은 아무도 상의하지 않았음에도 모두가 포니카를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생각대로 차원문 실험실의 포니카는 잠이 깨서 아이라즈에게 안겨 벌벌 떨고 있었다.
“포니카!” “아저씨이이이……. 으아아앙…….” [러트너, 설마 그건가?] “……네. 그거에요.”
아이라즈가 포니카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아이라즈도 포니카 못지 않게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길드 마스터가 분명 멋지게 해치워주실 거야.”
러트너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한 명임에도 이렇게 막연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쿱과 콜드펌도 기도문을 읊으며 나뮈에게 안위를 바라는 기도를 올리는 가운데 리베라나만은 실험실에 들어가지 않고 있다. 리베라나는 학파장을 찾고 있었다.
“학파장님!” “……고드니스.” “지금…….” “알아.”
학파장 카부스는 초췌해보인다. 그는 학파장의 마법봉을 손에 땀이 나도록 움켜쥐고 책상을 두드리던 중이었다. 그의 두 눈이 파르르 떨리고 입술은 바짝 말라 부르터있었다. 갈라진 입술이 움직이며 일으킨 바람은 미약하게나마 ‘왔나’ 라는 소리를 흉내냈다.
“대 드래곤 주문은 완성됐다니?” “……아직…….” “……그래.”
카부스는 떨리는 손으로 책상 위에 놓여있던 잔을 들어 힘겹게 한 모금을 마셨다. 입가에 묻은 액체는 피처럼 검붉은 색이었다.
“난 괜찮으니까 다른 애들은 네가 챙겨줘.” “그럼 다 한 곳에 모아놓을게요. 여차하면 대피하기 쉬운 곳에. 1층은 너무 낮은가. 2층? 아니면 지하 1층 연구소면 될까요?” “네 판단을 믿으마. 지금 나는…….”
카부스는 자신의 품을 뒤져 학파장의 증표를 꺼내 책상 위에 놓고 리베라나 쪽으로 밀었다.
“이것도 챙겨가고.” “학파장의…… 이걸 왜……?” “다른 애들이 날 찾거든 네가 대신 좀 전해줘. 이 학파장은 할 일이 있어서 학파장실에 남아있겠다고.” “네, 네. 그렇게 할게요! 일 다 끝나면 밑으로 내려오세요! 늦지 마시구요!”
리베라나는 학파장의 증표를 자기 명예마법사의 증표보다도 소중하게 챙겨서 학파의 모든 곳을 뒤지러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돌아다녔다.
“오들라오 님!” “마스터, 상황은?” “그 분충이 여기로 와요!” “쳇, 언제 오나 했네.”
흑마법 심문소의 깊은 곳에서도 들을 수 있는 경보 소리에 오들라오도 밖으로 뛰쳐나오고 마침 흑마법 심문소로 찾아오던 길드 마스터와 마주쳤다. 오들라오의 손에는 큰 융단이 하나 들려있었다.
“예정 시간은, 아니, 그런 건 의미가 없지. 어차피 도착하면 끝인데.” “실지 시험이자 마지막이 되겠네요.” “가이더링 중심지가 어디야. 행정 말고 지리적으로.” “광장이에요. 저쪽!”
길드 마스터는 오들라오를 이끌고 가이더링의 중심지를 향해 달려갔다. 물리차단막을 빗면으로 세워 앞을 막는 사람들은 옆으로 치워내고, 물리차단막으로 치워낼 수 없는 것은 오들라오가 힘으로 치워냈다. 가는 길에 길드 마스터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지만 다들 대피하기 바빠 신경도 쓰지 않는다. 딱 두 사람을 빼고.
“마스터!” “피시스에!” “마스터, 저희도 있습니다!” “유크니 심문관님! 빨리!”
그것으로 인사를 마치고 함께 달렸다. 오들라오가 피시스에를 한 번 째려본다. 딱히 표시가 되어있지는 않지만, 더 가이더링 길드의 지리상 가운데에 위치한 샛별바라기 광장은 여러 학파장과 고위 전투마법사, 흑마법 심문관들에게는 중요한 전술 전략적 거점이며 지하에 민간인들은 알지 못하는 마력 공급 설비가 깔려있었다. 다름 아닌 마법진의 중심을 차지하는 자리다. 흑마법 심문관들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강제로 쫓아내며 광장에 단 한 명도 남겨두지 않았다.
“당장 광장에서 물러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이건 명령입니다! 두 번 말하지 않습니다!”
대 드래곤 주문이라고 해서 다른 것은 주문서의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길드 마스터는 살면서 이렇게 큰 주문서는 처음 보고, 이 주문서가 계획했던 크기를 한참 줄인 것에 더해 아직 미완성본이라는 사실에 걱정하고 있었다. 둘둘 말린 두루마리를 펼치자 광장의 끝에서 끝까지 닿을 정도다. 그 펼쳐진 주문서의 가운데에는 원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오들라오가 그 위에 가서 올라앉으니 수석심문관 로티스 유크니가 광장의 정해진 위치에 심문관 열 명을 세웠다. 특정 신분의 증표를 평범해보이는 소품이나 장식물에 가져다 대면 숨겨진 단추가 드러나고 열 명의 심문관이 셋을 세며 동시에 단추를 누른다. 그러자 광장에 깔린 벽돌 틈새로 빛이 새어나왔다. 광장 하나가 거대한 마법진처럼 기능한다. 그 마법진이 대 드래곤 주문서에 마력을 채우며 그려진 도식을 따라 빛을 채운다.
“강한 힘…… 강한 책임……!”
오들라오가 가부좌를 틀고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니 도식에만 차오르던 빛이 주문서 전체를 채워나간다. 그러나 그 속도는 심각하게 느렸다.
“머리님, 얼마나, 얼마나 걸리죠?” “기도 끊지마!” “네, 네.”
그저 빨리 되기를 바라고 있으니 기다리는 시간이 더욱 길다. 대피하던 사람들이 광장에 홀로 앉은 오들라오를 보고 기대감에 가득 차있으면 심문관들이 이들을 쫓아내며 어떻게든 건물 안으로 밀어넣는다. 공중에 신호탄을 쏴대는 위협사격도 서슴치 않았다.
[마스터!] “뭐야, 누구야!” [위에요!]
길드 마스터의 머리 위에 통신기가 떠다닌다. 길드 마스터의 금빛 오리알과는 다른, 얼굴이 다 비칠 정도로 매끄럽게 반짝이는 은빛 오리알이다. 인공생물학파장 노일람의 전용 통신기였다.
[완성 안 됐다면서요?] “그렇다고 가만 있을 순 없잖아!” [아무튼, 지금 감시충에 모습이 잡혔어요!] “방향이랑 시간!” [방위는 동쪽, 빠르면 30분요.] “어떻게든 늦출 수 없어?” [감시충 죄다 들이박으면서 막아보려는데 안 먹혀요!] “뭐든 좋으니까 최대한 늦춰! 거리도 제때제때 보고해주고!” [얼마나 걸리는데요?] “몰라!”
길드 마스터는 해가 떠있는 위치와 시간을 확인하고 동쪽을 주시했다. 지금은 해밖에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도 계속 해만 보이기를, 마스터가 빌었다. 인공생물학파장 노일람은 학파 아파트에서 날려보낼 수 있는 인공생물은 죄다 동원해서 지금 가이더링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니파티를 방해하고자 애를 썼다. 감시충으로 들이받거나 시야를 가려도 보고 인공 까마귀 떼로 크고 무서워보이는 괴물 형상을 만들어보지만 니파티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니파티가 지나가는 길을 막는 인공생물은 크기와 종류를 막론하고 허무하게 떨어졌다.
“안 되겠다, 물리적으로 막을 수 없다면 도발이라도 해보자.” “저걸 도발했다가 무슨 화를 입으려고요!” “입어봤자 좀비밖에 더 되겠어!”
출동한 인공생물 중 음성을 재생할 수 있는 인공 조류와 광학 마법으로 환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인공 나비의 조종에 집중한다. 그는 실장석에 대한 지식에 별로 관심이 없어 무슨 말을 해야 도발을 할 수 있을지 잘 몰랐지만, 실장석들이 정말 싫어하고 입에 늘 담는 말 하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나비들이 넓게 모여 날개를 붙이니 하나의 커다란 화면이 만들어졌다. 그 화면이 니파티의 추한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며 인공 조류가 소리친다.
[야, 분충!]
그 효과는 굉장했다.
[어느 건방진 상분충이 감히 아타치를 분충이라 부르는테챠아아아아앗!]
조류와 나비들은 그 음성을 재생하고 산산히 부서져 떨어진다. 니파티는 그 화면을 부수기 위해 잠시 멈췄으며 노일람이 무릎을 탁 치면서 소리쳤다.
“옳거니 이 분충 새끼! 딱 걸렸어!”
여전히 가이더링에서는 수많은 인공생물들이 날아오르고 있었고 조류와 나비의 수는 셀 수도 없었다. 수많은 인공생물들이 니파티의 주위를 선회하고 니파티의 얼굴을 비추면서 똑같은 말을 계속 소리친다.
[야 이 똥벌레 새끼야!] [분충이라는 말에 과민반응하는 거 보니까 저거 진짜 상분충이야!] [자기가 분충이라는 게 찔리는 거지?] [자기는 분충 아니라는데 하는 짓거리는 인간보다 못한 거 봐라!] [추하다 추해! 노예가 보기에도 추하다!] [야, 이거 보여? 이게 네 얼굴이야! 네가 봐도 웃기지 않냐?]
일단 한 번 욕에 탄력이 붙으니 인간들의 도발은 창의력을 붙여가며 니파티를 타박했다. 니파티는 대놓고 쌍욕을 박는 쪽보다 니파티를 분충이라고 매도하는 쪽에게 더욱 신경질적으로 반응했고 그 반응으로 학습해가며 더욱 신이 나서 니파티의 자존심을 긁는다.
[똥노예가 주제파악도 못하고 감히 주인에게 기어오르는테챠아아아아아아악!]
니파티의 염화술은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인공생물에겐 통하지 않았다. 인공생물을 통해 바라본 니파티는 얼굴이 추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일그러져서 신경질을 내며 인공생물을 부수고 있을 뿐이다.
[인간 노예로 삼겠다더니 우리는 어떻게 하지도 못하네?] [무능하다 무능해. 할 줄 아는 건 쥐뿔도 없는 무능한 분충이야.] [아이구 화났어요? 화났어요? 화났는데 어쩌라고? 네가 화내면 세상 모든 일이 네 뜻대로 될 것 같지?] [우린 상관도 안 해, 분충 새끼야. 아 꼬우면 인간 하시든가?] [테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니파티는 마구잡이로 마력을 휘두르며 날아다니는 것이라면 일단 떨어트리고 보았다. 그 때문에 인공생물이 아닌 진짜 새도 날아가다 떨어지는 등 피해가 있었다. 인공생물들은 니파티를 도발하면서 경로를 가이더링에서 멀어지도록 틀어보려했다. 하지만 니파티가 눈으로 쳐다보기만 해도 인공생물들이 뚝뚝 떨어져 별로 효력은 없었다.
“아오, 저 분충 새끼 진짜!” “제자리에 묶어놓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이대로만 계속 해!”
니파티에게 직접 인공생물을 보내는 동시에 경보용으로 쓰이는 인공 말똥가리를 가이더링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멀리 보냈다. 확성 주문이 걸려있어 다른 인공생물에 비해 훨씬 큰 소리를 훨씬 멀리서 낼 수 있었다.
[야 분충 새끼야!] [죽으란테챠아아아앙!]
그러나 니파티를 끌어내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인공생물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거리는 전부 니파티 손바닥 안이었다. 더욱 신경을 긁을 수 있는 창의적인 욕설을 떠올리려 모두 두뇌를 굴려보지만 니파티는 창의적인 욕설을 알아듣지 못해서 원색적인 비난에만 민감하게 반응했다. 노일람은 인공생물의 재고를 확인하고는 다급히 통신기를 통해 말한다.
[마스터! 인공생물 재고가 얼마 안 남았어요! 준비 얼마나 됐어요!] “나도 몰라! 그냥 될 때까지 끌어줘!” [미치고 팔짝 뛰겠네 정말!]
길드 마스터도 오들라오가 앉은 주문서에 빛이 계속 차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빛이 차오르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것이 착시인지, 아니면 지금처럼 빛이 차오르지 않는 상태가 제대로 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다가 주문서의 빛에 하나 둘씩 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 오! 이제 뭐가 된다. 이제 뭐가 된다!”
아주 잠깐 환호의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그 점 하나를 끝으로 다른 점이 나타나지 않고, 주문서에서 제대로 그려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깨닫는다. 다름아닌 오들라오의 쌍코피였다.
“머리님!” “수도사들은 빨리 머리님께 붙어라!”
흑마법 심문소 소속의 전투수도사들이 그 즉시 오들라오에게 달라붙어서 몸에 손을 대고 생명력을 나눴다. 생명의 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힘의 신에게서 빌린 힘은 산전수전 다 겪은 흑마법 심문관으로서도 제정신으로 버티기 어려웠다. 모두가 참을 수 없어 입 밖으로 힘겹게 끄윽 소리나 내고 있는 가운데 오들라오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 힘을 견뎠다.
“대체 어떻게 이런 걸 홀몸으로……!” [마, 마스터! 마스터!] “또 뭐야!” [그 분충이 또 움직여요! 예정시간 20분!]
원색적인 비난을 듣고 또 듣던 니파티는 화가 폭발할 대로 폭발해서 날아다니는 것이라면 무작정 떨어트리고 보았다. 인공생물들이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날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챈 니파티는 그 방향을 향해 굵직한 광선을 쏘았다. 그 광선은 더 가이더링 길드의 창공을 가르며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허억!”
건물 안에 들이찬 피난민들의 비명이 들려왔지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창공을 가르는 광선을 본 순간 나오려던 말도 쑥 들어간다. 두려움과 기대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마, 마스터! 아까 광선 봤어요?] “그걸 어떻게 못 보겠어.” [그 광선이 인공생물을 거의 다 떨어트렸어요! 더 늦출 수가 없어요!] “미치고 팔짝 뛰겠네 진짜.”
분노로 얼룩진 니파티는 노일람이 길을 막아서기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노일람이 황급히 예상 시간을 세어주는데 그 속도를 가늠할 수 없어 시간이 제멋대로 바뀐다. 그러다 그 어떤 인공생물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날아 니파티를 놓쳐버렸다.
[도착 예정시간 앞으로, 20분, 아니, 10분, 15분? 마, 마스터! 너무 빨라서 놓쳐버렸어요!]
그와 동시에 길드 마스터는 각 아파트 꼭대기에서 요란하게 터져나오는 신호탄의 파도를 쳐다보고 있었다.
“찾았어.” [찾았……. 아아.]
성벽 너머로 하늘이 희미하게 연둣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아파트 위에 올라가있던 사람들은 그 연둣빛을 보자마자 혼비백산하여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길드 마스터는 수석심문관을 돌아보았다.
“심문관님.”
수석심문관은 쓰고 있던 까마귀 가면을 벗으며 점점 밝아오는 연둣빛 여명을 맞이했다.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마스터.”
마침내 더 가이더링 길드의 성벽 위로 니파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땅에서 올려다보던 모든 인간들의 얼굴에는 그저 공포만이 서려있었다. 니파티는 그런 공포에 관심이 없었다. 카오스 실장석인 자신을 맞이하는 다른 동족들의 환호도 관심이 없었다. 분충이라 불리는 치욕을 당했고 세상에서 가장 세레브한 자신에게 이런 치욕을 느끼게 한 인간들을 쳐죽여버리겠다는 강렬한 살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니파티는 거대한 불덩이를 만들며 연둣빛의 후광을 이글거리는 주홍빛으로 바꾸었다.
[똥닌게에에에에에에엔! 죽으란테챠아아아아아아아아앗!]
니파티는 자기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성벽을 향해 불덩이를 던졌고, 그 성벽에 서있던 마법사들은 성벽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불사하며 어떻게든 화마를 피해보려 발버둥쳤다. 그 말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던 오들라오가 하늘을 쳐다보며 손을 활짝 펼친다.
“아직 일러!”
오들라오의 몸에서 광채가 일고 있었다. 그 빛은 대 드래곤 결계진을 가득 채운 빛과도 유사하다. 니파티가 던진 불덩이는 더 가이더링 길드의 허공에서 폭발했고 니파티를 역으로 휘감았다.
“무, 무슨!”
주홍빛 불길이 사그라들고 니파티는 허공에 얼굴이 찌그러져 가뜩이나 추한 얼굴이 더 추하게 보였다. 더 가이더링 길드의 성벽은 언제나처럼 차갑고 굳건하게 서있었다. 거대하고 투명한 비누거품같은 막이 더 가이더링 길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종이 한 장 보다도 얇지만 니파티조차 뚫을 수 없는 강건한 막이다.
“학파장님, 바깥 좀 보세요!”
이미 인공생물의 눈으로 바깥을 보고 있었던 노일람은 창문에 드리운 장막을 거두고 도시를 감싼 막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 막 너머에 찌그러진 니파티가 보이니 그 니파티에게 주먹감자를 날려댔다. 온 가이더링이 감격에 벅차 건물 밖으로 나와서 환호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하, 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이야하하하하하! 해냈어! 해냈어! 마스터가 해냈다고!” “됐다. 됐다! 됐다아!” “만세! 길드 마스터 만세! 왈디오의 머리 만세! 대 드래곤 주문 만세!” “흐하! 포니카! 내가 뭐랬어, 마스터가 멋지게 해치워줄 거라고 그랬잖아!” “사, 살았어요? 이제 다 끝난 거에요?” “그래, 다 끝났어! 저 분충에게 지금껏 당한 사람들의 원한을 되갚아줄 차례라고!” “설마 살면서 기록 말소된 주문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지식은 진실로 무한하도다.” “테켈리-리.”
공간조율학파 연구실의 러트너 일행도 환호성에 놀라 바깥을 쳐다보고 도시 전체가 막으로 둘러싸인 것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머리님, 머리님! 저게, 저게!”
오들라오의 광채는 은은하다. 그러나 신을 믿지 않는 자라도 바로 몸을 굽혀 절을 올리고 싶을 만큼, 인간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신성이 있었다. 별다른 신앙을 품지 않은 자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 오들라오는 지금 왈디오의 힘이 함께 하는 힘의 화신이 되어있었다.
“이상한 부분에서 자꾸 헤매느라 늦을 뻔했다……. 다친 사람 있냐.” “서, 성벽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좀 있어서…….” [테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귀에 거슬리는 악소리에 모두가 말을 끊는다. 허공에 부딪혀 얼굴을 찌그러트린 니파티는 자신을 가로막은 허공에 마구잡이로 주먹질을 하고 있었다.
[죽으란테치! 죽으란테치! 죽으란테치! 죽으란테치! 똥닌겐주제에 뭘 좋다고 실실 쪼개고 있냔테챠아아아아아아악!]
그 주먹질이 절대 그냥 주먹질이 아니라는 것을 겪어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으나, 대 드래곤 결계진에 막힌 니파티의 주먹은 그냥 자실장이 토닥토닥 붕붕 휘두르는 주먹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안도했고 그 안도감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인간들의 웃음이 니파티의 분노를 더욱 부추겼다. 그러나 지금 니파티의 분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네 못생기고 더러운 면상이 볼 때마다 웃겨 죽겠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 [오마에가 더 추하고 못생기고 더럽고 냄새나고 짜증나고 분충인테챠아아아아아아아아악! 죽으란테챠아아아아아아아아악!] “뭐? 내가 분충이라고? 그럼 나같은 분충에게도 무시당하는 너는 뭐, 상분충이냐? 분충 중의 분충? 왕분충이네! 왕분충!” [테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인간들도 갖가지 창의적인 욕설로 니파티를 조롱했다. 조롱하는 이들 중에는 니파티의 제2노예였던 전령도 섞여있었다. 니파티는 그런 욕설의 의미를 대부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들에게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 어떤 욕설보다도 심각한 모멸감을 느끼고 있었다. 니파티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어, 야, 너 우냐? 우냐? 푸하하하하하하! 여러분! 저 분충을 보세요! 할 줄 아는 건 먹고 싸는 것 밖에 없는 주제에 뭘 잘했다고 울기까지 하네요!” “우헤헤헤헤헤! 아이고, 아이고 웃겨죽어!” [오마에타치가 나쁜 것인테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테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엥!] “다들 방심하지 마. 아직 안 끝났어!”
오들라오는 주변에서 폭소를 터트리는 사람들을 크게 꾸짖는다. 그리고 니파티 밑에서 꾸물꾸물 기어올라오는 이상한 덩어리를 목격했다. 촉수와 점액을 섞어놓은 듯 꾸물텅거리는 시조물이 결계진을 타고 오르더니 점차 하늘을 덮어갔다.
“우린 스스로를 고립시킨 거나 마찬가지야. 저 분충을 죽이지 못하면 우린 이대로 고사한다.” “그, 그렇죠. 마력말소까지 끝을 내야해요! 하지만, 마력말소는 결계진에 비하면 제대로 연구도 안 됐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나도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왈디오께서 허락하시는 한 버틸 수 있지만 마력말소까지는 무리야. 애당초 마력말소는 완성도 안 됐고.”
오들라오의 빛나는 눈이 고개를 휙 돌려 길드 마스터 옆에 서있는 피시스에를 쳐다봤다. 그 눈을 마주한 피시스에는 이미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아예 땅을 파고 들어가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괴생물학파장.” “예!” “너희의 그 친구,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거겠지?” “그 친구……? 아, 아! 무, 물론이죠! 지금 바로, 지금 바로 데려올게요!”
피시스에는 곧장 일어나 자기 학파를 향해 뛰었다. 누구를 데려와야 할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흑마법 심문소에서 고문을 받는다고 해도 지금이야 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피시스에는 괴생물학파 지하 5층의 실장석 보관소에 들어가자마자 소리쳤다.
“지금 지상으로 옮길 수 있는 애들은 다 옮겨!” “전부 다, 다 놓아주라구요?” “그래! 아냐, 아니지, 승강기가 좁아. 좁아……. 옮길 수 있는 만큼만 옮기고! 안 되는 놈들은 채혈실로 보내서 피라도 광장으로 보내! 되는대로 전부 다!”
괴생물학파 지하의 학파생들은 지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래도 아무튼 학파장이 풀어주라고 하니 일단은 풀어줄 뿐이다.
[데, 자유인데스! 드디어 와타시가 자유를 쟁취하는데스!] [아타치가 응당히 누려야 할 자유인테치! 똥닌겐타치에게 징벌을 내리란테치!]
단박에 많은 실장석들을 풀어주자 기세가 등등하여 지금껏 자유를 박탈한 학파생들에게 격렬한 분노(糞怒)를 쏟아냈다. 모든 실장석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당장 자기들을 위로 올려보내달라며 승강기 문을 두드리는 실장석들도 있었다. 학파생들은 승강기 문을 두드리는 실장석들을 지상으로 올려보내고 똥을 던져대며 성질을 버럭버럭 내는 실장석들은 채혈실로 들여보냈다.
[이게 무슨 짓인데스! 오마에타치는 악마인데스! 오마에타치는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 데, 데?] [데, 데갸아아아아아악! 뾰족뾰족씨인데샤아아아아악! 아픈데샤아아아아악! 와타시가 죽어버리는데샤아아아아아악!] [싫은테에에에엥! 싫어테챠아아아아아아앙! 뾰족뾰족 아파아파 싫어테챠아아아아아아아지벳!]
채혈실은 보통 괴생물의 연구목적을 위해 피를 뽑는 곳이기에 피를 많이 뽑을 일은 없다. 그러나 에립마브가 들어온 이후로 더 많은 피를 뽑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실장석의 피만을 쫙쫙 뽑아내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그러나 작동방식만큼은 그 어떤 채혈기보다도 무식한 착혈기는 실장석의 몸을 가시박힌 판으로 납작하게 눌러 뼈와 살과 내장으로부터 피를 온전히 쭉 짜냈다. 실장석 보관소의 수천 마리 실장석의 피를 다 짜내기에는 채혈실의 통이 모자랄 정도다. 짜낸 피를 담은 통을 승강기로 올려보내려는데 마침 그 통의 주인 되는 괴물도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다 풀어줬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야…….” “질문은 나중에 하고 빨리 올라가! 가는 길에 저 통도 챙기고!”
부피 때문에 한 개 이상 들 수는 없었지만 한 통이라도 자력으로 들 수 있다는 것으로 족했다. 온몸을 검은 옷으로 둘둘 두른 에립마브는 미라익스에서 복귀한 이후로 아주 오랜만에 세상의 하늘을 마주했다.
“어으, 적응 안 돼. 어, 야. 하늘이 뭐가 이상하다? 완성했구나!” “빨리 따라와!” “으, 으아아! 흡혈귀다! 흡혈귀다아!” “당신들 살려줄 흡혈귀니까 조용히들 해요!”
그 누구도 흡혈귀의 앞길을 가로막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광장까지 가는 길은 험악하게도 순탄했다. 이미 광장에는 미리 승강기로 올려보냈던 실장석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마법사들이 물리차단막으로 사방에서 압박하며 도망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에립마브는 그런 실장석보다 광장 한가운데에서 광채를 뿜어내는 오들라오와 광장을 잔뜩 둘러싼 흑마법 심문관들을 보며 멈칫한다.
[데게엣, 이게 무슨 짓인데스! 와타시타치가 쟁취한 자유인……데스!] [데게에에, 숨이 안 쉬어지는데스우…….] “저, 저, 저거…….” “왔냐, 흡혈귀.”
오들라오에게 뺏겼던 눈길을 잘 돌리면 성벽 위에서 결계진을 토닥이는 니파티가 보인다. 니파티를 보자마자 에립마브는 온몸에 돋을 수 없는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든다. 니파티는 얼굴을 가린 에립마브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늘이 내 처형날이냐?” “오늘은 아니다. 이 대 드래곤 주문의 마법진을 네 머릿속에서 뽑아냈으니, 분명 너도 머릿속에 도식이 남아있겠지?” “나도 전체 도식은 몰라. 비어있는 부분이 많아서…….” “혈마법이야.”
에립마브는 오들라오의 말을 듣고 혈마법의 도식을 떠올렸다가, 그 도식이 대 드래곤 주문 파편에 딱딱 들어맞는 사실을 깨닫고는 놀라서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서 너네가 다른 놈들 내버려두고 굳이 나를 찾았구나?” “할 수 있겠지? 못 하면 죽는다. 저기 저 놈에게.” “못 할 게 어딨어? 세상에 나만큼 혈마법 잘 다루는 놈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에립마브는 들고 온 피통을 바닥에 흥건하게 쏟아내고 흑마법 심문관들이 압박하던 실장석들을 에립마브 쪽으로 밀어주었다. 에립마브는 울고불고 팔다리를 휘두르는 실장석들의 머리통을 잡고는 일부러 니파티가 잘 보이도록 높이 들어주었다.
[데에에에에에엥! 카오스 마마아아아아앙! 똥닌겐이 무고한 와타시를 괴롭히는데, 데거어어어어어억!]
그리고 등에 그대로 주먹을 박아 심장을 잡아서 배쪽으로 뚫고 나온다. 심장이 뽑힌 뒤에도 계속 꿈틀거리는 실장석은 바로 바닥에 버리고 구멍에서 흐르는 피와 심장의 피가 도식의 시작점을 찍는다. 가이더링의 시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바빴다.
“기분 묘하네. 맨날 날 죽이려들던 심문관들이 날 그냥 이렇게 내버려두고 있다니.” “특별사면이라 생각해! 오늘만 특별히 봐주는 거야!” “그 특별한 기대에 충실히 응해줘야지!”
에립마브가 양손을 펼쳐 실장석들에게 뻗자 수십 마리가 뭉친 실장석들 중 열 마리 정도의 실장석이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새겨진 도식을 바닥에 그대로 그리기는 쉬웠다. 에립마브는 바닥에 실장석의 피를 흥건히 흩뿌리고 그 피를 움직여가면서 기본 도식을 그렸다. 대 드래곤 주문의 기본 도식은 종류에 상관없이 모두 같았다.
“야, 쭙쭙아-!” “바빠죽겠는데 누가 불러!” “어……. 어! 리베라나다!” “뭐, 고드니스?”
고개를 돌리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에립마브는 바로 피시스에가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아파트 창문에 비치는 햇살에 눈을 질끈 감고 싶었지만 굳은 의지로 참는다. 도식을 그려나가는 움직임에 흥이 느껴진다. 수많은 종류의 대 드래곤 주문 가운데 에립마브의 머릿속에 남은 기억 파편으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은 결계진과 마력말소 단 둘 뿐이었다. 그중 결계진은 이미 오들라오가 펼치고 있으니 자연히 그리지 않았는데, 에립마브는 기본 도식을 완성하면서 피시스에에게 묻는다.
“야, 피시스에. 지금 내가 그려야 하는 게 어떤 거야?” “마력말소.” “마력말소, 알았어!”
그 말에 에립마브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식을 완성해나갔다. 피시스에는 그렇게 열정적인 에립마브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파왔다. 그는 열심히 집중하고 있는 에립마브에게 말했다.
“저기, 쭈…… 에립마브.” “뭐!” “알아둘 게 있는데, 모든 주문의 영향은 시전자를…….” “시전자를 포함하지! 나도 마법사야. 모르겠냐?” “당연히 알겠지! 그러면, 그러면……. 알잖아.” “뭐, 나도 마력말소에 휘말려서 그냥 시체가 된다는 거?”
역시 모를 리 없겠지, 피시스에는 왜 에립마브가 이렇게 열중하고 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알면 됐고. 너도 고생 많이 했으니까, 많이 했으니까…….” “야, 피시스에. 나도 궁금한 거 하나만 묻자.” “어?” “이 마력말소라는 거, 세상 어느 마력원이든 다 먹히냐?” “우리야 모르지. 수백 년간 쓰인 적이 없는 주문인데…….”
에립마브는 중간중간 도식을 그린 피를 마력으로 전환하며 도식이 제대로 그려졌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도식을 이루는 피가 줄어들기에 더 많은 실장석의 피를 뽑아낸다. 도식의 부족한 부분을 점점 채워가던 에립마브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가 든 작은 유리병을 꺼내며 말했다.
“그럼 이거면 흑의 계약서 마력도 지워지겠지?” “아마……도?” “모르겠지 물론, 수백 년간 써본 적이 없을 텐데. 그럼 내기 하자!” “이 상황에 내기는 무슨 내기!” “난 ‘마력말소로 흑의 계약서 마력이 지워진다’에 건다! 내 전 재산 다!”
흡혈귀에게 무슨 재산이 있다고, 라고 따지려던 피시스에는 점점 선명하고 세세하게 그려지는 마력말소의 도식을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목이 메었지만, 그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삼키면서 말했다.
“……그래 그럼! 나는 안 지워진다에 내 전 재산이랑 학파장 자리까지 걸게!” “그렇게 나와야지! 아렌지한테 처사 잘 해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립마브는 대 드래곤 마력말소 주문의 도식을 완성했다. 도식의 피를 마력으로 변환하자 불길한 붉은 빛으로 변하여 에립마브의 몸을 감싼다. 피시스에를 제외하면 그 모습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어어, 이거 즉발식이 아니네. 시간이 좀 걸려! 피가 엄청 필요하겠어!” “지금 가져오고 있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괴생물학파쪽에서 드르륵 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피가 흘러내린 자국이 선명한 통이 손수레에 담겨 끌려오고 있었다. 통이 얼마나 무거우면 땅이 흔들리는 것만 같다. 에립마브는 고개를 슬쩍 돌려보고서 통 안의 내용물에 감을 잡고는 그대로 소리쳤다.
“가져오지 말고 그냥 거기 엎어!”
어차피 가까이 다가가기도 싫었던 학파생들은 그 말을 충실히 따랐다. 피통의 뚜껑을 열고 바로 엎어서 바닥에 쏟아버리자 에립마브가 그 피를 끌어모아 마력말소 도식에 보충한다. 피가 마치 슬라임처럼 꾸물꾸물 기어서 도식에 스스로 합류하는 모습을 보고있으면 속이 거북했다. 에립마브는 도식에서 흐르는 마력을 느끼면서 오들라오에게 외쳤다.
“야, 머리! 얼마나 유지할 수 있어!” “네놈이 준비 끝나기 전까지는 충분하다!” “그거면 됐고!”
체감상으로는 금방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금방은 빨리 좀 끝나지, 언제 끝나냐, 하는 긴장 때문에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래도 점점 주문이 완성되고 있다는 신호는 받을 수 있다. 도식에 집중하는 이들을 포함해 가이더링에 있는 모두가 땅이 미약하게나마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지진이라, 보통은 좋은 신호가 아니지만 오늘만큼은 예외겠지?” “모두 머리를 감싸고 피신하세요!”
멈춰있는 손수레가 진동에 들썩이고 나무들이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흔들렸다. 이러다 진동이 더 세지면 넘어져버리는 게 아닐까, 넘어져버리면 집중하던 마력도 흩어져버리는 게 아닐까, 선 채로 주문에 집중하던 에립마브는 걱정이 일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앉아버리기엔 많이 늦었다. 넘어지더라도 저 분충을 떨어트리면서 넘어지겠다는 심정으로 하반신에 힘을 강하게 주었다. 그리고 넘어지고 나서는 다시 못 일어날 게 확실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야, 피시스에.” “왜.” “…….” “왜 불러!” “아냐, 됐어. 괜히 안 하던 짓 하려니까 집중 안 되네.”
가이더링의 땅이 점점 거세게 흔들려 멈춰있던 손수레가 저절로 굴러가고 벽을 짚지 않으면 걷다가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에립마브는 열심히 버티면서 마력을 집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진동이 깔끔하게 탁 끊어지며 역으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던 사람들을 휘청이게 한다. 바로 지금인가보다, 에립마브가 손을 뻗었다.
[아니이일!]
니파티를 향해 손을 뻗자 눈 앞에 온통 분홍빛으로 변했다. 뇌리에 환하게 새겨지는 분홍빛, 세상 그 어떤 빛보다 선명한 분홍빛. 에립마브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눈을 감고 햇빛을 받으면 눈앞에 붉은색이나 분홍빛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꽤 오래 전에 잊어버린 채 살았다. 하지만 이 빛은 지금 오래 전에 잊어버린 사실도 깨우치게 할 만큼 밝고 선명했다. 그리고 그 빛은 에립마브의 머리 위를 타고 올라가는 연기처럼 가이더링을 감싼 결계진의 꼭대기 위에서 빛났다.
“……고드니스…….”
에립마브는 천천히 몸에서 힘을 빼었다. 마력말소가 휘감은 산송장의 몸은 그냥 시체에 불과하다. 마력말소라 하면 마력이 한 번에 쭉 빠져나가면서 온 몸이 그대로 무너지고 의식도 그냥 꺼져버릴 줄 알았는데 에립마브의 의식은 꽤나 오랫동안 깨어있었고 몸도 굳건하게 서있었다. 송장이라 몸이 굳은 채로 서있나보다, 에립마브는 몸에서 빠져나갈 줄 모르는 마력을 계속 느끼면서 분홍빛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거? 야, 피시스에.” “어, 어? 에립마브! 너 무사하냐?” “이거 뭔가 이상한데? 발동이 제대로 안 됐나봐.” “제대로 된 거 맞아? 이 분홍빛이 제대로 된 거 아냐?” [아닐! 아닐! 아닐은 어디있나!] “아닐이 누군데!” “아닐? 아닐이면 그, 잠깐, 이거 누구야?”
모두의 이목이 하늘을 향했다. 괴생물학파의 아파트 꼭대기 위에, 한 태양의 빛을 가리면서 새로운 태양을 자처하는 듯한 분홍빛이 떠있었다. 니파티마저도 홀린 그 빛은 광원주문처럼 둥글지도 않고, 무지개처럼 구부러지지도 않았다. 길게 쭉 뻗으면서 전체적으로 4갈래로 갈라진 듯한 빛, 오로라처럼 일렁이고 구름처럼 흩날리는 그 분홍색 빛은 마치 하나의 커다란 짐승을 보는 것 같았다.
“……드래곤……?” “뭐, 그렇게 보이긴 하네. 근데 말이 돼? 드래곤은 이미 진작에 멸…….”
그렇게 말하려던 에립마브는 항상 자신과 함께 지내던 이 세상 유일한 드래곤의 존재를 떠올렸다.
“……저게 왜 나와있어! 피시스에!” “나도 몰라! 누가 풀어줬어 저거!”
건물 안에 있었던 사람들도 드래곤의 제대로 된 육체는 볼 수 없었지만, 그 기척과 빛만으로도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파트 안에서 지켜보던 러트너는 자기도 모르게 창문을 열어 드래곤을 마주했다. 직접 마주한 드래곤은 오직 하나 뿐인데도, 저 하나만으로도 절대 승리할 수 없을 것 같은 위압감으로 가득했다.
“저게…… 진짜 드래곤이구나…….” [아닐……. 네놈들 중에 아닐의 존재를 아는 자는 속히 고하라!]
분명 얼굴이 없는 분홍빛 아지랑이일 뿐인데 어마어마한 분노가 느껴졌고,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닐을 찾는 드래곤 앞에 나선 것은 길드 마스터였다.
“아, 아닐이라 함은, 드, 드래곤 슬레이어…… 에스레브니 아닐 말인……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그 아닐 말이다! 내 힘을 빌려 대 드래곤 주문을 만들어내고 내 동족들을 멸절시킨 인류의 수호자, 그 아닐 말이다!]
왜 찾는지, 무엇 때문에 찾고 있는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입 밖으로 꺼내기 두려운 말이었지만 길드 마스터 의지는 한없이 나약해져있었다.
“그 아닐은, 드래곤의 암흐……. 수백 년 전의 인간이라, 이미 숨을 거둔 지 오래입니다…….” [……뭐라.]
그 목소리를 듣자 가이더링의 인간들은 이유 모를 깊은 슬픔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분홍빛 용은 날개처럼 보이는 아지랑이를 접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아닐이 죽었는가.] “인간이 아무리 오래 살아봤자……. 길어야 100살인지라…….” [……아닐이 죽었는가…….] “드, 드래곤이시여, 감히 묻겠는데, 아닐은 왜 찾으시는 겁니까……?”
그렇게 묻는 길드 마스터조차도 차오르는 슬픔을 어찌할 수 없어 메이는 목으로 말했다. 이미 주변에서 흐느끼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아닐은……. 동족의 학살자……. 그리고 내 유일한 벗.] “하, 학살자이자, 벗?” [다양성의 부조리를 역병이 아니라 가능성으로서 가르쳐준 유일한 인간이었고……. 그 가능성을 실제로 보여준 유일한 인간이었거늘…….]
접혔던 분홍빛 날개가 다시 활짝 펼쳐지며 드래곤이 묻는다.
[아닐은 공존을 약속했다. 아닐은 변화를 약속했다! 너희는 어찌하여 아닐이 변화를 맹세하며 잠재운 유산을 다시 깨웠는가!]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지만, 광장에 나온 이들은 그저 손가락으로 결계진의 한 구석을 가리키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분홍빛 용의 머리가 분홍빛 옷을 입은 니파티와 눈을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순간 용은 니파티의 눈에서 실장석의 기억, 분노, 억울함, 부당함, 절망감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저것은…….] “저, 저것이 우리 인간들 뿐만 아니라 드워프랑 오크까지, 전부 가리지 않고 죽이며 좀비로 만들고, 저렇게 시조물을 만들어버리는 탓에 저희도 부득이하게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대 드래곤이나, 그, 위대한 아닐을 음해하거나 위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니며…….” [인간들의 탓이구나.]
그 말에 길드 마스터의 심장이 덜컹 했지만 그는 순순히 과오를 인정했다.
“무, 물론 그렇습니다. 저희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기에, 드래곤의 광대한 식견에 비하면 저희 인간 개개의 식견은 좁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으며, 다양성의 부조리로 하나의 존재를 똑같이 볼 수 없기에 저희로서도 이를 굉장히 후회하며 되풀이하지 않고자 합니다.” [……전혀 변하지 않았어.] “무……엇이, 말씀이옵니까?”
보이지 않는 분홍빛 드래곤이 입을 열자 환멸과 증오가 가슴 속에서 벅차올랐다.
[평화와 공존을 약속한다던 인간들은 전혀 변하지 않았어. 그저 생김새와 행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무고한 것들을 학대하고 학살했어. 방금 막 세상의 빛을 본 유생들마저 학대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 유생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것으로도 모자라, 종족 전체를 멸절시키려 했어! 인간들은 수백 년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 아닐이 약속한 공존, 아닐이 약속한 변화, 아닐이 약속한 가능성은 하나도 보이지 않아! 너희가 다른 종족이었다 그래도 용서할 수 없을 천성이었을 것을!]
그리고 끓어오르는 환멸과 증오는 본능적인 절망감으로 뒤덮여갔다. 길드 마스터가 다급하게 나서서 스스로를, 나아가서는 인류 전체를 대변하여 변호하였다.
“드래곤이시여! 부디 알아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 실장석들의 존재가 산송장을 가깝게 합니다! 저들은 손쉽게 시체가 되고, 시체를 먹어치워 배설하며, 그 체취가 산송장을 끌어들여 인간의 삶을 위협합니다! 분명 학대와 학살은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일 테지만, 실장석으로 인해 희생된 인간들이 있으며 그러한 과오가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학습하는 과정에 있음을 부디…….” [지금 나한테 저 꼴을 보고도 산송장이 위협이라는 말을 믿으라는 거냐!]
드래곤이 소리를 지르자 길드 마스터는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모두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에립마브를 쳐다봤다.
[인간들은 언제나 그랬어. 자신에게 즐거운 일이라면 참혹한 악행이라도 서슴지 않았어. 결국은 모두를 파멸로 몰아세우고, 인간들만이 남아 파괴와 학살을 자행하고, 너희가 실장석이라 부르는 존재들도 결국은 네놈들의 손으로 만들어낸 또 하나의 과오일 뿐이지 않느냐! 그저 너희의 피와 부조리 속에 잠재된 파괴 욕구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던 것일 뿐이야!] “자, 잠시만, 하,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실장석이라는 것들도, 저, 저희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다, 다른 세계에서……. 저희가 사는 세계와는 또 다른 세계에서…….” [다른 세계의 인간이라서 인간이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거냐!]
보이지 않는 분홍빛 용은 길드 마스터의 대답을 듣는 대신 그 눈을 정면으로 째려보면서 길드 마스터가 하려던 말과 생각을 전부 읽었다. 그리고 한탄하며 말했다.
[아닐은 다양성의 부조리를 평화와 공존의 가능성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너흰 그 가능성을 언제나 악용하기만 했어. 수백 년동안. 한 종족의 운명을 송두리채 뽑아내고, 종족의 운명을 구원하고, 평생을 바쳐 변화를 꾀한 아닐의 뜻을, 동족이라는 네놈들이 망쳐놓고, 너희의 입으로 한 약속을 너희의 입으로 저버리고, 그 모든 악행이 다양성의 부조리 때문이라고, 모든 인간이 악한 건 아니라는 입에 발린 변명만 늘어놓는구나! 너희가 아닐을 욕보였고, 너희가 나를 욕보였다!]
분홍빛 아지랑이가 날갯짓을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자 강렬한 바람이 사람을 손으로 밀쳐내듯 전부 넘어트렸다. 모두가 넘어지는 가운데 에립마브와 오들라오는 밀려난 게 아니라 집어던진 것처럼 저 멀리 날아가고 말았고, 마력을 집중하던 도식에서 떨어지면서 발동이 모두 해제되었다. 더 가이더링 길드를 감싸던 결계진은 사라지고, 결계진이 사라지며 하늘을 뒤덮어가던 시조물이 땅을 덮친다.
“어, 어어어, 어어어어어어! 으아아아아아아아!”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어어어어!” [당사자마저 이해하지 못하는 다양성의 부조리에 속아 동족들을 배반한 대가를 뒤늦게나마 치르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조물에게 붙잡혀 시조물과 하나가 되어간다. 전투마법사와 수도사들이 황급히 불을 뿜고 구마의식을 펼쳤지만, 하늘에서 떨어져 건물의 옥상까지 뒤덮은 시조물들은 하나의 거대한 암세포처럼 가이더링을 갉아먹어갔다. 보이지 않는 분홍빛 용은 하늘에서 그 풍경을 바라보며 슬피 말했다.
[스스로를 니파티라 부르는 실장석이여, 마지막 남은 드래곤으로서 그대의 슬픔과 분노와 절망을 내가 이해하니, 그대에게 명예로써 청한다.]
니파티는 인간들의 절규와 고통을 음미하면서 탐욕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테츄웅~?] [이 세계의 공존과 평화를, 나아가서는 만물의 번영을 확립하는 동맹을 제안한다.] “무슨 짓이야 이 미친 새끼야아아아악!” [치프픗, 이제야 아타치의 말을 알아듣는 자가 생긴테치!]
두 존재의 동맹 맹세가 더 가이더링 길드에 비탄으로 울려퍼졌다. ------------------------------------------------------------------------------------------------------------------------- 애오파 드래곤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