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카오스 럭키짱 천일모험기를 능가하는 진정한 판타지 실장석 참피 소설 실장석과 환상 89화 : 니파티 구제군

 [데헥, 데헥, 데헥, 데푸풋, 데푸웅~.]

[데깃, 데고옷, 데기잇! 이, 이, 이곳은 극락인데스! 데푸웅!]

[이 똥닌겐은 섬세함이라는 게 없는데스! 와타시의 델리킷 바디를 가지고 무슨 짓이냔말인데스! 바꾸란데스!]

[분충 주제에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으면 감사할 줄 알란테치!]

[데게엑!]

[테기이이이이잇! 대체 왜 안 되냔 말인테챠아아앗!]

 

시그니 산의 정상에서 실장석과 좀비들이 한 덩어리처럼 뒹굴며 이따금 녹색 불꽃이 파바박 튄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봉화대를 전부 치워버리고 차원문 장치를 대신 놓아두고는 차원문 장치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실장석을 되는대로 집어넣는다. 차원문의 마력과 실장석의 마력동석이 반응하며 실장석들이 퍼버벅 터져나가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반응은 없다. 눈앞에서 동족과 가족들이 터져나가는 모습을 직접 목도한 실장석들은 그런 풍경에 전혀 상관하지 않고 좀비들에게 자신의 몸을 맡겼다. 그러나 좀비들은 살아있는 몸이 아니기에 생체활동이 정상적으로 일어날 리 없었으므로, 실장석들의 행위는 그저 비위생적인 행동에 불과했다.

 

[아타치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테챠! 아타치는 전부 다 똑바로 하고 있는테치! 애초에 왜 아타치가 이걸 직접 하고 있어야 하냔 말인테치! 똥닌겐들이 말만 제대로 들었어도 아타치가 이럴 일은 전혀 없었을 것인테치! 테에엥! 테에에엥! 세상은 불공평한테치! 아타치는 불행한테치! 왜 오마에타치는 흑발의 자를 못 낳냔 말인테챠! 무능한 분충인테치! 자도 못 낳는 마마따위는 필요없는테치!]

[데푸풋, 자실장 주제에 마마가 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면서 아가리만 놀리는 데게엣!]

[늙어서 추해빠져가지고 문이 안 열린단 말인테챠악!]

[대체 하는 말에 두서가 없는데스. 하여튼 요즘 자실장들은 이래서 안 되는……. 데기얏!]

[테기이이이이이이익!]

 




분명 머릿속에는 차원문을 가동시키는 방법이 전부 입력되어있는데도, 그 방법을 완벽하게 똑같이 따라하고 있다고 니파티는 굳게 믿고 있음에도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속만 터진다. 지금이라도 차원문을 부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서 더 짜증이 올라왔다. 니파티에게는 차원문 장치를 만드는 지식이 없었다.

 

[대체, 대체 왜 이러는데스! 왜 닌겐은 내버려두고 멀쩡한 자들을 죽이냔말인데스!]

[…….]

[대답하란데샤아아아아아악!]

[오마에는!…….]

 

그 모습을 원망 가득한 눈으로 나무 말뚝에 박힌 채 똑똑히 쳐다보는 리도미가 있었다. 실장석의 눈에도 인간의 눈에도 추한 벌거숭이 대머리 리치 실장석이다. 누구도 리도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니파티도 한 번 리도미의 몸을 차원문으로 집어던져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 확인한 뒤에는 그저 말뚝에 박아놓기만 할 뿐이다.

 

[흑발의 자만 있으면 되는테치……. 대체 왜 흑발의 자를 못 낳냔 말인테챠아아아악!]

[데에에에엥……. 데에에에엥……. 주인사마……. 보고싶은데스…….]

[오마에도 닥치란테치! 오마에는 소중한 돌 씨를 잃어버린 주제에 뭘 잘했다고 쳐 울고 자빠진테치! 오마에의 소중한 돌 씨만 있으면 아타치가 이딴 헛고생을 할 이유도 없단 말인테챠아아아아아악! 대체 아타치 말을 들어먹는 영특한 자가 어떻게 한 마리도 없는테챠!]

 

시그니 산 주변으로 좀비들이 바글바글했고 주위를 지나가던 인간들은 니파티의 시선에 걸려 즉시 차원문을 작동시키라는 요구를 강제당하기도 했다. 두르마르의 극소수 인원들이나 가동시킬 수 있는 차원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작동시킬 수 있는 확률은 굉장히 희귀했고 니파티라고 그런 기회를 쉽게 잡을 수 있을 리 없다. 결국 길을 잘못 든 사람들은 그 사소한 선택의 대가로 앞날의 모든 선택권을 잃어버렸다. 니파티는 속에서 불이 난다.

 

“저기 보이시죠? 저기가 시그니 산이에요. 저 산만 넘어가면 가이더링은 코앞이다, 이런 말입니다.”

“정말 가이더링만 가면 안전한 거 맞죠?”

“적어도 산송장은 없겠지요.”

“그렇겠, 어! 길에 사람! 길에 사람!”

“어어어!”

 

그리고 또 하나 불운한 마차가 유자테아 시를 지나 시그니 산 옆의 도로에 가까워진다. 도로가 깔린 언덕을 넘어가려는 찰나, 마부는 길 한가운데 떡하니 서있는 사람을 보면서 급히 말을 멈춘다. 가속 주문서가 구하기 쉽지 않은 시기라 마차는 빠르지 않고, 길에서 멈추는 것도 훨씬 쉽다.

 

“야이, 미친 새끼야! 길 한복판에서 뭐 하는 거야!”

[이 길로 가지 마라.]

“뭐야?”

 

길 한복판에 서있는 붉은 머리의 여자는 마차를 쳐다보며 입술을 옴싹달싹 하지 않고 그대로 의사를 전달했다. 금방이라도 사람을 칠 뻔한 마부나 승객들에겐 그런 사소한 사항이 눈에 안 들어온다.

 

[저 건너편에는 산송장과 실장석들이 우글거린다. 이 길을 따르면 너희도 산송장이 될 것이다.]

“사, 사, 산송장? 그, 그치만, 우리는 가이더링으로 가야 하는데!”

[가이더링도 이미 산송장에게 점령되었다. 이 길로 가지 마라.]

“가, 가이더링도 점령됐다고?”

“말도 안 돼!”

[사실이다.]

 

붉은 머리의 여자는 표정 변화가 없어도 얼굴에 확신이 가득하다. 그저 가이더링으로 갈 수 있기만을 바라며 길을 달려온 인간들에게는 절망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그, 그러면 어디로, 어디로 가라고? 가이더링도 무너지면, 우린 이제…….”

[그것은 너희가 고민할 바이다. 그러나 이 길은 가지 마라. 내가 할 말은 그뿐이다.]

 

길에서 비킬 생각이 없는지 붉은 머리의 여자는 움직임이 전혀 없다. 찬바람이 불어 사람들은 몸을 떨었다. 붉은 머리의 여자는 떨림이 전혀 없다.

 

[아,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뭐, 뭔데?”

[너희 중 데아르라는 인간을 아는 자가 있나?]

“데아……르? 몰라. 누군데? 어떻게 생겼는데?”

 

그 즉시 붉은 머리의 여자가 갈색 머리의 소녀로 변한다.

 

[이렇게 생겼다만.]

“으, 으아아아악! 저게 뭐야!”

“귀, 귀신이야, 귀신이야!”

[앗, 저기…….]

 

마차가 바로 머리를 돌려 길 반대편으로 도망쳐버렸다. 길 한가운데 갈색 머리 소녀 혼자 외롭게 우두커니 서있다.

 

[……아무튼 길에서 벗어나게 했으니 됐나.]

 

갈색 머리의 소녀도 사라지고 길에는 싸늘한 바람만이 남는다. 아무도 볼 수는 없었지만, 구름만 떠가는 하늘에는 구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분홍빛 드래곤이 스스로의 기척을 숨긴 채 두르마르의 창공을 활공하며 가능한 인간이 없는 곳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없는 곳은 찾기 어렵다. 산 속 깊은 곳까지 숨어 사는 인간들은 마력을 써도 탐지하기 어렵고, 지금은 마력을 마음껏 쓸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인간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는 곳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드래곤은 시그니 산을 기점으로 나선형으로 빙빙 돌면서 정찰 범위를 넓혀나갔다. 니파티가 살아있는 실장석을 차원문에 던지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드래곤은 가이더링의 위를 세 번은 지나쳤고, 아쿠아힐도 한 번 지나쳤다. 드래곤은 이름도 잘 모르고, 알려는 관심도 없는 땅을 몇 번이고 지나갔지만 도무지 인간이 없는 땅을 찾기가 더 힘들었다. 그나마 두르마르의 남쪽 영토에서 무인도를 몇 개 발견했지만 인간이 아니라 수인(水人)들이 살고 있다. 결국 드래곤의 날갯짓은 다시 제자리로, 이삭 백작의 아성으로 돌아온다.

 

[어렵군.]

“으아, 뭐야 이거!”

 

기척도 전혀 없이, 분명히 아무도 없던 식탁에 언제나 있었던 것처럼 아닐이 앉아있으니 모두들 화들짝 놀라기 일쑤다. 때는 정오를 조금 넘겼고 하인들이 막 러트너 일행이 먹은 식기를 치우고 나간 참이었다. 식당 안에는 러트너 일행과 이삭 백작 밖에 없다. 드래곤도 그것을 알고 들어온 것이었다.

 

“야이 씨, 들어온다고 티라도 좀 내주면 어디가 덧나?”

[다른 인간들이 두려워할까봐 일부러 조용히 들어왔는데. 다음부터는 시끄럽게 들어오면 되나?]

“어……. 생각해보니까, 그래……. 우리만 놀라는 게 낫긴 하겠네.”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으니 놀랐을 뿐 모두 그 이상으로 놀라는 기색은 전혀 없다. 유달리 크게 놀라는 사람이 있다면 포니카였다.

 

“아, 아, 아저씨? 저 사람은 누구에요?”

“응? 어, 어……. 그, 포니카는, 만나본 적이 없었지? 저 사람은…….”

[드래곤이다.]

“……네?”

“아잇, 진짜, 내가 설명하려고 했는데. 아무튼……. 맞아. 드래곤이야.”

“……에……. 허.”

 

또 괜히 상처라도 줄까 러트너가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하려고 했는데 포니카의 반응은 생각보다 훨씬 심심했다.

 

“막, 소리지르고 그럴 줄 알았는데 그러지는 않네?”

“그야 뭐……. 아저씨는 요정 님이랑, 흡혈귀랑, 저기 열쇠님 기록에서 보니까 드워프에다 우리 언니에다 뭐 그냥 세상 모든 게 다 친구잖아요. 드래곤까지 친구라고 해서 뭐……. 이상할 건 없죠.”

[친구는 아니다.]

“친구는 아니……, 그래, 내 말 대신 해줬네.”

 

러트너는 드래곤을 친구로 인정할 마음이 전혀 없다. 니파티를 죽이고 나면 그런 마음이 들지도 모르지, 그는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었다.

 

“근데 드래곤이랑은 적수 아니었어요? 다른 드래곤인가?”

“아니, 그 분홍색 드래곤 맞아. 하도 멍청해서 니파티랑 같이 놀 생각이나 하는 드래곤.”

 

그 말에 포니카도 러트너처럼 드래곤을 환멸하는 눈으로 쳐다본다. 드래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부정해야 할 것은 부정했다.

 

[멍청한 결정을 했을 뿐 내가 멍청한 것은 아니다.]

“닥쳐. 니파티 죽기 전까지 넌 앞으로 멍청이야.”

[나의 이름은 멍청이가 아니다.]

“그럼 원래 이름은 뭔데?”

[기억에서 지웠다. ……동족들이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고통과도 같았기에……. 나는 이 세상의 유일한 드래곤이니, 혼동될 여지도 없겠지. 드래곤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의 이름이다.]

“그럼 넌 니파티 죽기 전까지는 멍청이고, 니파티 죽으면 그때부터 드래곤이야.”

[나는 상관없지만, 아닐의 모습을 욕되게 부르지 말았으면 한다. 너희 입장에서도 드래곤의 암흑기를 끝낸 위인이 아닌가.]

“알았어, 알았어. 그냥 드래곤이라 부르면 될 거 아냐.”

 

그렇게 이름을 드래곤의 이름을 드래곤이라 지은 러트너는 대강의 상황을 묻는다.

 

“그래서, 사람 없는 곳은 좀 찾았어?”

[내가 어렵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도대체 인간이 살지 않는 땅이 없어. 중간중간 위험지역으로 발을 들이려는 인간도 내가 돌려보내기는 했다만.]

 

쿱과 콜드펌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도책을 펼쳐 두르마르 전체 지리를 살피고 있었다. 인구밀도가 표시된 지도는 아니었지만 도시나 마을의 위치는 표시되어있고,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을 장소도 꽤 많았다. 지금 이 아쿠아힐에서 가까운 곳도 몇 군데 있어 의문만 남는다. 쿱이 물었다.

 

“지도를 작년에 갱신하기는 했습니다만……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그렇게 적습니까?”

[겉보기에는 사람이 없어도 살펴보면 꼭 어딘가에 숨어있거나, 길목으로 삼고 지나다니는 인간이 하나둘씩 있었다.]

“유동 인구까지 전부 인구수로 파악하신 겁니까? 그러니 장소가 마련이 안 되지. 경고를 해서라도 강제로 쫓아내시지 그러셨습니까.”

[경고했다가 소문이 퍼질 것이 우려된다. 특히 나뮈의 신자들은, 드래곤이 싸움을 벌인다고 하는데 그 광경을 눈으로 목격하고 기록하고 싶지 않겠는가?]

“정보가 중한 신자라면 모일 것이고, 목숨이 중한 신자라면 모이지 않을 겁니다. 어쨌든 스스로가 결정한 길입니다. 희생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흠.]

“드래곤께서는 인간의 부조리 때문에 당신이 무슨 결정을 하든 반대하는 인간이 꼭 있을 것이니 당신의 결정을 밀고 나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라면 어차피 경고를 해도 모일 인간은 모일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더욱 경고를 하기 싫은 것이다. 경고를 하지 않고 조용히 처리하면 불필요한 희생도 없을 것인데, 경고를 하면 희생이 늘어날 수도 있지 않은가.]

“스스로가 모이고 싶어 모인 것이 어떻게 희생이겠습니까. 희생이란 원치 않을 때 희생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드래곤께서는 인간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니 희생이겠습니다만, 인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희생은 감수해야 할 수밖에 없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드래곤께서는 합리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지금 사람 한두 명의 목숨 때문에 니파티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더 많은 인명을 희생시키시겠습니까?”

[그러나 그 희생은 결국 나를 겨누는 화살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나는 드래곤으로서 분명히 희생자들을 내지 않고도 니파티를 처리할 계획이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희생자를 낸다는 것은 드래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시선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네 논점은 분명히 일리가 있으나…….]

 

어느새 아성의 식당은 드래곤과 나뮈의 열쇠간의 토론장이 되어 뜨거운 열기를 뿜고 있었다. 나뮈의 열쇠들이 말이 많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지만, 세상에 저렇게 말을 빠르고 장황하고도 똑똑히 하는 것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쿱은 두르마르를 비롯해 전 세계 재판의 판례와 극한 상황에서 감수할 수밖에 없는 희생의 예를 정말 끝도 없을 것처럼 쏟아낸다. 그 지식은 괴생물학파에 수백 년간 홀로 있었던 드래곤마저도 반박할 수 없었지만, 결국은 인간의 시선에서 바라본 인간의 지식이었고 드래곤의 시선은 그 어떤 지식으로도 반박할 수 없다. 서로의 반박할 수 없는 주장이 계속되며 쿱과 콜드펌은 땀을 뻘뻘 흘렸다. 정작 다른 이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중간부터 잊어버려서 그냥 대화가 언제 끝나나 기다리기만 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길어졌군. 역시 나뮈의 열쇠 다워.]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내가 날 논박하고 있었군. 내가 니파티와 손을 잡은 시점에서 이미 불필요한 희생은 넘치도록 저질렀지. 그 순간부터 다른 존재들이 날 비난할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고. 지금 여기만 해도 내 존재가 달갑지 않은 자들이 많으니. 내가 여기서 더 막아야 할 것은 희생당할 존재가 없어지도록 손을 쓰는 것이야. 그렇다면 장소를 직접 마련해야겠군.]

“미리 봐두신 장소가 있으십니까?”

[없다. 다시금 보러 가봐야겠다.]

 

아닐의 모습은 흐려져 사라지고 아성의 창문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 장막과 식탁보를 휘날렸다. 그릇을 치우러 나갔던 하인들이 갑작스런 바람에 놀라 들어와서 창을 닫아걸고 식당은 다시 조용해졌다. 쿱은 그제야 구슬처럼 흐르는 땀을 닦는다.

 

“……내가 드래곤과 논쟁을 벌일 줄이야.”

“쿱 동지, 이 모든 대화내용은 확실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이 정도 기록이라면 쿱 동지는 차기 서기장 자리에 올라서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드래곤 논파자……. 대단하십니다.”

“제가 할 정도라면 다른 분들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수백 년간 괴생물학파에 갇혀있던 드래곤이기에 식견이 좁았으니, 아직 한참 모자란 제 식견으로도 논파할 수 있었던 겁니다.”

“아니, 저는 드래곤의 식견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그 자신감을 칭찬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드래곤의 말이라면 무조건 옳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가이더링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을 보았음에도 말입니다. 이것 참…….”

 

드래곤이 자리를 떠난 뒤에도 두 열쇠의 대화는 끊일 줄을 몰랐다. 그 대화를 계속 듣기만 하던 아이라즈는 한숨을 쉬면서 포니카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니니아릇 에밋.”

“찰 타…….”

 

식탁 아래에 놓아둔 목검을 챙겨들고 포니카는 아이라즈를 따라나간다. 요정도 의자에서 일어나 러트너의 손을 잡아 끌었다.

 

“러트너, 계속 듣고 있을 것이냐?”

“아뇨.”

 

요정도 러트너도 두 열쇠의 대화가 절대 짧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피시스에는 자리를 지키고 있겠다고 하기에 식당에 내버려두고 요정과 러트너만 식당을 빠져나와 아성의 안뜰을 걸었다. 훈련의 일환으로 갑옷을 입은 채 뜀걸음을 하는 병사들이 보인다. 아이라즈가 인솔하는 그 병사들 사이에는 포니카도 끼어있었는데 어린 몸이어도 대열을 잘 따라잡는다. 보고 있으면 기특해서 요정이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니 병사들은 힘을 내어 더욱 열심히 뛰었다.

아성의 바깥으로 나가니 사람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가지고 실장석을 꾀어내려는 광경이 보였다. 아쿠아힐의 거리는 다른 도시와 비교해도, 트루피아나 가이더링과 비교해도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다. 러트너는 저 실장석을 잡아들이는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실장석을 잡아들일 이유는 차고 넘친다고 생각했다.

 

“러트너.”

“네.”

“리베라나가 그립구나.”

 

러트너는 심장이 철렁하면서도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요정은 그저 진심으로 리베라나가 보고 싶어서 말을 꺼낸 것처럼 들렸다.

 

“저도요.”

“리베라나는……. 이 몸이 처음으로 가까이한 마법사였느니. 리베라나를 보기 전에는 마법사라는 것들이 숲을 불사르고 요사스러운 힘으로 자연의 이치를 주무르는 악한으로만 알고 있었느니라. 이 몸의 인식을 바꾸어준 것이 리베라나였거늘.”

“……갑자기 그런 말씀은 왜 하세요.”

“저 실장석들은 흡혈귀에게 가져다줄 것이 아니겠느냐. 그 흡혈귀는…… 리베라나를 퍽이나 아끼었지.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었다면서. 리치도 그러한 말을 하였고. 자신을 믿어주어 고맙다며……. 보고 있자니 생각이 났느니라.”

 

러트너는 머릿속에서 리베라나의 모습을 떨쳐내고 좋았던 날의 기억만 떠올리려고 애썼다. 혹시나 요정이 읽기라도 할까봐, 활기차고 발랄하고 생기넘치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요정 님.”

“응.”

“만약에…… 리베라나 님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어떠실 것 같으세요.”

 

러트너는 자기가 뱉은 말을 후회했지만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요정이 자신의 마음을 읽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너무도 반가우리. 죽은 줄 알았던 그대를 살아서 다시 보았을 때처럼. 아니, 그대는 죽지 아니하였으나 리베라나는 실제로 명을 달리하였으니…… 비교가 아니되겠구나. 실제로 돌아온다고 한다면 그때는 산송장일 것이니…….”

“그렇겠죠.”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야. 그이는 산송장으로 살 바에야 죽음을 택하겠다고 하였노라. 리베라나는 엉뚱해도 확실할 때는 확실한 이로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고개를 돌린다. 그는 애써 헛재채기를 해가면서 요정의 관심을 끌지 않아보려 했다.

 

“푸헷취! 어으, 죄송해요. 콧속에 찬바람이 들어가서.”

“일없노라. 겨울이니까.”

 

그날 하루도 러트너와 요정은 아쿠아힐로 몰려드는 난민들을 맞이하느라 진을 빼야 했다.

 

 

 

“아니 글쎄, 도로 한가운데에 웬 여자가 떡하니 서있는데, 고개를 돌리니까 막 없어지더라니까요.”

“나는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이 길로 가지 마라’ 뭐 이런 거였어. 근데 말하는 사람은 보이지도 않더라니까. 근데 가지 말라는 걸 굳이 갔다가 또 뭔 일 당할까봐, 시키는대로 돌아갔지 뭐.”

“거기가 혹시 그, 파스테이트 부근 아니었어요?”

“파스테이트? 거기 동쪽이지? 우린 밑에서 올라오던 길이지. 거기가 어디더라. 딱히 주변에 뭐도 없는 동네여가지고. 진짜 말 그대로 허허벌판. 그런 데서 목소리가 들려오더라니까.”

“어으,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이러나…….”

 

불안불안한 밤이 여럿 지나고 아쿠아힐에는 희망찬 소식이 들리지가 않는다. 요즘은 길 한복판에서 유령이니 귀신이니 헛것을 봤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웬만한 사람들은 유령의 소문을 잘 믿지 않지만, 요즘같은 때라면 신이 강림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요정 님! 그래, 요정 님께 물어봅시다 그래. 요정 님, 요정 님은 유령을 믿으십니까?”

“유령? 에이레아프와는 면식이 조금 있지만서도……. 아, 레테아 말이더냐?”

“레테아요?”

“아, 아. 미안하구나. 요정말이니라. 그러니까…… 그대들이 말하는 유령이나 귀신은, 죽은 자의 혼령을 말하는 것이지?”

“네. 그게 유령이죠.”

“이 몸이 말하는 레테아는 그……. 두르마르말로 무어라 하는지 모르겠구나. 아무튼 형체는 있으나 실체가 없어 만질 수 없고, 삶은 있으나 생명이 없어 산송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로다.”

“그게 유령이잖아요!”

“유령과는 다른 것이로다. 아무래도 두르마르말에는 레테아를 칭하는 말이 없나보구나. 요정은 그대들이 말하는 개념의 단어가 없노라. 아니지, 암사트나프……. 그래, 요정은 그것을 환각이라 부르는도다. 아닌가? 확실치 아니하구나. 이 몸이 피시스에에게 물어보리다.”

“그럼 그때 우리가 본 게 그 레테아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요정은 그런 소문들을 잘 듣고 또 기억했다. 요정에게는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들리더라도 지금은 그런 인간들의 태도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아성으로 돌아온 요정은 곧바로 피시스에를 찾아가서 물었다.

 

“피시스에, 그대는 유령을 믿느냐?”

“유령? 에테리얼 말씀하시는 거죠?”

“에테리얼?”

“네, 그니까 형체는 보이는데 마치 공기처럼 만질 수가…….”

“두르마르어에도 그 단어가 있었구나! 나이를 이러하게 먹고도 배우는 것이 참으로 많도다.”

“에테리얼은 당연히 믿죠. 전에 어떻게 한 마리 잡아서 학파에 가둬놓았었는데, 틈새가 하나라도 있으면 빠져나가다 보니까 잡아두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지금은 없겠지만. 근데 뭐…… 죽은 사람의 영혼 이런 거 말씀하시는 거면 전 그런 거 안 믿어요. 가끔 돌팔이들이 스펙트럴이라고 하면서 죽은 사람이랑 대화를 시켜준다고 하는데, 그거 다 사기에요.”

 

갑자기 들어오자마자 유령 얘기부터 꺼내고 있으니 모두의 시선은 식당 한 구석의 의자로 향한다. 다른 의자와 다를 건 없다. 단지 창문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놓여있을 뿐이다.

 

“바깥에서 유령 소문이 돌기에 물어보았노라. 모두 그대의 소행이렷다.”

 

그 의자에는 언제나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아닐이 앉아있었다. 하인들이 없는 시간대를 어떻게 알고 찾아와서는 귀신같이 나타난다. 그 시간대라는 것이 정해져 있지 않다 보니 한밤중에 소리 없이 찾아왔다가 애꿎은 포니카가 소리를 지르게 만든 뒤에는 꼭 낮에만 찾아왔다.

 

[그런 것 같군. 드래곤이라고 말하기라도 했나?]

“말하여봤자 아니 믿으리.”

[그래. 잘했다.]

 

식탁 위에는 그릇 대신 웬 자루가 올라가있었다. 가이더링의 인장이 찍혀있지만 그렇게 멀쩡한 상태는 아니다. 열어보니 그 안에는 은처럼 반짝이는 옷이 들어있었다.

 

[찾던 물건이 이것인가?]

“후, 방마복이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피시스에는 말보다 직접 옷을 입어서 보여주었다. 옷은 많이 헐렁거리는데다 번쩍거려서 다 입고 난 모습은 꼭 철동이를 뒤집어 쓴 인공생물처럼 보였다. 눈구멍조차 없이 사슬로 된 두건을 쓰고 반짝이는 장갑까지 끼고 나니 피부가 드러나는 부분이 없고 피시스에의 얼굴도 잘 보이지가 않는다. 그래도 피시스에는 나름 앞이 잘 보이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을 돌아보며 손을 슬슬 휘저어본다. 포니카는 그런 모습이 우스꽝스럽고 재밌게 보였다.

 

“이게 뭐냐면, 마력의 흐름을 차단해주는 옷이에요. 이걸 입고 있는 동안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마력을 전부 다 막아주죠. 정확히 말하면 막는 건 아니긴 한데 아무튼 그렇게만 이해하시면 돼요.”

“그것으로 니파티의 마법을 막아낼 생각이더냐?”

“아뇨……. 그건 불가능할 거라고 봐요. 이건 마법을 막는 옷은 아니거든요.”

 

아리송한 답변에 아리송한 얼굴을 하니 피시스에가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두드려가며 할 말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이건 저한테 직접 가해지는 마력만 막는 거예요. 정신지배라든가, 혈마법같은 거요. 그거는 마력이 직접적으로 정신과 혈액에 간섭하거든요? 근데 이제 직접 간섭하는 게 아닌 뭐, 마공탄, 화염구, 충격파 이런 거. 이런 거는 이 옷으로도 막을 수 없어요. 갑옷이 아니거든요.”

“조금 쉽게 풀어줄 수 없겠느냐.”

“그러니까! 어……. 이 옷이 냄비고, 마력을 불이라 생각해보세요. 냄비가 불을 아무리 피워도 뜨거워지지 않고, 물도 끓지 않는 거에요. 그런데, 그 냄비 속으로 달군 돌을 집어넣으면 끓겠죠? 그런 얘기에요.”

“뭐, 대강은 알겠구나.”

“제가 마도구학파였으면 좀 더 잘 설명했을 텐데……. 아무튼, 이건 니파티가 아니라 제게서 저를 지키기 위한 겁니다.”

 

피시스에는 장갑 위로 가락지를 힘겹게 끼운다. 장갑의 두께가 있어서 가락지를 끼우기가 워낙 힘들었다. 본디 중지나 검지에 끼우던 가락지를 새끼손가락에 끼우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피시스에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고 부족하다면 지팡이를 하나 구해야겠다고 계획도 세웠다.

 

“이거……. 요정 님이 보시면 노발대발하실 텐데.”

“흑마법에 관한 이야기겠구나. 이 몸도 이제는 익숙하도다. 마법의 문제가 아니라 사용자의 문제이니 어디 보여보거라.”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잠깐 밖으로 나가시죠. 도시 밖으로.”

 

아닐의 모습은 흐릿하게 사라지고 피시스에는 입었던 방마복을 다시 벗는다. 러트너 일행은 별 일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아쿠아힐의 도시 관문을 나갔다. 그러나 도시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 유일하게 나갔다 들어오는 사람인데다 오크와 요정이 끼어있는 만큼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도 도시 밖으로 따라나오려는 사람은 없었다. 피시스에는 적당히 깊은 숲을 찾아서, 스톤빌과는 정 반대방향으로 길을 잡으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그렇게 가만히 머무르고 있으니 아닐의 모습이 또 귀신처럼 나타났다.

 

[이곳이 적당한가.]

“제가 묻고 싶었던 건데요. 적당한가요? 주변에 보는 사람 없어요?”

[알고서 온 게 아니었나. 쯧.]

 

아닐의 모습이 사라지고 광풍이 일어 낙엽을 흩뿌리더니 다시 아닐의 모습이 나타난다.

 

[너희밖에 없다.]

“좋았어……. 그럼 주위에 실장석이 있나요?”

[동시에 물어보지 그랬나.]

 

마치 아지랑이가 핀 것처럼 아닐의 모습이 일렁이더니 러트너 일행의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요정의 눈에도 보이는 것은 없다.

 

[저기. 썩은 나무통 속에서 낙엽을 덮고 자고 있다.]

“감사합니다, 잡아오는 건 제가 할게요.”

 

쓰러진 나무는 하나밖에 없으니 위치를 확인한 피시스에는 다시 허둥지둥 방마복을 걸친다. 한 번 입고 나니 두 번 입는 것은 속도가 붙었다. 준비된 가락지까지 전부 끼고 나서 일행에게 주의를 주는데, 뒤를 돌아보고 있는데도 얼굴이 안 보여서 돌아봤다는 티가 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앞으로 나서지 마세요!”

 

피시스에는 썩은 나무통의 안을 살펴보다가 썩은 나무에서는 날 수 없는 고약한 냄새를 맡으며 고개를 든다. 그는 나무를 힘껏 걷어차며 흔들었다. 썩어서 속까지 비어있는 나무지만 그래도 단단하기는 여전하다. 몇 번 걷어차고 나니 그 안에서 테에엥 테에엥 거리는 소리와 함께 실장석 세 마리가 기어나왔다. 성체실장 한 마리와 자실장 두 마리였다. 세 마리 일가는 감히 자신들의 잠을 깨운 불경한 자에게 일갈을 하고자 피시스에를 올려다보았다.

 

“데에? 데, 데, 데샤아아아아앗! 데스우우우우우우우!”

 

그리고는 공포에 질려 꽁지빠지도록 도망치기 시작했다.

 

“인간 무서운 건 아는 놈들인가?”

[너를 하얀 악마라고 하는군.]

“뭐…… 유령같이 생기긴 했죠. 잘 보세요!”

 

피시스에는 장갑 위에 가락지를 낀 왼손을 실장석들에게 뻗어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특히 덩치가 크고 움직임이 잘 보였던 성체실장은 그 즉시 자리에서 멈춰서며 덜덜 떤다. 그리고 온 몸의 구멍에서 생피가 쏟아져나와 피시스에를 향해 흐르기 시작했다. 러트너가 자신도 모르게 요정의 어깨를 감싼다. 요정은 생각보다 덤덤했고 오히려 포니카가 겁을 먹고 있었다.

 

“데고로로로로로로록…….”

“테, 테챠아아아아앗! 테챠아아아아아앗! 테챠아아아아아아아앗!”

 

어미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와 시체는 쪼그라들고 피의 구슬이 왼손 앞에 둥글게 모이자 피시스에는 손을 옮겨 도망치는 자실장에게도 똑같이 향했다. 덩치가 작은 자실장들은 피가 모조리 빠져나오는데 얼마 걸리지도 않았고 피의 구슬 크기에도 별로 영향이 없다.

 

“……그래, 흡혈귀와 오래 지내었으니 그 정도 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아니하구나.”

“진짜는 이제부터에요.”

 

피시스에는 조금 궁리를 하고는 피의 구슬을 움직여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무슨 마법의 도식이겠구나, 하는 것은 모두가 알지만 무슨 도식인지는 피시스에만 알고 있다. 가진 피의 구슬을 전부 써서 도식을 완성한 피시스에는 오른손의 중지와 약지만 구부려서 그 도식에 뻗었다. 그러자 도식이 번쩍이더니 그 자리에 남아있던 낙엽과 나뭇가지가 둥실둥실 떠오른다.

 

“와, 이렇게 작은 부양진을 쓸 수 있다니.”

“이것도 흑마법이에요?”

“아니요! 그러니까, 이 마법을 유지하는 방법은 흑마법이긴 한데 부양마법 자체는 그냥 마법이에요. 러트너 씨, 잠깐 여기로 와보실래요?”

 

이게 그 마력전환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보다, 러트너는 피시스에를 믿고 천천히 도식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피시스에가 러트너를 경고도 없이 확 밀친다. 러트너는 팔을 휘두르며 뒤로 넘어졌는데 몸이 바닥에 안 닿고 둥실둥실 떠있기만 한다. 계속 떠오른다.

 

“으어, 이, 이거 뭐야!”

“공중부양이요! 재밌죠?”

“말이라도 해주지, 으아, 내려줘요! 저 높은 거 싫단 말이에요.”

“손 잡으세요.”

 

러트너는 피시스에가 내민 손을 잡고 도식 밖으로 끌려나왔다. 떨어지기 전에 피시스에가 경고를 하니 안전하게 착지할 수도 있다.

 

“떨어질 때만 조심하면 안전해요. 가이더링에는 이걸로 만들어진 놀이터도 있는걸.”

“애들 장난용 마법이란 말이네요.”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죠? 진짜 마음먹고 강력하게 시전하면 위로 계속 올라가거든요. 위로 떨어진다고 하는 표현이 맞으려나.”

“……헉.”

“하지만 그렇게 강력한 부양진은 이론상으로만 존재하고 아직 썼다는 기록은 없어요. 드래곤이라면 가능할지도. 대 드래곤 부양진도 어쩌면…… 아, 드래곤은 날아다니지. 의미가 없겠구나.”

 

러트너가 피시스에한테 푸념을 하는 사이 요정과 포니카는 그 둥둥 뜨는 마법진에 돌을 던지면서 신기하다고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용감하게도 포니카가 먼저 도식 안으로 몸을 던진다. 그냥 가만히 누워있을 뿐인데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은 신기하고 두려우면서도 꽤 재밌었다.

 

“이거 은근히 재밌는데요?”

“그러니까 놀이터로 쓰겠지.”

 

포니카가 또 너무 높이 올라가면 아이라즈가 끌어내려주면서 잠깐이나마 부양진을 가지고 놀았다. 누군가의 웃음기를 보기 힘든 시대에 포니카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다가도, 이렇게 웃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 또 무겁게 어깨를 짓누른다. 피시스에가 말한다.

 

“괜히 무서운 마법 보여줬다가 꾸중 들을까봐 가벼운 걸로 해봤어요. 아무튼……. 이제 말씀드릴게요. 저도 대 드래곤 주문을 맡기로 했어요. 저는 산송장이 아니니까 이런 보조도구가 필요한 거고요.”

 

방마복 두건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목소리 하나는 비장했다. 요정도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

 

“흡혈귀가 순순히 부름에 응하지 아니하더냐?”

“아뇨. 이 방법도 에립마브가 알려준 거예요. 그래도 쓸 수 있는 전력은 다 끌어모아야 성공률이 올라갈 거 아녜요. 저도 니파티 격리 실패자로만 남기는 싫으니까. 제가 격리하던 생물인데 제가 책임을 져야죠.”

“그대는 학파장이 아니더냐. 이러한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

“처형당하거나 살해당하겠죠.”

 

뭐 당연한 걸 묻고 있냐는 말투로 피시스에가 대답했다. 요정도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의 뜻을 알고 더는 묻지 않았다. 아닐의 모습은 가만히 있는데도 바람이 분다. 방마복 자락이 흔들리고 서로에게 비비면서 사그락 사그락 속삭였다.

 

“처음엔, 그런 생각도 해봤어요. 나도 차라리 흡혈귀나 리치가 되어서 니파티를 상대해볼까……. 진짜 심각하게 고민 많이 했는데. 일단 사람일 때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고, 그렇게 결정했어요. 이것마저도 실패하면…….”

“……실패하면.”

“……저랑 요정 님은 더 이상 볼 일이 없겠죠.”

 

피시스에는 가락지를 빼고 두건도 벗으면서 말했다.

 

“드래곤 님, 공터는 확실하게 마련됐나요?”

[경고는 충분히 내렸다. 너희 말대로, 그래도 찾아오는 인간은 무시할 생각이다.]

“좋아요……. 좋아.”

[더 필요한 게 있나?]

 

그의 발밑에 핏기없이 비틀어진 시체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놓여있다. 피시스에는 머릿속으로 그 실장석들에게서 뽑아낸 피의 양과 그 피로 대 드래곤 주문의 도식을 완성하려면 얼마나 많은 실장석이 필요한지 빠르게 계산해냈다.

 

“실장석이 잔뜩 필요해요.”

[그게 다인가.]

“네.”

[알겠다.]

 

아닐의 모습은 사라지고 바람이 불어 말라비틀어진 시체가 바닥을 뒹굴다가 낙엽 사이로 묻혀 사라진다. 그 자리에 남은 러트너 일행은 바로 아성으로 가는 대신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좀 나누기로 했다.

 

“……들어가기 전에, 이거 하나만 정하고 가죠. 이제……. 머지 않은 시일 안에 니파티랑 정면으로 붙겠죠. 드래곤이랑, 저랑, 에립마브랑. 이 셋은 무조건 가야해요.”

 

그렇게 말을 하는 피시스에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최대한 편하게 앉아있었지만 손끝이나 발끝도 살살 떨렸다.

 

“저는 여러분이 오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위험하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오신다고 해도 뭘 하실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근데 오지 말라고 해도 오실 거잖아요? 그래서 확실하게 정해요. 니파티랑 싸우는 데 따라갈 사람, 지금 바로 손 들어요.”

 

그 즉시 아이라즈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오크이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바로 손을 드는 것은 예상 못하고 있던 지라 잠깐의 탄식이 자리를 스친다.

 

“언니! 위험하다는데!”

“굽티슈 타흐 옷 키드 드나 넴 위레베 촐 이. 티 투오바 그니흐에모스 오드 춤 이. 티 시 시흐 드나.”

“……키드 아저씨…….”

“에크나엑네브 로프. 야츠 워이. 오그 이.”

 

아이라즈는 포니카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고 러트너에게 맡겼다. 그리고 용기있게 콜드펌이 손을 든다.

 

“콜드펌 동지?”

“역사에 길이 남을 순간입니다. 그곳에 나뮈의 열쇠가 없어서야 말이나 되는 소리겠습니까. 더구나 저는 본디 차원문 연구를 기록하고 있었어야 하나, 그 모든 의무를 다할 수 없게 된 몸입니다. 그 의무를 이렇게라도 다하겠습니다. 저 또한 성직자로서 나뮈의 권능을 어느 정도 빌릴 수 있으니,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닙니다. 저희 둘이 모두 목숨을 잃는 상황도 배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꼭 살아남아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쿱 동지께서는 제가 명을 다하거든 부디 제가 못다한 의무를 맡아주십시오. 무엇보다, 쿱 동지는 드래곤 논파자이시지만 저는 그저 나뮈의 열쇠가 아니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저는 드래곤 조력자로서 불리울 겁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정보와 기록이니, 알겠습니다. 동지의 용맹함은 반드시 후세에 길이길이 남을 겁니다.”

 

그 이후로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손을 들고 싶었지만, 니파티의 힘을 눈 앞에서 목도한 입장으로서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한동안 손을 드는 이가 없자 피시스에는 거기서 말을 끝맺었다.

 

“좋아요. 오겠다고 했는데 안 와도 뭐라고는 안 할게요. 근데, 안 오겠다고 했는데 따라오면 진짜 화낼 겁니다.”

 

피시스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그리고 비장한 마음으로 아쿠아힐로 돌아가 소식을 기다렸다.

 

 

 

때는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이었다. 방마복을 그대로 걸친 채 에립마브의 동굴을 찾아간 피시스에는 동굴 앞에 살아 움직이는 생물을 보며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생물처럼 생긴 돌덩이라는 것을 알고는 안도했다. 그 돌덩이들이 자기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데도.

 

“가고일? 나 알아보겠어? 알아보면 너희 주인좀 불러줘.”

 

두 마리의 가고일은 피시스에의 말에 입을 크게 벌리며 철판을 돌로 긁는 듯한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다. 소름돋는 소리라 귀를 막기는 했지만 그뿐이다. 가고일은 피시스에를 공격하거나 위협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소리에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 속에서 흡혈귀가 기어 나온다. 햇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 목소리만이 들렸다.

 

“왔냐.”

“나만 왔어. 리베라나는?”

“자.”

 

에립마브가 손짓하자 가고일은 몸을 웅크린다. 웅크린 모양이 정말 그냥 돌덩이 그 자체였다.

 

“그 옷은…… 방마복이냐?”

“응. 준비 다 끝났어.”

“……후우…….”

 

에립마브가 한숨을 쉬니 피시스에도 따라서 한숨을 푹 쉬었다. 둘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장소는.”

“남서쪽.”

“잠시만.”

 

동굴 속은 계속 어두컴컴했지만 흡혈귀의 목소리가 잠시 들리지 않는다. 아마 리베라나에게 당부의 말이라도 전하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려니 평소 입는 검은 옷 대신 푸른 누더기를 걸치고 얼굴과 손을 온통 검게 칠한 에립마브가 나타났다. 피가 말라붙은 갈색 흔적이 군데군데 보이는 옷에는 공간조율학파의 문양이 그려져있다. 리베라나의 로브였다. 피시스에는 할 말이 많았지만 입을 꾹 닫고 참았다.

 

“업혀.”

 

피시스에는 군말 없이 에립마브에게 업혀서 하늘로 펄쩍 날아올랐다. 하늘을 나는 경험이 처음은 아니지만 흡혈귀에게 매달려서 날아보는 건 처음이다. 쿱이 드래곤 논파자, 콜드펌이 드래곤 조력자라면 자신을 흡혈귀 기수라고 부를 수 있을까 고민도 해보았다. 날아가면서도 주위 풍경을 착실히 봐가며 손가락으로 가리켜 방향을 튼다. 아래로 사람이 깔아놓은 길이 눈 돌아가게 휙휙 지나가는데, 그 머리 아픈 속도도 어쩐지 에립마브가 전속력을 내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꽤 오랜 시간을 날아간 이후 피시스에가 지시하지 않아도 에립마브는 알아서 한 평원 위에 내려앉았다. 뜬금없이 평원 위에 오크와 나뮈의 수도사와 붉은 머리의 여자가 서 있고 그 주위로 실장석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있었다.

 

“오셨습니까.”

“렉쿠스둘브.”

[다 모였군.]

 

에립마브는 피시스에를 바로 내려주고 주위를 한 번 슥 둘러본다. 지평선으로 나무의 끄트머리가 보이는 황량한 벌판이다. 이렇게 넓은 땅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는 게 신기할 정도여서 에립마브는 드래곤이 이 땅을 초토화시켜서 벌판으로 만들어버린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주변에 모인 실장석들은 다들 비통함에 눈물을 쏟고 있었다. 잘 보니 모두 양 다리가 부러져 일어서지도 못 하는 상태였다. 잔뜩 모인 실장석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전력은 다섯 명이었다.

 

“이게 니파티 구제군의 끝이냐?”

“니파티를 상대할 수 있는 게 이 정도뿐인걸.”

 

곧 대 드래곤 주문으로 산화될 산제물들에게 일말의 연민은 사치에 불과했다. 화려하게 치장된 흑철 상자 앞에 서있는 붉은 머리의 여자 아닐은 온 몸에서 분홍빛의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곧 에립마브가 증오해 마지않는 형상이 되어 나타났다.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가고 눈에는 적대감이 솟는다. 그는 보금자리에서 추위와 외로움으로부터 자신의 광기를 달래고 있을 가엾은 마법사를 생각하며 씹어뱉듯 말했다.

 

“그 분충, 죽여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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