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카오스 럭키짱 천일모험기를 능가하는 진정한 판타지 실장석 참피 소설 실장석과 환상 90화 : 깜빡이는 주기

 수백 마리의 실장석에게서 피를 뽑아내는 것도 상당한 중노동이다. 에립마브야 흡혈귀로서 혈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으므로 간편하게 피를 뽑아냈지만, 피시스에는 혈마법으로 혈마법을 유지하기 위한 임계점까지 도달하려면 먼저 피를 사전에 뽑아내는 절차가 필요했다. 아이라즈의 동행이 그리 무의미하지만은 않았다.

    

“데에엥! 데게복!”

“테에엥! 테쨧!”

    

아이라즈는 치명적인 혈관의 위치를 잘 알았다. 단검으로 그 부위를 푹 찌르기만 해도 피가 샘물처럼 솟는다. 방마복을 뒤집어쓴 피시스에는 그 피를 모두 착실히 모아서 이미 방마장갑과 가락지를 끼고 있는 양손 위로 또 피로 짜낸 장갑을 두른다. 붉어진 손에서 혈마법의 마력이 넘치도록 흘렀다. 피시스에와 에립마브는 대 드래곤 주문을 준비하면서 도식이 겹치지 않도록 거리를 두어 서고 바닥에 피로 도식을 그렸다.

    

“에립마브! 마력 말소는 내가 맡을게!”

“개소리 마! 넌 결계진이나 맡아!”

“안 돼! 마력 말소 잘못 되기라도 하면…….”

“그러니까 내가 맡아야지! 너랑 나 둘 중에 누가 더 혈마법 잘 쓰는데!”

    

에립마브는 말릴 새도 없이 도식을 다 그려버리고 대 드래곤 마력말소 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피시스에는 어쩔 수 없이 대 드래곤 결계진 주문을 준비한다. 바닥에 그려진 대 드래곤 주문의 도식이 불에 올린 물처럼 끓어오른다.

    

[완료까지 얼마나 걸리나.]

“몰라! 완료를 해봤어야 알지. 누가 방해만 안 했어도 진작 알았을 텐데 말이다!”

[흠. 나뮈의 열쇠는 공포의 신을 섬기니 정신적으로 꽤나 굳건하겠지?]

    

지금 이 자리에 나뮈의 열쇠는 콜드펌밖에 없었으니 콜드펌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한데, 왜 갑자기 자신을 찾는지 알 수 없었던 콜드펌은 불안하게 답했다.

    

“어느…… 정도는? 왜 그러십니까?”

    

그 말을 맺는 동시에 콜드펌은 눈앞이 분홍빛으로 가득차 눈이 부셔서 얼굴을 가렸다.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는 시야가 이상해져있었다. 분홍빛 아지랑이와 자신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고개를 휘저어도 모습이 변하지를 않아 당황해서 눈을 자꾸 깜박거렸는데, 오른쪽 눈을 가려도 분홍빛 아지랑이는 여전히 보이는데 왼쪽 눈을 가리면 자신의 모습만 선명하게 보였다.

    

“이건, 이건……. 정신공유입니까.”

[과연 나뮈의 열쇠다워. 그렇다.]

“후우……. 이것도 흑마법이지만, 이제 와서 그런 얘기는 의미가 없겠지.”

    

머릿속에서만 울리던 드래곤의 말이 이제는 가슴에서 들린다. 다른 사람들이 바라본 콜드펌의 오른쪽 눈은 분홍빛을 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분홍빛 아지랑이가 고개를 돌리자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바뀐다. 콜드펌은 지금 자신의 오른쪽 눈에서 보이는 풍경이 드래곤이 보는 풍경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높은 곳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

“없습니다.”

[좋다.]

    

분홍빛 아지랑이가 하늘을 날아오르자 땅이 점점 멀어진다. 순간 속이 울렁거렸던 콜드펌은 오른쪽 눈을 감고 왼쪽 눈을 떴다. 그러자 가슴 속에서 다시 드래곤의 목소리가 들린다.

    

[가능하면 눈은 감지 마라. 한 시도 놓쳐서는 안 된다.]

“아, 알겠습니다.”

    

콜드펌이 허공에 대고 대답하자 피시스에도 주문에 집중하면서 목소리로만 묻는다.

    

“기록은 웬만하면 드래곤 시점으로 해주세요. 여기야 뭐 지루해서 볼 거 없잖아요.”

“괜찮습니다. 둘 다 가능합니다.”

“그게 더 무섭네.”

    

품에서 새 펜을 꺼낸 콜드펌은 자신의 기록지의 남은 부분 중 절반을 떼어서 드래곤의 시야로 보이는 것을 낱낱이 기록하고 그 동시에 자동펜은 여전히 대 드래곤 주문의 진행도를 기록한다. 피시스에가 힐끔 곁눈질로 쳐다본 그 모습은 나뮈의 열쇠 특유의 속기가 더해져 보기만 해도 현란했다.

    

“대체 요즘 같은 때에 그 많은 종이는 어디서 구하시는 거예요?”

“쿱 동지께 남은 종이를 전부 받아왔습니다.”

    

눈 앞으로 지나가는 두 개의 형상을 전부 기록한다. 그의 오른쪽 눈은 까마득하게 높은 두르마르의 창공을 가로지르며 구름만이 가득한 앞을 보고 있었다. 지평선이 보이고 아마도 횃불로 추정되는 작은 불빛들을 지나쳐가는 가운데 콜드펌의 눈에는 꼭대기가 녹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산봉우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높은 고도에서 주위를 둘러본 적이 없어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봉우리를 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쓰지 않는 봉수대 위에 최초의 차원문 장치가 대신 놓여있는 시그니 산이었다. 

그곳에 니파티가 있었다. 차원문에 동족들을 던져대다가 지치고 짜증나고 화가 나서 동족들을 학대하고 있었다. 카오스 파워를 얻은 실장석의 학대 방식과 니파티의 폭력성은 굉장히 광범위하게 조화를 일으켜서 희생자가 된 실장석이 펑펑 울다가 그 자리에서 폭발하는 단일 결과로 귀결되었다.

    

[죽으란테치!]

[데, 데, 데, 와타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데-.]

[죽으란테치!]

[살려주는데스! 살려주는데스! 대체 왜 와타시인데스! 와타시가 뭘-.]

[죽으란테치!]

    

다른 실장석들은 공포에 질리거나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니파티의 카오스 파워에 열광하면서 더 화려한 죽음을 보여달라고 아우성쳤다. 그리고 자신들도 곧 있으면 저 카오스 파워를 손에 넣어 새파랗게 어린 자실장 주제에 감히 자기보다 먼저 카오스 파워를 손에 넣은 괘씸죄로 니파티를 똑같이 폭사시킬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니파티가 또 실장석 하나를 잡아세우면 희생자가 된 실장석들은 모두가 똑같이 외쳤다.

    

[대체 왜 와타시인데샤아아아아아아악! 와타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데샤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사방에 피와 살과 뼈를 흩날린다. 수만 마리의 실장석들이 다시금 환호했다. 그러나 실장석들이 얼마나 환호를 하든 니파티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 자신에게 환호를 하는 실장석들은 모두 갈색머리다. 자신에게 환호하는 실장석들은 모두 붉은 피가 흐르고 있다. 그 사실이 너무도 마음에 안 들었다. 평소같으면 인간에게도 화풀이를 했겠지만 지금은 살아있는 인간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살아있는 거라곤 죄다 실장석 뿐이다. 너무 화가 났다. 하늘에서 날아다니고 있는 분홍빛 아지랑이도 니파티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중 하나였다. 눈이 아팠으니까. 그 분홍빛 아지랑이는 그저 하늘에 떠있을 뿐이었다. 그 아지랑이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그 어떤 실장석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지랑이의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 아지랑이는 동족의 안배따윈 어찌 되었든 자신의 욕망만 추구하는 실장석의 탐욕에 끝없는 환멸을 느끼고, 그런 존재와 손을 잡을 생각을 한 자신의 우매함을 한탄하고 있었다.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열지 못한 건가.]

“여는 방법만 알지 여는데 필요한 재료는 모르는 모양입니다. 아, 리도미도 보입니다.”

[글쎄. 괴생물학파에서 흡혈귀 실장석을 잔뜩 데려간 적이 있고, 리도미의 영물함을 재료로 쓰려고 했으니 모르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흡혈귀가 햇빛을 받으면 타죽는 건 몰랐던 모양이더군. 그 많던 흡혈귀 실장석들은 모두 타죽었다.]

“그것 참 다행이……  잠깐. 드래곤 님, 저것들 좀비입니까?”

    

드래곤은 콜드펌의 말을 듣고는 시그니 산 전체에 잔뜩 깔린 좀비들을 살펴보면서 눈에 천리안의 마력을 집중했다. 상이 확대되면서 또렷하게 보이니 콜드펌은 산송장과 실장석들의 입에 담지 못할 행위를 직접 보면서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피시스에가 걱정하며 묻는다.

    

“우욱…….”

“괜찮으세요? 정신공유 부작용이에요?”

“아닙니다. ……니파티가 필요한 재료를 구하는 법도 아는 모양입니다만……. 좀비와 흡혈귀는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필요한 재료…… 좀비와 흡혈귀……? 윽, 괜히 물었다.”

    

뒤틀린 쾌락만을 위한 왜곡된 행위를 자행하는 실장석들은 차원문을 여는 데 필요한 재료를 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니파티에게 터지고 또 찢겼다. 모두가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장석들은 자기 듣기 싫은 얘기는 듣지 않아서 상황에 변화는 없다.

    

“드래곤 님, 지금 저 차원문을 파괴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이다.]

“니파티가 차원문을 연다면 더 큰 재앙이 벌어질 것입니다. 지금 방심하고 있을 때 확실하게 처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니파티가 지금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가 저 차원문 때문이다. 저것이 부서지면 니파티가 어디로 가겠나.]

“아, 그런 이유가…….”

[주문이 모두 준비되는 즉시 파괴하겠다. 지금은 지켜보기만 하지.]

    

니파티는 짜증을 내다가 화를 내다가 울다가 실장석을 죽이다가 짜증을 내다가 화를 내다가 실장석을 죽이기를 1분 단위로 반복하고 있었다. 실장석 한 마리가 죽을 때마다 터져나오는 핏물이 콜드펌의 눈에는 안타깝기만 하다. 저 피를 여기로 가져올 수 있었더라면. 해는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고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티아우.”

“무슨 일입니까?”

    

열심히 실장석의 목을 따서 도식 위로 던져대던 아이라즈는 수상한 기척을 느껴 주위를 둘러본다. 달이 낮게 뜨는 시기라 사방이 평소보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다. 다른 종족에 비해 밤눈이 밝다고 할 수 없는 아이라즈는 부스럭대는 소리를 좇으며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소리가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드누오라 그닐크릭……. 수 슙마 옷 그니위릇 시 그니헤모스.”

“슙마……. 슙마……. 슙맹……. 기습? 누가 우리를 노리고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대체 누가?”

“누구가 아니야, 뭣들이다!”

    

아이라즈의 말에 주위를 둘러본 에립마브와 콜드펌의 눈을 빌리고 있는 드래곤은 밝은 밤눈으로 기습의 정체를 파악했다. 적어도 수십 마리는 될 법한구울이 온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구울이다.]

“구울? 맞다, 실장석이 이렇게 많은데!”

“하필이면 이럴 때! 이거 끊을 수도 없는데!”

“메흐 엘드나흐 리우 이!”

    

아이라즈의 은검과 은갑옷이 산송장 앞에 당당히 빛나고 콜드펌은 초라하게나마 나뮈의 인장을 그려놓은 지도책을 꺼낸다.

    

“구울도 공포는 느낄 테니, 저도 거들겠습니다!”

[열쇠, 괜히 나서다 다치지 마라. 네가 다치면 나도 아프단 말이다. 그리고 네가 죽기라도 하면 나 또한 그 죽음의 공포를 같이 나눈다.]

“학파장님, 가락지좀 빼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 가락지를? 쓸 수 있으세요?”

“이래 봬도 가이더링에 몸담은 열쇠입니다!”

    

피시스에가 집중 끊길까 염동력으로 피에 뒤덮인 손 속에서 가락지를 후다닥 두 개 빼내 던지니 콜드펌이 바로 받아서 검지에 끼운다. 그는 가락지로 마법을 써본 적은 없었지만 가이더링에서 보고 배운 건 많아서 금세 가락지를 조정해 조명탄을 설정하고 하늘로 쏘아올린다. 주위가 환하게 밝아지더니 사방을 둘러싼 구울의 모습을 맨눈으로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키에에엑!”

“구으으으으으윽…….”

“열쇠님! 그 가락지에 발향 마법 있을 거에요! 요정 냄새로!”

“알겠습니다! ……요정 냄새?”

“자세한 건 나중에 하고요!”

    

가락지를 돌려 발향 주문을 맞추고 피 냄새, 꽃 냄새, 오물 냄새, 갖가지 과일 냄새 등 다양한 향기를 지나니 콜드펌은 처음 보는 설정이 있었다. 나머지는 모두 아는 것이었으니 마지막 남은 것이 요정 냄새라고 확신하여 그대로 주문을 발동시킨다. 그러자 코가 싸할 정도의 송진 냄새가 주위로 퍼진다. 에립마브는 기침이 절로 나왔다.

    

“쿨럭! 어흑! 야이씨, 뭐 이렇게 독해, 요정도 기겁하겠다!”

“집중하는 데 문제 있어?”

“없어!”

    

구울 몇 마리는 독한 송진 냄새에 뒤로 물러나거나 도망치기도 했다. 그러나 소수에 불과하다. 여전히 많은 수의 구울들이 실장석들을 바라보며 그르르르 소리를 내고 있다.

    

“아무래도 실장석 악취가 더 센 모양입니다.”

“그렇긴 해!”

    

다시 가락지를 조정한 콜드펌은 손가락으로 구울들을 가리키면서 살상용 마공탄을 쏘았다. 본디 전투마법사도 아닌데도 드래곤과 시야를 공유하고 있어 조준이 신통치 않아 빗나가는 탄이 많아도 한 발만 맞으면 골절은 기본이다. 콜드펌도 구울을 죽인다기보다는 제압만 한다는 생각으로 주로 다리를 노리고 있었다.

    

“워이 레복 리우 이, 메흐 투슈 페엑!”

“뭐든 노력해보겠습니다, 지켜주십시오!”

    

피시스에도 주문에 집중하는 마력을 조금씩 분산시켜서 구울들을 향해 휘둘렀다. 에립마브는 달리 구울을 향해 휘두를 만한 주문이 없어 계속 대 드래곤 주문만 집중하면서 피시스에가 분산시킨 마력을 자신의 도식에서 나누어 채울 뿐이다. 구울들도 산송장보다는 살아있는 쪽에 관심을 더 보였다.

    

[너무 마력을 낭비하지 마라. 피가 부족할 수도 있다.]

“니파티랑 싸우기도 전에 구울에게 죽게 생겼는데 별 수 있겠습니까! 돌아오셔서 도와주실 게 아니라면 계속 이러고 있겠습니다!”

“어차피 결계진 발동하면 구울도 이 안에 들어오거든요! 지금 치워두는 게 나아요!”

    

콜드펌과 아이라즈는 등을 맞대고 덤벼오는 구울들을 상대했다. 구울도 한꺼번에 달려들기는 했지만 그 목적은 결국 허기인지라, 은의 기운과 요정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쪽보다는 지금 당장 맛있는 냄새가 풍기는 실장석들을 더욱 찾고 있었다. 둘에게 덤벼오는 구울들은 처리하기 어렵지 않았다.

    

“에이드! 스다에드누 은나스독! 렉쿠스둘브, 엑네포 온!”

“뭐라 그러는지 말해도 못 알아들으니까 나 부르지 마!”

    

아이라즈의 검은 수많은 산송장을 베고 날도 제대로 갈지 못해서 꽤 무디다. 그로 인해 떨어지는 절삭력을 오로지 완력으로 만회했다. 구울의 목을 마치 추수하듯 베어내는 아이라즈는 검을 대각선으로 들어올려 앞으로 뻗으면서 치고 들어오는 구울 한 마리를 막아내는 동시에 구울은 달려오던 힘 때문에 스스로 검에 뚫려버렸다. 반대편으로 튀어나온 검끝을 쥔 아이라즈는 발로 구울을 걷어차 살점을 뜯어내다시피 한 다음 그대로 등 뒤에서 덮쳐오던 구울의 목을 뚫는다. 그리고 구울을 바닥에 강하게 내치자 검끝이 구울의 목을 끊어버리면서 빠져나왔다. 칼 한 자루만으로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이루어내는 아이라즈였지만 한 자루만으로 부족할 때는 주먹과 발과 머리까지 써가면서 구울들을 무찔렀다. 콜드펌의 자동펜이 그 모든 광경을 철저히 기록하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군. 최대한 버텨라. 내가 가겠다.]

“우리가 너무 방심했습니다. 실장석에게 정신이 팔려서 구울을 잊다니!”

    

드래곤은 여전히 니파티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날개를 펄럭여 날아갈 준비를 했다. 그로 인해 바람이 불어 몸이 약한 자실장들은 날아가거나 구르기도 했지만 그 자실장의 어미나 니파티나 전혀 관심이 없었다. 흐트러진 조준선으로 허공에 마공탄을 더 뿌려대던 콜드펌은 어느 시점에서 손가락을 움직여도 마공탄이 나가지 않았다.

    

“학파장님! 마력이 다 떨어졌습니다!”

“저기 가방 안에 더 있어요!”

    

피시스에가 가리키는 가방은 실장석들 사이에 끼어있어 구울들과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다. 아이라즈가 몸을 던지듯이 날려 구울을 뚫고 검을 휘두르고 콜드펌도 그 뒤를 따라 지도책을 휘두르며 구울을 물리치고 길을 터낸다. 그 검에 실장석 몇 마리가 또 휘말려 숨이 끊어지기도 했지만 누구도 관심없었다. 오히려 실장석들도 그런 아이라즈를 잘 한다며 응원하고 있었다.

    

[오, 옳은데스! 다른 자들은 다 죽어도 되는데스! 와타시만 살려달란데스! 저 분충들을 다 죽여버리란데스!]

“가, 가방이, 여기, 여깄다!”

“키에에에엑!”

“윽!”

    

구울도 공포를 느끼는 것은 확실했다. 콜드펌의 지도책이 구울의 머리를 찍으면 정신사납게 고개와 발톱을 마구 휘저으면서 아무 곳으로나 뛰쳐나간다. 그러다 운 좋게 같은 구울을 할퀴기거나 둘이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 발톱에는 규칙이 없다. 공포에 미쳐 마구 휘두르는 발톱은 제정신으로 휘두르는 발톱보다 피하기 힘들었다. 콜드펌은 결국 팔뚝을 할퀴고 만다.

    

[윽!]

    

그 고통은 드래곤에게도 똑같이 전해졌다. 막 날아가려던 찰나에 날개에 짜릿한 고통이 느껴져 움직임이 늦춰지고, 드래곤 비늘에 상처도 못 낼 구울 손톱이었지만 인간 콜드펌이 느끼는 고통을 그대로 받으니 드래곤이라도 아팠다. 그 고통에 드래곤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만다.

    

[누구인테챠!]

[……이런.]

    

니파티는 그 소리에 반응했다. 아까부터 계속 하늘에 떠있던 아지랑이가 그냥 아지랑이가 아니라는 걸 알아챈 때가 바로 그 때였다.

    

[오마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아까부터 있었는데 이제 알아보는 건가!]

    

그 즉시 불덩이와 광선이 아지랑이를 향해 쏟아져 나왔다. 눈앞이 환해지니 콜드펌이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가렸지만 드래곤이 눈을 가리지 않는 이상 콜드펌에게 보이지 않을 수는 없다. 드래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눈이 멀 것만 같은 불덩이와 광선을 소멸시키면서 니파티에게 정면으로 맞섰다.

    

[지난 번에는 네가 분충처럼 똥이나 싸지르면서 내빼는 바람에 승부를 내지 못했구나. 이번에도 도망칠 생각은 말아라!]

[도망친 건 오마에인테챠아아아아아아아앗! 오마에는 오마에가 한 일도 제대로 기억 못하는테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네가 한 말을 그대로 되갚아주었을 뿐이다!]

    

주변에 인간은 없을 것이라 믿고 드래곤도 갖가지 공격용 주문을 쏟아내면서 니파티와 맞섰다. 둘의 수준은 비등비등했다. 주문에 있어서 좀 더 노련한 드래곤은 거울상과 기상 마법을 통해 하늘과 땅을 갈아엎어지는 듯한 환상을 만들었다.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니파티를 덮치며 주위의 실장석과 좀비들을 하늘로 빨아올리고 하늘이 땅이고 땅이 하늘인 듯하며 해와 달과 별이 니파티를 비웃으며 정신을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드래곤은 니파티가 정신이 팔려있을 때 산 자체를 봉수대로 쓸 법한 규모의 화염을 뿜었다. 니파티는 그 불길을 째려보기만 해도 소멸시켜버리며 더더욱 큰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니파티의 눈에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이 들어왔다. 녹색의 기운이 스며든 머리칼이었다. 그 기운은 아주 찰나의 순간 머물러있다가 이슬처럼 흩날려 사라지지만 니파티는 그 머리칼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세레브하다는 것에 일말의 반박도 존재할 수 없는 자신의 머리칼 한 가닥이 거센 바람에 뽑혀나간 것이다.

    

[테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오마에따위가 아타치의 옥체를 범해버린테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크읏!]

“으허억!”

    

니파티의 격노는 드래곤의 심장을 흔들었고 인간의 육신으로는 버티기 힘든 고뇌였다. 콜드펌은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움켜쥐면서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여전히 주변에 제정신인 구울이 많았다. 아이라즈가 놀라서 콜드펌을 몸으로 덮으며 보호한다.

    

“헉, 헉, 헉, 나, 나뮈이시여, 나뮈이시여…….”

“포 캅 드나 푸 텍! 플레쉼 윕 에세흐 들로흐 낙 이!”

“아, 안 됩니다, 이 책은 건드리면!”

    

아이라즈는 콜드펌이 책으로 구울의 머리를 찍어대는 것을 보면서 범상찮은 책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해보고자 콜드펌의 책을 낚아챘다. 콜드펌이 말려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이라즈는 책을 들고 구울들에게 덤벼들려고 했으나 그대로 몸이 굳는다. 낡고 해져 군데군데 구멍난 장갑 사이로 드러난 살갗에 콜드펌의 책이 닿자 구울도 흡혈귀도 괴생물학파장도 나뮈의 열쇠도 실장석도 하나도 없고 오로지 펄펄 끓으며 기어오르는 대지만이 있을 뿐이다. 아이라즈의 몸을 가라앉히고 팔을 낚아채며 눈을 뽑아버리려 하는 선명한 색채였다. 아이라즈는 그곳에서 화염에 휩싸인 키드와 포니카의 얼굴을 보았다. 분명히 여기에 있을 수 없는데, 머리는 이성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너무도 현실적이고 고통에 찬 둘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이라즈는 그 둘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에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

    

“키드! 포니카! 니아가 시흐 톤!”

    

책을 손에서 떨어트리고 아이라즈는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베어내고 끊어나갔다. 앞에 서있는 존재가 구울과 실장석밖에 없었지만 언제 칼끝이 자신을 향할지 몰라 콜드펌은 바닥을 기어서라도 책과 가방을 챙긴 다음 아이라즈에게서 멀어졌다. 아무리 은갑옷을 온 몸 전체에 걸치고 있다고 해도 수십 마리의 구울을 상대하다보면 갑옷의 틈새를 파고드는 발톱이 하나둘씩은 있기 마련이었다. 아이라즈는 알게 모르게 몸에 상처를 새겨가며 구울을 상대했다.

    

“열쇠님, 아이라즈 괜찮은 거 맞아요?”

“안 괜찮습니다! 여러분께 돌진하면 무조건 막아내십시오!”

    

아직도 떨리는 손으로 마력동석을 교체한 콜드펌은 마공탄 사격을 이어나갔다. 구울들은 자신의 식사를 방해한 아이라즈를 노리며 몰려든다. 그러나 공포와 광기에 휩싸여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라면 모조리 박살내느라 수십 마리의 구울도 아이라즈를 쉽게 대적하지 못한다. 그러다 힘조절도 생각치 않고 검을 휘두르던 아이라즈는 어느 순간 검을 놓쳤고, 맨손으로 구울을 상대하다가 결국엔 역부족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미 죽은 실장석 두 마리를 품에 안은 채 바닥에 엎드렸다.

    

“니아그 메흐 에캇 톤낙 워이! 에이드 이 리트누 톤!”

    

구울들이 아이라즈의 위로 발톱을 퍼붓는 사이로 콜드펌이 끼어들었다. 잘못된 조준으로 마공탄을 허공에 뿌려버린 그는 아예 조준이 필요없는 방식을 택했다. 마공탄 대신 공성마탄을 준비한 콜드펌은 구울들 사이로 뛰어들어 한 손으로 구울의 뒤통수를 붙잡고 반대편 손을 구울의 턱 밑에 가져다 댄 뒤 공성마탄을 쏘았다. 영거리 사격의 성능은 확실했다. 구울의 턱이 두개골과 함께 박살나며 쓰러졌다.

    

“한 번 죽었으면 계속 뒤져있으란 말이다!”

    

공성마탄의 반동이 콜드펌의 팔을 뒤흔들었고 그 반동을 타고 다른 구울의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어 공성마탄을 쏘았다. 언틋 보기에는 마구잡이처럼 쏘는 것 같은 그 움직임으로 콜드펌은 그 자리에서 다섯 마리의 구울을 처리했다. 드래곤의 눈을 빌려 구울의 위치와 자신의 팔이 어디로 움직일지 모두 가늠할 수 있었던 콜드펌은 손가락을 대는 것만으로 구울을 추풍낙엽으로 쓰러트리고 있었다. 그 시간은 아주 찰나였고 구울이 대응할 틈이 없었지만, 새로운 위협이 생기자 구울들의 관심은 자연히 그쪽으로 쏠렸다. 구울의 손톱이 콜드펌을 향해 날아오자 이렇다할 방어구도 없는 콜드펌은 손톱을 그대로 맞아줄 수밖에 없었다.

    

“크윽!”

[으허억!]

    

콜드펌의 눈 앞에는 공간이 수십 개의 조각으로 박살나면서 빛과 화염으로 가득차 황폐화되는 대지가 보였다. 산이 깎여나가고 있었다. 구울의 손톱이 박혀 콜드펌이 쓰러지자 오른쪽 눈의 하늘도 똑같이 떨어져내리다가 땅에 닿기 전에 다급히 멈춘다. 그 덕분에 드래곤은 니파티의 공간절단을 피할 수는 있었다.

    

[열쇠! 괜찮은가!]

    

마음속에서 드래곤이 다급하게 외친다. 콜드펌은 공성마탄을 두 발 더 쏘아 자신에게 접근하는 구울을 떨쳐낸 다음 가락지를 조정해 물리차단막을 펼치며 말했다.

    

“무사합니다!”

[주문은 얼마나 됐나!]

“학파장님! 얼마나 남았습니까!”

    

피시스에는 끓어오르는 도식의 일렁이는 빛을 보면서 시간을 가늠했다. 빛은 주기적으로 깜박거리고 있었는데, 그 주기가 집중을 시작하던 때에 비교해서 많이 짧아졌다. 집중이 완료되면 이 빛이 깜박거리지 않고 계속 빛나리라는 것을 피시스에는 알았다.

    

“얼마 안 남았어요!”

“얼마 안 남았답니다!”

[그럼 지금 그쪽으로 찾아가도 되겠나!]

“어차피 데려와야 할 거잖아요! 당장 와요!”

“서두르십시오!”

[알겠다! 열쇠여! 영물함을 응시하라!]

    

콜드펌이 시선을 영물함으로 돌리자 드래곤은 자신의 위치에 정말 위협적으로 생긴 드래곤의 환상을 남기고 니파티의 등 뒤로 날아갔다. 니파티는 그 환상을 광선으로 뚫어서 흩어버리고 바로 고개를 돌렸다.

    

[또 도망치는테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어디 도망쳐보란테치! 그게 오마에의 하찮은 인생인테치! 맨날 그렇게 도망치기만 해서 뭔가를 이루기나 하겠는테챠! 아타치처럼 삶을 세레브하게 만들 노력이나 똑바로 하고 아타치에게 깝치란말인테챠아아아아아아아아악!]

[세레브하게 만들 노력? 이것 말이냐!]

    

드래곤의 눈에서 빛이 나오더니 산 전체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에 비친다. 검은 연기에 비친 빛은 콜드펌이 지금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리도미의 영물함을 비추고 있었다. 세상에서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아는 실장석은 단 둘 뿐이었다.

    

[테, 저건!]

[와, 와타시의 소중한 돌씨데스!]

    

뭔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대견하면서도 한심했던 드래곤은 즉시 빛을 거두었다.

    

[나는 이렇게 노력을 해서 영물함까지 손에 넣었는데 너는 여태까지 뭘 했지? 내가 하는 노력의 눈곱만큼도 노력하지 않은 모양이군?]

    

아쿠아힐에서 러트너와 대면하면서 그의 머릿속을 어느 정도 읽었던 드래곤은 니파티의 성질을 박박 긁는 말만 골라서 하는 재주를 익힐 수 있었다. 그 즉시 니파티는 온 얼굴에 핏대를 흉측하게 세우며 드래곤을 쫓아왔다.

    

[테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오마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어디 열심히 노력해서 내 발밑이라도 따라와보거라! 크하하하하!]

[내놓으란테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드래곤은 창공을 가로지르면서도 가능하면 사람이 가장 적을 것으로 예상되는 경로를 따라 날았다. 니파티가 그 뒤를 무섭게 쫓아온다. 드래곤과 니파티가 싸우면서 불바다를 만들어놓은 시그니 산의 정상에는 남은 실장석과 좀비들이 속수무책으로 불타올랐다.

    

[마마아아아앙! 뜨거운테챠아아아아앙! 구해주는테챠아아아아아아앙!]

[와타시도 뜨거운데샤아아아악! 꺼지란데스! 오마에 몸 속에 흐르는 피로 뜨끈뜨끈씨를 꺼트리란뎃쌰아아아아악!]

[테보오오오오오오옥! 오마에에에에에에에에엑! 마마가 되었으면 자를 위해 희생하란테보오오오오옥!]

    

그러나 드래곤은 바로 콜드펌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가지는 않는다. 드래곤은 구름 속을 날면서도 니파티의 화염구를 피하며 콜드펌에게 다급히 물었다.

    

[얼마나 남았나!]

    

글을 쓸 때보다 빠른 손놀림으로 물리차단막과 공성마탄을 교체해가며 구울을 막으면서 싸우기에 급급했던 콜드펌은 피시스에를 쳐다볼 여유가 없었다. 드래곤에게 보이는 시야로도 어디를 보나 구울뿐이니 콜드펌이 대답을 할 여유가 없다는 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열쇠여! 나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그 말을 하는 사이에 머리 옆으로 니파티의 광선이 스쳐지나간다. 드래곤의 비늘을 뚫고 느껴지는 열기에 기겁하면서 드래곤은 곡예비행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시간은 최대한 끌어보겠다! 부디 준비만 무사히 마쳐라!]

    

콜드펌은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고 공성마탄의 반동과 마력동석의 고갈이 겹쳐 맨몸으로 구울을 상대해야 할 상황에 놓이고 있었다. 그는 다시 맨손으로 책을 휘둘러 구울의 머리통을 찍어대며 저항했다. 이미 그의 몸은 핏자국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 먼저 머리통을 찍었던 구울들은 나뮈의 환상이 다 사라지고 제정신을 차려서 다시 살아있는 목표들을 노리고 있었다.

    

“저리, 꺼지지 못해! 나뮈께서도 거르실 산송장이! 에립마브! 악의는 없습니다!”

“나뮈충주제에 싸움 하나는 기똥차네! 그대로 있어!”

    

마력말소에 집중하던 에립마브는 잠시 집중하던 마력의 일부를 나누어 콜드펌쪽으로 강풍을 쏘아보냈다. 구울이 서있기도 힘든 위력의 바람에 구울은 물론이고 콜드펌마저도 나가떨어져 바닥을 구른다. 피시스에가 그렇게 구르는 구울들을 마공탄을 쏘아서 해치웠다. 콜드펌은 나가떨어지고 나서도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났지만 그 몸은 만신창이였다.

    

“대체, 대체 수가 얼마나 많은 거야!”

[10구 이상이다.]

“수사의문문입니다!”

    

나가떨어지는 순간까지도 책만큼은 손에 꼭 쥔 콜드펌은 한 발을 내딛다가 발을 딛을 힘을 주지 못하고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다리가 저렸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저린 감각이 아니라 자신의 뇌가 저린 감각이라고 착각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다리는 지금 스스로의 몸을 가눌 상태가 아니었다. 팔로 몸을 받쳐서라도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팔도 힘없이 무너진다. 교리상으로도 절대 3발 이상 연달아 쏘지 못하게 하는 공성마탄을 무리해서 연사한 콜드펌의 팔은 팔이 해야 할 기능 대부분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안 돼! 아직은……!”

“콜드펌 씨!”

“……산치핀치…….”

[열쇠여! 그 기도문은 안 된다! 드래곤도 나뮈의 공포 앞에서는, 큭! 저 분충이!]

    

엎드려서도 기도문만큼은 욀 수 있다. 콜드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모두를 지키고자 나뮈의 뜻을 빌었다. 대 드래곤 주문의 도식처럼 끓어오르듯, 온 세상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대지와 창공은 모두 콜드펌의 기도에 응하여 나뮈의 화신을 불러내고 있었다. 나뮈의 공포에 질렸던 자도, 질리지 않았던 자도 그 위화감을 느껴 불안함에 고개를 젓는다. 일찍이 나뮈의 공포를 한 번 접했다가 어렵게 떨쳐낸 이도 그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르르르…… 게엑!”

“키익! 케엑! 쿠에에엑!”

“산치핀…… 으읍!”

    

나뮈의 광기에 이성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린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라즈가 구울 세 마리를 은장갑 낀 손으로 때려눕히고 콜드펌의 입을 막고 발로 책을 차서 치웠다.

    

“드님 윔 키릇 워이 에라드 워흐……. 에세흐 에라 쿠프 에흐 타후?”

    

그때까지도 죽은 실장석 두 마리를 소중하게 품고 있었던 아이라즈는 역겨운 표정으로 시체를 도식 안으로 내던졌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온기가 남아있던 시체는 그 온기를 모두 도식에 넘겨주고 말라비틀어진다. 손에 있던 검이 어디로 갔나 애타게 찾아봤더니 구울 사이에서 뒹굴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저 검을 잡고 구울을 베어넘겨야 했지만 그럴 만한 몸상태가 아니다.

    

[열쇠여, 정신차려라! 주문은 얼마나 남았나!]

“학파장님……! 주문은……!”

“조금만 더, 조금만 더요!”

“그 조금만 더가, 대체 얼마나…….”

“도시만한 결계진 펼치는 게 어디 눈 깜짝하면 될 일이냐고요! 저도 갑갑하니까 조금만 기다려줘요!”

    

그 이야기를 콜드펌에게 전해들은 드래곤이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말했다.

    

[도시만한? 지금 우리는 도시를 지킬 필요가 없다! 너희 몸만 지킬 정도면 충분한데 지금까지 도시를 지켜내려 하고 있었나!]

“아, 우리도 아는데! 우리 몸을 지킬 만한 소형 결계진은 지식이 없걸랑요! 애초에 드래곤으로부터 개개인이 아니라 도시를 지키려고 만들어진 주문이라고요! 꼬우면, 에익, 나가 뒈져! 후, 꼬우면 아닐에게 따지시든가요!”

[어찌 이리도 기구한 운명인가!]

    

드래곤은 눈 옆으로 화염구가 스쳐지나갈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는 자신의 목숨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일부러 경로를 틀거나 회피기동을 하느라 속력을 내기 어려웠기에 니파티가 점점 가까이 따라붙고 있었다. 드래곤은 대 드래곤 주문을 준비하는 장소로 날아가면서 도착하기 일보직전의 위치에서 주변을 빙빙 돌았다. 

    

[너희의 주위를 선회하며 지원하겠다. 부디 서둘러다오!]

    

지상의 피시스에에게는 하늘의 드래곤과 니파티가 보이지 않았다. 니파티가 불덩이를 던지고 광선을 쏠 때 하늘에 별똥별이 지나가는 듯한 자국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별똥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인간은 콜드펌 뿐이었고 그는 이 사실을 철저히 함구했다. 콜드펌의 눈을 통한 드래곤의 시선이 잠시 지상의 특정부분을 향했는데, 잠시 후 퍼버벅 소리가 나더니 구울 대여섯 마리가 쓰러졌다.

    

“뭐, 뭐야 이거.”

“드래곤의 마법입니다……. 계속 집중하십시오……. 크윽!”

    

은갑옷만으로 구울들을 상대하던 아이라즈는 드래곤이 지원해주는 모습을 확인하자 전투를 멈추고 콜드펌을 챙겨 도식 근처로 끌고왔다. 피시스에와 드래곤이 구울을 상대하는 사이 아이라즈는 콜드펌의 옷을 찢다시피 하며 벗기고 그 옷을 붕대로 삼으며 가방의 구급약을 써가며 상처를 압박했다.

    

“톨 아 트루흐 리우 시흐, 이납나위 포 체이릅 아 톤 마 이 타흐 위로스.”

“으그으으으으으으윽!”

    

마취따위는 할 시간도 없고 할 줄도 몰랐던데다 오크의 힘이 더해지니 상처 지혈 효과 하나는 탁월했다. 벌어진 상처를 쥐어짜는 듯한 고통에 드래곤마저 휘청거린다. 주변에 부목으로 쓸 만한 나무도 없다보니 아이라즈는 자신의 검집을 부러트려서 부목 대신으로 콜드펌의 다리와 팔에 대어 묶었다. 자신의 몸 곳곳에도 상처가 많고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갑옷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아이라즈는 하도 움직였더니 몸에 땀이 차서 간지러운 거라며 무시하고 있었다.

    

“거의 다 됐어!”

    

피시스에는 도식이 현란할 정도로 반짝이는 것을 보면서 발동이 임박했음을 직감했다. 콜드펌은 정신을 바짝 차려가며 그 말을 드래곤에게 전한다.

    

[즉시 가겠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똥별인줄만 알았던 것이 분홍빛 빛줄기가 되어 피시스에를 향해 날아간다. 피시스에도 하늘을 쳐다보면서 넋을 놓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남아있던 구울들이 마공탄에 맞아 머리통이 날아가고 있었다.

    

“뭐야, 지금까지 저기 있었던 거야?”

    

분홍빛이 날아오는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아직 주문이 발동하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피시스에는 별로 의미도 없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면서 빨리빨리 발동할 수 있도록 빌고 또 빌었다.

    

[도착이다!]

“으아아! 아직 멀었는데!”

[거의 다 됐다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빨리 올 줄 누가 알았겠냐고요!”

[이런 젠장!]

“이런 젠장할!”

    

니파티의 얼굴이 보일 만큼 가까이 있다. 언제 봐도 흉한, 세상 징그러운 괴물을 다 보고 살아온 괴생물학파장이 보기에도 저것보다 징그러운 건 없을 것 같은 끔찍한 몰골을 하고, 그 몰골이 흉터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화가 나서 얼굴을 찌푸린 것 뿐이라는 사실에 두 번 놀란다. 드래곤을 쫓아 날아오던 니파티는 피시스에와 에립마브 가운데에 놓여있는 리도미의 영물함을 보았다. 그러자 가뜩이나 징그러운 몰골이 두 배는 징그러워진다.

    

[내놓으란테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임박한 공포에 피시스에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순간, 번쩍이던 도식이 환하게 빛나며 주변의 모든 것이 물방울처럼 얇고 투명한 막으로 감싸였다. 콜드펌의 시야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고 드래곤도 마찬가지다. 드래곤은 시야가 맑아지는 동시에 그 막을 느끼고 즉시 방향을 틀어 하늘로 올라갔다. 뒤를 따르던 니파티는 앞뒤 안 보고 영물함만 손에 넣어야겠다는 열망으로 계속 날아오다가 그 투명한 막에 정통으로 부딪혔다.

    

[테쨕!]

    

아프지 않았다. 물리력과 마력의 접근을 원천 차단하는 니파티는 아플 수가 없다. 그러나 마음은 아팠다. 저 앞에 모든 계획을 완성시킬 물건이 있는데, 그 물건을 빼앗긴 것도 억울하고 서러워 죽겠는데 지금 그 물건을 가지고 인간들이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는 데다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결계에 막혀 이상한 소리까지 내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것이 너무도 아팠다. 니파티는 결계진에 매달려 악을 쓰며 울었다.

    

[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돼, 됐다, 됐어!”


“나뮈시여……. 감사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에립마브 마력말소는!” 



피시스에는 자신이 대 드래곤 주문을 직접 시전하고 있다는 감격을 느낄 새도 없이 바로 에립마브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도식이 깜박거리고 있다.

    

“이건 좀 더 걸리려나봐!”

[상관없다! 시간적 여유가 생겼으니!]

    

드래곤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숨결과 함께 마력을 끌어올려 니파티에게 초열적인 불길을 내뿜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타오르는 듯한 새하얀 불길이다. 니파티는 물론이고 니파티 뒤로 펼쳐진 대지까지 휩쓴 불길은 그 앞에 선 모든 것을 완벽한 검은색으로 그슬려버렸다. 딱 하나, 니파티만 빼고.

    

[테에에에에에에에에에엥! 테에에에에에에에에에엥! 테에에에에에에에에에엥!]

    

니파티는 울면서 결계진을 두드리며 마력을 되는대로 결계진에 들이부었지만 어떤 강력한 주문을 퍼붓더라도 결계를 뚫을 수는 없었다. 피시스에는 니파티가 자기들보다 먼저 마력말소를 써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잠깐 일었다. 하지만 그럴 줄 안다면 진작에 썼겠지, 피시스에는 니파티가 영리했다면 애당초 자신이 지금 이러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고 믿음은 곧 현실이 되었다.

    

[으음?]

“엥?”

[테, 테에엣!]

    

뿌닷,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보통 실장석들이 똥을 쌀 때 내는 소리와도 비슷했다. 하지만 이미 구울과 아이라즈가 대판 붙으면서 살아있는 실장석은 하나도 없었다. 딱 한 마리 빼고.





[테, 테, 테, 테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테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엥! 마마아아아아아아아아앙! 무능한 똥닌겐 때문에 세레브한 아타치가 빵콘을 해버린테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오마에타치 때문에 아타치의 완벽한 커리어가 산산이 부서져버린테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푸크흡.”

[웃는테챠아아아아아악! 웃는테챠아아아아아악! 지금 아타치의 커리어를 작살내놓고 지금 쳐 웃고있냔테챠아아아아아아악! 오마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죽여버리는테챠아아아아아악! 죽여버리는테챠아아아아아아아아악! 죽이고 죽이고 죽여서 죽여달란 말이 나올 때까지 죽여버릴 것인테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타치를 모독한 대가를 삼대가 치르게 해주겠는테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해봐! 해봐 이 새끼야! 옷에 똥이나 싸는 분충 주제에 말은 더럽게 많아요.”

[테&#49968;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번에야 말로 도식을 방해하고 결계진을 흩어놓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피시스에도 드래곤도 콜드펌도 아이라즈도 승리와 복수를 눈앞에 두고 마음놓아 웃었다. 모두가 웃어댈수록 니파티의 분노와 증오는 극에 달한다. 곧 니파티의 몸 전체에서 화염이 뿜어져나와 사방을 대낮처럼 밝혔지만 결계진 뒤 인간들에게는 열기도 느껴지지 않는 재롱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웃지 못하는 것은 니파티 뿐만이 아니었다.

    

“……야, 피시스에. 큰일났어.”

“왜, 뭐가!”

“피가 모자라.”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에립마브의 대 드래곤 마력말소 도식은 언제부터인가 깜박이는 주기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결계진이 완성되었으니 곧 있으면 되겠지, 곧 있으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계속 지켜봤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혈액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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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모자라 배고파 피가 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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